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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안티조선 문제 4

간단한 리플입니다

암중모색

1. 이미 충분히 현실의 "거대담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입장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가 중요하다고 따지실 정도면 민주주의와 언론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관심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민주화와 국가 이익의 관계도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요.

2.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데 철학적 사유방법을 끌어들이는 건 때때로 토끼 한 마리 잡기 위해 중무장을 하는 것처럼 불필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할 때 자꾸만 추상적인 원칙으로 넘어가는 건 (1)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혹은 그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하는 부담)를 직시하지 않기 위한 회피의 담론으로 쓰이는 경우가 아니면 (2) '글 읽는 자'의 천형 같은 고질병이라고 저는 늘 생각해 왔거든요. 관망님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플라톤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망치로 못을 때려야 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역학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3. 아무튼, 안티 조선에 대한 글에서 시작되어 결국 관망님이 고민하시는 문제가 "진보와 보수-이름은 어떻게 붙여도 좋습니다-에 대한 논의"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는 게 지금 논의의 소득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함부로 님의 견해를 요약할 수는 없지만, 님이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는 '신문이나 이념에 대한 선입견'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벗어던지고 '어떤 것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님은 그 중요한 문제를 바라보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안티 조선'과 같이 약간은 맹목적인 반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시려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합리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사소한 일에 대한 반감은 제쳐두는 게 필요하니까 말이죠. 맞습니까?

4. 몇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선 철저하게 반성적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 이익'과 같은 모호한 개념을 좀 더 파고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라는 제안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이익'이라는 모호한 개념과 만날 경우, 님이 우려하시는 것처럼 그 구체적인 논의는 사라진 채 '국가 이익'이라는 이름만 공중에 휘날리는 경우가 되기 쉽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국가 이익의 적은 지금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국가의 이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게다가 그것에 저해되는 ""이 있다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복잡한 현실적 이해관계 속에서 "국가의 이익"을 따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텐데, '국가 이익'이라는 대의가 앞서 버리면 합리적으로 '어떻게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가'를 따지기 전에 이미 구호의 차원에서 답이 결정되어 버리는 비합리적인 논의가 되기 쉽겠지요. 님의 말씀대로 '보수''개혁'이니 하는 '구호'에 너무 구애받지 마시고 실제로 그 주장들이 현실 속에서 누구의 이익으로 관철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5. 전 보수냐 진보냐, 뭐 이런 식의 선택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조선이냐 한겨레냐, 뭐 이런 식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요. 제가 님의 글에 대해 집요하게(?) 댓글을 다는 것이 "안티 조선 운동을 옹호하기 위해"라는 식으로 여겨진다면 전 좀 불편할 것 같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주장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어떤 깃발 아래 가져다 붙이는 건 피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물론 저는 안티 조선 운동에 대한 저의 지지가 단순히 '보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체적인 주장의 내용에 대한 검토를 거쳐 얻어진 거라고 믿습니다만.)

6. 아무튼 관망님의 말씀대로 논지를 따라가자면, 조선일보가 왜 잘못인가라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님의 말씀대로 '중요한 문제'는 각각의 사안들에 대한 검토(이익 형량, 비용 편익 분석?)에 놓이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이 '이념적 정향'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안에서 일관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충분한 사례와 근거가 있으면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야 아직까지는 그런 구체적인 사안과 쟁점들에 대한 논의가 없었으니까 '조선일보와 같은 수구 보수 세력은 서민과 중산층의 이익에 반하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저 같은 사람)이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저는 관망님의 신중한 자세를 존경합니다만, 아마 안티 조선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믿어보세요.

7.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환경에 대한 규제에 대해 기업들은 반대하는 편인데요, 왜냐하면 당장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신문이나 잡지들은 "지나친 규제는 경제를 억제해 경기가 위축될 수 있다"는 식의 전문가들(?)의 글을 싣지요 - 미국의 보수적인 잡지들을 살펴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환경 규제를 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 경제적인 이익은 대폭 축소됩니다. 생산비용과 단가가 올라가고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국민의 대부분인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분석'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국민도 아니고, 아직 '사람'도 아닌-, 즉 미래의 세대들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국가 이익'이란 좀 모호해지는 것이죠. 여기서 슬쩍 철학을 끌어들이자면,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그의 <윤리 21>에서 윤리란 결국 타자에 대한 태도의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기서 타자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도 포함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좋고 나쁨'의 문제로 혹은 '이익과 손해'의 문제로 치환한다고 해서 윤리적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어려운 법이죠.

8. 최근 북미 문제를 둘러싸고도 '무엇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으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이익'을 어떻게 따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입장이 정해져있다면, 그 입장에 들어맞도록 계산법을 만들어내는 건, 머리만 약간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입장의 평면적 대립보다는 입체적 분석이 필요한 건 그것 때문이겠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 게시판에 글을 썼습니다만, 전 방위비 문제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도 남북 동시 군비 축소를 환영합니다. "군축을 주장하는 건 반국가 세력이다"라고 주장하는 조갑제보다는 제가 훨씬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전 생각하고, 그의 주장보다는 제 주장이 훨씬 '국가 이익'에 바람직하다고 믿어마지 않습니다만.

2002-12-27


Re: 보충답변입니다

관망 (philebus 답변3)

암중님이 지엽적인 문제보다 당면한 현안자체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제 말을 인정하고, 그렇다면 '국가이익'이나 '이익'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우선 따져야 할 것이라고 한 말씀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제가 느끼기에는 현재 암중님의 입장에서는 이익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형식적, 논리적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을 뿐 암중님의 실제 관심사는 여전히 제도나 힘이나 권력에 관계된 현실적인 문제(이익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 가 등)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님의 말씀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잡한 현실적 이해관계 속에서 "국가의 이익"을 따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텐데, '국가 이익'이라는 대의가 앞서 버리면 합리적으로 '어떻게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가'를 따지기 전에 이미 구호의 차원에서 답이 결정되어 버리는 비합리적인 논의가 되기 쉽겠지요. 님의 말씀대로 '보수''개혁'이니 하는 '구호'에 너무 구애받지 마시고 실제로 그 주장들이 현실 속에서 누구의 이익으로 관철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

여기서는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 관점은 암중님의 것과는 상당히 다르고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님이 하시는 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지엽적인 문제보다 제기되고 있는 현안자체를 중요시 하라는 말도 궁극적으로 현실 문제를 엄밀히 다루라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런 인식을 기반으로 참된 개인적인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조금 어렵게 생각되긴 하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를 마저 해보겠습니다.

'국가이익'에서 이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면 저는 대다수 국민의 지속적인 행복, 또는 그러한 행복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필수적인 요소들 중 하나가 재화의 공평한 분배라고 한다면 암중님은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국가라는 거대한 집합체를 두고 계속 생각해 나가는 것이 매우 복잡하다고 여겨지므로 일단 개인을 두고 한번 행복과 그 조건에 대해 할 수 있는 데까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짧은 내용에 큰 문제를 다루는 것이니 전체적으로 거칠더라도 일단 봐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행복이란 행복한 마음상태와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내포하는 뉘앙스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외형적으로 당사자를 어떻게 보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즐겁다고 느껴지는 기분이 다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즐거운 기분을 억지로 피하라는 말이기 보다는 어떤 즐거움들은 애써 구할 것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들이 나오느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는 과정에서 즐거움 또는 쾌락이라고 부르는 기분을 맛보고 그러한 기분을 느끼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그러한 행복감은 지금 현재 욕망을 채우는 과정에서도 나타나지만 미래에 그러한 욕망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흔히 희망이라 불리기도 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사람들은 흔히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필요한 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그보다는 더 참된 즐거움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혼동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필요한 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입니다.
굶주렸을 때 먹음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은 단순히 삶을 위해 필요하지만 어느덧 그것이 자신의 본분을 넘어 인간의 행복감 형성에 지나치게 관여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반면에 보다 참된 즐거움이라고 불릴만한 것의 예를 든다면 논어 속에 나오는 구절들이 짤막하면서도 적합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日新日日新又日新"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위의 구절 외에도 찾아보면 부지기수일 테지만 지식의 탐구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인격을 향상하길 간절히 바라고, 그를 위해 모든 방법을 다하며 실제로 자신이 배움으로 인해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경우, 그 행복감이 더욱 참된 것이며, 이것은 좋음을 향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먹고 마시는데서 오는 행복감은 단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 과도하게 평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본래 거짓이나 실제보다 과장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배움의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 위와 같이 말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하며 불만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는 게 무어 그리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인간적이기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배를 불리고, 나아가 TV의 광고 속에서나 영화 속에서 여인들이 온갖 자세를 취하며 현란한 모습으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즐겁게 보고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요구하는가 하면, 해당 여인들은 자기 자신의 그런 자기표현을 스스로 당당하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 체험을 잠깐 얘기해 보겠습니다.
언젠가 봄에 충남 예산에 있는 수덕사라는 절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절 구경을 거의 다 하고 마지막 건물을 지나는데 그 법당 앞 섬돌에 개가 한 마리 앉아서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죠.
크고 나이가 좀 먹은 흰 잡견이었는데 절에서 기르는지 밑에 있는 민박집이나 식당에서 올라와 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더군요.
아무튼 그 개를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이 순간적으로 차례대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첫 번째는 그 개의 모습이 매우 당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체구가 훌륭하여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의 존재나 위상이 갑자기 더 이상 뭐라고 트집 잡기 어려울 만큼 충만해 보였다는 뜻입니다.
, 법당 앞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그 개의 존재성이 확실하게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거죠.
그런데, 뒤이어 바로(0.5초 정도 후) 정반대의 감정이 뒤따랐는데, 그것은 그 개가 순간적으로 측은하게 느껴지더라는 거죠.
, 윤회의 사슬 속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는 개에게 연민의 정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보니 개는 다른 곳으로 가고 없더군요.
절을 나서며 생각하기를 그 두 감정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에 관한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개에게 투사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때때로 사람을 볼 때나 나아가서 살아 있는 다른 동물을 볼 때도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위에서 말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옹호하고 여인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당당하다고 말하고 나아가 온갖 예술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껍질을 벗고 보다 더 완성된 인격을 향해 나아가는 즐거움을 선호하는 고상한 사람들의 태도도 물론 이해하는 것이죠.

암중님이 지난 글에서 제 말을 가리켜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닌" 글을 보는 것 같다고 꼬집은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개개의 인간은 둘 중에 한쪽을 골라 이것이 진실이라고 선언하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어느 쪽을 향할 것인가 하는 결단은 있을 수 있죠.
그러나 그렇다고 어느 쪽이 진실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포기하고 단지 개인의 맹목적인 결단에 맡겨버린다는 것은 저로서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비약시켜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죠.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감각적 세계는 참된 의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 세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참된 의미에서 있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은 아마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있는 것(있음)은 있고, 없는 것(없음)은 없다." 라는 얘기가 그나마 가치 있는 언급이 될까.
이 세계는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다르게 있는 것이다.
다르게 있는 것은 있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는 있는 것에 못지않게 충실히 있는 것이다.
달과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는 각각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속에 있는 토끼가 생각할 수 있다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행동해야 할까, 또한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이야기의 결론으로 저는 인간은 역시 각자 자신의 마음에 유의해야 하며,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배움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에 기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작지만 순수한 즐거움을 행복한 상태로 여기는 것이 보다 올바른 생각이라는 거죠.
여기까지 개인의 행복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한 거고요.

다음은 윤회 속에서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정해지는가 하는데 대한 플라톤의 신화를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플라톤은 에르의 신화를 통해 인간이 죽은 후 어떤 경로를 거쳐 다시 다른 개체로 환생하는지를 흥미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화란 전부를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철학적 사고를 촉발하는 시사점이 적잖게 있는데 그 한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인간이 죽은 후, 현세에서의 행위로 인한 그 영혼의 상태에 따라 판결을 받고 어떤 이는 하늘로 난 평탄한 길을 따라 안락한 여행을 하는 반면 어떤 이는 땅속으로 난 지저분한 길을 따라 고통스러운 여행을 합니다.
각각의 영혼들이 그러한 일주여행을 마친 후 갈림길에서 모여 다시 다음의 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절차로 들어갑니다.
에르가 보기에 영혼 각자가 자신의 다음 생을 선택하는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딱하게 보이기도 했다는데, 주로 전생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습관에 의해 선택을 하더라는 거죠.
전생에 용맹한 장수였던 사람이 사자의 생을 선택하기도 하고 남을 웃기던 사람은 원숭이를 택했으며, 여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오르페우스는 다시 여자의 몸을 통해 나는 것이 싫어 백조의 생을 택하기도 하더라는 겁니다.
어떤 이는 엉겁결에 좋게 보여 독재자의 생을 택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생을 곰곰이 뜯어보고 땅을 치며 후회하더라는 얘기도 있고요.(플라톤은 폭군이나 독재자의 삶을 정치체제와 관련시켜서만이 아니라 당사자 개인적으로도 가장 못한 삶의 유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학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습관에 의해 생을 선택하므로 써 전생에 안락한 삶을 보낸 사람들은 다음 생에는 보다 못한 삶을 택하게 되고, 전생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신중하여 보다 나은 선택을 함으로써 서로 뒤바뀜이 일어나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참된 의미에서 철학을 한 사람들은 전생이나 다음 생이나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기복이 심하고 지저분한 길을 따라가지 않고 대체로 평탄한 길을 따라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플라톤은 바로 이러한 선택에 인간의 모든 모험이 걸려있다고 말하고 그 선택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 자신과 자신의 생활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의 조합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라는 식입니다.
가난과 부, 훌륭한 가문과 별 볼일 없는 집안, 아름다움과 추함, 건강과 병약함, 영리함과 둔함, 재빠름과 신중함 기타 이런 요소들이 서로 결합되어 한 사람의 성격과 기본환경을 만들 때 그가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인간으로 성장해 가느냐가 핵심입니다.
위에서 든 요소들 중 좋게 생각되는 것들, 즉 부와 건강, 훌륭한 가문, 영리함, 아름다움 등을 모두 선택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면 그는 단순한 사람이며, 예컨대 독재자와 같은 인생을 살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좋은 요소들이 결국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활용되는데, 모든 면에서 남보다 뛰어나며 걸릴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욕구를 최대한 확장하려고 하며, 일시적으로는 성공하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와 주변과의 알력에 부딪혀 패배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오랜 기간 패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플라톤은 그런 자유롭고 방만한 욕구충족의 삶을 경건하고 행복한 삶의 반대쪽에 놓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맛난 음식을 먹고 어떤 화려한 옷을 입고 살든지 말씀입니다.
만약, 다른 조건은 다 좋은데, 병약한 신체를 가져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면 이는 전자보다는 더 나은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욕구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게끔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실 속의 그는 "다른 건 다 구비되었는데 왜 하필……."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병약함을 한탄할지도 모르죠.
어쨌든 이러한 선택에 개개인의 운명이 걸려 있고, 이것이 만약 학문에 속하는 것이라면 최고의 학문이 될 것이며, 참된 철학자는 이러한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럼 이제까지 말한 두 가지 것, 즉 개인의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와 요소들의 조합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의 의미를 개인의 집합체인 국가와 '국가이익'과 관련시켜 얘기해 보도록 하죠.
지금에 와서는 보수나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나라의 운영에 대해 소리 높여 주장하는 말들과 제가 추구하는 지향점 사이에 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실 겁니다.
예컨대 진보 쪽 사람들은 국민의 행복이라는 것을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그에 따라 진보운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마도 "현재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제도나 관행을 고치기 위해" 진보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럴듯한 대답이 되겠죠.
그럼 개혁이 전체적으로 웬만큼 잘 이루어져 경제성장도 매년 7-10%씩 되므로 재화도 풍부해지고 더욱이 그 풍부해진 재화를 잘 분배하여 최소한 불공평한 분배에 따르는 불만은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가정하죠. 그리고 환경도 잘 가꾸어 쾌적한 삶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럼,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게 될까요?
아니 이렇게 묻는 것보다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더 이해하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들은 무엇을 욕구하게 될까요?
아니면 모든 조건이 웬만큼 충족되었으므로 아무것도 더 이상 욕구하지 않고 주어진 것으로만 살아갈까요.
저보고 답변하라면 "대중이 아무 것도 욕구하지 않고 무심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럼 어떨까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었으므로 그들은 배우려고 할까요?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 군자를 향한 배움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다 더 유식하고 보다 더 자신의 존재를 안정감 있게 확인시켜 주는 배움에 몰두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외국어나 자격고시와 같은 것들이죠.
그리고 교양을 위하여 뭔가 배운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자신의 성숙을 위한다기 보다 단지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배우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치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데 신경 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적인 쾌락도 넘쳐날 것이며, 알코올이나 마약류도 증가할 것입니다.
왜 이런 추측이 가능하냐 하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한정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배움에 의해 그 욕구가 적절히 조절되지 않는 이상 없어지거나 조화된 것으로 변하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보통사람들의 속성은 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는 대개 각종 쾌락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군자는 위로 달하지만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는 말도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제 해석은 군자는 로 향하고 소인은 감각적인 것으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해석한다면 군자는 先代를 봉양하는데 힘쓰지만 소인(아녀자 포함)은 자식에게 과도한 기대를 건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소인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소인이라는 어휘는 보통명사처럼 쓰인 것으로 생각하면 그다지 기분상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런 말들은 보통사람들의 욕구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데 대한 근거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경제 환경이 변화하면 그러한 속성에 따라 보통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예측의 근거로도 사용이 가능하게 되죠.
진보 쪽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상태에 얼마만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바람직한 쪽으로 돌리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위에서 제가 잠깐 말한 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므로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보면, 논리적, 형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위해(남이 알아주든 말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최선의 삶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 남을 위해(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위하려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뛰어 다닐 새가 없는 것입니다.
이젠 아마 제가 전에 말한 조선이나 한겨레나 또는 보수나 진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과 핵심에 천착하라는 말과 사소한 것에는 분노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무지에는 태연함이 놀랍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신중한 태도를 좋게 보시고, 진보 쪽 사람들을 믿어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사람들을 믿지 못하여 제가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실 걸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수나 진보 운동을 배움과 관련하여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연기이론에 해당하는 점이 눈에 띄기 때문인데요,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는 것입니다.
보수가 있기 때문에 진보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것도 없는데 진보 의견이 우리 국민이 행복하게 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책이며 개혁이라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보수가 있기 때문에 그 보수 중 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진보 쪽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때가 되면 그러한 운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얘기죠.
예를 들면 정지해 있는 시계추를 손으로 오른쪽으로45도 정도 들어 올렸다가 놓으면 진자의 운동에 의해 시계추는 중심을 지나 왼쪽으로 비슷한 각도만큼 올라가겠죠.
그와 같이 보수와 진보는 서로의 힘 때문에, 서로에 의지하여 나타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것은 사실 중도나 진리나 적중과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이익에 관한 핵심은 보수나 진보에 관계없이 돌고 돌아 이렇게 됩니다.
어떤 정책이나 개혁이 국민들을 일시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행복하게 하는가?
어떤 정책이나 개혁이 국민들의 마음상태를 올바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가?
만약 올바르다는 말이 껄끄럽다면, 어떤 정책이나 개혁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하고 평상시에는 유순하게 하며, 비상시에는 용감하게 하는가?

말미에 말씀한 남북한 군축문제는 암중님의 말에 반대할 사람 별로 없습니다.
단지, 그 말이 지금으로서는 실질적으로 쓰임새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왜 쓰임새가 없느냐 하면 검증이 어렵기 때문이죠.
인력을 줄이고 무기를 폐기하고 예비 전력을 축소하고 기지를 이전하는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철저한 상호검증을 해야 하지만 북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해온 햇볕정책대로 우리가 먼저 감축할까요?
그렇게 하면 북한이 따라서 같이 같은 비율로 감축할거라고 보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네요.
제 추측이지만 조갑제도 기본적으로 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믿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는 아마 우리 남한의 전력이 현재의 북한 전력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약화되지 않는 상호군축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협의 과정과 검증과정에서 북한이 이것저것 생트집을 잡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조건을 붙이고 시간을 끌며 양보를 받아낸다는 말이죠.
그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대비하려는 북의 방침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좋은 말은 남쪽에서 다 했죠.
남과 북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거나 북한은 대화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거나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거나 한반도에서 핵은 없어야 한다거나 하는 등이죠.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은 그들에게 마이동풍이고, 반면에 북에서 하는 말은 남에서 먹히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미군철수 주장이고요.
같은 민족끼리 잘해보자는 얘기는 정서에 호소하고 있죠.
미녀 응원단도 상당히 전략적이고요. 송이버섯도 그렇고…….
아무튼 우리 정부도 알아서 잘 대응하겠죠.

제 입장과 암중님의 입장차이가 매우 큰 것으로 여겨져 그 점을 설명하느라 길어졌습니다.
암중님이 제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 하셨다면 다음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죠.
하지만 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것 같아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질문해 주시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2002-12-28

관망님의 글을 읽고 - 소승과 대승, 개인과 사회

암중모색

1.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감할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옳은 이야기라고 동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관망님이 애초의 글을 올린 여러 가지 이유들을 이제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게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네요. ^^;

3.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부적절한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논쟁적인 논평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관망님을 설득하려는 생각은 없고 (게시판에서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다만 게시판에 자기 생각을 올린 분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가를 물어본다, (충분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것과 동시에 그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은 "이런 것은 약간의 오해나 오류가 아닐까요?" 정도의 코멘트(이것도 충분히 정당하겠죠)를 한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게시판을 보는 소수의 독자들이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관망님께" 할 말은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성실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4. 마지막으로, 관망님께 말씀드리자면, 전 제가 '형식논리'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번 문제에서는 별로 수긍할 수 없네요. ^^;; 왜냐면, 관망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내가 느끼는 것'이라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떠한 가'의 실질적이고 사회적인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트릭스와 호접몽을 넘나드는 '실재론' 논쟁을 펼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제 직관이 관망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저는 오히려 관망님이 '추상적 사고'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와 논리를 나름대로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관망님의 입장을 공박하려는 건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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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망님께 할 말은 끝났지만, 관망님의 얘기 속에서 언급된 몇 가지 논점들에 대해서는 제 견해를 다소 부연해도 상관없겠지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충분히 제 견해를 소개하고 다른 분들의 견해를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 먼저, 약간의 주관적인 견해 하나.
제 주변의 몇몇 동양학도들(혹은 동양학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단순한 직관과 상대적인 무관심/무지를 보이는 것을 보며 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적이 있습니다. 뭐랄까, 철학자들이 '모든 걸 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떤 종류의 관심과 그 관심사를 둘러싼 담론은 '결여'된 부분을 어쩔 수 없이 갖기 마련이라는 기본적인 사실, 그리고 '수양'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학 담론이 대체로 갖는 사유의 경향성이 우리가 흔히 '사회적'이라고 하는 문제를 사고하기에는 부적절한 문제 틀을 갖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동양학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종류의 '경향성'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옹호와 비판의 문제를 떠나서, 객관적인 시각에서도 충분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이 있는 거죠.
예를 들면, 매개 없이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사이를 넘나드는 '비약'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와 도가와 화이트헤드를 넘나드는 독서를 하는 교양인들에게서 비교적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사고 유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주론과 운명론, 수양론 등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제도와 사회적인 것, 집단적 행위 등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거나 결여되거나 부족한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부적절한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과 우주의 기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실제로 의학과 의료 제도, 혹은 형벌 제도와 공장 시스템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 가 등에 대한 성찰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을 소우주로 보고 그 기운을 원활하게 해서 건강해지고 자연/우주와의 기운 소통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담론이 왜 몸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무지하거나 시선을 결여해야 하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건 담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제 생각이지만, 그 담론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하려기보다는 즉자적인 ''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때문일 겁니다. 충분히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고 수양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는 누군가가 그러한 행복의 조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문제는 소승과 대승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2. 소승과 대승,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직관
제가 관망님이 보여준 직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직관을 갖고 있는 건, 개인의 존재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도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에서 받은 지적 세례의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를 중심에 두는 종류의 사유 유형에 대해 경계하는 철학적 직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것을 충분히 파고들어 갈 때, 발견되는 건 ''라는 의식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들이다, 라는 식의 직관을 저는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의 전언을 래디컬 하게 해석하거나 정신분석학의 전언을 래디컬 하게 해석할 경우, 충분히 (혹은 상당히) 정당화되거나 지지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소승의 길을 가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하거나 '너만 생각하지 말라'라는 식의 유치한(?) 윤리적 담론을 펼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제 철학적 직관을 해명할 뿐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논리들은 이렇습니다. 근대 철학은 ''라는 주체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칸트와 더불어 ''의 존재 속에서 ''의 것이지만 온전히 ''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들, 다시 말해 나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면서 그 경험 이전에 앞서있는 형식, 즉 초월적 조건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독일 관념론의 급진적인 해석은 (혹은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의 해석은) '초월적 조건'이 사회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계를 의식 속에 가두려고 했지만, 의식 속에서 발견된 것은 바로 '세계'(혹은 사회)였다는, 간략한 경구로 정리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모든 가치 평가의 문제를 ''라는 개별적 주체/의식에 따른 상대적인 것으로 보려는 식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고 보는 근거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즉자적인 사고 유형이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에서 지지되기 어렵다는 거죠. 저는 그 생각들(과 그 기원, 양태들)에 대해 '반박'하지 않고, 다만 '분석'하고 싶을 뿐입니다.
(참고삼아, 부르디외 등이 쓰고 편집한 "세계의 비참"은 어떻게 주관적인 견해들, 입장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직관'을 즉자적으로 진술하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우리는 '주관적인 것''객관적인 것', "내가 느끼는 것""사회의 객관적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 덧붙여, 상대주의의 논리
보수와 진보는 "고정된 실체" 개념이 아니라, 상관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한 짝이다" "그러므로 같이 가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이런 유형의 보수가 계속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이 이념의 보수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왕당파(보수였겠죠)와 공화파(진보였겠죠)가 대립했을 때, 나름대로 급격한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세력들이 "견제와 균형"의 논리, "보수와 진보의 한 쌍 논리"를 펴며 자신들의 주장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왕당파라는 보수 세력이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겠지요.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중심선은 언제든 이동이 가능한 것이고, 실제로 이동해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부연할 필요도 없다고 보지만, 저는 보수 세력을 악으로 보는 입장은 충분히 '나쁜'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특정한 종류의 보수적 이념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그 구체적 사안에 대한 논의에 따라 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형식 논리상의 사유, 라고 제가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말장난'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보수와 진보는 서로 균형과 견제를 이루는 게 바람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늘 항상 '견해가 대립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여기서 나누어지는 이야기들은, 혹은 '철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사태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태에 대한 관점 혹은 이론에 대한 메타 비평과 메타 이론으로 넘어가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테오리아가 테크네와 프락시스로부터 태어났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p.s.
물론 이 논의 자체가 (모든 논의가 그렇듯이?) 꽤 정치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제 정치적 견해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관철하려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게시판을 우연찮게 들렀다가 왠지 "이거, 노무현주의자가 판치는 곳이잖아?"라는 식의 인상을 받고 불쾌해할 수 있는 분들을 충분히 존중하거든요……. ^^;; 게다가, 그 장본인이 게시판 관리자이기까지 하면 더더욱 나쁜 인상이 굳어지기 쉽지요……. ^^;;
전에 제가 한 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누구나 '개인'으로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의 논쟁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왜 다른 가'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상대를 꺾기' 위해서나 '설득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닐 것 같거든요. '개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가 말하는 가'의 문제보다는 '무엇을 말하는 가'가 더 중시되어야 합니다.

2002-12-29

Re: 감사합니다.

관망 (philebus 답변4)

제 말을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질문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우선 상대방이 내 의도를 잘 이해했다는 증거가 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도 되므로 제게 도움이 되죠.
골치만 아픈 책 10권 읽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게시판에서 그리 많은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철학에 있어 질문과 답변이 가장 훌륭한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에는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사실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질문에 척척 대답을 할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다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암중모색님과의 대화도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식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뜻이 없는 것 같아 아쉬운 감이 있네요.
감사했고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그럼 이만.

200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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