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시케
[질문](--)/" 또 질문입니다..-.-;;
웅.. 맨날 질문만 해서 죄송합니다..(__),,
제가,, 여기 안 들어온지가 오래 되서리,,, 요 며칠간 여기 글들을 거의 다 읽어 보려고 노력 중이거든여.~ ㅡㅡ;;
그러다가,, 저~~ 뒤에 있는 글들 중에 이 글을 읽게 됐어염.
새람..이란 닉을 쓰시는 분의 글인데,, 그분도 요즘 흔적이 안 보여서 이 글을 못 보실 지도 멀겠네염..ㅡㅜ
그래서 말인 데여,, 혹시,, 제 질문에 답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__)(^^),,
-->
예수가 묻습니다. "이 창녀에게 돌 던질 자 그 누구냐!" 그러자 모두 짱돌을 하나씩 듭니다.
그리고 투척. 세상에 두드려 먼지 안 나올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아.. 오류의 세계는 정말 인정머리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켕기는 게 있다고 남 잘못한 일 눈 감아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 때와 장소를 가려 범합시다.
1) 예수는 자신의 실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관용'을 이야기했다.
2) 예수는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3) 2)처럼 논리의 틀에서 말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4) 하지만 그 '관용'이 쓰일 곳을 정확히 알고 써야겠다. 자신이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고 해서 다른 사태에 대한 판단에 주저하게 돼서는 안 된다.
<--
..여기서 질문이여,,(--)/
우선 1)은 하나의 추측인데, 이러한 추측의 근거를 제시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여?
근거를 제시하기 어려운 추측을 전제로 삼는다면...그 논리를 취약 해질 것 같은데.
만일 새람님이 말한 1)이 의미가 있으려면,,
"다른 사람의 어떤 과오에 대해서 관용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그러한 실수의 경험이 있을 때뿐이다."는 식의 전제가 필요한데, 이런 전제가 지탱되기는 어려울 꺼예여.
3)...피장파장의 오류가 비인간적이다?...이 말은 잘 이해가 안 돼 거든 여..
"인간적인 것"(새람님이 생각하는)이 무엇인지, "비인간적인 것은 무엇인지" 설명이 되어야 이해가 될 것 같은데....이러한 개념 정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건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는 글이 되긴 어렵지 않을까여?
4) 자신이 과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과오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타당하다고 생각해염.
마찬가지로, "너도 잘못이 있으니 내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주장이 인정되어서는 안 되겠져.
각각의 잘못은 잘못으로 지적하고...각각의 잘못을 고치려는 자세가 열린 자세일 꺼고여.
그런데...이러한 논리가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으려면 1)의 문제가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따라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이 말을 했다면 별로 설득력은 없지 않을까..^^;;
조금 더 고민해 볼 문제 중의 하나는..."관용이 쓰일 곳을 정확히 알아야 겠다"고 했는데...
관용은 어떨 때 필요 할까여?
이상,, 여기까지가 질문인 데여.. 웅..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는 거거든여..^^;;
여러분들의 답변 기다릴게여..^^+..^^+
philebus 답변
Re: [질문](--)/" 또 질문입니다..-.-;;
제가 좀 다른 관점에서 말씀드려 볼까요.
성경에 있는 해당 구절을 찾아보니 이렇게 되어 있네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 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요 한복음 8장 3절~’...........'요한복음8장3절~’
먼저 글을 올린 새람이란 분의 논리에 대해서 옹호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지도 않고요,
위 성경구절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말씀드릴 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법률 또는 율법의 성질이란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의사가 피치 못할 이유로 먼 지방에 장기간의 출장을 떠나면서 자신이 돌보아오던 마을 사람들을 위해 건강을 위한 보편적인 처방과 약품들을 남겨두고 갑니다.
열이 날 땐 어른의 경우 해열제 두 알,, 어린이일 경우는 한 알, 배가 아플 땐 소화제 두 알, 외상을 입었을 땐 그 상태에 따라 외용 연고 및 항생제........등,
또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생활 방식으로 일반적인 식사시간의 지정, 보편적인 식사량, 운동 방식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가 남겨 놓고 간 지시와 처방에 따라 대체로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가긴 하지만, 만약 의사가 출장을 가지 않고 계속 남아있다면,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병이 나서 그 의사를 찾아갈 경우, 의사가 실제로 환자 하나하나를 진찰해 보고 내려주는 처방은 자신이 출장 갈 때 남겨준 일반적인 지시보다는 훨씬 정밀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남겨준 지시에 정 반대되는 처방을 내려야 할 때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열이 높은 환자에게는 해열제를 먹으라고 지시했었지만 실제로 진찰하고 문진 해본 결과 그 환자가 위장이 매우 약해 해열제에 의한 위장장애가 우려될 경우에는 경구 투여 해열제보다 주사제를 써야 할 경우도 있을 거고요..
건강을 위한 보편적인 식사량으로 끼니마다 밥 한 그릇을 지정했었지만 어떤 이는 몸이 매우 약해 밥 한 그릇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는 상태라면 그에게는 따로 밥 반 그릇이나 일정기간 죽을 먹을 것을 권할 경우도 있다는 말이죠.
어떤 이에게는 고기를 먹으라고 권해야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고기를 금하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을 거고요,,
어떤 이에게는 하루 이틀 굶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려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의사가 남겨준 처방이나 지시는 건강을 위한 대강의 요결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환자마다, 개인마다 조금씩 다를 거고요.
어떤 때는 일반적인 처방과 반대되는 처방을 할 때도 있을 거라는 얘기죠.
그러나 의사가 그곳에 없는 한 사람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의사가 남겨준 처방과 지시를 따라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별도로 의학지식이 없고 현재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즉, 가끔씩 법률을 뛰어넘어 각 개인이나 각 지역이나 사회에 합당한 정치를 베풀 수 있는 완전한 성인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법률은 그대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죄에 대한 벌의 의미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아시다시피 벌이란 죄지은자의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올바른 상태로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첫 번째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한자에 대해 징계를 내림으로써 그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올바른 쪽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란 얘기고요,, 그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피해를 당한 상대방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거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그다음 문제요, 덧붙은 사안이라는 생각입니다.
범죄자를 벌함으로써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도 부차적인 문제죠.
죄와 형벌의 본질은 죄지은 자의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형벌로써 올바르게 되게끔 한다는데 있다는 거죠.
마치 환자로서는 고통을 겪게 되는 의료행위가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환자의 건강을 위해 행해지듯이 말입니다.
그 환자가 병이 나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게 된다는 얘기도 역시 다음 단계의 얘기고요,,
의료행위의 목적 자체는 어디까지나 해당 환자의 건강회복에 있고, 형벌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해당 죄인의 교정에 있는 거죠.
이상은 법률과 율법의 성질에 대해 예를 들어 말해 본 거고요.
다음은 책을 통하여 본 성인이나 현자들이 누군가와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에 대해 제가 느낀 바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마 다른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그들은 문답을 주고받는 바로 그 상대방의 영혼 또는 정신에 주목한다는 겁니다.
상대방과 대등한 관계에서 어떤 따로 떨어진 논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거의 없고 상대방에게 그 시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한다는 거죠.
설사 어떤 논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더라도 그 귀결이 대체로 상대방에게 되돌려져 스스로 자신을 음미하게 유도하는 쪽으로 끝나게 되고요 - 특히 소크라테스의 경우죠.
흔히 말하는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들을 병든 마음의 치료를 위한 참된 의사들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논리의 비약이라고 반발할지도 모르지만 성인들의 행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리 있는 말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세 가지 경우를 조합해서 성경의 구절을 제 나름대로 음미해 보면,
예수가 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예수께 질문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준 치료제로서의 답변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한 말이죠.
또한 그 말의 결과로 결국 간음한 여인은 살게 됩니다만,
예수의 뒤이은 말, 즉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는 말을 듣고 그녀가 회개하였다면 죄를 지은 자의 마음을 다시 올바르게 한다는 형벌의 목적을 그 형벌을 이용하지 않고 달성한 셈이 됩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참된 의사, 즉 성인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이것을 구차하지만 좀 길게 부연하면 이렇게 됩니다.
서기관들은 여인을 율법으로 다스리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여인의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는 치료(형벌)의 본래 목적과는 멀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단지 율법의 조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하고 있고, 그 마음은 그로 인해 완악해져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인에게 올바른 형벌을 내릴만한 상태에 있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환자를 치료하려는 자는 의학과 환자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형벌을 내리려는 자는 죄인의 모든 것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테지만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러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직시가 없고, 여인은 단지 예수를 상대하기 위한 볼모에 지나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물론 여인을 측은히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단죄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자신을 먼저 의인이 되게 함이 더 급한 일이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간음한 여인을 매개로 예수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이 역시 그 여인의 단죄여부에 대한 답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들에게 합당한 훈계를 듣고 하나둘씩 부끄러워져 떠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 만약 어떤 서기관이 이렇게 반문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식으로 죄인을 벌하지 아니하면 장차 간음하는 여인은 더 많아지고, 아무도 죄인을 벌할 수 없고 사회의 기강은 흔들릴 텐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말이죠.
성인의 온전한 뜻을 모르니, 그의 답변을 예상할 수는 없고, 만약 제가 답변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서기관이여! 어째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여 성인의 말뜻을 스스로 흐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토록 염려하며 유지하려고 하는 사회와 사회인과 사회기강은 무엇을 위해 계속 존재하려는 겁니까?
그 존재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눈앞에 두고, 어찌하여 그 존재의 계속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질문하신 분이 말미에 언급한 관용이 필요한 곳이란 어떤 때인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경우에는 '관용을 베풀므로 해서 그 당사자가 좋게 될 경우'라고 밖에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구체적으로 다시 엄밀하게 말한다면 관용을 베풀므로 해서 그 당사자가 좋게 되느냐 그 반대가 되느냐, 아니면 형벌을 주는 것이 더 나으냐 하는 문제는 오직 진리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지혜로운 자의 소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환자에 대해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뿐이듯이 말이죠.
그다음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법률과 재판관의 양심에 따라야겠죠..
저 위에 의사가 남기고 떠난 처방과 지시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일부러 성경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고요,
지금 성경을 새삼스레 찾아보고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 건데 보는 분에게는 미진한 구석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남의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제 의견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으면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나쁘다니까 저도 주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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