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회상 6
알키비아데스는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에, 그의 후견인이고 국가의 제 1인자였었던 페리클레스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해 주십시오, 페리클레스. 당신은 나에게 법률이란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하고 알키비아데스는 말했다.
“아아, 할 수 있고말고”라고 페리클레스가 말했다.
“그러면 꼭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세상 사람이 법률을 지키니까 기특하다고 칭찬을 듣고 있는 것을 보면, 법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는 이 칭찬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항상 듭니다.”
“자네가 원하고 있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세, 알키비아데스. 자네는 법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고 했는데, 법률이란 민중(民衆)이 회의에서 결정하고 문서로 작성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명백히 규정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네.”
“선(善)을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악(惡)을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거야 물론 선이지, 악은 아닐세.”
“하지만 민중이 아닌 과두정치(寡頭政治)의 나라에서 보는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명문(明文)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국가의 주권자가 숙고해서, 그리고 이러이러한 행위를 하여야 한다고 명문화한 것은 모두 법률이라고 불린다네.”
“그러면 민왕(民王)14)이 국가의 주권자이고, 시민이 하여야 할 일을 정하여 명문화한 것이 바로 법률입니까?”
“민왕이 명문으로 선포한 것도 법률이라고 불리네.”
“압제와 무법이란 무엇입니까, 페리클레스. 강자가 약자에 대하여 자기 멋대로 설득에 의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그렇지”라고 페리클레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민왕이 국민을 설득하지 않고 행위를 강제하는 명문을 선포했다면 그것은 모두 무법입니까?”
“그렇군. 민왕이 설득에 의하지 않고 명문화한 것을 법률이라고 한 말은 취소하지.”
“소수의 사람이 설득에 의하지 않고 다수의 사람을 강제하는 법문(法文)을 내면, 우리들은 이것을 압제라고 말해도 좋을까요, 안 될까요?”
“사람이 남을 설득하지 않고 행위를 강제하는 것은 명문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압제이지 법률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렇다면 전 민중(全民衆)이 자산가(資産家)들에게 대하여 설득하지 않고 강권으로 법문을 만들었다면, 이것도 압제이지 법률은 아니겠군요.”
“알키비아데스, 사실 우리들도 자네 나이 또래에는 이러한 일에 준민을 번뜩였었지. 지금 자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우리들도 염두에 두고 이론을 펴기도 했지.”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말했다.
“아아, 페리클레스, 당신이 이러한 문제에 가장 준민했던 시절에 나도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마침내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자마자 당장 소크라테스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그를 좋아하지 않았었고, 또 그를 찾아간다면 반드시 자기들이 저지른 실책을 문책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그것이 불유쾌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하고자 한 바는 정치였고, 정치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교우(交友)15) 중에는 크리톤이 있고, 또 카이레폰, 카이레크라테스, 헤르모게네스, 심미아스, 케베스, 파이돈다스, 그 외에도 몇 명이 있었다. 이들은 원로원 의원(議員), 법무관으로 성공키 위해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군자(君子)가 되고, 집안, 가족, 친척, 친구, 국가, 시민에 대하여 훌륭히 본분을 다 하기 위하여 그를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 중의 단 한 사람도, 젊어서나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비열한 짓을 한 자는 없고, 비난을 받은 자도 없었다.
14) 튀란노이(tyrannoi)란 그리스어는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말이다. ‘튀란노이’는 기원전 7, 6세기의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등장했다. 그 앞서의 귀족정치를 대신하여 나왔고 다음에 나오는 평민정치에 앞선다. 그러나 ‘튀란노이’의 정치는 별다른 하나의 정체(政體)가 아니다. 튀란노이의 기원은 귀족 과두정치에 대한 불만이 민중 사이에 고조되었을 때, 이것을 원조함과 동시에 이용한 호족(豪族)이다. 요컨대 도시의 지배적 가계(家系) 사이의 확집(確執)이 민중운동과 야합하여 현존의 정부를 쓰러뜨린다.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지만 민중은 정치에 어둡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기꺼이 신 정권을 자기들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귀족에게 위임한다. 이리하여 일종의 군주가 형성된다. 그러나 옛날 왕처럼 세습권에 의한 왕이 아닐뿐더러 선거에서 뽑힌 원수(元首)도 아니다.
그 지위는 법률이나 관습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무력을 길러 자신의 지위를 지킨다. 따로 사회제도를 변경하거나 법률을 새로 제정하거나 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정책에 맞도록 처리했다.
5, 4세기의 그리스인은 플라톤을 필두로 튀란노이 정치를 혐오했다.
15) 교우(homiletes)는 또한 제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크리톤은 아테네의 부호로,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는 그의 이름을 표제로 삼았다.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년배, 카이레폰과 카이레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으로 이 책 제 2권 제 3장에 나온다. 헤르모게네스는 아테네 시민으로 크세노폰의 변명에는 법정에서의 말을 저자에게 전해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심미아스는 테바이 사람으로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케베스는 테바이 사람으로 처음에 피타고라스파의 철인 필로라오스에게 사사하였고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파이돈에 언급되어 있고 스승이 죽을 때까지 곁에 있었다. 파이돈다스는 불명.
- 소크라테스 회상 크세노폰/최 혁순 역 중에서 -
이승과저승 생각 :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젊은이는 말로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는 기술을 배워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원하였던 인물로 소크라테스 문하의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이단아(異端兒)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위에서 페리클레스에게 한 질문은 음미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