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

직궁에 대한 명상 1

이승과저승 2023. 6. 26. 13:59

예전에 agora.co.kr에서 한 회원과 나눈 문답입니다.

 

K

직궁이 계속 나를 괴롭히고 있다. 아버지가 잘못을 했다. 직궁은 그를 관가에 고발했다. 이 직궁의 행위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한비자는 그렇다고 한다. 반면에 공자는 부정적이다. 우리는 이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아니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내 아버지가 밤낮 술만 먹고 놀음만 하고 내 어머니를 때린다면 그런 아버지는 고발해서 우리 가족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이 경우 내가 아버지를 고발했다고 후레자식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그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생을 살아보아야 진실한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윤리에 대한 일인칭적 접근과 삼인칭적 접근을 구분하고 있다. 혹시 공자나 한비자가 전하는 이야기가 너무 간단해서 이러한 어떤 상황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도 저런 아버지 밑에서 살았더라면 그렇게 단순하게 직궁의 행위를 평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보통의 아버지인 경우는 어떠한가? 그냥 쉽게 남의 일처럼 관가에 고발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면 나 또한 공자처럼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우 아무래도 공자처럼 생각할 것처럼 보인다. 왜 공자처럼 생각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고발한 직궁에 대해서 왜 나는 부정적이며 비판적 태도를 갖는가? 이러한 태도 밑에 깔린 그 생각의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의 소중함,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효도, 이것을 천륜(天倫)이라고 하는가?

몇몇 글쓰기에서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고 발상법이 나온다. 그것은 어떤 문제, 주장, 사유에 대척점에 있는 문제, 주장, 사유를 떠올리는 것이다. 가령 이어령의 글에서 이것은 아주 잘 나타나는데, 이 경우 우리와 대조되는 서양의 경우를 떠올려 보는 것인가? 서양인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이어령에 의하면 서양신화는 그 첫머리부터 싸움질이 나온다. 카인은 아벨을 살해한다. 비록 몰랐지만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때려죽인다. 비록 술에 취했지만 펜테우스는 그의 어머니와 이모로부터 맞아 죽는다. 신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서양의 원형과 근원이라면 서양의 경우 잘못한 아버지를 고발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잘못을 했다고.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 누구라도 예외가 없지. 아마도 이들에게서 천륜은 천륜이 아니라 그냥 단지 임의적 관습일 수도 있다.

비록 효도를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은 어떤 의미에서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우리에게서는 일종의 의무이며, 부담이며, 억압이며, 동시에 자연스러운 즐거움이며 주어진 것이다. 아마도 공자는 이것을 의무라고 보기 보다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즐거움으로 보았을 것 같다. 멀리 친구가 오면 즐거운 것처럼 밖에 나가서 삼가면서 남에게 믿음을 주고 안에서 효도를 한다는 것,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삶이다. 오히려 이런 일을 한 후에 시간이 남을 때 배우는 공부가 부차적인 것이요,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공자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잘못을 고발한 직궁은 아마도 인간으로서 흠집이 있는 그런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공자는 이러한 관계가 모든 사회로 확장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나의 국가나 사회는 마치 한 가족 같아야 한다. 임금은 아버지이다. 그는 때로는 위엄이 있지만, 그렇다고 억압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다. 그는 마치 공자처럼 온화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약하며 겸양해야 한다. 이런 임금이 존재하는 곳에,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는 곳에서 정치란 공자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효도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아버지이자 임금이 설혹 무엇을 잘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또 그런 아버지는 아마도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이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이런 아버지에게 있어서 직궁의 예는 단지 불가능한 예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보통 아버지는 이런 아버지의 한 측면도 지녔고 직궁이 고발했던 그러한 측면도 가지고 있다. 때로 우리의 보통 아버지는 온화할 수도 있지만 포악할 수도 있고, 선량할 때도 있지만 불량할 때도 있고, 공손할 때도 있지만 거만할 때도 있고, 검약하지만 때로는 사치스럽기도 하고, 겸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을 때도 있다. 나아가 우리의 보통 아버지는 안에서는 따스하지만 밖에서는 포악할 때도 있다. 안에서는 나에게 좋고 따스한 아버지이지만, 그러나 밖에서는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문을 일삼고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부동산 투기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공자의 희망과 다르게 가족과 사회, 안과 밖,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개인과 사회 등의 갈등을 엿보게 된다. 직궁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유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을 적이 있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는 가족에 대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영상이 떠오른다. 하나는 이기적인 가족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따스한 가족의 영상이다. 유교 혹은 공자에 대해서 갖는 부정적 영상은 바로 이기적 가족과 가문의 영상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이익, 혹은 공동선 보다는 오히려 가문과 가족의 영광을 위해서 군림했던 어떤 역사처럼 가족과 가문은 부정적이며 배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아직까지 잔존해 있는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는 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직궁의 예에서 공자를 옹호하는 견해들이 이런 것을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 가족 안에서는 따스하며 헌신적이고 가정적인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밖에 나가서 이기적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런 아버지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조폭과 같은 짓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의 경우라면, 오히려 직궁의 행위가 더욱 권장되어야 하지 않는가?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부도난 재벌들이 - 몇몇 재벌들이 나왔지만 나산 밖에 기억하지 못하겠다. - 몰래 뒤로 돈을 감추고 그 돈으로 아내와 가족의 이름으로 계속 더욱 돈을 벌어가지만, 그러나 법적으로 완벽하게 가난한 사람에게만 피해를 줄 때, 이런 가족의 아들과 딸이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해야 하지 않는가?


philebus(바람) 답변

[re] 직궁에 대한 명상

K님께서 이미 여러 갈래로 풀이를 해놓으셔서 그 안에 포함되는 말이겠지만 제 의견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일단 공자가 아비가 죄를 짓더라도 고발하지 말라고 대중에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섭공의 말이 있고 나서 그에 대응하여 그 말을 한 것으로 압니다.
, 섭공이 우리 향당에 직궁이란 자가 있어 마음이 바르고 곧아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로서 스스로 고발하였나이다.” 하고 말하자 공자가 그를 되받아 우리 향당의 곧은 자는 그 같지 아니하여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깁니다.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한 거죠.
이것은 공자의 그 말씀이 수학의 공리처럼 누구에게나 불변하는 진리라기보다 자신의 치세를 자랑하는 섭공에게 곧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공자의 그 말씀이 섭공에게만 유효하고 보편성은 없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보편적으로 올바르게 생각되지만, 현대에 와서 그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비를 고발한 직궁의 마음과 그가 속한 향당의 정치 분위기를 어떤 상태로 상정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고발 당시 직궁의 마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두 갈래로 추정해 봅니다.
첫째,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망설임 없이 곧이곧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아비에 대해 송구한 마음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 이상 별다른 마음도 없다.
둘째, 법도 그렇거니와 사회와 국가 전체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아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회한의 마음도 있지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심정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정황은 직궁이 고발하거나 증언하지만 않았으면 아비가 잡혀가지 않거나 무죄로 풀려날 테지만 그의 고발과 증언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위 두 가지 경우에 공통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것은 부자간의 함입니다.
일반인이 죄를 지어 관아로 끌려간다고 하는 것이 주는 일차적인 느낌은 당황과 두려움이고, 감옥에 갇혀 벌을 받는데서 오는 고통, 곤란, 낙심과 슬픔 등이 바로 뒤따라오는 감정이죠.
이런 감정은 그 지경에 처한 당사자에게 그대로 일어나겠지만 함께 일을 당하는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등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그래야 이 사회가 올바르게 된다는 등의 생각은 그다음 단계에서 일어나는 완전히 이성적인 생각이죠.
그런데 함이나 親和가 있어야 하고 또 있는 관계에서 理性的인 주장을 맨 먼저 앞세우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직궁의 경우 아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좀 더 분명해 질 것 같네요.
위 직궁의 두 가지 마음 상태 중 그가 만약 첫 번째 마음을 가지고 고발했다면 어떨까요.
나라의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아비는 직궁에게 뭐라고 할 말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냥 잡혀가는 거죠.
그러나 그 뒤의 부자 관계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좀 답답하죠.
아마도 최소한 예전과 같은 함은 있기 어렵겠죠.
현재 어느 정도의 함이 있든 간에 그보다는 훨씬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통치자를 상대로 논한다면 가족의 핵심멤버인 부자간의 관계를 그렇게 만들고도 정치를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사례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난다면 어떨까를 상정해 보면 감이 잡히죠.
군주가 보기에는 완전한 법치국가로 보일지 모르지만 인민의 심성은 피폐하고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되니 좋은 나라는 물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 나라 전체에 기계적인 올바름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좋음()은 없는 것입니다.


또 직궁이 두 번째 심정으로 고발했다면 어떨까요.
그 아비는 아마 황당하게 생각할 것 같지만 그 이유는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기르며 함께 살아온 아들이 가장 가까운 아비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려 돌보지 않고, 머나먼 뜬 구름과 같은 국가의 정의를 위해 자신을 고발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런 직궁의 마음 상태를 미혹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어로 흔히 말하는 사랑이나, 親和, 友愛 등이 밑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그 위에 어떤 구조물을 세우든 황량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만약 어떤 아비가 살인을 위해 준비 중인 데, 그 자식이 경찰에 고발하는 것 말고는 달리 그를 막을 방도가 없다면 이 경우에는 고발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비가 살인자가 되어 그 후에 당사자가 받아야 할 고통과 응보보다는 차라리 미수에 그친 채 지금 감옥에 가는 것이 아들의 입장에서 아비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말씀이죠.
말미에 예를 드신 다음 부분,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부도난 재벌들이 몰래 뒤로 돈을 감추고 그 돈으로 아내와 가족의 이름으로 계속 더욱 돈을 벌어가지만, 그러나 법적으로 완벽하게 가난한 사람에게만 피해를 줄 때,

이런 때에도 제 생각으로는 고발하는 것은 공자의 뜻에 어긋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친에게 간절히 간하고, 그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면 포기해야죠.
자식이 만약 그 이상 고민한다면 집에 남아 부친의 그늘 밑에서 생활하느냐 아니면 가출하여 정정당당히 독립하느냐 정도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것도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고 부러지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 구 게시판에서 바람이라는 이 닉네임으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죠.
그리고 다른 닉으로 도덕에 관해서도 말씀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매우 성실한 답변을 듣게 되어 감사했는데 또 한 말씀 직접 들을 수 있겠네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