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 : 자네 말은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그 옛날 헬라스 지역에서 기하학자인 테오도로스가 학구적인 청년 테아이테토스에게 했던 것처럼 해보라 그 얘기로군 그래.
이군 : 무슨 말씀이시죠?
김 선생 : 자넨 잊었나? 테오도로스가 정사각형의 도형에서 무리수에 해당하는 선분을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나아가 √3이나 √5 ····· ·√17에 이르기까지 같은 작업을 하여 테아이테토스에게 차례로 보여주었지만, 더 이상의 설명이나 진전이 없이 거기서 그쳤다고 하지 않았나?
이군 : 예, 그래서 테아이테토스가 그 모든 경우를 묶어 무리수를 정의했다고 하는 이야기죠.
김 선생 : 그렇지. 그럼 조금 전에 자네가 내게 요구한 바가 무엇이었나?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게.
이군 : 예, 그건 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즉
“사람이 천지天地 건곤乾坤의 역능力能을 본받아 움직여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각자 하고자 하는 바 즉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易簡의 방식으로 충족하게 된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도닦음, 신앙,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과 같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욕구는 어떤 식으로 충족되는가?
이에 대해 먼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在地成形, 坤作成物이라는 지침에 따라 일단 형태로써 그 욕구에 응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경전經典이나 집회 또는 대화 기타 은밀한 기회의 어느 순간에 위와 같은 무형의 가치에 눈을 뜨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어쨌든 그쪽으로 움직여 가고 싶어 하는데, 만약 그때 그가 받은 인상이 ‘자유로움과 독립’이었다면 그는 왜곡되지 않은 그 가치로 나아가는 대신 자전거 타기에 몰두할 수 있다. 그것이 실제 여정의 험난함 대신 易簡에 부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그 인상이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그에게 각인된다면 그는 그쪽을 향한 순수한 정신의 모험 대신 낚시질에 몰입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정한 만족을 얻게 되고 그 시점에 만족의 주체가 된다.
만약 존재 자체가 苦라고 해서 非存在를 열망한다면 이번에는 그에 정반대 되는 것, 즉 존재의 조건인 음양교합, 異性의 영상이 그를 압박할 수 있다. “
이 부분에 관해서인데요,
위 말씀 중 누군가가 어느 때 받은 강한 인상에 따른 행위, 즉 자전거 타기나 낚시질 같은 그런 행위의 예를 인상의 다른 면과 관련해서 더 들어주실 수 있나 해서 말씀드렸던 거지요. 어렵지 않으시다면요. 여러 가지 예를 듣다 보면 전체적인 이해가 좀 더 쉽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김 선생 : 그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이군 : 하지만 뭐죠?
김 선생 : 무엇이든 유사한 사례를 여러 번 듣다보면 그것들의 생동감이 점차 사라지고 그에 대해 막연히 알겠다는 생각이 강화되며, 그런 감을 바탕으로 뭔가 사변적인 이야기를 지어내려고 애쓰기 쉬운데 자네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네.
이군 :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그보다는 하나의 사례라도 어딘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았으면 하니까요. 그런 일이 제 마음속에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입니다.
김 선생 : 그렇다면 위의 예에 이어 말해볼 테니 들어 보게. 누군가 강한 인상을 받고 그것이 총체적으로 외래적外來的인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는 해외여행을 갈망할 수 있네. 아니면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릴 수도 있네. 또 그것이 둘에 의한 미지未知의 변화이면서도 그 결과가 바로 앞에 있어서 붙잡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수手를 연구해야 하는 보드게임에 관심을 보일 수 있네. 그리고 그것이 일면 아주 정합적整合的이지만 여전히 변화와 흔들림이 있고 또한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낀다면 그는 학문의 탐구 쪽으로 옮겨 갈 수 있고, 다만 높다는 것이 강조되면서도 잡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등산을 유달리 좋아하게 될 수도 있을 걸세. 또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지금 여기서 완성된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그는 노래와 음악에 빠질 수 있네.
이군 : 즐겁고 선한 것으로써의 완성이로군요.
김 선생 : 그렇지. 그러나 반대쪽도 가능하네.
이군 : 어떻게요?
김 선생 : 지금 여기가 완성(막다른 곳)이라고 느껴지긴 하나 거기에 적의가 끼어든다면 전쟁이나 분란,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걸세. 또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있지만 일정 부분 독립적이라고 파악된다면 그는 자동차 운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일 수 있네. 그리고 神的인 것이 함께 있어 매우 아름답고도 금방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는 아마도 즐거이 술을 마시게 될 걸세. 물론 그 자신으로서는 별도로 그에 인간적인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붙이겠지만 말이네. 어떤가? 이만하면 되었나?
이군 : 예, 하나하나 따라가기엔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다 듣고 보니 저로서는 결국 그 모든 행위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요. 무엇을 전제로 하여 易簡이라는 지침에 따라 그처럼 욕망이 충족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김 선생 ; 내 생각에는 거기에 두 가지 전제가 있네. 첫째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존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질이 또는 물질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가치와 완전히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걸세. 그리하여 욕망을 일으켰을 때, 그 욕망이 비록 최초에 정신적인 가치나 참된 존재와 같은 것을 향하고자 할지라도 일단 물질이 개입되며 만족을 달성하게 되는 걸로 보이네.
예컨대 지혜나 사랑이나 기타 정신적으로 참되고 고귀하다고 할 만한 것을 얻고자 열망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며 금金이나 보석 등이 그것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과 같네. 금과 보석의 귀하고, 빛나고, 변하지 않는 성질 등이 유사성으로 작용함으로 해서 말일세.
이군 : 예,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만.....
김 선생 : 뭔가 달리 짚이는 것이라도 있는가?
이군 : 아니, 그렇게 물질을 개입시켜 만족을 구하게 되는 것이 易簡이라는 지침에 따른 것이라지만 그 각각은 분명히 다른 것이 아닙니까? 금이나 보석을 소유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 어찌 그것들을 멀리하면서 無形의 가치나 진리를 바라며 애쓰는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神이나 神的인 것과 동행하려는 사람의 마음과 술꾼의 마음을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 선생 : 같은 게 아니라 동등하다는 걸세. 위상位相은 서로 다르지만 말이네. 알겠나?
이군 : 예, 정말 묘한 유비類比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등한 것이 아니라 참된 바로 그것을 구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로 목적을 이루게 하는 이간易簡은 상당히 번잡하고 공연한 것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진정한 목적 달성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처럼 생각되니 말입니다. 애초에 지혜나 仁을 얻고자 했던 사람이 세파에 부딪치면서 금과 보석을 얻고, 고급 자동차를 여유 있게 몰고 다니며,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과시하듯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처음의 욕구에 易簡이 자신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목적 달성일까요?
김 선생 : 여보게, 자넨 천지를 관통하는 위대한 법칙에 대해 그런 식으로 자기식대로 말하며 깎아내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네의 질문은 상당히 비뚤어져 있는 걸세.
이군 : 아 예, 죄송합니다. 그럼 제 의문을 어떻게 말하면 될까요?
김 선생 : 그보다 먼저 한 가지 물어 보세나. 자넨 금이든 돈이든 성실히 일하여 재물을 모으고, 그로부터 풍족한 살림을 꾸려 가족이 즐겁게 살아가도록 조성하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자주 해외여행을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베풂으로써 그들로부터 호평을 듣고, 등산이나 수상스키와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며, 애완동물들과 함께 건강하고 원만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가? 마치 플라톤이 호메로스의 시구를 빌어 찬양했던 그런 사람들처럼 말이네.
이군 : 예, 그런 사람들은 여기저기 많이 있겠죠.
감 선생 : 그럼 자네는 그런 사람들이 각자 지혜롭게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거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군 : 그런 것 같군요.
김 선생 :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다면 곧 그들이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군 : 그들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 선생 : 어째서 그렇다는 거지?
이군 : 그것은..... 예를 들어 기회가 있어 제가 그들에게 묻기를 “어째서 그렇게 높은 산을 자주 다니시나요?” 또는 ”바둑을 열심히 두십니까?”라고 하면 그들은 대체로 “좋아서요.” 또는 “그냥” 또는 “그냥 좋아서요.”라고 하든지 아니면 “좋잖아요?”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대답은 듣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듣더라도 그것은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들이겠지만, 그것으로 그 일관된 열성을 모두 보상하기에는 이유로써 부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 : 흠... 자네는 그들이 자신의 그런 행위들을 둘러싼 상황 전체에는 아예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 듯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로군 그래. 그러니까 그들이 지혜로운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어떤 한 가지 점에서는 무지하고 그 무지까지 지혜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그런 무지한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자네 말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하겠는가?
이군 : 그건 그들이 어쨌든 神(또는 神들)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인간으로서 神을 공경한다는 것은 첫째로 꼽아야 할 준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김 선생 : 이 사람! 자넨 어디서 그렇게 아름답게 말하는 법을 배웠는가? 난 감탄했어. 자넨 덕과 관련하여 더 이상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같네, 그러니 어떤가? 이제 그만 下山하는 것이.
이군 : 아니죠. 저는 그저 생각을 굴려가며 탐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런 덕을 가지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마시고요, 조금 전 제 물음에 답변이나 해주시죠.
김 선생 : 그 물음이란 게 무엇이었나?
이군 : 易簡의 작업에 대한 제 물음이 비뚤어져 있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물어야 할까요?
김 선생 : 그건 아주 간단하네.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은 어떤 쉽고도 간단한易簡 절차를 통해 얻게 되는가?” 하고 물으면 되네.
이군 : 예, 그렇군요. 공연히 에둘러 돌아갈 일은 전혀 없는 거죠. 그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디서 들을까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해 주시겠죠.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선생 : 자넨 이런저런 고전을 읽는 중에 논어도 여러 번 읽었지?
이군 : 여러 번 읽었죠.
김 선생 : 그럼 그 말씀 중에서 지금의 자네 질문과 관련해 떠오르는 구절이 없는가?
이군 : 아... 예, 죄송하지만 제가 아둔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구절이었는지요.
김 선생 : 논어 술이述而 29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은가?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즉 공자가 이르시길 仁이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仁하고자 하면 仁이 이르는 것이다. 이 말은 최소한 절차상으로는 아주 쉽고 간단하네. 마음에서 구하면 그 마음속에서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니겠나? 외부 물질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걸세. 이처럼 易簡한 방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仁과 지혜는 같거나 동족에 속하는 것이니 지혜를 구함에도 같은 방식으로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될 걸세.
이군 : 과연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경험상 때로는 뭔가 비슷한 마음이 들다가도 쉽사리 상황이 바뀌기 일쑤이니까요.
김 선생 : 자넨 종종 일생을 통해 훌륭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겠지? 예컨대 훌륭한 피아니스트에 대해 말해 보세. 그는 타고난 자질을 지니고 어릴 때부터 자의든 타의든 많은 연습을 거치는데 거기엔 훌륭한 스승도 한몫한다네. 다른 부문의 성취도 대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루게 되겠지만 지혜를 구하고 얻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자넨 공자가 어릴 때 조두俎豆놀이를 즐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제사 지내기를 좋아했다는 얘기 말이네. 그분은 이미 어릴 때부터 특별한 자질을 보였던 거지. 그리고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의가 그를 평생에 걸친 여정을 통해 聖人의 경지로 이끌었던 걸세. 그리하여 아울러 ‘仁하고자 하면 仁이 이르는 것’이라고 공언할 만한 자격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
이군 : 예,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조건이 부합하여 一心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놓고 오직 그것을 구하려 하면 곧 이른다는 말씀이겠죠.
김 선생 : 자넨 지혜를 구하는 일이, 즉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세계의 운행과 人心의 이치를 알고 그에 대응하며 평생을 허물없이 즐겁게 살고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일보다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나?
이군 :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또한 자신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사한 도움을 주는 일일 텐데요. 말씀은 아마도 그런 사람은 피아니스트에 못지않은 자질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 가지만 더 여쭤보려는데요, 괜찮겠습니까?
김 선생 : 말해 보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끝을 보아야 할 테니까.
이군 : 그것은 위에서 易簡의 전제로 말씀하신 것인데요, 즉 “첫째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존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질이 또는 물질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가치와 완전히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걸세. 그리하여 욕망을 일으켰을 때, 그 욕망이 비록 최초에 정신적인 가치나 참된 존재와 같은 것을 향하고자 할지라도 일단 물질이 개입되며 만족을 달성하게 되는 걸로 보이네.”라고 하신 부분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물질이 정신적인 가치와 동등하게 취급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욕망에 대해 항상 물질이 먼저 개입하여 만족을 구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김 선생 : 그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나. 자넨 프로이트의 저작들도 읽은 적이 있지?
이군 : 예전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죠.
김 선생 : 그렇다면 꿈의 작업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
이군 : 예,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압축과 전위, 상징, 이차가공 등이지요.
김 선생 : 그중에서 전위轉位(verschiebung, Traumverschiebung)란 무엇이었나? 한번 상기해 보게.
이군 : 그건 상당히 복잡한 내용이었지만 제가 갈무리하여 기억하기로는 꿈을 해석할 때 우리가 최종적으로 알아야 할 핵심적인 부분이 현현顯現하는 꿈의 내용에서도 핵심적인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분은 애매하거나 흐릿하거나 잠을 깨고 난 뒤, 기억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것으로 표현되는 반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것이라는 거죠. 즉 그 꿈을 꾸는 동기의 핵심적인 부분을 숨기기 위해 비교적 사소하거나 가벼운 부분에 강세가 주어지며 꿈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김 선생 : 맞아. 그리고 프로이트의 다른 저작들에 따르면 현실의 낮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밤에 꿈을 꾸게 하는 그것이 실수 행위나 망각, 백일몽, 완전히 임의적이거나 우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표현에도 무의식적인 동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등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네. 그리고 플라톤의 논의 중 누군가 우리에게 현실이 바로 또 다른 꿈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네.
이군 : 그렇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김 선생 : 우리로 하여금 밤에 꿈을 꾸게 하는 그것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그것 - 神이라고 해야 할지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 과 규모는 다르더라도 같은 부문을 영위하는 동종의 존재라면 자네가 말한 轉位를 이 현실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네.
이군 : 어떻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알아듣기가 어려워져서요.
김 선생 : 여기까지 오면 어려울 게 없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차안此岸의 세계에서는 물질에 강세가 주어져 있다는 걸세.
이군 :........
김 선생 : 말하자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물질에 강조점이 있게 되며 반면 정작 우리가 찾아야 하는 정신적인 가치는 평소 사소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속에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나?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억지로 현실 해석에 갖다 붙인다면 말이야.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이론을 이런 식으로 남용하는 걸 달갑게 여기지는 않겠지만 말이네.
이군 : 예.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대저택과 화려한 의상과 귀금속,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따라붙는 온갖 찬사와 명성 속에 참된 가치가 있다기보다 가난하고 볼 품 없는 외관이라도 그 안에 찬찬히 들여다 볼만한 작지만 진실하고 아름다운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김 선생 : 너무 앞으로 나아간 듯하지만 또한 그 말도 맞네. 단 그렇더라도 물질적인 성대함이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닐 것이야. 거기에도 여러 요소가 중복 결정되어 세계 안에서 어떤 부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네.
이군 : 예.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프로이트 꿈 이론의 유비적 확장과 연관된 결정적인 질문이 남게 되겠군요.
김 선생 : 그건 또 무엇이지?
이군 : 꿈을 해석하여 그 외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듯 우리의 일생에 걸친 생활도 해석을 통하여 그 참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예컨대 꿈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부도덕한 성욕의 발현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현실적이고 평범하고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위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 현실도 그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중요한 어떤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아마도 우리가 얻고자 하는 지혜와 직접적인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김 선생 : 플라톤의 말대로 에로스가 우리의 주인이어서 그는 지상의 온갖 것들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한편 저 위 하늘의 사물들과도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지상의 온갖 것들을 추구하는 욕망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걸세. 거기에서 나와 사랑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즐기며, 승화를 통하여 학문과 예술에도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높은 지혜를 얻어야 하는지는 오리무중이라네.
이군 : 일단 아마도 사회 속에서 자라고 강화된 자아를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보거나 떨쳐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통상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또한 명백한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김 선생 :그럼 어떻게 그 한계를 넘는 것이 좋겠나? 묘안이라도 있나?
이군 : 저는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김 선생 : 어떤 식물이 거추장스러워 없애고자 할 때 잎과 가지를 쳐내면 잠시 시원스럽게 되겠지만 이내 또 자라나면 전과 마찬가지가 되겠지? 그러나 뿌리를 제거하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걸세.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이군 : 그럼 우리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는 말씀인지요.
김 선생 : 잠시 리비도를, 즉 性的인 욕망과 그로부터 변화되고 승화되어 이어져 나오는 일체의 사랑과 욕망과 그 결과물들을 떠나서 그보다 훨씬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이군 : 어떻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김 선생 : 이렇게 말이네. 자넨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동물들의 삶을 자주 보게 되지? 세렝게티와 마사이마라 평원의 얼룩말과 누우 떼, 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는 포식자들이나 북아메리카의 숲과 구릉지대에 사는 곰 같은 동물들 말이네.
이군 : 꽤 자주 보죠. 그들의 사는 모습이 흥미로우니까요.
김 선생 : 그럼 먹이가 풍부한 시기에 새끼들을 낳고 키우며 때가 되면 큰 강을 건너 새로운 초지로 이동을 하면서 밝은 햇살 아래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네는 “평화롭고 보기에 좋구나. 저들이 오래오래 본성에 따라 큰 고통 없이 삶을 이어나간다면 좋겠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군 : 꼭 같지는 않지만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더러 있습니다.
김 선생 : 그렇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그들과 한 식구가 되어 함께 그런 생활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게야. 보기에 좋다는 것과 바로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
이군 :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김 선생 : 그리고 그들 중 어미와 새끼가 서로 호응하며 들판을 달린다든가 먹이를 먹고 배가 부른 새끼들이 서로 뒹굴며 노는 모습을 보고는 자네는 마치 莊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듯이 그 동물들의 즐거움에 공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그들과 情을 나눈다고 말할 순 없을 게야. 그리고 위와 마찬가지로 그 생활을 동경하여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겠고.
이군 : 그렇습니다. 그들은 야생에서,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기 때문에요.
김 선생 : 한편 많은 경우엔 그들이 겪는 고난을 보게도 될 걸세. 사자와 치타에게 잡혀 먹이가 되는 새끼 영양과 누우를 보며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고 큰 강을 건너다 악어의 먹이가 되는 누우나 얼룩말을 보고 그 불운을 슬퍼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은 관련된 감정뿐 그들을 도와줄 순 없네. 설사 어떤 경위로 그들 가까이 우리가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자연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경고가 우리 마음을 붙잡게 될 걸세.
이군 : 예 저의 느낌도 대체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김 선생 :그렇다면 위에 이어 자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는가? “저들은 본능에 묶여있구나. 본능에 따라 代를 이어 살아가며 이런저런 고난을 끝없이 겪게 되는구나. 본능이란 굴레는 저들에게는 참으로 억센 것이라 저들 스스로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구나. 아니, 벗어나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도 있을 수 없겠으니...” 그리고 이런 생각과 함께 잠시나마 그들의 고난에 깊은 연민심을 일으킬 수도 있을 걸세.
이군 : 예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네요.
김 선생 : 그럼 위와 같은 감정과 사유가 어쩌면 리비도와는 상관없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위에서 前者는 자慈요 後者는 비悲로써 말이네.
이군 :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이 바로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 찾아낸 꿈의 원인과 같이, 꿈과 같은 현실을 사는 우리가 찾아내야 할 삶의 동기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 선생 : 아마도 그 마음 그대로는 아닐 게야. 예컨대 위와 같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도 닦음이 깊어진 사람들은 어쩌면 동물들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심정을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동물과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라고 이런저런 근거를 대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이군 : 그럼 그렇게 성숙한 자비심이 우리가 살면서 찾아내야 하는, 꿈의 원인이나 동기처럼 우리 인생에 숨겨진 요소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온갖 속된 삶의 목표나 그와 관련된 행위들은 그 숨겨진 요소를 가리기 위한 덧없는 스토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아가 그 자비심이 곧 우리가 찾는 지혜라고 생각해도 되겠는지요.
김 선생 : 자비심이 곧 지혜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나 아마도 지혜를 얻기 위한 조건이나 통로는 될 수 있을 걸세.
이군 :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김 선생 : 여기서 우린 다시 프로이트 박사의 이론을 남용해야 되겠네 그려.
이군 : 필요하다면 할 수 있죠. 주저하지 마십시오.
김 선생 : 자넨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정신분석 기법으로 신경증 환자는 치료하여 낫게 할 수 있지만 조현병과 같은 정신병 환자는 어렵다고 한 말도 알고 있나?
이군 :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 : 어째서 그렇다고 하는가?
이군 : 그것은 조현병 환자의 경우 리비도가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에 분석 중 리비도의 전이轉移가 일어나기 어려워 치료도 어렵다는 것이죠. 반면 신경증 환자의 경우에는 리비도의 외부 전이가 가능하므로 증상의 분석과 자각이 비교적 쉬워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이고요.
김 선생 : 그렇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프로이트를 끌어들여 시작한 논의를 다시 그의 이론을 지렛대로 삼아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신경증 환자는 아니지만 낮이나 밤이나 리비도의 일정한 영향 아래 있어 그로 인해 고된 삶을 이어가며, 지혜를 얻는 데도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번에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神이 의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의사가 되든지 말이네.
이군 : 예, 환자가 아닌 정상인의 치료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김 선생 : 그렇다면 신경증 환자의 치료에 리비도의 외부 轉移가 조건이듯이 진리에 대한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순수한 사랑이나 자비심이 그 조건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어떤가? 내 생각이 그럴듯한가?
이군 : 예, 그럴듯하군요. 다만.....
김 선생 : 무엇인가? 말하려는 것이.
이군 : 사랑이나 慈悲心은 결국 외부 대상에 대한 것일 텐데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지혜를 얻으려 하면서 그 조건으로 자비심을 강조한다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매우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자비의 대상보다는 자신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김 선생 : 그렇다면 내 물음에 한번 대답해 보게. 누군가 연말이 되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세. 그리하여 A는 얼마간의 재물을 보시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네. “이 보시가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저들이 춥지 않은 연말을 보내는데 보탬이 되기를...” 그리고 B는 같은 보시를 하면서 이렇게 기원했다네. “이 보시로 내 마음이 인색함에서 벗어나 좀 더 부드러워 지기를...”
자, 그렇다면 자네는 둘 중 누가 더 道와 관련하여 수승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군 : 예상치 못한 물음이라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로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김 선생 : 잘 들어두게. B가 더 수승한 걸세. B는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그것을 수정하려는 걸세.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온전히 내비친 A도 칭찬받을 만 하나 실은 道와 관련해서 B가 더 수승하다네. 만약 B의 기원이 이루어진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테니 B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그 의미의 실체가 사라지는 거지. 道와 관련해서는 이기적이라는 어휘의 의미가 없어지네. 그 이하에서는 그것이 꽤 부정적인 의미로 – 아마도 정당하게 – 사용될 수 있겠지만 말이네.
이군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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