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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매트릭스 3

김 선생 : 지난 우리의 대화와 관련해 오늘 자네가 다시 제기한 문제를 정리하여 요점을 말해볼 테니 한번 들어 보게.
자네의 얘기는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예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나?
A 전자회사의 직원들이 한 식당에서 망년회를 한다고 하세.
그들은 한해의 영업실적을 자축하며 그동안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해에는 더욱 분발하여 업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을 결의한다고 하세.
그리고 식탁에는 술과 갈비, 삼겹살 등 푸짐한 안주를 놓고 서로 술잔을 들어 위하여!’ 하고 소리높이 외치며 흥을 돋우고 있는 걸세.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업무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직원 간에 오해를 털어내고, 우애와 협력을 돈독히 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고 능률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도모하려고 하는 걸세.
그래서 직원들은 허리띠를 풀어놓고 부담 없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으며 재미있는 대화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걸세.
이 경우에 술과 고기는 좋은 것으로 직원들에게 있는 것일세.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것이냐 하면 단순히 그들이 그때 좋아하니까 좋은 걸세.
다른 의미는 일단 제외하세.
A 전자회사의 직원들에게 있어 술과 고기는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는 걸세.
이해할 수 있겠지?

이군 : , 이해합니다.

김 선생 : 그런데 그 때 식당 홀 한 구석에 한 사람의 수행자 - 또는 수행자가 아니라 일반인 중의 한 명이라도 무방하지만 - 가 국수로 요기를 한다고 하세.
그리고 그는 A 전자회사의 직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멀찌감치 앉아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세.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 술을 마시면 이성과 판단기능이 약해져 사고를 예리하고 분명하게 진행시킬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술을 마시는 당사자는 적당히 마셨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자신의 정신활동이 더욱 활발하고 개방적으로 되었다고 느낄 수 있으며, 계산과 판단, 논리적인 사고 등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본래 역량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더할 수도 있다.
아주 짧은 순간 술은 우리에게 어떤 만족을 주긴 하지만 그 외에는 후유증과 고통이 너무 크므로 가급적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육류의 과다한 섭취는 미각을 통한 쾌락을 동기로 다른 불필요한 욕구를 증진시키므로 마음을 들뜨게 하는데 한몫을 할 것이다.
건강을 위하여 반드시 먹어야 한다면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될 일이다.
불필요한 육류의 섭취는 내 육신에 역시 불필요한 군더더기 살을 붙여줄 뿐이다.
그런 살이 붙음으로 해서 내 정신이 덩달아 훌륭해진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나 그렇지 않다면 육류의 섭취는 불필요한 짓이며, 고기를 먹기 위해 돈을 더 벌어야 하는 피곤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식사의 양과 질은 육신을 유지하는데 알맞은 정도면 좋은 것이며, 따라서 나는 배고플 때 먹는 이 국수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
어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가능한 일이죠.

김 선생 : 그때 A 전자회사 직원들이 먹는 그 술과 음식이 수행자에게는 좋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걸세.
대신 그에게는 간단한 그 국수가 좋은 것으로 있게 될 걸세.
물론 여기서 그 수행자는 그렇게 편협한 사람은 아니므로 술과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 보거나 적대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단지 그는 그런 음식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자신을 위해 먹지 않을 뿐이네.

이군 : 그도 마땅히 그래야할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럼 여기서 그 수행자에게 국수는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지만 술과 고기는 좋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런가 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 수행자가 술과 고기는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국수는 좋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달리 더 특별히 말할 만한 이유는 없지만 있다 해도 일단 제외하세.
반대로 A 전자회사 직원들에게 술과 고기는 좋은 것으로 있지만, 만약 그런 음식을 모조리 빼고 국수만 놓고 망년회를 한다고 하면, 직원들은 그 음식을 전의 것보다 좋아하지 않을 걸세.
그리고 그런 망년회는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네.

이군 : 그야 그렇겠죠.

김 선생 : 그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것이네.
한 쪽이 좋다고 간주하는 사물(, 고기)을 다른 쪽은 좋지 않다고 여기고, 오히려 그와 뚜렷이 대비되는 다른 사물(국수)을 좋은 것으로 간주할 경우, 각각의 사물은 모두 좋음에 참여하여 각자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지만, 그 때 이 좋음()이란 이데아를 어떻게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말이네.
자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위 두 가지 중 한쪽을 선으로, 다른 한 쪽을 악으로 놓는다면 - 물론 이것은 가정일 뿐이네. 실제로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닐세. 그건 무모하고 지금의 논의에서는 불필요하니까 - 대체, 좋음(의 이데아)이란 무엇이기에 선과 악의 양편에 동일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일까 하는 점이 자네가 가지고 있는 의문이겠지?

이군 : 그렇습니다. 실로 정확하게 제 의문을 집어내셨습니다.

김 선생 : 그런가? 그럼 문제를 더욱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 다른 예를 또 한 번 보세.
예시를 반복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자네에게 동생이 하나 있지?
그 동생이 단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컴퓨터 게임도 그렇게 좋아한다지?
그래서 항상 과자나 사탕, 케이크 같은 먹거리를 옆에 두고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간식으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식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편식으로 인한 영양의 불균형이 걱정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게임에 대한 지나친 몰두로 공부에도 지장이 있을까 염려되고, 건강에도 나쁘지 않을까 하고 식구들이 걱정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자네는 동생에게 간식보다는 식사를 제때 할 것을 주문하고, 게임보다는 가벼운 운동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그 녀석 때문에 골치 아픕니다.

김 선생 : 그 경우에 사탕이나 케이크, 그리고 게임은 자네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일세.
반면에 정상적인 식사나 운동은 그보다 좋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일세.
하지만 자네나 식구들에게는 그와는 반대로 정상적인 식사가 좋은 것이며 지나치게 단 것들은 좋지 않은 것일세.
그리고 역시 적당한 운동이 좋은 것이며, 하루 종일 하는 게임은 좋지 않은 것일세.
이 경우에도 케이크나 사탕, 그리고 게임은 좋음에 참여하여 자네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일세.
반면에 같은 관점에서 자네나 식구들에게는 정상적인 식사나 운동이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게 되는 걸세.
여기서 위의 경우와 같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네.
일단 육신의 건강이라는 점을 기준으로 할 때, 케이크나 사탕이나 과도한 게임을 악이라고 가정하고, 그 반대의 것들을 선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양측이 모두 좋음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네.
, 좋음(의 이데아)이 선과 악 양측에 함께 관여하고 있는 걸세.
이때 이 좋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자네 의문인 걸세.
좋다는 것으로 표시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 말이네.

이군 : 역시 정확한 분석입니다.

김 선생 : 그럼 나머지 경우들을 한 번 더 둘러보세.
테레사 수녀가 평생 빈자들을 돌본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그녀가 생각해서가 아니겠는가?
빈자나 약자들을 돌보는 행위가 좋음에 참여하여 그녀에게 좋은 것으로 있었던 것이며 그녀는 평생 그런 좋은 행위를 실천하여 그녀 자신도 스스로 좋음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가 좋은 사람으로, 또 그녀의 생활이 좋은 일생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겠지요.

김 선생 : 반면에 어떤 건설회사는 빈민들의 집을 모조리 부수는 경우도 있을 걸세.
거기에 아파트를 짓거나 다른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말이네.
빈민들은 때로 데모를 하거나 격렬히 저항하기도 할 걸세.
그 경우에 회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나?
사업의 원활한 집행, 건축물의 완성, 분양, 수익의 달성, 회사의 보존이나 확장 등이 그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 목표를 위해서 빈민가를 철거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이 될 걸세.
이 경우에도 빈민들의 항의를 무시하고 철거를 강행하는 것은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일로 그들에게 있는 것일세.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국회의원에게 그 돈은 최소한 그 당시에 그에게는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었던 걸세.
그 돈이 당시 좋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가 받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 일체의 모든 사물이나 행위가 누군가에게 좋게 여겨질 때는 그것이 좋음 자체에 참여함으로서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일 뿐, 그 사물이나 행위가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김 선생 : 아름다움도 올바름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사물이나 행위도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며, 그것이 그렇게 보일 경우에는 단지 올바름 자체나 아름다움 자체에 참여해서 그렇게 있는 것일세.

이군 : 역시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자네는 이 세상에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 경우에 따라 선한 행위도 있고 악한 행위도 있으며, 때로는 선하게(좋게) 생각되는 사물도 있고, 때로는 악하게(나쁘게) 생각되는 사물도 있는 것인가?
건강에 좋거나 건강에 나쁜 사물이나 행위도 있고, 도둑질과 같이 법에 저촉되는 나쁜 행위가 있는가 하면, 기부나 장기 공여나 자원봉사처럼 대중이 흐뭇하게 생각하는 좋은 행위도 있는 것인가?

이군 :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김 선생 : 그리고 그 중에 비록 악한 것들이라도 행위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좋은 것으로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나?
건강에 나쁜 사탕도 그것을 즐겨 먹는 아이에게는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며, 대중의 지탄을 받는 불법 정치자금도 그것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그 당시 좋은 것으로 있었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도 바로 그 당시에 도둑의 눈에는 그 물건이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훔칠 만큼 좋은 것으로 있었던 걸세.
그리고 그 모든 경우에 좋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단지 좋음 자체에 참여함으로써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악인 또는 어리석은 이가 좋게 보는 사물도 좋음에 참여하여 그렇게 있는 것이고, 선인 또는 어질거나 현명한 자가 좋게 보는 사물도 역시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그렇게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자네의 의문이자 딜레마가 될 걸세.
어떤 가? 자네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이군 : 그렇습니다.
더 할 나위 없이 제 의도를 잘 짚어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선생 : 난 아무래도 자네의 탐구정신을 다시 한번 칭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네.

이군 : , 아 괜찮습니다. 개 이야기는 한번으로도 족하니까요.

김 선생 : 그래?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칭찬은 보류하지.
하지만 이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해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벅찬 일이네.
단지 의미 있는 한 가지 구별에 의해 설명을 시도해 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네.
자네는 플라톤이 대화편 소피스트의 후반부에서 스승인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뒤엎고, 비존재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군 :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 : 그럼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내 질문에 차례대로 대답해 보게.
중요한 이데아에 다섯 가지가 있네.
있음(존재), 운동, 정지, 같음(), 다름()이 그것들 일세.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 사물이 있음(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에 있는 걸세.
그리고 어떤 사물이 움직일 경우 그 사물이 운동(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며, 정지해 있을 경우, 정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런 걸세.
또 어떤 사물이 같다고 말할 경우 그 사물이 같음(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고, 다르다고 말할 경우 다름(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에 다른 걸세.
여기서 다름은 있음과 마찬가지로 만물 위에 고루 분포하고 있네.
그리하여 만물이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또한 서로 다르게 되는 걸세.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이데아에는 위의 다섯 가지 말고도 좋음, 아름다움, 올바름, 빠름, 느림, , 작음 등 여러 가지가 있었네.
그럼 다름(의 이데아)이 기타 이데아들과 감각적인 사물 등 만물 위에 고루 분포한다고 했을 때, 그 중 특히 아름다움(의 이데아)과 관련된 다름의 일부분을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는가?

이군 : 아름답지 않은 것, 또는 다른 아름다움, 아름다움과는 다른 것, 非美 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럼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야 할 때, 아름다움 이외의 모든 사물 중 아무거나 거기에 갖다 붙여도 된다는 말인가?
예컨대, 그것에 물, , 책상, 토끼, , 야채, 올바름 등등 아름다움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해당된다는 것인가?

이군 : 그렇진 않습니다.
그것은 다름의 일부분이므로 분명 다른 것이긴 하지만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다른 것입니다.
, 아름다움(의 이데아, 아름다움 자체)과 다른 것이므로 아름다움 자체는 아니지만 아름다움 자체에서 전혀 아름답지 않음까지 일련의 계열 중 한 부분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선생 : 그러네, 아마도 자네 말이 옳을 걸세.
이해가 쉽도록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네.
아름다움과 다름이 교집합을 이룬다고 말일세.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교집합에 있어 겹치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걸세.
그럼 그 겹치는 부분도 이데아라고 불러야 하겠지?
그것은 아름답지 않음의 이데아이며, 거기에 참여하는 사물은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있게 될 걸세.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이건 여담이지만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예를 또 살펴보세.
다름(의 이데아)이 달과 관련될 때 거기 있는 다름의 부분이 현실적으로 무엇이 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군 : 위 아름다움과 같은 경우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달은 아니지만 달과 유사한 것, 또 달처럼 보이지만 달은 아닌 것, 달과 가장 달처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어떤 것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예컨대, 호수나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그것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렇군. 자네의 순발력은 참으로 뛰어나네.
그럼 달그림자는 달은 아니지만 달을 닮은 것일세.
그리고 만약 달을 있는 것이라고 - 달답게 있는 것이라고 - 못 박아 말하면 달그림자는 달과 같은 의미에서 있는 것은 아닐세. 그것도 어쨌든 달의 형태로 있는 것이긴 하지만 달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럴 경우에 - , 달을 있는 것의 기준으로 할 경우에 - 달그림자는 있지 않은 것, 또는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될 테지?
그러나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결코 는 아니네.

이군 :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비존재의 일종이 될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러나 여기서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즉 이번엔 만약 달그림자를 어떤 점에서 달답게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어떻게 되는가?
, 있음의 기준을 바로 그 어떤 점이라는 그 점에 둔다면 말일세.
그때는 반대로 달이 있지 않은 것으로 될게 아닌가?

이군 : 그렇습니다. 논리상 그렇게 되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김 선생 : 흐흠……. 자네는 현실이 논리에 의해 뒤집힐까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 같군. 염려 말게.
달을 관찰하기 위해서 망원경을 달그림자로 향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말이네.
그리고 달을 탐사하기 위해 로켓을 쏠 때도 달그림자에 대고 발사하지는 않을 테니 맘 푹 놓게.
아니, 하기야 그림자를 실체보다 더 아끼는 듯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이군 : 그게 누굽니까?

김 선생 : 과거에 중국에서 詩仙이라 불렸던 이 태백 말일세.
전설에 불과한지 모르지만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러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 죽었다고 전해지지 않는가?

이군 : 과연 그렇군요. 항상 예외는 있는 가 봅니다.

김 선생 : 그럼 여기서 위 달과 달그림자가 서로 엇바꿔 가며, 있음 그리고 있지 않음과 관계를 맺었듯이 아까 얘기한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도 그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
아름다움(의 이데아)을 그대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의 이데아)과 같은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그보다 못한 것일세.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만약 아름답지 않음(의 이데아)을 어떤 점에서 아름다움이라고 간주하면 - , 바로 어떤 점이라는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유사성이 될 테지만) -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고, 아름다움(의 이데아)은 이제 반대로 그보다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될 걸세.

이군 : 역시 억울하지만 논리상 그렇게 됩니다.

김 선생 : , 그럼 이제 본래 자네가 제기한 오늘의 문제로 돌아가세.
자네가 말하는 것은 선과 악의 양측에 똑같이 좋음의 이데아가 관여한다고 말할 경우, 그 좋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들로 미루어 그에 관해 어떤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이군 :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문제는 그것이었고, 대답도 대강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마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따라온 만큼 끝까지 잘 따라가 볼 테니까요.

김 선생 : 그러세,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다름(의 이데아)이 좋음과 관련될 때 그 다름의 부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나?

이군 : 좋지 않음, 좋음과는 다른 것, 다른 좋음 등으로 부르면 될 것입니다.

김 선생 : 그것도 역시 이데아에 속하는 것이겠지?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그럼 자네의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생각하게.
A 전자회사 직원들에게 술과 고기는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국수가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네.
반면에 그 수행자에게 술과 고기는 좋지 않음에 참여하여 좋지 않은 것으로 있지만, A 전자회사 직원들에게는 국수가 좋지 않음에 참여하여 좋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일세.
, 후자의 경우 지금까지 우리 논의에 따라 좋음에 다름이 개입되어 그리 된 것이라고 간주하면 되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지만, 위에서 말한 달과 달그림자,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의 예에서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있음과 있지 않음, 또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의 여부가 갈라졌듯이, 이번에도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네.
좋음(의 이데아)을 그대로 좋음으로 간주하면 좋지 않음(의 이데아)은 참되지 못한 좋음, 다른 좋음이 되네. 반면에 이번엔 좋지 않음(의 이데아) - , 다름이 개입된 좋음 -을 어떤 점에서 좋음으로 간주하면 그것은 어떤 점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못지않은 좋음이며, 정작 좋음(의 이데아)은 그보다 좋지 않은 것으로 되는 걸세.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군 : , 그럭저럭 따라가고 있습니다.

김 선생 : 그럼 다음은 알기 쉽게 이렇게 생각하게.
술과 고기, 그리고 국수가 모두 좋음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어느 한 쪽은 좋음(의 이데아)을 좋음으로 간주한 그 기준에 따른 좋음에 참여하여 당사자에게 좋은 것으로 있지만, 나머지 한 쪽은 좋지 않음을 어떤 점에서 좋음으로 간주한 그 기준에 따른 좋음에 참여하여 당사자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일세.

이군 :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제가 제기한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군요.

김 선생 :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과연 어느 쪽이 정말 좋음(의 이데아)을 기준으로 한 좋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어느 쪽이 아닌지를 구별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을 걸세.
그건 역시 무모한 짓이기도 하며, 현재로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네.
우리는 같은 어휘(좋음)에 참여하는 극단적인 양자가 어떤 경로로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점만을 밝히면 되지, 그것들 중 어느 쪽이 실제로 참인지, 또는 참에 가까운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니 말일세. , 가치관은 일단 배제하는 걸세.

이군 :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고로 누군가 선생님을 도덕적 상대주의자 등으로 취급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김 선생 : 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걸세.
구체적으로 무엇이 올바르고 참인가를 서둘러 규정짓지 않더라도, 철학을 꾸준히 그리고 순수하고 올바르게 계속한다면 어떤 것이 올바르고 참인지는 스스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일세.

이군 : 알겠습니다.

김 선생 : 그리고 위의 경우에 우리가 서로 다른 두 경우를 선과 악으로 놓고, 한 쪽을 원래의 좋음에 참여한 것으로, 다른 한 쪽을 좋지 않음을 어떤 점에서 좋음으로 간주하는 그 기준에 따른 좋음에 참여한 것으로 놓는 것은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지, 어느 경우든 꼭 그렇게 양극으로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네.
다른 복잡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논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능력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될 걸세.
또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대중이 그렇게 판단하는 정도의 것이라고 여기면 될 걸세.
이 점은 다음에 이어 말하는 모든 예에서도 통하는 걸로 하세.

이군 : , 선생님께서 단지 다른 경우들의 차이만을 염두에 두시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김 선생 : 그럼 계속해서 다음 예를 설명해 보기로 하세.
자네 동생의 경우, 대립되고 있는 것은 사탕이나 과자, 케이크와 같은 간식과 지나친 게임이 한쪽이고, 정상적인 식사나 적당한 운동이 다른 한쪽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 경우에 한쪽은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고 다른 한쪽은 다른 식구들에게 좋은 것으로 있으며, 또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은 다른 식구들에게는 좋지 않은 것으로 있고, 다른 식구들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은 동생 자신에게는 좋지 않은 것으로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나?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그럼 이번엔 지금까지의 내 설명을 토대로 자네가 직접 설명해 보게.

이군 : , 정상적인 식사와 운동은 좋음(의 이데아)에 참여하여 식구들에게 좋은 것으로 있지만 간식과 게임은 좋지 않음(의 이데아)을 어떤 점에서 좋음으로 간주한 그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동생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점이란 일종의 유사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좋음(즉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 좋지 않음이 좋음으로 간주된 경우)은 그 자체로는 좋음(의 이데아)에 못지않게 좋은 것이며, 단지 좋음(의 이데아)과 정당하게 비교될 경우에는 좋지 않음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김 선생 : 아주 훌륭한 답변이네.
더 이상 내가 뭐라고 덧붙일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지.
하지만 자네는 동생의 취향을 본래 좋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식구들의 간섭을 좋은 것으로 단정하고 있군.

이군 : 저도 선생님께서 단정적인 독단을 가급적 피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저와 같이 말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상식이 있는 어른과 지각이 없는 아이는 아무래도 그만한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김 선생 : 그렇지, 자네 말이 옳다고 하세.
그럼 나머지 경우도 모두 합쳐서 결론을 말해 보게.

이군 : 테레사 수녀의 경우나 건설회사의 경우는 그렇게 선과 악의 양극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아마 좀 더 깊은 탐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그런 탐구가 필요하다면 말씀입니다.
현재의 저로서는 다름(의 이데아)이 좋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아마도 올바름까지 포함해서 모든 이데아와 사물에 걸쳐 있으며, 그런 관여로 말미암아 좋지 않음, 아름답지 않음, 올바르지 않음 등의 이데아가 있게 되고, 때로는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 좋은 듯이 보이는 좋지 않음, 아름다운 듯이 보이는 아름답지 않음, 올바른 듯이 보이는 올바르지 않음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는 것으로도 다른 탐구의 여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사실을 경험으로부터 충분히 확인하게 되기까지는 가급적 그와 관련되지 않는 다른 탐구는 보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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