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philosophy.co.kr 에서의 문답
고쓰리
자아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 바쁜 때에 맞지 않게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슬픈 고쓰리입니다.
자아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결코 내향적인 성격도 아니며 외향적인 성격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남이 만들어 놓은 성격 유형에 포함되고 싶지 않고요.
그래서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나는 부모님을 닮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리석게도 나는 부모님에게서 같은 점을 일부러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보편적인 부분에서조차 나는 엄마를 닮았으니, 나는 아빠를 닮았으니 라고 단정 지어버리고,, 그리고 엄마를 닮기를 더 소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커가면서 나는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았지만 다르다는 것을.
같아져 버린 부분이란 내 본래의 자아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스스로 선택해 버려 같아진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생각했었지만 부모님과 같은 성격일거라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심리테스트-아니 성격과 진로를 택하기 위해 하는 적성검사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유형이 별로 되지 않더군요.
아이들을 모두 이렇다 저렇다 같은 식으로 만드는 것 같아 불쾌감도 들고 거부감이 들었었나 봅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유형에 속하기엔 제가 달랐거든요.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도 많았어요.
사람들은 제가 그 응답지에 솔직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르다는 것이 이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란 걸 좀 더 늦게 깨달았지만요.
세 번째는 책이었습니다.
어쩌면 롤을 찾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성장 소설, 자아를 찾는다는 소설들만 찾아서 읽어댔습니다.
고3인데도 말이죠.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나와 똑같은 경우, 똑같은 사상을 찾아보려던 생각 자체가 너무도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데미안의 경우 싱클레어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게서 카인의 표적을 찾으려던 어리석은 행동.
나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자아라는 것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었어요.
내 성격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만 큼이나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파괴의 욕구 따위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사회의 이치에 대해서도 조금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 그다지 이해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아니 제 좁은 사고가 부끄럽고 제 무식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모든 지식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았어요.
난 보수적인 인간인지 진보적 인간인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
도무지 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순되는 내 행동들이 두려워서 때론 울어본 적도 있고요.
세상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게 어떠냐고 여기며 무시하고 살아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지내고 싶지만은 않아서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 걸까요.
저에 이어 자신의 모순에 괴로워하고 우울해하는 제 동생에겐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요.
저는 제 동생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제 동생의 성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지요.
다른 현학적인 태도를 지닌 이들을 비판하면서
같잖은 제 현학적인 태도- 제 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오만과 편견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겸손해지자고 다짐하고 있지만 저는 너무나도 교만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도 교만한데 제가 동생에게 무슨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나오는 행동들도 모두 다 위선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실제로 저는 거짓말도 잘 안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고 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사람인데 말이죠.
제 동생에게 저는 지금 너의 그 고민들은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렇지만 궁극적인 대답은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교만은 어디부터 시작된 것인지,
제가 스스로 어떤 사람이란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실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단순히 변증법적 태도로 현실과 자아의 이상을 타협해서 적당히 중용을 지키면서 살라라는 말은 제겐 너무 멀어요.
초자아, 그리고 자아는 제게는 아직은 낯설기만 해서 저는 앞으로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고요.
여긴 철학 광장이니 답변 부탁드릴 게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올 테니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꼭 답변 부탁드리고요. 충고도 좋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philebus(후원자) 답변
Re: 자아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존심도 강하고 상당히 예민한 학생인 것 같네요.
먼저 한 가지 얘기해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마음속의 감정들과 행위 사이의 괴리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거나 상심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속에서는 상대를 얕보고,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욕을 하고도 싶지만 겉으로는 짐짓 무심하게 대하는 데 대해서 자신을 위선자라고 비하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쓰리 학생은 거짓말도 잘 안 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고 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사람인데, 속은 온통 교만과 현학과 서로 모순되는 감정에 싸여 있어 헷갈린다는 말씀이죠?
사실은 대부분의 인간이 본래 그런 모순된 상태에 있는 걸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학생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태양을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하면 흑점도 있고 내부에 굉장한 소용돌이가 있으며, 홍염이라는 불꽃도 주위에 상당히 멀리까지 뻗쳐있다고 합니다.
즉, 가까이서 관찰하면 완전한 원도 아니고 기하학적으로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는 모습이지만 지구에서 보면 언제나 둥글게 항상 같은 모습으로 만물을 비추고, 영원할 것처럼 스스로 돌아가며, 옛날 같으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근원으로 신으로서 존경받기도 하는 거죠.
태양이 그것 다운 점은 항상 불변하는 모습으로 비춘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홍염이 어떤 모양으로 자주 변하든, 흑점이 어떤 방향에서 나타나든, 내부의 소용돌이가 어떻게 운동하든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며 아주 사소한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전체를 통제하는 힘,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주위의 만물을 이롭게 하는 힘이 주목할 만하고, 따를 만하고, 참된 것이라 불러도 좋을 만하다는 얘기죠.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리라 생각하지만,
학생이 거짓도 없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고 고지식하게 행동하고 있다면 그 마음이 바로 태양을 태양답게 하는 힘과 같은 것이며, 반면 교만과 현학 같은 감정은 내부에서 수시로 변하는 홍염이나 소용돌이와 같은 종류라는 얘기죠.
그러한 감정에 특별히 주목하여 절망할 이유도 없고, 스스로 위선이라 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태양에 있어 홍염이나 소용돌이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와 같이 모순되고 비이성적인 감정도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묻는다면 일단은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다시 이렇게 되물을 수 있죠.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가?
당신은 지금 어쨌든 잘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진지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대하면 그 반대되는 감정은 자취를 감추고, 그것이 반복되면 인격의 틀로 정립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공부를 통해 배우고 그대로 실행하려 힘쓰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하려는 마음까지 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되네요.
그리하여 후에 자신의 마음이 원만하게 닦이면 그때는 홍염이나 소용돌이는 더 이상 낯선 무질서가 아닌, 전체 안에서 조화된 운동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다음은 어느 청소년 철학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인데 참고하기 바랍니다.
요리학원에 다니는 형이 쓴 글을 동생이 올린 것인데, 본인의 순수한 마음가짐과 자신이 다루는 사물을 스스로를 위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세가 돋보이는군요..
(허락 없이 퍼 와서 글 올린 분께 미안합니다.)
요리를 하다가 손을 베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살점이 너덜거리는 것도, 피가 샘솟는 것에 별로 놀라질 않았다. 조금씩 아려오는 통증을 느끼면서 피를 멈추려고 휴지로 감싸 안았다.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피가 나고 살점이 떨어져 짜증이 날려고 하는 마음을 억눌렸다.
가슴 한구석이 아련히 쓰라려 오는 걸 느끼면서,
마치 칼이 내 살점을 베어버린 게 아니라, 내 마음 한 구석을 베어버린 것 같은 통증을 더 깊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요즘 들어 마음이 한없이 어지럽고 답답해 오는 걸 느낀다.
이치로는 머리에 있으면서, 행동이 잘 되지 않는 내 모습도 이젠 더 이상 불필요한 허상처럼 느끼기도 하니깐.
마음도 그렇게 되진 않는 게 나이고, 사람이고, 우리네 사는 인생이니깐.
요리를 마치고 나서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항상 그 누군가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애초부터 그 답은 내 속에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답을 끌어내기가 힘에 겹고, 머리가 아픈 것뿐이다.
요리는 우리 사는 인생이랑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리는 그 순서가 있다. 그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요리는 형편없이 모양을 갖추어 있고 맛 또한 그 향기 또한 엉망이 되어 버린다.
우리 사는데도 그 순서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 순서대로 길을 걷지 않으면 금세 어른다운 아이가 된다거나, 시답지 않게 어른들이 어린애 시늉을 내는 꼴답지 않는 상황을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 순서. 일치되지 않는 인생의 여로.
누구의 순서가 옳고 누구의 삶이 값지다고 평할 순 없겠지.
다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길.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요리는 그 순간을 소중히 한다. 요리의 재료를 준비한다는 것. 우리가 하나의 완전한 거목이 되고 삶의 버팀목이 되기 위한 각각의 교육과 인성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 순간을 소중히 하며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선 안 되고, 딴짓을 하거나 한 눈 팔아서도 안 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요리는 개개인의 손맛이다.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냐에 따라 향도, 크기도, 맛도 달라지는 게 요리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요리는 개인마다의 스타일이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성하기 전에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스타일을 느끼고 몸으로 음식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요리는 인생이다.
재료가 있고, 하나하나 그 완성품을 위해서 자르고 볶고, 굽고, 찌고, 끓이는, 우리네의 인생이다. 그 수많은 재료들을 하나의 맛있고 아름다운 음식을 위해서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치고 우여곡절 끝에 눈과 코와 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인생처럼 우린 나아가야 하고, 용감히 손에 칼을 들어야 하는 게다.
생각을 이렇게 늘여 놓는다 하여도, 가슴속에 있는 아련함은 지워지질 않는다. 누구 때문일까. 무엇 때문일까.
정성껏, 성심성의껏. 가슴을 열고, 웃음을 짓고, 환한 마음 누군가에게 전해 줄 수만 있다면. 나 하나쯤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은 없다.
다만 나도 그런 관심, 그런 사랑받지 못한다는 그런 편협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서 내가 나에게 그렇게 아픔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 정말 가슴이 아픈데…….
따뜻한 마음 한구석에서 슬피 울고 있는 것 같다.
서럽게 무언가가 모자라서 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해서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가 보다.
미안하다. 너무나 미안하고 나도 울고 싶다.
요리. 오늘은 그것에서 내 삶을 배우고, 인생을 맛본 날이다.
아픈 가슴 위로해 주고, 내 갈 길을 향해 꿋꿋이 웃으며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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