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도서관에서 논문 읽음
요즘 쉬는 날은 주로 도서관에 가 책을 읽는다.
주변 몇 군데 도서관 중 어딜 가느냐는 그때그때 기분에 달려 있다.
아래 사진들은 당진군 합덕읍 변두리에 있는 합덕도서관 안에서 찍은 것이다.
도서관 뒤 휴게소로 올라가는 계단
옥외 휴게소
휴게소 정면 모습
길가에 핀 철쭉
배롱나무
호랑나비
오늘은 동양철학 연구회에서 펴낸 논문을 한 권 가져와 읽었다.
제목은 ‘원시유가의 형성과 본질적 이념’ -공자의 천인 관과 예악사상을 중심으로- 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A4용지로 30쪽 정도 되는 분량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의 참모습은 한마디로 ‘비평가적 기질’이며 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표적인 것이 예와 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仁으로 예, 악을 해석하여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고, 나아가 예와 악이라는 별개의 개념을 예악이라는 하나의 총체적인 문화개념으로 해석하여 “예악문명“이라는 가장 유교적인 패러다임을 구축하였다.
그는 특유의 비평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溫故知新의 학문태도와 損益의 역사정신을 통하여 기존의 문화를 비판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사회문화체계를 구성하려 했다.
禮記- 表記에 殷人과 周人의 중요한 차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은나라 사람은 신을 높이고 백성을 이끌어 귀신을 먼저 하고 예를 뒤로 한다.
주나라 사람은 예를 높이며 베푸는 것을 숭상하고 귀신을 섬기고 공경하되 멀리하며, 사람을 가까이하되 충심으로 한다.
은에서 주로의 전환은 신권의식으로부터 인문의식으로의 전환이며 공자는 周人의 인문정신에 비로소 자각적 긍정을 하였고 나아가 여기에 이론적 기초를 완성한 인문사상의 宗主이다. 그리고 그 인문정신의 완성은 곧 仁의 실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仁이라는 말은 예전에 和順, 親愛, 慈愛 등의 단편적 덕목을 지칭하였으나 공자에게 있어 그것은 인간성의 총체적 본질이며 인간의 내면적 인격세계의 발견이고 도덕적 주체의 자각을 의미한다..
또한 仁은 혈연에 기초한 孝悌의 확대적용이며 도덕적 情感의 표현이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공자가 예를 인으로 해석한 것은 예란 맹목적 의절형식이 아니요, 인간의 참다운 본질 즉,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관점을 보여준 것으로 결국 인은 욕구와 법도가 통일되어 나오는 도덕적 정감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예술적 경계로 볼 수 있다.
仁은 철저한 인간존중이며 사회적 책임의식이다.
이상적인 경지에의 도달은 반드시 욕구(자유)와 법도(질서)의 조화로운 통일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정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樂과 인간의 욕구와 행위에 절제와 질서를 부여하여 그것을 조절하는 禮가 요구되는 것이며 공자가 인문사상의 정수라 할 仁을 강조함에 예와 악을 함께 중요시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읽기 쉬운 논문이다. 그가 그린 공자의 참모습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논문을 흥미 있게 읽으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그것은 내가 仁하게 되는데 이 논문을 읽고 때로는 그 내용을 깊이 음미하고 그것에 동의하며, 때로는 반대하거나 비판하며 때로는 관련 내용을 뒤지거나 탐구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가이다.
조금 달리 말하면, 공자는 仁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인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禮樂을 주문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논문 읽기나 연구 등은 분류하자면 知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논문의 성격은 仁도 아니고 禮도 樂도 아니고 仁에 관한(또는 공자에 관한) 知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의문은 이런 식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사람이 仁하게 되는데 知가 어떤 식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자에게 있어 仁은 확실히 근본 출발처이며 또한 최종 도착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知는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주목할 만한 개념은 아니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필요한 말은 간결하지만 꼭 하며 불필요한 말은 전혀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 여기서 필요, 불필요의 기준은 넓게 보아 역시 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런 공자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공자가 말할 때마다 그 사람,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면에서 知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볼 때 공자는 仁과 知에서 아울러 최고에 도달해 있었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仁이며, 知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知보다는 예악의 훈련을 통해 仁에 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특별히 知에 치중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체육 실기와 예능 실기를 제외하면 거의 지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빼면 그 나머지 음악도 지식교육일 테고 직접 그림 그리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미술도 역시 지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詩作은 예술이겠지만 분석이나 비평은 그 시에 대한 지적 작업이 될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도 아마 지식 교육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仁이 인간성의 총체적 본질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라면 知는 이 목표달성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여기서 일반적으로 知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내 생각에 知는 반드시 대상을 갖게 마련이다.
知가 외부로 향하여 온갖 사물을 대상으로 할 때(독서 포함) 얻게 되는 것을 흔히 지식이라고 한다면 반면에 그것이 내부로 향하고 그 대상을 제거 또는 응축시켜 나갈 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그 자신, 自我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얻게 되는 것이 깨달음 또는 지혜라 불린다고 생각해 보자.
禮樂을 주로 추구하여 목표에 도달하려는 것과 안팎으로 知를 주로 하여 목표에 도달하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목표는 仁 또는 인격의 완성, 참된 인간성의 실현, 그리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상태라고 해보자.
플라톤은 초기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의 입을 빌려 지혜 또는 절제가 일종의 자의식 또는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앎과 무지를 분별하게 해 주며 아는 만큼 행하게 하고 모르는 것은 행하지 않거나 아는 자를 찾아가게 하거나 배우도록 함으로써 무지로 인한 과오를 막아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특별한 지혜가 없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을 거론하며 그 지혜가 행복을 위해 어떤 선을 베푸는지를 묻는다.
이것은 조금만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궁극적으로 知가 仁에 어떻게 유용한지를 묻는 것과 유사하다.
知란 대상을 갖게 마련이고 지혜가 일종의 자기의식이라면, 그리하여 자아를 그 대상으로 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정도에 차이는 있을망정 자기 분열의 상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仁은 예와 악(욕구와 법도)이 혼연일체로 조화된 상태로 분열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知를 추구하는 사람은 仁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현재의 잠정적인 결론은 知를 끝까지 추구하고 그로 인해 일정한 수준의 지혜나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면(예컨대 스스로 天命을 알았다면) 그는 자신에게 있어 樂의 주체를 요청하여 설득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知가 파악한 도리에 따라 욕구가 순종한다면 樂과 知가 어울려 仁과 동등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 분열이라는 부정적 양상이 없고 즐거움의 주체는 지혜, 또는 지성과 일체가 되며 예컨대 사려, 또는 숙고가 그 대표적인 자기표현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