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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불교경전연구회에서 2

**

제 목 : philebus님에게..

오랜만에 병을 앓았더니 몸이 가벼워졌군요.

philebus님의 글을 보면서 상당히 사색적이고 현학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열정이 보이는 듯합니다.

우선, 언어는 실체를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는 동감입니다.
불교의 공부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 데요.
예를 들면 언어가 무상한데 부적절한데 그러면 진실은 뭔가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쪽으로요.
물론 이런 의문이 저절로 생기리라고 보지만요.

조금만 관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언어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실제로 수행을 하게 되겠지요.

님의 말에 불교적인 용어를 붙일 수 있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본질이겠지요.

많은 성취를 기대합니다.

philebus


제 목 : **님의 답변에 대해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병이 다 나으신 것 같은데 다행이군요.

저는 탐구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건 능력이 닿는 한은 구체적이고 자세히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이**님께서 해주신 답변에 대해 한 가지만 확인해보고 싶은 점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말씀 중에 언어가 무상하고 부적절하므로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 실제로 수행을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만,

그 말은 수행자가 수행 끝에 뭔가를 터득하여 알게 되지만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수행자도 모르고, 일반 재가자도 모르고,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잖으면 이도 저도 아니고 어떤 다른 의미인지요?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이만 안녕히…….

**


제 목 : 답변..

저도 잘 모르지만 답을 해야겠군요.
죄송하고요.

글쎄 수행이라는 것 도라는 것 이런 것들은 앎을 넘어서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장자가 말했듯이 인간의 작은 머리로 우주를 알려고 하는 뭐 그런 표현입니다.

아무튼 선인들은 실상과 언어의 부조화 부적절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왜 언어를 사용하는 가를 발견하는 것 같고요.

글쎄 불가에서는 앎이라는 걸 아마 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식 이전에 상태가 존재하는데요..

무명과 행이지요

점점 어려워집니다.

공과 연기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의문이 좀 풀리리라 생각이 됩니다.

언어의 무상함을 발견하는 것은 전도몽상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뭔가 나올 것 같네요.


philebus


제 목 : **님께 다시…….

**,

**님의 답변을 읽고 안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대충이나마 드러내고, 또한 이**님과 저의 사고하는 과정의 차이를 한 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앞서 선*님의 말씀에 답하는 중에도 제가 글을 읽을 때는 상대방의 문장 하나하나를 쫓아가며 그 뜻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써 이해하려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에 익숙지 못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가 아래에서 이**님께 드린 질문을 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다면, 그는 아마도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제게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대가 내게 한 질문 가운데 그대는 안다는 말을 중요한 요소로써 사용하고 있지만 그 안다는 말의 의미는 다음 중 어느 것에 해당합니까?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그대의 질문에 답할 수가 있기 때문에 되묻는 것입니다.

첫째 수학자나 기하학자가 공리를 사용하여 연역적으로 이끌어낸 결론을 옳다고 믿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인식을 안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그러한 결론은 자체적으로는 인간행동의 규범이나 가치문제를 포함하지 않지만 공리로부터 시작하여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논리는 완벽하다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 그가 올바른 사람이든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든 그는 수학이나 기하학에 관한 한 아는 사람입니다.

둘째 이것은 아마도 문학작품을 읽을 때, 그중에서도 특히 시를 읽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됩니다만, 어떤 시를 읽으면 그 내용이 마음에 와 부딪혀 진리처럼 생각되고 갑자기 머릿속이 확 트인 듯이 느껴지지만 몇 초 후면 마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흐트러지면 곧 보이지 않게 되듯이 머릿속이 텅 비게 되어 내가 읽은 것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런 시를 읽을 때 받게 되는 그런 느낌을 안다고 하는 건가요?

셋째 이번에는 시가 아니라 철학이나 사상, 종교 관련의 여러 서적을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말을 듣고, 이 내용이야말로 올바른 말이며 또한 내가 구하는 바라고 확신하며, 그 내용에 집착하여 읽고, 읽을 때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에 머릿속에서 그 내용 전체를 다시 정렬시켜 차례대로 상기하려 하거나, 실제로 그 내용을 내 주변의 삶의 현장에 있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사물에 적용하려 들면 애를 먹을 뿐 아니라, 그러한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의미 있는 질문을 하거나 반박을 해올 때 자신이 읽은 내용을 이치에 따라 변호하지도 못하는 경우(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무조건 자신의 주장을 옳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에 그런 책을 읽으며 갖게 되는 그런 느낌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넷째는 위에서처럼 이치와 이론이 따르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으로써 얻어진 것을 잘 활용할 줄 안다면 그것이 그대가 말하는 아는 것이 될까요.
예를 들면, 맛을 중요시하는 요리법인데, 누군가의, 또는 다수 대중의 입맛에 맞춘다는 것은 철저히 경험에 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조미료를 얼마만큼 넣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또는 음식재료를 어떤 식으로 조리했을 때나 배열했을 때 좋아하더라 등등의 경험을 잘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지요.
다른 예를 들면 TV 광고를 들 수 있습니다.
거기는 짧은 시간 동안에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므로 이론보다는 느낌에 호소하게 됩니다.
때문에 선전하려고 하는 상품과는 관계없는 화면이 자주 나오지요.
미인이 나와 웃는다든가,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무게를 잡는다든가, 뭔가 희망찬 앞날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보여준다든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 어떤 것을 보여주거나 말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또는 식상해하는지를 잘 파악하고서 그때그때 그런 경험을 모종의 목적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위 세 번째에서 말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사용하여 스스로 주변의 사물을 세밀히 고찰하므로 써 얻어지는 지식을 말할 수 있을 텐데, 만일 그 과정이 치밀하고 그 결론이 올바르다면 그러한 지식의 소유자야말로 올바르고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기하학자나 수학자는 악한 성품을 지닐 수가 있지만 지금의 이러한 지식의 소유자에게서는 그가 지닌 지식이 완전함에 가까울수록 그런 악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지식은 누구로부터 질문을 받거나 반박을 당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이치에 합당한 답변을 할 수 있고 스스로를 옹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는 그러한 참된 지식을 나침반으로 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언제나 올바름을 선택하고, 끝에 가서는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한, 훌륭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러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

제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위와 같이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대여, 위의 경우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든 예를 저는 아는 것이라고 인정하고자 합니다.
그 외에 무엇을 진정한 의미에서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아는 것에 관해 설명하지 못하거나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경우 그것을 그가 알고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안다기보다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믿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

그럼 위와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이**님이 말씀하신 언어를 넘어선 수행을 한다거나 수행이나 도는 앎을 넘어서 있다거나 하는 말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장자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지혜로운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지요.
인간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은 아니지요.
모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있겠지만요.

아무튼 이**님의 답변으로 볼 때 수행을 통하여 터득한 것은 말로 할 수 없다고 이해하면 되겠나 모르겠네요.

아니면 사람에 따라 누구는 그것을 말로 표시할 수 있지만(부처님처럼) 누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까요.

제가 이렇게 길게 예를 든 것은 저와 이**님의 생각과 그 생각의 표현 방법이 상당히 틀려서 제가 따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하지만 아마도 그렇고 그런 정도의 뜻이려니 하는 느낌은 제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정도의 이해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금세 말로 하되 그것이 모두 아는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지요.
책을 읽거나 남에게서 들은 것은 외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생각은 무수한 오류에 빠질 수 있고 참된 것은 많은 수고를 거친 뒤에야 겨우 조금씩 얻어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이**님의 사고방식이 틀린다고 하는 것을 별다르게 듣지는 마세요.
제 생각이 우월하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님의 생각이 훌륭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유익한 논의를 위하여 둘의 차이를 제 나름대로 보다 분명히 짚어보려고 한 것뿐이니까요.

오늘은 이만 안녕히…….

**
제 목 : 죄송하군요.

제가 philebus님의 글을 잘 못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님의 글은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군요.
그러나 대충 생각해 보면 저도 그러한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좀 아쉬운 점은 아직 인간의 의식의 근본 즉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깊이 접근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지적인 사람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님처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알고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며 등등
우리가 아는 것은 진실인가

이런 의문들이 확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불가에서는 인간의 앎이란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지푸라기를 보고 뱀이라고 생각하는 격이죠.

계속 변화해 가는 현상을 고정된 단어나 언어에 한정시키죠..

이걸 제행무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무상을 항상한 것으로 생각하는 전도된 생각을 갖고 살지요.

이런 전도된 생각을 무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라고 하지요.

님이 마음이라고 했는데 마음에는 어떤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 기준들은 시시각각 환경에 따라 변하지요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선이고 저 상황에서는 악이지요.

종교는 일반적인 선과 악을 넘어서 절대의 선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냥 세상에서 일반적인 논리로 이야기하면 안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님께서는 아함경정도를 정독하시면 어떨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제행무상 등등의 이야기를 이해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럼, 도움이 안 되면 잊어버리시길.. 나무 미륵존불

philebus


제 목 : 고맙습니다, **

답변에 다시 감사드리면서…….

불가에서 생각하는 앎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제행무상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군요.

말씀하신 내용들은 그 핵심을 따진다면 불가에서만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아닌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용어만 다를 뿐이지 철학을 비롯하여 정신세계에 있어 가치 있는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런 내용들을 거의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철학의 발상지인 고대 희랍에서도 이미 유전설을 비롯하여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감수되는 지각의 기만성을 논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변하기 쉬운 성질도 충분히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마음 중에는 아주 적은 부분이지만 불변하는 것들과 짝할 수 있는, 보다 고귀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논하고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러한 참된 부분이 비록 무명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말이지요.
또한 그러한 주제들에 관한 논의의 엄밀함으로 말하자면 결코 다른 종류의 종교나 사상에 못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언어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포기되거나 뛰어넘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 수행하는 사람이 문득문득 일어나는 쾌락에 대한 욕구를 그저 억누르는데 평생 적지 않은 힘을 들인다고 하면, 반면에 다른 누군가는 책을 통하여서나 남에게서 들어서나 욕망과 쾌락이 어떻게 일어나며, 고통과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육신과는 별개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쾌락에 대해 만족해하는 부분으로 우리의 혼을 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그것은 거짓이며 기만이라는 말을 듣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관찰하므로 서 훨씬 깊이 이해한다고 하면 그는 보다 자연스럽게 쓸모없는 쾌락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과정이 말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말은 인간의 마음을 유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올바로 사용되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크나큰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兩者 간의 말에 대한 타당성이나 유효함을 따지는 데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순의 도출이든 이치와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말을 통한 단계적 추론과 이치에 따라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능력을 연마하여 더욱 빛을 내도록 힘쓸지언정 그러한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부처님도 제자들의 말에 대해 어떤 때는 "그러하니라"하고 긍정하고, 어떤 때는 "만일 그렇다면……. 이러저러한 일이 있지 않겠느냐?"하고 반문 함으로써 제자의 말에 대해 모순을 지적하여 그가 헛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면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고요, 그것도 역시 말로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의 질문에 대해 이**님의 분명한 답변이 없고, 말미에 도움이 안 되면 잊어버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더 이상 제게 말씀을 해주실 의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요,
불가에서의 앎에 대한 태도 등을 간단히 소개해주신 데 대해, 또한 이전에 수행은 앎을 넘어서 있다는 말씀에 대해, 최종적으로 저의 의견을 위와 같이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끝맺을까 합니다.

말씀해 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 혹시 어느 분이든지 제게 말씀을 해주실 분이나 질문 등이 있으면
언제든지 메일을 주십시오. 환영하겠습니다.

philebus 드림

**
제 목 : 참 어려운 문제군요

인식의 체계가 다르니 때문에 서로 이해의 접근이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부연을 해보면 언어는 도구가 되어야지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인간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알고 본질로 나아간다면 언어는 도움이 되겠지요.

언어를 넘어선다는 표현은 진실은 언어의 구속을 넘어서 항상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을 고정된 언어로 표현하는 한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는 불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일 뿐이죠.

석가모니라 할지라도 진리를 대변했을 뿐이니까요.
단지 많은 성인들 중에서 가장 인식의 깊이를 더한 분이기 때문에 존경과 추종을 할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럼, 차 꽃피는 마을에서..


찬제


제 목 : [의견] philebus님의 학문의 깊이에 감탄 드리

놀랍습니다.
미린다팡하의 나가세나 존자와 왕의 간단한 문답
그 하나의 문답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시다니…….

유식학에서 선문답까지…….
그리고 이산선사 발원문까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philebus님께서 만족해하시기 에는
뭔가 조금 부족했었나 봅니다.

님께서는 그 문답 속에서 비유로 나온 등장인물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신 것 같았는데
(이거 맞게 이해했나 몰라.. ... )
오히려 설상가상이 되어 짐만 한 짐을 더 얹어 드린 것 같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미 님께서는 정답을 알고 계신 듯하는 그런 느낌이 오는군요..

단지 그런 정답을 말하는 분이 계신지 알고 싶어 하시는
그런 질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글 중에서 보면 이미 그 정도의 의식 수준을
넘어선 오히려 미란다팡하 정도는 강의해주실 만한 그런 분이라는 걸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부탁드리건 데..
이곳은 초심이 배우는 방이오니 더욱 많은 질문과 해설로써
많은 초심 불자들이 쉽고 편안하게 부처님께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부분도 많이 글 올려주셨으면 하고요
님의 글을 읽고 여러 법우님들의 의견이 많이 올라온다면
자연스럽게 초심불자들이 불교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님의 관심과 열정에 감사드리며
저희 경전방에 더욱 많은 사랑과 애정을 보내주시길 빕니다.
님께 부처님의 자은이 늘 충만하소서...

남해 먼바다 끝에서 벽*

philebus


제 목 : 과찬을 해주셔서…….

안녕하세요?

찬제 님께서 저에 대해 과찬을 해주셨습니다.
호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그 내용은 반환해 드려야겠네요..
저는 생각하시는 만큼 아는 게 없어요.
정답을 이미 알고 질문을 드렸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제가 지난 답변 중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되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질문드린 것뿐이지요.

위 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식의 체계가 달라 서로 이해를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도 듭니다.

저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몇 권의 경전을 읽은데 불과한 상식 수준입니다.

단지 부처님의 말씀이 제가 이미 읽은 다른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능엄경에서 그런 부분을 많이 볼 수 있었지요.
다른 대승경전도 읽어보면 역시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불교경전 연구회에서 다른 얘기를 하기는 좀 어색하지만
**님이 진리는 불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이해를 해주셨으니,

이번에 한해서 엄밀한 논박보다는 그저 서로의 이해를 돕는다는 차원의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제 생각의 대부분은 서양철학의 원조 격인 플라톤에서 연장되어 나온 것이고요, 그 이후의 철학자들과는 무관합니다.
플라톤의 저작 대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저작의 내용 중 실제 생존 시 소크라테스의 말이 어디까지이고
플라톤 자신의 말이 어디부터 인가하는 문제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양자의 구분을 굳이 하지 않아도 좋으리만큼 그 전체
내용은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시다시피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지요.
성인들이 출현할 당시에는 모두 성인들이 이루어 낸 사상과 유사한, 자신들의 생각을 제각기 진리라고 주장하는 많은 분파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서 참된 것이 등장했다고 생각됩니다만 고대 희랍에서는 그러한 유사한 무리들로써 소피스트들이 있었죠.

인도에서는 어떤 성향의 분파들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희랍의 소피스트들은 당시 직접민주주의에 필요한 변론술이나 대중연설을 기반으로 매우 입심이 센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교묘하게 단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뿐인 것을 실제 그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실제로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주장할 때 그것을 논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고 또 적지 않은 열성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다 방면의 주제에 대하여 훌륭히 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플라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논쟁을 벌이고, 결국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최종 판결을 내리며, 상대편이 스스로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기준이 되는 것은 이치와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상대한 사람 모두가 그렇게 정화되었던 것은 아니고요,

그중에서도 솔직하고 순수하며 지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 있었지만, 재치는 있으나 솔직하지 못하여 말을 이리저리 끌고만 다니거나 자신의 의견이 논파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꼭 그에게 동조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 섰을 때 원고 측의 주장 중에는 그가 하늘과 땅 밑의 일을 탐구하며, 약한 주장을 강하게 만드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요,
그것은 평소 그의 말(주로 질문을 통한)이 이치에는 합당하나 사람들이 흔히 의심 없이 옳다고 믿고 있는 대중적인 의견과는 상치될 때, 그가 그런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는데서 사람들의 오해를 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님은 언어의 구속을 넘어선다거나 언어의 한계를 알고 본질로 나간다거나 하는 표현을 하셨지만 그 얘기는 누가 말로써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참된 것을 있는 그대로 표시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하신 걸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도 말씀한 것일 테지요.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이것이다. 라는 투의 뭔가 특별한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에게 계속적으로 질문해 나갔을 뿐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요.
그는 말하자면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대가였지요.
하긴 단지 질문뿐 아니라 문답의 형식으로 된 논증도 있습니다.
상대편 주장의 모순을 밝히는 부정의 논증도 있고, 하나의 최종적인 명제를 생산해 내는 논증도 있지만 그 경우에는 수많은 사례와 예시, 그리고 쇠사슬처럼 단단히 엮어진 논리를 통하여 보편적인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뒤에 결정짓고 있지요.

불가에서 보면 그런 질문하는 방식을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사후에 성인으로 추앙받긴 하지만
그 질문과 논증의 엄밀함 덕분에 그 자신에 대해 신비적인 요소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의 사상도 그다지 대중적으로 확산되진 못했지요.
하지만 뒤에 신 플라톤주의자들이 신비주의 색채를 띠게 되고, 또 중세 신학이 플라톤적인 요소를 많이 물려받은 걸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의 사상에도 역시 후대에 이것저것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얘기가 되지만, 저작만큼은 플라톤의 그것과 후대사람들의 그것이 확실히 구분되므로 각자의 판단에 따라 그 내용을 취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하여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완고한 고집에서 해방되기를 바랐지만, 사실 그러한 단계적인 질문들은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가 없는 거지요.
흔한 말로 모르는 사람은 질문도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간혹 그런 점(, 자신은 이미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을 시인했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지식을 잉태하지 못하도록 신이 막아놓았다고 말한 바 있고, 또한 그 유명한 말도 했다고 하지요.
나에게 있어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고요..
하지만, 플라톤의 작품을 보면 존재와 인식에 대해, 언어에 대해, 그 외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당시로서는 들어갈 수 있는데 까지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님께서 앎 이전에 무명이 있고 행이 있고 ……. 식이 있고,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그 말도 일종의 지식이지요.
그러한 불교적 지식은 참되지만 나머지 지식은 허망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유독 강조한 말 중에 지식이 덕이니, 지식을 힘써 구하라고 한 것이 있는데, 실용적인 것이든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지식이라면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본겁니다.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지식을 구하겠지만 절대적 지식이 있다면 그것도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 절대적 지식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실로 지겨울 정도의 세밀한 문답을 통한 끝에 모른다고 결론짓곤 하죠.
말하자면, 무명이 있고 행이 있고……. 라는 연쇄 고리를 밑에서
부터 따져 올라가다가 제일 위에 이르러서는 모른다는 결론을
짓거나 논의를 중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무명이 제일 위에 있는 것이고 그에 관해서는 단지 명칭뿐 다른 어떤 설명도 없다면, 그에 대해 단지 이름을 붙인 것이나 그에 대해 모른다고 한 것이나 결과는 같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적 지식이 있는데 말로는 할 수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긴 탐구 끝에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할 경우

저로서는 후자가 올바른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말하자면 불가지론적 입장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알 수는 있어도 남에게 전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의 생각이었지요.
그것을 알지만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은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말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충분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마치 험난한 길을 갖가지 고난을 무릅쓰고 따라가듯 자세하고도 폭넓은 탐구가 있었다면,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들은 단지 책을 읽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미 그 자신의 지식으로 자리 잡고 있을 테고, 그는 질문을 받을 때 질문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에 맞는 적당한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 생각으로는 인간의 이성은 거기에 어떤 무리한 욕심이 섞이지 않는 한, 타당한 비유와 현실적인 사물들을 옳게 분석하여 그것들 간의 관계를 추론함으로써 참된 존재들 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도록 비례관계에 놓는 것으로도 대부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철학하는 즐거움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하는 즐거움과는 본질적으로 틀려서 거의 항상 충만해 있을 수 있지요.
마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잠깐의 쾌락 이후에는 독이 비어버려 다시 채워야 하지만
철학하는 즐거움은 깨지지 않은 독에 한번 물을 부으면 계속 차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또한 색깔로 치면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거무칙칙한 잡티가 많이 섞인 흰색으로 그 양은 많지만, 철학하는 즐거움은 비록 양은 적지만 잡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흰색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족한다고 해서 최고의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플라톤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말로 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도 않았고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논리의 가시밭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구해 나갈 용기를 지닌 사람이면 가능할 것이란 의미로 얘기했지요.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경외하는 또 한 사람의 노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하여 젊은 소크라테스에게 주는 충고로써 했던 말로 기억합니다만 …….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역시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 제 생각의 뿌리를
설명하느라고 했습니다만 쓸데없이 길어진 것 같네요.

불교 동네에서 철학얘기라니…….

양해하시고요,

찬제 님의 저에 대한 격려에는 감사합니다만 불교에 대해서 뭔가 자발적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니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질문을 드린다고 해도 저같이 까다로운 사람을 만족시키려면 쉽지 않을 테니 그것도 계속되면 누가 될 것 같습니다.

플라톤에 관해서는 이미 제가 운을 떼어 놓았으므로 뭔가 질문이 있다면 제가 이해하고 있는 한도 내에서 생각을 말씀드리고 안내도 해드리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이것으로 끝낼까 합니다..

이만 안녕히…….

* 하실 말씀이 있다면 가급적 메일을 주시길 바랍니다.


**


제 목 : 즐거움

철학하는 즐거움과 밥 먹고 똥 싸는 즐거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개 밑의 philebus님 글을 보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즐거움이고 철학하는 ,즉 논증 언어로 이치를 탐구하고 논증하는 작업은 물 부은 것 위에 또 물 붓기와 같아서 항상 더욱 충만해지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철학을 무지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개똥철학이지만)
그 즐거움에 몸서리치고 이치와 현상을 더 잘 이해하고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인식의 범위가 커졌으며 현상과 이치를 이해함으로 함께 조화되거나 통제 조절할 수 있게 되는 능력도 확장되는 것이니
아니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니 하나씩 하나씩 알고 넘어가는 철학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기기 어려웠다.(그것이 개똥철학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즐거움의 중독? 을 벗어났는지? 아니면 식상해진 건지 모르지만 그것에 별 흥미를 못 느끼게 된다.
오히려 여전히 반복되는 밥 먹고 똥 싸는 일에도 예전의 철학하는 즐거움과 비기기 어려울 정도로 쏠쏠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나를 볼 때 대견하기까지 하다.
알아서 충만해지고 즐거운 때도 있는 반면 모르므로 더욱 충만하고 즐거울 때도 있다.
언어나 비언어, 말과 침묵, 앎과 모름, 이들은 상대적이고 대립적이지만 그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성립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당신이 여러분들이 이 상대적인 둘 중에 하나로서 궁극의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유의해야 할 것이 딱 하나 있다
언어로서 말로써 앎으로서 논증으로서 진리를 찾으려 하는가?
여기에 비언어 침묵 모름 비논리를 무시하고는 그대가 찾는 진리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언어 속에 비언어가 있고 모름 속에 앎이 있고 말속에 침묵이 있음을 이해하거나 알지 못하면 한쪽으로의 추구나 탐구는 그 끝을 붙잡을 수 없으니 충만하다 한 듯 느끼지만 언제나 허기질 것이니 즉 충만 위에 충만을 더 채워야 하는 것이니 언제나 편히 쉬려나?
앎 속에 모름이 있고 침묵 속에 말이 있게 되면 크기와 질과 양에 구애받지 않게 되니 언제나 무엇을 하든 때마다 시마다 충만하게 되니 그것이 곧 부처가 말하는 중도라 온라인 편집으로 하다 보니 말도 안 되고 막 틀렸네요.
이해하시고 넘겨짚으시기를
바이

**
제 목 : 모른다와 너 자신을 알라

괜찮다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할까 합니다.

실제로 philebus님에게 굳이 이해를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열정과 구도를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곧 원만한 이해를 가지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의문이고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 진리를 찾는 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먼저 모른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문답법으로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죠.
이것은 불가의 의 방법과 같다고 봅니다.
아니다와 없다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느끼고 전도된 실상을 느끼는 거죠
이런 전도된 관념을 깨기 위해서 붓다는 무진 애를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불경이 이것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진정 알 수 없고 불가득(不可得)즉 공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의 의문에 들게 됩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실체는 무엇인가, 어떻게 전도되었는가 등등이죠.
이렇게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당연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관찰이 이루어졌습니다.
불가에서는 12연기라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단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최초의 무명이라는 힘에 의해서 행, , 명색…….

기독교에서는 창세기라는 걸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태초에 혼돈, , 어둠…….

도가에서는 무극, 태극, 음양 등등…….

그런데 붓다는 이런 걸 설하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런 걸 말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이건 내가 아니라도 아라한이나 연각들이 말해왔고 말할 수 있다고..

붇다가 오신 뜻을 새기는 것이 진정한 붓다의 위대함을 아는 것이리라 생각이 됩니다.

지리산의 나무꾼이..

philebus


제 목 : 정리해보며…….

안녕하세요.

어디서든지 벌려놓기만 하고 치우지 않는 것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만 못하므로 여기서도 역시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을 정리해 봄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미린다팡하 중에서 질문드린 것은 네 가지였는데 그중에서 첫째와 둘째는 셋째와 넷째 질문을 위한 정의에 불과한 것으로 보다 중요한 내용은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생각합니다.
**님께서 답변하신 바로는 새로운 용어를 나열하신 것이지만 어쨌든 첫째와 둘째 질문에는 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셋째와 넷째 질문의 답은 간단치 않으므로 약간만 언급한 후 뒤로 미루고 대신 유식학과 그의 입문서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몇 가지 이유로 사변은 참된 지식 획득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씀드렸고 여**님도 그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하셨습니다.

그 후 이**님께서 언어가 무상하고 부적절하므로 언어를 넘어서 실제로 수행을 한다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말은 수행자가 수행 끝에 뭔가를 터득하여 알게 되지만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수행자도 모르고, 일반 재가자도 모르고,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까. “

**님께서 하신 답변 중에서 위의 질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발췌해 보면,

"글쎄 수행이라는 것 도라는 것 이런 것들은 앎을 넘어서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장자가 말했듯이 인간의 작은 머리로 우주를 알려고 하는 뭐 그런 표현입니다. “

"종교는 일반적인 선과 악을 넘어서 절대의 선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냥 세상에서 일반적인 논리로 이야기하면 안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

"언어를 넘어선다는 표현은 진실은 언어의 구속을 넘어서 항상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을 고정된 언어로 표현하는 한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

대강 이 정도인데요,

첫째 답변을 보자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둘째 답변은 절대의 선을 찾는다고 했으니 알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아예 알 수 없는 것이면 찾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다고도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상 일반적인 논리로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논리로 하면 안 맞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답변 역시 말로 표시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저나 이**님이 하신 나머지 말들은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이므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닌 걸로 여겨집니다.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으므로 현재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한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

"그런데 붓다는 이런 걸 설하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런 걸 말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이건 내가 아니라도 아라한이나 연각들이 말해 왔고 말할 수 있다고..
붇다가 오신 뜻을 새기는 것이 진정한 붓다의 위대함을
아는 것이리라 생각이 됩니다. “

위에서 말씀드린 저의 질문과 이**님의 답변을 볼 때,
붇다가 오신 뜻을 새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더욱 아리송해집니다.

상황은 이런데 이**님께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저도 그만두고 싶었는데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문제는 보기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초발심을 낸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 저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들르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답변을 해주신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거지요.

그리하여 번거로움을 끼쳐드리는 점은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언어를 넘어서 수행하는 수행자가 수행 끝에 뭔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수행자는 알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위에 덧붙여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위에 대해 이**님께서 어떤 답변을 해주시든 그것은 이**님의 개인적인 견해인가요, 아니면 불가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인가요?

답변을 주신다면 초심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간명하게 해 주시면 더욱 좋겠고요,
만일 굳이 답변하길 원치 않으시면 저도 더 이상은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 위에 주**님이 쓰신 글은 마치 자동차에 갖가지 색칠을 하고 시속 200km 정도로 지나가서 저로서는 그 차에 무슨 색으로 무엇을 그렸는지 언뜻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제 글을 자세히 보고 이해를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앎 속에 모름이 있고 침묵 속에 말이 있다고 하셨지만 그런 식의 말로는 어차피 토론은 안 된다는 것은 아실 테고요,
그냥 넘겨짚으라고 하신 걸 보니 제가 읽어보고 뭔가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 같군요.
전 확실히 아는 건 없고, 의문은 있지만 그렇다고 의문 때문에 괴롭거나 불편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전 넘겨짚는다거나 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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