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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인사동

얼마 전(2009년) 서울 갔던 길에 인사동에 들렀다.

그곳에 전통 예술품이나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다는 기사를 몇 번 본 터라 직접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료 이용도서

전철 통로에 설치된 책장. 여행자들 아무나 아무 책이나 집어가 읽다 돌아올 때 있던 자리에 꽂아 놓으면 된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시집을 가져가 읽었다.

 

가게 1

 각종 민속 공예품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대부분이 이런 것들이다.

 

가게 2

탈과 탱화, , 풍경 등이 보인다.

 

가게 3

도자기를 취급하는 곳이다. 들어가 보면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화랑

 

식당과 주점

전통음식과 술을 파는 가 보다. 값이 비쌀 것 같아 들어가 보지 못했다.

 

가게 4

각종 탈과 전통 악기가 있다. 손님 중에는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도 적지 않다.

 

고서점

고서를 쌓아놓은 책방에 주자어류가 보인다.

 

귀천

전에 신문에서 잠깐 보았던 찻집이다.

 

노점상

인도에 노점상이 줄지어 물건을 판다. 작고 값싼 공예품들이다.

 

형형색색 볼 것은 많았지만 특별한 관심은 느끼지 못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평소에 마음을 쓰고 있는 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감각적인 사물로 - 물건이나 소리로 - 마음을 채우는데 대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급하게 든 완만하게 든 끊임없이 변화하는 종류에 속하며 유한한 인간이 무작정 따라가기에는 덧없고 위태롭기까지 한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글자 그대로 최상 또는 최선의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적인 한계로 또는 개인적인 한계로 최상의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차상, 차선의 것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며 합리적인 인간의 길이다.

무엇이 최상, 최선이고 무엇이 그다음인가?

될 수 있으면 길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대신 그것을 얻었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추론해 보자.

최상의 것을 얻었다면 다른 것을 애써 구할 필요가 없다.

, 그로 인해 마음(욕망)의 움직임이 정지되고 그것이 곧 고요함이다.

감각적인 사물은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을 구해도, 그리고 아무리 많이 구해도 고요함과는 관계가 없다.

감각적인 사물이 아닌 세속적인 명예나 권세를 구해도 역시 고요함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최상의 것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결국 얻은 자는 잃게 마련이다.

 

그럼 차상과 차선의 것을 얻었을 때의 마음은 어떤 상태로 보아야 하는가?

아직 최선의 것을 얻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마음(욕망)은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과 흔들림의 폭이 작을 것이며 그에 따라 생성되는 거친 즐거움과 고통도 작을(적을) 것이다. 그리고 균형이 잘 잡혀있어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차차상과 차차선이 있을까?

아마도 흔히 말하는 지혜나 이성이 그것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보다 크게 움직일 때 그것을 통제하고 유도하여 바르게 나아가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 유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 예를 들어 안정된 직업으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재물을 벌고 현명하고 교양 있는 부인과 예의 바르고 똑똑한 아이들과 믿고 사귈 수 있는 친구들과 그를 믿어주는 부모와 친척들이 있고, 본인 스스로도 그다지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성품을 지니고 있어 그때그때 앞에 닥친 일을 무리 없이 잘 처리하고 항시 여유롭고 긍정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며 분수에 맞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난 진실로 그의 삶을 적극 찬양하고 또한 그러한 유복한 삶을 가능케 한 그의 덕성을 찬양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삶이 과히 부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외형상 위와 같은 주변 조건들과 거의 반대되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도 위의 주인공에 비해 결코 못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떤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공부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修身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마음을 닦거나 를 닦는 삶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고 觀照하는 삶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前者後者는 서로 대등한데 어떤 점에서 대등한가?

각자 구하는 바가 있다는 점에서 대등하고 좋은 또는 나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등하다.

다른 점은 대체로 전자는 밖으로부터 구하고 후자는 안에서 구한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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