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오랜만에 성서를 읽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위 네이버에서 펌
위 구절에 인생이 곤고한 근본적인 까닭이 드러나 있다.
달리 말하면 첫째는 육신을 먹여 살리는데 애써야 함이고 둘째는 죄가 그 인간을 지배하길 원하므로 그것을 스스로 다스리고 방어하는데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글자 그대로 육신을 먹여 살리는 것뿐이라면 그 짐이 그렇게 무거운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육신의 요구가 거의 항상 그것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죄를 다스리는 – 또는 다스린다기보다 그로부터 도피하는 - 보편적인 방식은 일과 유희遊戲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예술과 학문에도 적지 않게 유희성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별도로 종교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표면적으로는 보다 큰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이 뭔가 중요한 일이 어그러질 때면 보통 그가 말하기를 “그 일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온다.”라고 하는데 인간이 세상에 나올 때 지고 나오는 위와 같은 짐도 언뜻 다시 생각해 보면 실상 잠 못 들기엔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다.
그러나 낙담 대신 생각을 조금 바꾸어보자. 인간은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이는 사람의 탄생이 하나님의 선의와 은총에 힘입은 바라 할 수 있을 터, 그 시작에 어떤 不義도 없었을 것이며, 이후 죄지음과 낙원추방은 낙관적으로 말하자면 중간에 일어난 에피소드와 같은 일이니, 아무래도 그것이 결국 최초의 원리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리라.
흔히 죽음을 인간의 가장 큰 재난으로 여기고 철학이라는 것도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죽음을 능가하는 큰 문제는 위 성경 구절에 있는 대로 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이라면 순교殉敎나 순국殉國이나 살신성인殺身成仁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무엇 무엇을 한다’와 같은 말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남에게 해를 당하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지만 굳이 둘 중에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남에게 해를 입히느니 차라리 해를 당하는 편이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자신의 혼이 죄에 물드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싶어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즐거움을 찾고 급속도로 발달하는 문명의 산물들이 그 즐거움을 위해 낱낱이 쓰이고 있지만, 때로는 그 즐거움이란 아프로디테가 거기서 태어났다는 바다의 포말泡沫쯤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금 수저를 물고 나온 복된 사람이 있어 재산이 넉넉하고 가족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고 기르고 있는 개와 고양이까지 사랑스럽다면 사람들도 나도 그를 부러워할만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孔子라면 더하여 그가 禮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위와 같은 행복한 삶이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경우에는 오래전에 經典과 철학이라는 도피처를 찾아내 그에 의지하여 반평생을 비교적 평온하게 보내고 있는 중인데, 그에 대해 결론적으로, 그간의 내 생활에 모순되지 않도록, 그리고 최대한 안전하게 한마디 한다면, 경전을 읽으며 옛 聖賢들의 삶과 언행을 문자를 통하여서나마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해 A가 말한다. “나쁘지 않다면 곧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B가 말한다. “나쁘지 않은 것이 어떻게 곧 좋은 것이 될 수 있는가? 金은 金이요, 銅은 銅이요 금도 아니고 동도 아닌 것은 역시 금도 아니고 동도 아닌 것이 아닌가? 그러니 좋은 것은 좋은 것이요, 나쁜 것은 나쁜 것이요, 나쁘지 않은 것은 단지 나쁘지 않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