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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논리, 신념의 관계 2

이승과저승 2023. 10. 28. 16:33

감성과 논리, 신념의 관계

 

Re:Re:하지만 그 즐거움의 감성이 위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겁니다.  
글쓴이: Adolph Knigge       
 
마라톤선수의 예는 Adolph가 잘못 쓴 예였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산소부족으로 죽을 수도 있다면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체력 한계의 신호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통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육체적으로 경고하는 신호로서 만족해야 합니다.


만약에, 즐거울 필요도 없고 정신적인 고통도 느낄 필요가 없는 상황에 우리가 직면한다고 했을 경우에 굳이 즐거움을 느끼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즐거움을 느끼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즐거움을 느끼기 싫다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의 전제하에 정신적 고통은 합리적인 측면에서 그릇되고 이성을 잃지 않을 정도의 즐거움은 행복을 추구하니 합리적인 데다가 선악의 측면, 신념위배의 측면, 판단착오의 측면에서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상황을 직면함에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 평상심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즐거움이 올바른 판단이나 행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성을 감성과 연관 지어서 판단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즐거워하더라도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느낀 상태로도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판단할 수가 있지만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이성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게 가능하다면 굳이 정신적 고통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즐거움을 내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즐거운 상태이건 고통을 느끼는 상태이건 이성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건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통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냐 는 겁니다. 약간의 즐거움은 오히려 행복한 상태이니 즐거움을 추천할 만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언제나 착각으로 생겨나는 고통이고 불필요한 고통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것이 '손해인가 아닌가, 좋은 것인가 싫은 것인가' 는 판단은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하는 게 가능합니다.

즐거운 감성 또한 불필요한 즐거움이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라면 굳이 즐거움을 내버려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Re:답변…….  

글쓴이: philebus(나비
  
이어서 답변드리죠..

 

"만약에, 즐거울 필요도 없고 정신적인 고통도 느낄 필요가 없는 상황에 우리가 직면한다고 했을 경우에 굳이 즐거움을 느끼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즐거움을 느끼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즐거움을 느끼기 싫다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의 전제하에 정신적 고통은 합리적인 측면에서 그릇되고 이성을 잃지 않을 정도의 즐거움은 행복을 추구하니 합리적인 데다가 선악의 측면, 신념위배의 측면, 판단착오의 측면에서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상황을 직면함에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 평상심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 글을 읽고 보니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돌프 님은 통상 우리가 즐거워하거나 슬퍼할 때 합당한 어떤 원인이나 이유가 있어 그런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아니면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또는 주어지는 원인이나 이유에 반하여, 우리가 즐거워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저절로 즐거워지고, 슬퍼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슬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곳이 대화방이 아니니까 일단 제가 먼저 답변까지 해볼까요.
제 생각에는 사람은 그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으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고(행복해지니까), 반대로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으면 두려워지거나 슬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지나친 감정은 좋지 않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그런데 아돌프님은 슬퍼할만한 상황, 즉 인간이 그에게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잃었을 경우(이미 나왔던 애완견의 경우, 가족의 죽음 등)에도 즐거워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 것이죠.
저는 그런 경우에는 적당히 슬퍼하거나 중도의 감정이면 적절하지만 굳이 즐거워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거고요.
그리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경우에 실제 즐거워질 수 있는가도 의문이죠.
제대로 말하려 한다면 즐거운 상황에서는 즐거워하고 슬픈 상황에서는 슬퍼하되 양자 모두 도가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즐거움이 올바른 판단이나 행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성을 감성과 연관 지어서 판단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즐거워하더라도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 위의 내용으로 보면 즐거움이 올바른 판단이나 행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같은 레벨에서 슬픔이나 근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네요.
兩者가 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죠.
그럼, 지나친 감정일 때는 어떻게 될까요?
슬플 때는 아마도 좌절감, 무기력 등의 영향으로 판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죠.
반면에 지나치게 즐거워할 때는 부정적인 영향이 없겠습니까?
역시 지나친 이상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제 생각에는 지나친 기쁨이나 즐거움은 과신, 주의 소홀 또는 잘못된 희망을 우리 마음에 심어줌으로써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는 지나치거나 적당하거나 즐거운 감정과 슬픈 감정은 방향이 반대일 뿐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거죠.
님의 말씀대로 슬퍼할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즐거움을 특별히 옹호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정신적 고통을 느낀 상태로도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판단할 수가 있지만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이성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게 가능하다면 굳이 정신적 고통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즐거움을 내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즐거운 상태이건 고통을 느끼는 상태이건 이성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건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통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냐 는 겁니다. 약간의 즐거움은 오히려 행복한 상태이니 즐거움을 추천할 만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언제나 착각으로 생겨나는 고통이고 불필요한 고통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것이 '손해인가 아닌가, 좋은 것인가 싫은 것인가' 는 판단은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하는 게 가능합니다.
즐거운 감성 또한 불필요한 즐거움이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라면 굳이 즐거움을 내버려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이 부분은 이전에 슬픔이나 분노, 걱정 등으로 표현되었던 감정상태가 모두 정신적 고통으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이라면 아마도 지나친 감정 상태를 말한다고 해야 될 것 같고요.
지나친 슬픔은 물론 고통이겠지만 반면에 지나친 즐거움이나 쾌락도 고통입니다.
아픔을 느껴서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적절하다는 의미에서죠.
적당한 감정이라면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럼 조금 다른 질문을 다시 드릴까요?
님이 말씀하시는 약간의 즐거움,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즐거움, 따라서 바람직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그런 즐거움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충분한가요
 

나비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나비님, 모든 정신적 감성의 행위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착각의 행위입니다.  
글쓴이: Adolph Knigge 
  
인간에게 있어서 감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착각과 오류의 반응입니다.

Adolph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의 요지는 지나친 감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 요지가 아니고 슬픔, 분노, 히스테리, 웃음, 즐거움, 기쁨 등의 정신적 반응은 그것이 작게 일어나건 크게 일어나건 그저 착각의 감성이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겁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필수 불가결로 슬퍼하는 게 아니라
소중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인식했을 때 우리는 슬퍼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컨트롤하는 방법은 Adolph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A라는 여성은 B라는 남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B라는 남성이 유부남이었습니다.

A의 감성의 선택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1. B가 자신의 기대를 깨트린 것에 대한 미움.

2. 'B는 어쩌면 그리 멋진 남성은 아니었을 거야.'하는 자기 위안의 감성.

그렇다면 이 두 가지로 바뀌기 이전에 그것을 토대로 하고 있는 감성이 있는데 그것은 'AB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성으로 인해 다시 두 가지로 바뀌는 감성입니다.

그렇다면, AB를 사랑하던 감성에서 미워하는 감성이나 자기 위안의 감성으로 돌리려고 할까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있어서 A 자신의 사랑은 부적절한 사랑이었다는 걸 인식하고는 B를 사랑하던 감성을 왜곡된 감성인 미움으로 바꾸고 B가 멋진 남성이 아니었을 거라는 자기 위안의 감성으로 돌리려고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번의 'BA의 기대를 깨트린 것에 대한 미움'은 착각의 반응이 아니라 당연한 반응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B를 미워해도 BA 자신에게 오지 않으니 미워해도 소용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미워하니 그것은 미움으로서 현실을 해결하려는 착각의 행위인 겁니다.

왜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자신의 슬픔을 참지 못할까요?
어린아이는 주위에서 항상 부모가 살펴주고 있고 자신이 슬픔을 내비치면 그것에 합당한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렇기에 어린아이의 슬픔은 다른 주위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내보이는 감성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혼자 있을 때도 슬픔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 행위입니다.

성인이 되고 나면 슬픔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웬만해서는 그 감성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가끔 혼자 있는데 슬픔이 일어날 경우에 그것은 어린아이였을 때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남아있는 부작용입니다.

그럼 이번엔 분노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분노는 '지성과 판단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스스로 빠지기 위해서 파내려 가는 비상구'입니다.

화를 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이 스스로 인식할 경우 인간은 화를 내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화를 내서 자신의 어떠한 요구가 관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할 때에 화를 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싸놓은 변을 밟아서 넘어졌을 경우 왜 변에다가 화를 내지 않고 변을 싼 사람이나 그것을 치우지 않은 사람에게만 화를 내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변을 싼 사람이 조폭이었거나 총을 들고 서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행복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행복이란 것은 영원하고 완전무결한 것을 일컬으니 행복이란 것은 존재치 않으며 현재의 즐거움, 기쁨만이 실질적인 행복입니다.

또한, 철학적인 관점에서 행복은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슬픔과 분노는 실질적인 현재의 불행이며 슬픔과 분노가 없는 상황은 행복인데도 현재가 행복이란 사실을 모른다면 그것 역시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슬픔과 분노 등의 정신적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의 정신적인 현재는 즐거워야 할 상황이란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Re: 즐거움과 행복  

글쓴이: philebus(나비
  
제목을 보았을 때 이번에는 뭔가 존재론적인 심오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군요.

아돌프 님이 예를 들어 말씀하는 대로 화를 내거나 미워하거나 슬퍼해 봐야 전혀 소용없는 일인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그러나 님은 그런 몇 가지 예를 가지고 모든 면으로 일반화시키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이죠.

"모든 정신적 감성의 행위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착각의 행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감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착각과 오류의 반응입니다.
Adolph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의 요지는 지나친 감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 요지가 아니고 슬픔, 분노, 히스테리, 웃음, 즐거움, 기쁨 등의 정신적 반응은 그것이 작게 일어나건 크게 일어나건 그저 착각의 감성이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겁니다."

 

위와 같은 얘기가 진실로 성립하려면 존재론적인 밑받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감정도, 스승이 제자를 아끼는 감정도, 전쟁에서 전우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는 감정도, 꽃향기를 맡으며 그윽하게 즐거워하는 것도, 자식을 낳고 기뻐하는 감정도 모두 말씀이죠.
그런데 아돌프 님의 얘기는 그런 경지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님의 예처럼 남자를 사랑하다가 유부남인 줄 알고 미워하는데 미워해봐야 돌아오지 않을 테니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단지 행위에 관한 문제고 기술적인 조치일 뿐이죠.
위의 경우에 사랑하는 감정이 있었다면 마음속에 배신감이 일어나는 것은 인과적인 당연한 결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위안으로 속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인 즉, 그는 이미 일으킨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하며(지혜롭게 발전적인 방향으로, 또는 퇴폐적인 방법으로) 미워해도 돌아오지 않으니 미워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마디로 자르는 것은 지나치게 기계적인 처방이 되는 거죠.
감정이란 기계부품처럼 그렇게 중간에서 쉽게 잘라지도록 각이 져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죠.

"행복이란 것은 영원하고 완전무결한 것을 일컬으니 행복이란 것은 존재치 않으며 현재의 즐거움, 기쁨만이 실질적인 행복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주장한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감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착각과 오류의 반응입니다.
Adolph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의 요지는 지나친 감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 요지가 아니고 슬픔, 분노, 히스테리, 웃음, 즐거움, 기쁨 등의 정신적 반응은 그것이 작게 일어나건 크게 일어나건 그저 착각의 감성이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모든 감성이 착각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실질적인 행복으로 기쁨이나 즐거움을 택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무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착각인 줄 알면서 선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인간이 진리나 진실을 원하지 거짓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데요.
님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참된 것은 없거나 알 수 없으니, 착각이지만 현재의 기쁨으로 만족하자는 얘기가 아닌가요?
그것은 거짓을 싫어하고 가능하면 항상 참된 것을 요구하는 우리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또한 비현실적인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아가서 다음으로는 또 이렇게 말을 바꿔서 주장하시는 거죠.

"또한, 철학적인 관점에서 행복은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슬픔과 분노는 실질적인 현재의 불행이며 슬픔과 분노가 없는 상황은 행복인데도 현재가 행복이란 사실을 모른다면 그것 역시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슬픔과 분노 등의 정신적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의 정신적인 현재는 즐거워야 할 상황이란 겁니다."

이 말은 앞에서 제가 잠깐 말했지만 원인이나 이유가 없이 즐거워하거나 기뻐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저 슬픔과 분노가 없는 상황이 행복이라고 하는 거죠.
이것은 긍정하기 어렵네요.
아돌프 님도 앞에서 쓴 중도의 감정이라는 제 말을 평상심이라는 말로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평상심이 행복이며 즐거움이라는 말이 되는 거죠.
하지만 좋다고 생각되는 것, 또는 진실로 좋은 것이 없이 즐겁거나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문자 그대로 하면, 슬픔은 슬픔, 기쁨은 기쁨, 그 가운데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역시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떻게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될 수 있습니까?
아돌프 님의 말씀의 요지는 대체로 이해가 가지만 어쩐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뭔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씀이 있으면 더 얘기를 들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