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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산과 나무

 내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에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키가 큰 나무가 있고, 관목과 숲이 있고, 다람쥐와 새 종류가 있고, 계곡과 물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무와 숲에 친근감을 가진다.

어째서 그런 친밀한 기분을 느끼게 될까?

조금이라도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 한다면 아마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는 녹색과 맑은 공기와 식물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같은 물질 덕에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그로 인해 상쾌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신화적이거나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큰 나무등걸이나 숲에는 대체로 요정妖精이나 정령精靈이 그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난 대체로 후자의 관점을 더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그쪽으로 그리 많이 기울어진 것은 아니다.

책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미뤄두고 나 자신의 설명을 한다면,

나무는 생물의 발달 단계로 보면 초기에 속하고 매우 원시적인 속성만을 가진 탓에 동물이 가지고 있는 이동성이나 정신적인 특성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우리가 나무에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 즉 땅에, 한 자리에 뿌리박힘, 정지靜止(동물의 이동성에 대하여)라는 속성 때문이라고 유추해 본다.

가장 원시적인 생물이 가장 뛰어나고 고상한 속성을 가졌는데, 그것이 바로 한 자리에 뿌리 박힘과 靜止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장 뛰어나고 고상한 속성이 되는가?

쉽고 짧게 말해 流動하는 만물과 세계와 그 안에서의 인간은 어쩌면 정처 없다는 표현이 알맞을 만큼 방랑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랑은 개별적이고 아주 예외적인 특별한 노력에 의해서, 또는 만약 섭리에 따라 그 방랑이 종식되는 시점이 있다면, 그때나 되어서야 멈추게 될 것이다. 멈춘다는 것은 흐름과 流動에 대비되는 상태로 靜止를 의미한다.

우리가 변화하는 조건에 따라 흐르고 방랑함에 온갖 어려움과 고통, 고뇌, 슬픔, 절망과 분노 등이 따라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방랑이 그치는 상태, 靜止 상태가 되면 이상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소멸되고 그 자리에 완전한 안식과 평화가 깃들게 되지 않을까?

靜止란 진실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곳(상태)의 참된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장 뛰어난 속성을 가장 원시적인 생물인 나무는 이미 부여받은 것이다.

물론 나무는 그 자신이 물질이며, 또한 같은 종류로써 가장 기본적인 감각적 물질인 땅에 뿌리내려 정지 상태를 확보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런 정지 상태를 물질적 차원이 아닌 마음과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확보해야 한다는 차이는 있다.

고로 우리 인간이 얻으려고 하는 행복함의 근본 속성이 나무에 이미 있는 것을 보고 그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본래적이고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논어에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말이 있지만 꼭 어진 자로 啓發되고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날 때부터 의 근본은 가지고 나온다고 본다면 많은 사람이 산과 숲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 없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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