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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주역 지뢰복地雷復 六三

경전 또는 고전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전체의 개요가 한 두 어휘로 압축되어 마음속에 화두처럼 자리를 잡게 된다.

예컨대 논어라면 책을 읽고 있지 않을 때라도 또는 仁義라는 단어가 때때로 떠오르고, 그것은 그대로 마음에 편안함과 굳건함을 가져와 마치 어떤 때를 맞아서라도 피하여 돌아갈 수 있는 의지처를 확인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초기불전이라면 내 경우엔 사성제와 오계로 압축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면 ㅇㅇ은 무엇인가?”라는 의혹의 태도가 되며, 현실적으로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 대해 설명 가능한 이해를 구하는 단초가 되고, 그 상황을 이해하였다면, 그에 대해 감정적 차원의 대응으로 일어날 법한 분노나 기타 무지로 인한 갖가지 행동을 자제할 수 있게 된다.

크세노폰이 그린 소크라테스에서는 좋은 생활을 위한 용감함이 화두로 되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가장 들기 어려운 화두가 되는 것 같고프로이트를 요약하면 역시 리비도와 승화가 될 것 같은데, 윤리적으로는 통상 리비도를 그저 본능으로 간주하고, 그 뒤에 관습적이고 상식적인 도덕에 입각하여 그 본능적 욕망의 통제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보다는 리비도란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논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내면을 통해 부단히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시작은 프로이트와 같이 했으나 중간에 다른 길로 떠나간 아들러나 융과 같은 학자는 관심 밖이 되었다.

 

독서의 결과 그 내용과 의미가 마음속에서 활성화되어 때에 따라 내 마음가짐과 행동에 직접 관여하고 충고를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독서의 효용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나의 실제 행동이 자주 그러한 이상에 미치지 못하거나 실수를 거듭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자신에게 가혹할 필요는 없다.

주역 지뢰복地雷復 六三에서,

 

六三 頻復 厲 无咎

육삼 빈복 려 무구

육삼은 자주 회복함이니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象曰 頻復之厲 義无咎也

상왈 빈복지려 의무구야

상에서 말하길 자주 회복함의 위태로움이라는 것은 의에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괘는 강이 시초로 돌아와 형통하다는 것인데, 六三도 아니고 도 아니라 그 이 자주 어긋나니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전체의 괘의로 보아 또한 자주 회복하니 허물은 없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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