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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버려진 로또복권

엊그제 점심을 먹고 뒷산에 오르는데 초입의 벤치에 로또복권이 비닐봉지에 넣어져 얌전히 놓여 있다. 다섯 게임씩 4장이었는데, 들여다보니 바로 지난주에 추첨한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 당첨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버리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어 혹시 확인해 보지 않은 복권을 실수로 놓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공상의 시작이라고 얼핏 생각했지만, 한가한 마음은 헛된 공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서 번호를 맞춰보자. 여기에 만약 1등이 있다면 어쩔까? 당첨금은 그간의 예로 보아 대략 12억 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닌 습득물로써 내가 그 당첨금을 수령하는 것은 범죄가 될 수 있다. 습득물은 경찰서에 맡기는 것이 좋다. 경찰서에 맡긴 후 주인이 나타나면 내게 고맙다는 표시로 얼마쯤 떼어줄지도 모른다. 얼마를 줄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공돈이니 감지덕지하며 쓸 수 있다. 한 푼도 안 주면 어떻게 할까. 법적으로 습득물을 신고한 자에게 몇 %인가 주도록 되어 있으니 달라고 좋게 말해볼까.

주인이 영영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1년인가 지나면 그 물건은 신고자인 나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로또 복권의 당첨금 지급기한은 추첨 후 1년뿐이다. 지난주가 그 복권 추첨일이었으니 지금부터 경찰서에서 1년을 보내고 나면 설사 내 손에 다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지급기한을 일주일 정도 넘어가게 되어 당첨금 지급을 거절당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지급 기한 두 달 전쯤 경찰서장에게 민원편지를 넣어보자. 이러저러해서 복권을 맡겼는데 지급기한을 넘기면 휴지가 되니 일단 경찰서장 명의로 당첨금을 지급받아 보관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면 좋겠지만 안 된다고 하면?

그럼 끝이다. 깨끗이 털고 잊을 수 있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와 번호를 확인해 보니 전부 꽝이다. 여기서 백일몽은 끝난 것이다.

내가 만약 평소의 마음가짐에 대해 기준을 높게 잡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런 백일몽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괴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란 물건이 얼마나 제멋대로이며 다루기 어려운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간의 삶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 그런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聖人들의 말씀을 떠올리기보다는 일단 프로이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 백일몽은 자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일종의 증상을 통해 억압된 콤플렉스를 발현시켜 마음을 이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래에도 맘 놓고 공상을 즐기라는 것은 아니다.

한편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순간순간 알아차리며 마음을 단속하는 것도 그 자체로 결코 스트레스받는 일은 아니며 오히려 독특한 즐거움을 동반하지만,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 지속적인 실행이 여의치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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