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계사전 재천성상 재지성형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본래 어디에서 생겨 나왔습니까?”
그에 대해 A가 대답한다. “모친의 태胎에서 생겨나 열 달 후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번엔 B가 대답한다. “흙에서 생겨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C가 대답한다. “수십 가지의 원소들로부터 생겨 나왔습니다.”
A의 답변은 옳고도 이해하기 쉬운 답변이며, B는 옳지만 A만큼 현실적인 답변은 아니다. C의 답변은 옳다고 해야겠지만 가장 비현실적이고 수긍하기 어려운 답변이다.
A의 답변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같은 종류에서 같은 종류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이 나왔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이 나왔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B의 답변은 때로 우리가 당연한 듯이 여기지만 실제로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은 듯하다. 흙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나아가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흙이 주제가 되었다면 곧이어 자연스레 물과 불과 공기가 뒤따르게 된다. 사람 몸의 구성 성분 중 비교적 단단하게 만져지는 것은 흙에서 나온 것이고, 흐르고 적시는 성분은 물에서 온 것이며, 내부의 생화학 작용은 불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와중에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공기이니, 사람의 몸은 흙과 물, 불,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철학적 견해가 된다. 그리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이러한 견해가 어떤 면에서는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 아마도 백가지 미만 – 원소 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보다 더 나은 것 같다. 그 이유는 地水火風 설은 우리가 이미 체험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재료로 설명함으로써 그것들로 이루어진 존재의 성격을 각각의 재료가 가지는 유비적인 성질에 연관시켜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 주지만, 다른 쪽으로 말하면 물리학적으로 구분되는 갖가지 원소, 원자라는 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에 대해서는 아무리 정교한 계산과 실험 끝에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듣는 사람으로서는 단지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라고 여길 따름이며, 나아가 그 원소들 상호 간 다른 점이 인체 구성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각의 원자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어떤 다른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 알려지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주역 계사전 上 1장에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이라 하였으니 하늘에서는 象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태를 이루어 이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인데, 象이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부응하여 땅에서 형태를 이루며, 兩者의 같음과 다름에 따라 (무궁한) 변화가 생겨난다고 해석해 본다.
그리고 뒤에 가서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이라 하였는 바, 이는 건은 큰 근본(시작)을 주관하고 곤은 일으켜 사물을 지으니 건은 쉬움으로 주관하고 곤은 간략함으로 능하다는 의미로 본다.
사람이 천지天地 건곤乾坤의 역능力能을 본받아 움직여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각자 하고자 하는 바 즉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易簡의 방식으로 충족하게 된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도닦음, 신앙,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과 같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욕구는 어떤 식으로 충족되는가?
이에 대해 먼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在地成形, 坤作成物이라는 지침에 따라 일단 형태로써 그 욕구에 응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경전經典이나 집회 또는 대화 기타 은밀한 기회의 어느 순간에 위와 같은 무형의 가치에 눈을 뜨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어쨌든 그쪽으로 움직여 가고 싶어 하는데, 만약 그때 그가 받은 인상이 ‘자유로움과 독립’이었다면 그는 왜곡되지 않은 그 가치로 나아가는 대신 자전거 타기에 몰두할 수 있다. 그것이 실제 여정의 험난함 대신 易簡에 부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그 인상이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그에게 각인된다면 그는 그쪽을 향한 순수한 정신의 모험 대신 낚시질에 몰입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정한 만족을 얻게 되고 그 시점에 만족의 주체가 된다.
만약 존재 자체가 苦라고 해서 非存在를 열망한다면 이번에는 그에 정반대 되는 것, 즉 존재의 조건인 음양교합, 異性의 영상이 그를 압박할 수 있다.
한편 독서와 토론, 대화, 집필, 출판과 같은 작업은 당사자의 호승심이나 명예욕을 완전히 제거해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가 순수하게 저 무형의 가치를 위한 것인가?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욕구의 대상이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 욕구도 다양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욕구를 뒤따라가기 바쁘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태로운 일인 듯하다.
天地의 합작품인 自然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경이로움이요, 위대한 사업이지만, 그 안에서 역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만들어낸 것, 현대 문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실존적 입장에서 달리 방도가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것이 얕은 깊이에 오로지 成形, 成物의 넓음뿐이라면 그에 매몰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