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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문자와 타무스의 지혜

그런데 대화가 문자에 이르자, 테우트가 이렇게 말했다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러자 타무스가 이렇게 대꾸했네. "기술이 뛰어난 테우트여, 기술에 속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들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손해와 이익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오. 이제, 그대는 문자의 아버지로서 그것들에 대해 선의를 품고 있기에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을 말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들에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니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의 묘약이 아니라 상기의 묘약이지요. 그대가 그대의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지혜의 겉모양이지 진상이 아니라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 덕분에 가르침을 받는 일 없이 많은 것을 듣게 되고, 자신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대부분 그들은 무지하고 상대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그들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인 까닭이오." (플라톤 파이드로스)

 

자신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대부분 그들은 무지하고 상대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그들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인 까닭이오.” 이 부분과 똑같지는 않지만 유비적으로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구절로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언젠가 그 작업이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무의식을 규명해 낸 다음에, 이를 환자에게 알려만 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것이 근시안적인 오류임을 알아챘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지식을 알려준다면, 그 지식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대신해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프로이트 정신분석강의)

 

위에서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들의 무지는 환자의 무의식과 비교되고,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사의 지식은 문자로 쓰인 이론이나 사변, 연설 등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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