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 만일, 예컨대 섭공이 아니라 썰공이 꽁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 누이를 때려 등뼈를 부러뜨렸는데도 변함없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수발을 듭니다." 그 말을 들은 꽁자는 이렇게 대꾸했을지도 모르죠. "우리 향당에 어질고 효성이 있는 자는 그렇지 아니하여 아비의 포악함이 정도를 넘어서는 기미를 알아채고 어찌할 수 없을 때는 관아에 고발하여 격리토록 하되, 매일 한 번씩 면회를 청하여 아비에게 간하고 화해를 구합니다."
이 예가 일방적으로 공자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썰공이라면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에 누이를 때 등뼈를 부러뜨렸기 때문에 그를 관가가 고발하였다. 참 올바른 일이다.”라고 말했을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꽁자는 다음 두 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로 언급했을 것처럼 생각됩니다. 첫째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 누이를 때려 등뼈를 부러뜨렸는데도 변함없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수발을 듭니다.” 둘째, “우리 향당에 어질고 효성이 있는 자는 아비의 포악함이 정도를 넘어서는 기미를 알아채고 어찌할 수 없을 때 관아에 고발하여, 매일 한 번씩 면회를 청하여 아비에게 간하고 화해를 구합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왜 꽁자나 공자는 항상 두 번째 가능성을 취할 수밖에 없을까요? 첫 번째 가능성은 왜 배제되는가요? 둘째 가능성은 아마도 공자와 한비자의 논쟁에서는 공자의 견해로서 취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단지 공자와 한비자의 논쟁이 아니라, 가족 윤리와 개인 윤리로 상정되는 대립에 있어서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함은 올바르다는 명제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상대를 속이는 것이 타당할 경우도 많습니다. 상대가 적일 경우가 그렇고 어린아이일 경우도 그럴 수 있고, 환자에게도 그럴 수 있으며, 제 정신이 아닌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죠. 또 살인은 죄악이다라는 명제도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죠. 전쟁이나 정당방위와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도 예외가 있을 수 있는 거죠. 단지 직궁의 예와 같은 경우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곧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직궁의 예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모든 문맥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직궁의 예에서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곧음이 아니다.”라고 주장도 가능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비를 고발하는 것이 곧음이다”라는 주장도 가능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해서 안 된다”라는 명제의 예외가 있을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해야 된다”라는 명제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외를 허용하는 이 두 명제의 우선순위에 어느 것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사회윤리, 공동체의 윤리를 보존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고, 후자라면 친친관계가 손상되는 문제가 나타나겠지요. 바로 여기에 직궁의 문제가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philebus(바람) 답변
[re] 직궁의 문제 - 가족윤리와 사회윤리
썰공과 무골의 예를 그런 식으로 든 것은 제 나름대로 공자를 성인으로써 항상 中을 잡을 줄 알고, 처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전체를 고려하여 最善을 취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경전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꽁자나 공자가 만약,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 누이를 때려 등뼈를 부러뜨렸는데도 변함없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수발을 듭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어질다고 볼 수도 없고 지혜롭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용문 속의 그 자식은 실제로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상황 변동에 무지하며, 어버이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언제나 따르려고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공자라면 절대 위와 같은 자식을 두둔하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것이 K님께서 말씀한 첫 번째 가능성이 배제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만일 썰공이 꽁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우리 향당에 아주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무골이란 자가 있어 아비가 어미를 시비 끝에 때려죽이고 며칠 후 형을 찔러 죽이고 그 며칠 후에 누이를 때려 등뼈를 부러뜨렸기 때문에 그를 관가에 고발하였다. 참 올바른 일이다.”
꽁자는 이런 경우까지 자식이 아비를 감싸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자식이 아비를 고발한 것을 참 잘하였다고 말하는데 동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상상으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보아라, 자식에게 추앙을 받는 것도, 자식에게 고발을 당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자식의 고발을 묵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것은 어쨌든 아비가 죄를 지어도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에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 예외를 보이기 위해 썰공의 예를 든 거고요, 더하여 애초 섭공이 말한 내용에 곧음에 대한 인식에 지나친 경직성이 있다는 점을 공자가 비판한 것처럼 썰공의 말에는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말의 내용에 상황 분별을 못하는 우둔함이 있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공자는 무한히 자식이 아비를 감싸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섭공의 말에 지나침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며, 반대로 썰공이 말한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개념에도 지나침이 있으므로 그로 인하여서는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이는 모두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하거나 감싸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하나를 두고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보이기 위한 예시이며, 효과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공자의 어짊을 고려하여 작위적이지만 극단적인 예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썰공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대부분의 경우에 죄지은 아비를 자식이 고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으므로(親和를 근본적으로 해치므로) 공자의 말에 보편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 제 의견이었죠.
자식을 낳아서 기를 때 어버이는 자식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는 옳은 짓을 하든 그른 짓을 하든 관계없이 귀여워하고 사랑을 줍니다.
먹이고 입히는 것에서부터 자식의 인격의 훌륭함을 위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한은 다 하려고 하죠.
즉, 자식은 어버이에게 모든 면에서 기대고, 어버이는 모든 것을 자식에게 줍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기억들을 모두 축적시켜 간직해 가면서 생활하고 있죠.
그런데 자식이 다 큰 어느 날 아비가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고 해서 그를 벌 받게 하거나 사회에서 제거할 요량으로 고발한다면 아비의 황당함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도 앞으로 심정적으로 무엇에 자신을 기댈지 모르지만 情의 근본으로부터 스스로를 갈라내는 짓을 하여 그 자신도 차츰 고립되고 황폐한 마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이런 점은 논리나 합리에 앞서는 인간성의 한 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위를 할 때는 그 행위자나 대상에게 어떤 면에서든 이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익과 동시에 손실이 발생할 때는 총합적으로 이익이 손실보다 클 경우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보겠지만 손실이 이익보다 클 경우는 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여 그 자식이나 아비가 얻는 이익이 무엇이 있을까요?
설사 이익이 있다한들 그들이 받는 상처와 손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대신 사회 윤리나 공동체 윤리가 보존된다는 이익이 있을까요?
그러나 저로서는 이것은 대단히 막연한 추측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처음 비판에서도 말했지만 아들이 아비를 고발하고 국가가 이를 긍정적으로 취급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로 인해 편안한 마음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 행복이 있다면 그 행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가족관계에서의 화기애애함이나 서로 믿고 의지하는 정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국가나 사회정의를 위한다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의 행복 일부를 뺏긴 채, 정작 무엇을 위한 사회 정의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고로 저는 아들과 아비 당사자를 위해서나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일반적으로 죄지은 아비를 아들이 고발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발을 하면 가족의 친화는 무너지지만 사회 정의는 보존될 것이라는, 마치 상거래와 같은 도식에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만약 정 사회 정의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면 그 자신에게도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고, 사회정의에도 작으나마 보탬이 되는 다른 일을 찾을 것을 권하고 싶고, 반면에 아들로써 아비를 고발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결국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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