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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공자가 아비가 죄를 짓더라도 고발하지 말라고 대중에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섭공의 말이 있고 나서 그에 대응하여 그 말을 한 것으로 압니다. 즉, 섭공이 “우리 향당에 직궁이란 자가 있어 마음이 바르고 곧아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로서 스스로 고발하였나이다.” 하고 말하자 공자가 그를 되받아 “우리 향당의 곧은 자는 그 같지 아니하여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깁니다.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한 거죠. 이것은 공자의 그 말씀이 수학의 공리처럼 누구에게나 불변하는 진리라기보다 자신의 치세를 자랑하는 섭공에게 곧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공자의 그 말씀이 섭공에게만 유효하고 보편성은 없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보편적으로 올바르게 생각되지만, 현대에 와서 그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비를 고발한 직궁의 마음과 그가 속한 향당의 정치 분위기를 어떤 상태로 상정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흔히 공자나 동양철학을 옹호하는 경우 이런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공자의 언명은 보편적이지만 그러나 수학적, 또는 과학적 보편성이나 객관성과 다르다. 궁금한 것은 이 다른 종류의 보편성이 과연 어떤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수학적 보편성은 시간과 장소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성립하는 보편성입니다. 그런데 도덕적 언명이 가지고 있다는 보편성은 그 보편성의 위치조차 의심받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지요.
직궁의 예에서 첫째 공자는 “죄지은 모든 아버지를 아들이 고발하면 안 된다”라는 보편적 언명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자의 주장을 이런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바로 한비자의 반박과 같은 비판들이 나타나겠지요.
둘째 공자는 섭공의 경우에서 “죄지은 그 아버지를 아들이 고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경우에는 섭공이나 직궁의 사례나 그와 유사한 사례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공자의 주장을 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둘째 경우는 공자가 어떤 경우에는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잘못을 고발해도 괜찮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런 해석에서는 어떤 경우와 그렇지 않은 다른 경우를 구분해 줄 수 있는 기준들이 필요하겠지요. 만약 그러한 기준이 부재한다면 공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주장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넷째 죄지은 아버지를 고발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친친관계 또한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적어도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직궁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어떤 경우에서 아들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 될 것입니다.
때때로 공자는 상대편에 맞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지적되지요. 아마 흔하게 인용되는 구절이 다음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들으면 바로 행하여야 하는가? 라는 자로의 물음에 공자는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염유에게는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한다고 공자는 말합니다. 공서화가 왜 이리저리 답변하느냐고 반문하자 공자는 염유는 소극적이기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고, 자로는 남을 이기려고 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방법의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을 들르면 바로 행하여야 하는지 저 구절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도덕적인 것을 거기에다 대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을 들으면 바로 행하여야 하는가? 소극적인 자는 그래야 하고, 적극적인 자는 잠시 한 번 더 생각하고 해야 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내용을 지닌 어떤 도덕적 명제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직궁의 경우 문제되는 것은 바로 방법이 아니라, 그 내용입니다. 즉 죄지은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hilebus(바람) 답변
[re] 직궁에 대한 명상 - 보편성 문제
직궁의 예에서 제가 볼 때 공자의 비판이 옳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고,, 이번에는 그 언명의 보편성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경우에 섭공의 말과 직궁의 예를 따로 떼어놓고 아무런 조건이나 배경 설정 없이 공자의 그 말만 가지고 그것이 항상 정당한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구체적인 하나의 행위에 도덕적인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가미되어 논의가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경전에 있는 대로 섭공의 말과 공자의 말을 함께 묶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 하나에 항상한 도덕적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섭공과 직궁의 경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경우라면, 예컨대 섭공이 아니라 썰공이 꽁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 누이를 때려 등뼈를 부러뜨렸는데도 변함없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수발을 듭니다. “
그 말을 들은 꽁자는 이렇게 대꾸했을지도 모르죠.
"우리 향당에 어질고 효성이 있는 자는 그렇지 아니하여 아비의 포악함이 정도를 넘어서는 기미를 알아채고 어찌할 수 없을 때는 관아에 고발하여 격리토록 하되, 매일 한 번씩 면회를 청하여 아비에게 간하고 화해를 구합니다. “
이와 같은 아비를 관아에 고발하는 것은 말하자면 국가에 있어 극도로 포악한 군주를 인민들이 몰아내고 새 왕을 옹립하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국가적인 혁명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면(백이와 숙제는 아마도 비난할 테지만) 가정 내 포악한 아비를 자식이 고발하는 것도 용납될 수 있는 거죠.
정직함은 올바르다는 명제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상대를 속이는 것이 타당할 경우도 많습니다.
상대가 적일 경우가 그렇고 어린아이일 경우도 그럴 수 있고, 환자에게도 그럴 수 있으며, 제 정신이 아닌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죠.
또 살인은 죄악이다라는 명제도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죠.
전쟁이나 정당방위와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도 예외가 있을 수 있는 거죠.
단지 직궁의 예와 같은 경우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곧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궁의 경우 문제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그 내용이라고 하셨지만, 그 내용의 구체적인 면을 살피지 않고는 판단이 불가하고, 그저 하나의 단일한 행위(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함)를 절대적인 법칙처럼 도덕적이다 아니다 하고 공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편성이라는 어휘를 납득하기 위해서 내용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 또는 범위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직궁의 경우라면 너무 고지식하여 부자지간의 천륜을 모르는 자라거나 아니면 공명심이나 일종의 환상 때문에 소중한 가족관계를 파괴해 버린 자라고 비난을 들어도 할 수 없다는 얘기죠.
그리고 그와 유사한 정도의 죄와 행위는 모두 같은 경우가 될 것인데,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아비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자식이 그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천륜에 비하면 자식의 입장에서 볼 때 아비가 짓는 죄가 가볍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섭공에 대한 공자의 말을 보편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지어낸 얘기지만 위 썰공과 무골의 경우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외가 될 것 같고, 그런 예외 때문에 구체적인 하나의 행위에 절대적인 도덕성을 부여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떤 행위가 보편적으로 올바르다거나 도덕적이라고 말할 경우에 그 정도나 범위를 가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행위의 동기와 결과가 善에 부합할 경우는 도덕적이라거나 올바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거나 그 행위가 道理에 맞는 경우에……. 라고 하거나 좀 통속적으로 하면 건전한 상식에 위배되지 않는 경우에……. 등으로 말할 수 있겠죠.
듣는 사람은 아마도 싱거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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