一陰一陽之謂道
philebus(바람) 2003-09
一陰一陽之謂道
안녕하세요?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돌아오네요.
북송의 유학자였던 伊川선생 程이의 사상에 관한 책을 읽다 사소한 의문점이 일어나 여쭤볼까 합니다.(유학 사상가 총서 시리즈 “程이” 안 은수 지음 성균관대 출판부 55페이지)
정이는 주역 계사전의 “한 번은 음이 주도했다 한 번은 양이 주도하는 것을 일러 도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음이 주도하고 한 번은 양이 주도하는 것을 도라고 했을 때, 음양 자체는 도가 아니다. 한번은 음이 주도했다가 한 번은 양이 주도하도록 하는 근거가 도이다.
음양을 떠난 도는 없고 음양의 원인이 도이다.
그리고 저자가 덧붙여 설명하기를, 理는 사물의 법칙, 理는 현실세계의 현상과 분리되지 않고 그 안에 내재하는 보편원리, 理는 세계의 본원이며 만물은 다 본원으로서의 理를 함유한다.
불이 뜨거운 것과 물이 차가운 것에서 군신이나 부자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理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氣는 理의 하위개념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이며, 陰陽二氣의 상호작용 및 운동 변화가 만물 생성에 관여하고, 淸濁, 善惡, 純繁 등의 상반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이 만물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원인이며, 세상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그래서 “해와 달은 음양의 精氣이다.” 라든지 “사람은 五行 중에 가장 뛰어난 氣로 구성되니 이는 천지의 청명하고 순수한 기로 생성되는 것이다.” 라고 정이 등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理가 사물의 법칙이며 보편원리이고 음양의 氣가 만물의 생성 및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라면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역시 理와 氣가 그렇게 자리 잡고 작용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에 있어 한 번은 음이 주도했다 한번은 양이 주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개인의 일상사에 있어 어떤 사고나 행위가 음이 주도하는 것이며 또 어떤 행위나 사고가 양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각각의 사고나 행위에 있어 어떤 경우를 가리켜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경우를 가리켜 이치에 어긋나 지나치거나 모자란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고견을 들려주시는 분께 감사드리겠고요, 저도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글쎄요, 일반적으로 양은 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측면을 말하고, 음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측면을 말한다고 하니까, 막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가 조금 침체기를 겪고 차츰차츰 사랑이 안정기를 찾아가는 그런 상황을 일음일양 아, 여기서는 일양일음의 과정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 경우 어떤 것이 이치에 맞는가는 글쎄요, 막 너무 열정과 침체기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중용의 태도 혹은 사실 파악에서 찾아야겠지요. 뭐 그렇게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랑은 없다 그거죠. 제 사견이었습니다. ^ ^
philebus(바람)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예,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氣를 흔히 생각하듯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사랑의 침체기가 음에 의해 주도된 상태냐 아니면 단지 양이 물러나거나 약해진 상태인가 라는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역시 좋은 예시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누구나 일단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 - 자신에게 자문하든지 누군가에게 묻든지 - 들어볼만한 답변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역시 아무것도 얻을 게 없겠지만 물으면 자신이나 듣는 이의 혼을 움직여 그로부터 뭔가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나온 의견이 타당한 것인지 여부는 별도로 살펴봐야겠죠.
그래서 여기에 질문을 올린 후 제 머리에 뭔가 생각이 떠오른 것을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모든 이름을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나누듯이 여러 가지 사물들과 그 가운데 있는 속성도 음과 양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양은 아버지, 활발함, 밝음, 하늘 등으로 볼 수 있고 그에 대비되는 음은 어머니, 정숙함, 어둠, 땅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것에 덧붙여, 또는 이런 모든 구체적인 사물이나 속성을 총괄하여 양은 위를 향함,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이치를 향하는 기운으로 보고 음은 아래로 향함, 감각되는 사물을 향하는 기운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예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君子가 열심히 공부하며 格物하여 致知에 이를 때 이를 사물에 깃든 이치를 파악하려는 陽氣의 발흥으로 보고, 반면 그 군자가 활을 들어 새를 쏠 때 그것은 감각되는 사물을 향하는 陰氣의 발흥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兩者 간의 공통점은 的中에 있습니다.
양기의 경우는 적중의 대상이 해당 사물의 이치나 원리이며, 음기의 경우 그 대상은 나는 새입니다.
이 말은 道는 군자로 하여금 학문에 열중토록 하였다가 때로 방향을 돌려 감각적인 사물을 유비관계로써 취급토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陽氣를 타서 格物致知할 때는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경지까지 추구하다 그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며, 더 나아갈 수 있음에도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이 모자라는 행위요, 더 나아갈 수 없는 데도 억지로 판단을 내리는 행위는 지나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가 陰氣를 타서 탐구하는 군자로서의 본령을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 구현할 때는 나는 새를 쏘아 맞히는 것이 타당하며 자는 새나 어린것과 함께 있는 새를 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죠.
또 여러 사람이 함께 활을 쏘며 겨루고 있는데 새가 불쌍하다고 쏘지 않겠다면 이를 모자란다고 할 수 있을까요.
환경보호나 동물애호 운동이 강한 현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은 확신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상은 일상사에 비추어 보면 특별한 경우가 될 것이고 보다 보편적인 경우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보통 사람의 경우 일하는 것을 양기가 주도하는 것으로 보고 휴식, 레저, 취미생활 등을 음기가 주도하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근로는 양기에 속하는 것으로 위계는 다르지만 학문, 종교적 수행, 참된 의미에서의 정치 등과 동류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치의 틀에서 벗어남, 휴식, 무목적의 자유로움 등은 음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거죠.
이 음기의 대표적인 경우가 飮酒입니다.
道는 俗人으로 하여금 근로와 휴식을 교대로 갖게 하는 거죠.
마치 해가 뜨는 낮에는 양기가 지배하고 달이 뜨는 밤에는 음기가 지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근로를 함에 있어 일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분명히 알고 목적했던 바를 훌륭히 이루어 내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라면 그렇지 못한 것이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되겠죠.
그리고 음기가 지배하여 술을 마실 경우 건강을 해치지 않고, 사리분별을 잃지 않으며, 인간관계가 원만히 끝나는 경우가 적당한 휴식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지나침이 될 것입니다.
이상 책을 읽은 후 떠 오른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좀 견강부회한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의견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理가 사물의 원리라는 의미는 맞지만 이것이 음양을 기로 볼 때의 기에 대응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理氣論에서 기는 현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음양을 기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음과 양의 순환을 리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리기론에서의 기를 음양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바른 리기론도 아니고 음양론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리기론과 음양론은 서로 혼용되어 개념 될 수 없습니다. 둘 다 우주론적 논리 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리와 기에 각각 음양이 있는 것이며 음이나 양에도 각각 리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가 리의 하위구조라고 하는 개념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물론 무엇이 주가 되느냐를 따진다면 리가 주가 되고 기가 종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실질에 있어서 기가 리의 하위구조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理氣를 이해할 때 리를 주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의 개념에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한다고 했지만 여기에 시간적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음과 양의 기운이 같은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세상에서 나와 너가 분별되듯이 음양이 분별된다는 따위의 의미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실질에 있어서 음과 양은 항상 동시적인 것입니다. 가령 남자는 양에 적용하고 여자는 음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양에 고정되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여자에 대해서 남자가 양이라는 말이지 남자 자체가 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자는 양인 순간에도 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만 존립하는 존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사람이고 사람이 음인지 양인지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양은 이처럼 상대적인 원리입니다. 이건 존재가 인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따위의 불교적 주장과 상통됩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정신에 있어서 한 번은 양이 주도한다든가 한 번은 음이 주도한다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상에서 음양을 분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의 구체적 일상이라는 것은 분별을 전제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남자를 여자에 대해서 양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듯이 정**님의 말씀처럼 어떤 것은 양에 해당하고 어떤 것은 음에 해당한다 라는 따위를 분별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각각의 행위에 있어서 무엇이 이치에 맞고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철학의 궁극의 목표일 것이기에 이것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음양론이나 리기론으로부터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음양론이나 리기론적 논의 자체가 되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philebus(바람)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답변 주셔서 감사하고요,
대체로 의견님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어떤 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론과 음양론이 혼용될 수 없다는 말씀은 옳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래서 정**님께 답변한 것과 같이 주장하려면 음양에 각각 이가 내재한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안점은 음양이나 이기를 가지고 사변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칭이 무엇이든 상반되는 두 기운 또는 경향이 현실적으로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 있어 교대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의견님은 그것을 부정하시는 듯 하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거죠.
의견님의 다음 말씀,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의 개념에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한다고 했지만 여기에 시간적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음과 양의 기운이 같은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 부분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구분만을 하려 한다면 굳이 一陰一陽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죠.
제가 말하는 음양은 좀 더 역동적인 기운이 들어 있는 것으로 사람의 정신에 끌어다 댈 경우 그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또는 특정한 분위기 속에 있게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이나 분위기가 교대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가가 초점이죠.
또 그런 기운 가운데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고 할 수 있는가가 다른 주안점입니다.
의견님은 각각의 행위에 있어서 무엇이 이치에 맞고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철학의 궁극의 목표일 것이기에 이것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식으로 탐구하려면 곧 사변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제 의도는 현실 속에서 각각의 행위의 예를 들고 거기서 이치나 도리에 맞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를 반복함으로써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체득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즉, 님의 말씀 중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일단 제겐 문제가 아닌 거죠.
음과 양이 주도하는 구체적인 각각의 행위를 각각 어떻게 한정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본 뒤에 가능하다면 총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견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한 번은 음하고 한 번은 양한다는 말은 단순히 음양이 서로 갈음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음양이라는 상반되는 기운이 있어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음양이 상반된다고 했지만 음양의 본질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상반되지 않는 본질에서 파생되기 때문에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한다는 따위의 표현이 있게 되었다고 보입니다. 즉 본래 음양은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지만 현상적으로 달라야 하기 때문에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다르지 않다는 말은 음양이 서로 떨어진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음양은 본질적으로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음양은 교대로 나타나는 무엇이 아닙니다. 음양론의 기본은 상대성입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음 속에는 반드시 양이 있다는 말이고 양 속에는 반드시 음이 있다는 따위의 의미도 됩니다.
물론 음양은 순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환의 주기를 가지는 그러한 원리에 따라 순환하는 것이라기보다 음양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순환하는 것입니다. 음양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힘은 어떤 원리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령 예를 드신 것처럼 일을 하고 나서는 쉬어야 합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한다면 그런 식으로는 일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밀고 나가면 존재의 원리에 이르게 되는데 존재는 하나의 순일한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일한 것이란 것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성을 띨 수 없습니다. 존재란 반드시 나와 너를 분별하는 것이듯이 모든 존재에는 음양론 적 이치가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일을 하고 나서 쉬는 것은 자연스런 순환인데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냐면 존재가 원래 순일하게 존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음양을 서로 갈음하게 하는 원리가 우주에 따로 있어서 그러한 원리에 맞게 존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음양의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거듭 말하지만 음양엔 시간적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에서의 어떤 구체적 행위를 놓고 이것이 이치에 맞는 행위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으로 과연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이냐를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지만 그러한 실례를 편집해 놓는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음의 성격을 갖고 저것은 양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양의 성격 속에서 음의 성격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음양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은 양이 아니고 음은 음이 아닙니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습니다.
어떤 현실적인 사태를 음양론 적 논리로 분석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분석을 공식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의 기운이라거나 양의 기운이라고 하는 기운이 따로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양이 음이 되고 음이 양이 됩니다. 음의 기운이 물러나서 양의 기운이 온다는 표현은 가능하겠으나 실질에 있어서는 음의 기운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며 양이 기운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음양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도 음양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하고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 혹은 정신이 음이라는 기운의 주도에 의해 움직였다가 양이라는 기운의 주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한 기운에 의해 정신이 움직이게 된다고 하면 이건 그러한 기운이 외부적으로 우주에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 되므로 마치 우주를 만든 조물주를 객체로써 상정하는 것과 같아서 음양론 자체에 위배되고 철학적으로도 무용한 이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음양은 순서대로 드러나는 그러한 구체적인 기운이 아닙니다. 어떤 사태를 음양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으나 그 사태가 음양에 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노자는 오랠 수 있는 것을 도의 작용이라고 보았는데 음양론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 번 오르면 한 번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 오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질에 있어서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고 오래도록 번성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음양론의 묘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음양론의 묘리가 바로 도의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한 묘리를 노자는 무위에서 찾고 중용에서는 성실에서 찾습니다.
philebus(바람)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답변은 감사하지만 저로서는 내용의 중심을 잡기가 좀 어렵네요.
저는 의견님이 알고 계시는 음양론의 깊은 내막은 잘 모릅니다.
제가 마음속에 근거로 삼았던 것은 단순하죠.
인간은 우주의 기운을 타고 났으며, 우주는 낮과 밤이 교대로 이어지고, 여름과 겨울이 또한 교대로 이어지며, 그 원리는 고정된 태양과 지구의 자전과 공전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물은 근본적으로 여기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보는 거죠.
사람이 낮엔 활동하고 밤엔 쉬는 것이 그런 섭리에 따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활동의 내용도 큰 틀에서 그런 순환적인 자연에 따른다고 봐서 안 될 것이 없지 않을까 하고 전제하는 거죠.
단, 현재로서는 그 특성상 정신활동 중 어떤 부분과 어떤 부분을 대비시켜 순환하는 것으로 보는가 하는 점은 매우 불확실합니다.
따져보자면 한 인간의 일생에 걸친 변화를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거고 작게는 하루 동안의 변화를 가지고 상반된 두 가지를 대비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인간의 역사를 놓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긴 시간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서로 상반되는 태도, 주의, 주장, 흐름이 교대로 나타나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죠.
지난번에 예를 든 것은 단편적이고 추정적인 일면이고, 더 많은 사례를 가지고 검토해 봐야 뭔가 가닥이 잡혀도 잡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신에 있어 낮의 의식적인 활동, 밤의 휴식이라는 큰 범주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사고나 기분의 변화 등에 관해서는 탐구된 내용이 없어 현재로서는 거기까지 음양의 순환이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죠.
하지만 또한 음양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는 의견님의 얘기도 무엇을 근거로 하신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제 추정의 근거는 지구의 낮과 밤(또는 계절)이 교대로 찾아든다는 것이며 만물이 그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이상 정신도 역시 같은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와 같은 패턴을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견님의 다음 말씀에서,
"즉 본래 음양은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지만 현상적으로 달라야 하기 때문에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물론 음양은 순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환의 주기를 가지는 그러한 원리에 따라 순환하는 것이라기보다 음양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순환하는 것입니다. “
위의 말씀이 옳다고 본다면 순환하는 것이 현상적으로 다르게 나타나려면 시간을 달리하여 다르게 나타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순환한다고 말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요.
현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차피 시간 속에 그렇게 나타나게 되니 말입니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 휴식하는 인간을 봐도 교대로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양의 본질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거나 양속에 음이 있고 음속에 양이 있다거나 양이 음이 되고 음이 양이 된다거나 하는 얘기는 차후에 기회 있으면 또 경청하기로 하고 괜찮으시다면 우선 한 가지만 좀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즉, 음양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고 교대로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위에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로 인한 낮과 밤, 계절이라는 근거를 들어 음양이 교대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듯이,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님의 주장을 밑받침하는 실제적이고 적절한 근거를 듣고 싶네요.
그럼 이만…….
의견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말씀하신대로 현상적으로 볼 때 순환은 반드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낮과 밤의 순환을 음양으로 대입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현상하는 모든 것들을 음양론 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석된 값을 공식화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분석된 값에 머물러 사용하려고 한다면 음양론으로부터 취하려고 하는 것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현상이란 각각의 개체가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므로 그 고유성을 인정하는 한 낮을 양으로 밤을 음으로 대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지만 실질적으로 우주의 움직임에 있어서 낮이 양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낮을 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령 낮을 양이라고 하고 밤을 음이라고 할 때 낮에 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낮은 낮으로써 기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했지만 존재론적으로 순일한 것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반드시 음양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음양을 모두 함께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삼태극 혹은 팔괘의 숫자인 3을 존재의 기본 단위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건 음과 양을 내부에 가지고 있는 단위로써의 음 혹은 양을 말합니다.
낮을 양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낮과 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낮을 다시 분석하면 낮의 어떤 성질을 음과 양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나눔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분석으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분석해야 할 재료가 계속해서 생산될 것이기에 그것들을 그냥 놔두고 뭉뚱그려 말하려고 한다면 이미 오류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분석의 의미도 퇴색될 것입니다.
말씀하신 낮과 밤의 순환처럼 음양이 교차해서 순환한다는 개념은 2차원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존재는 3차원이고 음양론은 이 3차원을 해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말씀하신 주기적 순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음양론을 설명하기엔 너무 협소합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이 음양론 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건 음양론 자체의 개념이 아니라 음양론으로 설명되어지는 현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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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에 시간적 순서가 없다는 말은 음양론의 근본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음양은 태극으로부터 나온다는 논리를 사용합니다. 태극의 움직임이 곧 음양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태극이란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닙니다. 그런데 음 자체가 또한 하나의 태극입니다. 양 자체도 하나의 태극입니다.
음양론의 기본 개념은 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음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양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음양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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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신 응답이 되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주기적 순환이라는 개념을 음양론에 단순 대입하는 것은 음양론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을 굳이 음양론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philebus(바람) 2003-09
[re] 一陰一陽之謂道
제가 최초에 말을 꺼낸 의도는 一陰一陽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실제 생활과 경험에서 찾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즉, 막연한 사변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 속에서 一陰一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심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상황을 맞아들이고 어떻게 어디까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죠.
또 다른 말로 하면 음양론 가운데 확인가능하고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사실들이 현실적으로 무엇무엇인가, 거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이치나 도리라는 것을 적용할 수 있는가, 적용할 수 있다면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도 어떤 사물이 하나의 음이나 양으로 고정되지 않고 짝이 되는 사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나 사물에 음과 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온다는 말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그렇다고 인정하는 거죠.
저는 그런 幽玄한 개념들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현상으로 드러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변의 내용들을 공부하여 그 자체로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아니라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도 알기 쉬운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으로부터 깨달아 원리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방법이며 단지 거대한 이론으로 만족할 만하게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은 그것이 과연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도 의문이지만 수양이나 수신에 관한 한 어떤 이익이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견님 말씀대로 크든 작든 각각의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는 음양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그 음양이 실제로 드러날 때는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정신도 그와 같은 이치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본래 의문이었죠.
거기에 정**님이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신 거고, 저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덧붙인 겁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생각보다 거창하고 인간의 욕망과 의지, 도덕 등과 맞물려 쉽게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뒤로 미루어 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뭔가 또 떠올라 지금의 생각과 마주치는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어쩌면 의견님 말씀대로 음양론 전체의 내용과는 맞물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항상 중요하다면 제 관심은 거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거고, 따라서 지금 제기된 문제가 현재의 이기론이나 음양론에 정확히 부합하든 하지 않든 사변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상 큰 상관은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성실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