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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善, 포용력과 능동성

그동안 을 두 번 요청하였는데

한 번은 그로 인하여 을 구하였고

또 한 번은 를 구하였네.

이제 돌이켜 한 번 더 구하매

그 속성은 포용력과 을 향한 능동성이요,

조건은 이라

이 까다로운 자를 어찌 생각하실지…….

 

이군 :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날씨도 추운데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김 선생 : 나야 그럭저럭 잘 지내지. 자네도 얼굴이 괜찮군. 그런데 자네가 도 쓰는 줄은 몰랐어.

 

이군 : , 그건 그냥 생각이 떠올라 한번 써본 겁니다. 시라고 내놓기도 좀 그렇죠.

 

김 선생 : 그래 좋아, 그래도 아무튼 내겐 범상치 않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 듯이 보이네.

괜찮다면 자네의 시에 대해 해설을 좀 해주게, 시란 풀어놓으면 긴 말이 될 사상을 압축시켜 묘미를 갖게 하는 것이라 재능이 없는 사람이 보기엔 선뜻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은가?

 

이군 : , 그러시다면 해설이라기보다 제가 당시에 떠오른 생각과 일어났던 일을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에 대해 선생님께서 무슨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周易을 읽으며 음양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제게 의 기운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많고 분석적이긴 하지만 動적이기 보다는 靜적인 경향이 강하고 행동하기보다는 관찰하는 유형이라 아무래도 적극적인 면을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제 입으로 내겐 이 필요해하고 몇 번 되뇐 적이 있었죠. 그러고 나서 곧 그 상황을 떠나 잊어버렸는데 그 후로 한동안 평상시와 달리 제게 적인 욕구가 몰려와 진화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당시에는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하다 다시 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역시 이 필요해하고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전에 없던 욕구가 다시 생겨났는데 이번에는 제 차를 좀 더 좋은 걸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제 안에서 뜨겁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금 타는 차가 배기량이 너무 적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말씀이죠. 그러나 어쨌든 첫 번째 경우보다는 어렵지 않게 그 욕구를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원래 실제 필요 이상의 물건에는 무심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런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짤막한 시의 형식으로 위 와 같이 써 본 것입니다.

 

김 선생 :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으면서 난 지금 알라딘의 마술램프가 아니면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군 : 글쎄요, 저도 좀 의아스럽긴 합니다만…….

 

김 선생 : 좋아, 어쨌든 자네 말은 알아들었으니까. 자넨 말하자면 두 번의 고난을 치른 셈이로군. 다른 사람이라면 거의 평생을 함께 할 욕심을 자네는 비교적 단기간에 강렬하게 체험하고 그것을 자네의 관점에서 극복한 듯이 보이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자네는 어째서 세 번째로 기원을 하게 되었나? 두 번의 고난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이군 : 저는 플라톤이 말한 바, “우리에게 명예란 더 나은 것들을 따르되, 한층 못한 것들이기는 하나, 더 좋아질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좋아지도록 하는 바로 이 일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생활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배우고 노력하되, 한편으로는 능력이 되는 한 주변을 도와가며 부단히 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제게 능동성이나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다시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난 두 번의 방향착오는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말입니다.

 

김 선생 : 알겠네. 자넨 매우 고귀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그래. 그래서 한 번 더 을 구하되 그 속성은 포용력과 을 향한 능동성이라고 한 거지?

그런데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엄밀하게 규정된 말은 단 한 가지 오직 그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만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결국 복수의 사물이나 상황을 가리키게 된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이군 :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김 선생 : 자네는 플라톤의 말을 빌려 자네의 고상한 의도를 표시하고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내면적인 욕구의 속성을 규정했네.

그러나 생각해 보게, 누군가 여인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에는 포용력과 을 향한 능동성이 없는가? 내 생각에는 그 사랑 안에도 자네가 언급한 그 속성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 같네. 그것이 없다면 그 사랑이 정신을 포함한 것이든 단지 육체만의 것이든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걸세.

또 두 번째 경우의 자동차에 대한 소망도 마찬가지네. 자네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걸세.

그리고 소유하고자 하는 상태로부터 을 향한 능동성이 발휘되어 실제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자네가 세 번째로 기원을 했더라도 다시 첫 번째나 두 번째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이군 : ,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 때문에 제가 단서를 달았죠.

조건은 이라고 말씀입니다.

 

김 선생 : 자넨 매우 교묘하게 요구했군 그래. 그럼 더해서 말해 보게 그 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군 : 쉽게 말해서 그것은 물질에 대하여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제 자신의 정신적인 상태가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하게 - 하게 -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포용력과 능동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호연지기, 호방함, 우애, 지혜로움과 같은 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죠. 자동차나 연애의 즐거움보다는 말씀입니다.

 

김 선생 : 요즘 같은 때 자네 같은 사람도 쉽게 보진 못할 걸세. 어쩌다 생각이 그 높은 곳까지 미쳤는가?

그런데 이 사람아, 만약 자비로운 이 하계를 굽어보다가 자네를 발견하고 그 뜻을 갸륵하게 여겨 자네가 기원하는 그런 을 하사한다면 자네는 그야말로 횡재를 하는 셈이겠지만,

그와는 달리 이번에는 예컨대 은 아니지만 과 유사한 존재가 있어(그에게는 장난 끼가 있다) 자네를 재미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이군! 자네는 술을 좀 마시지? 술이란 적당히만 마시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윤활유와 같은 구실을 한다네. 술은 소심한 사람을 대범하게 만들어 주고 의기소침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사이가 서먹한 사람들에게는 우애를 심어주지. 자네도 알다시피 서로 싸워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사이의 동료들 간이라도 술잔을 앞에 놓고 화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네. 그리고 자네가 정신을 강조하니 하는 말이네만 술을 적당히 마신 사람의 정신 상태는 어떠한가? 그 호방함과 넓은 마음, 그리고 웬만한 건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포용력, 사람에 따라서는 평소에 비해 말도 조리 있게 잘하게 되니 그는 술을 마시기 전보다 지혜로워진 것이 아니겠나?

, 술을 적당히 마신 사람은 마시기 전보다 훌륭한 정신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의 세 번째 기원에 대해 내가 술을 찾는 을 보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이렇게 말한다면 자네는 뭐라고 답변하겠는가?

 

이군 : 절대 안 받겠다고 해야죠.

 

김 선생 : 그러나 그의 말로 보면 자네가 조합해낸 어휘가 가진 의미는 충족하지 않았는가?

술을 찾는 것은 술에 대한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요, 슈퍼에 가서 술을 사와 마시는 것은 을 향한 능동성이 발휘된 것이고 적당히 마신 후의 정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군 : 어쨌든 그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궤변에 속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 선생 : 지금 자네가 이처럼 견고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나?

자네가 조합해낸 어휘의 힘인가?

 

이군 : .…….

 

김 선생 : 그 장난 끼 많은 존재가 이번엔 술이라는 단어를 전혀 입 밖에 내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내게는 (좋음)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이 있어 누구든 그 양을 받아 사용하기만 하면 기나긴 노력과 고난과 분투가 없이도 현자가 될 수 있으며, 용기 있는 자도 될 수 있으며, 호방한 대인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며,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누가 이것을 받아 지니겠는가, 자넨가?”

 

이군 : 저는 그렇게 쉬운 방식으로 그렇게 훌륭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렇겠지, 아마도 자네가 理性을 가지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양식을 지니고 있을 때는 분명히 그럴 걸세. 그러나 자네가 오로지 포용력과 을 향한 능동성이라는 말이나 그에 따른 느낌만을 가슴에 새기고 그로 인하여 좋은 정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뿐 그 외 이성적인 헤아림이나 분별력이라고는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나?

 

이군 : 어이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김 선생 : 그럼 지금과 같은 예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겠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어휘로 사물이나 가치를 한 가지로 규정하려 할 때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그 어휘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것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걸세. 그렇다면 그 와중에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어찌해야 하겠나?

지혜(사려분별)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분별력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갈 자산이라 생각되지만 자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군.

 

이군 : 저도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술을 제안한 그 존재의 말은 그 자체로 보아서는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리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분명 기만하는 말인 줄 알겠지만 말만 들어서는 그럴듯하게 생각되기도 하니까요.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 따져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 선생 : 다른 점은 뒤로 미루더라도 거기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는 그가 ‘적당히’라는 단어를 그야말로 적절히 교활하게 사용하고 있는 걸세.

예를 들어 그가 술을 적당히 마신 사람의 정신 상태는 어떠한가?’ 하고 말했을 때 그 문장 속의 적당히는 실제 술 마시는 행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네.

우선은 언제나 매번 일정량의 술을 마신다는 의미로써 적당히이고 다음은 기분이 가장 좋아질 때까지 마신다는 의미에서 적당히 일세.

그 존재는 아마 두 번째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을 걸세. , 기분이 적당히 좋아질 때까지 술을 마시면 마시기 전보다 훌륭한 정신 상태가 된다는 말일세. 여기서 술을 적당히 마신 정신 상태가 실제로 훌륭한 정신 상태인지 아니면 마시는 자에게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인 상태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고, 술을 적당히 마실 경우 일단 실제로 훌륭하게 된다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세.

중요한 점은 실제로 술을 마실 때마다 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로 되려면 마시는 술의 양이 점점 늘어나야 한다는 점이라네. 그런데 자네나 누가 그의 말을 처음 듣고 언뜻 해석하기로는 적당히란 매번 일정량의 술을 마시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네.

적당히란 단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말하고 들으면서도 전체 단락의 의미는 피차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기서 기만이 생겨나게 되네.

결국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적당한 정신 상태를 위한 음주량은 늘어날 것이며 나중에는 그 육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정신도 아울러 피폐해질 걸세.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존재의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전체적으로 파악함에 있어 시간에 따른 상태 변화와 음주로 인한 훌륭한 정신이 자신과 주변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은 무엇인가를 자네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일세.

, 자네는 가능하면 사태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을 그에게 던져야 하는 걸세.

예를 들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음주량과 시간의 추이에 따라 그의 정신 상태는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 정신의 훌륭한 상태는 어느 정도 지속되는가? 그 훌륭한 정신은 우리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며 음주 반대자들은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술을 마시는 당사자가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점들을 모두 파악하고 난 뒤에야 그의 말이 진실로 그럴듯한 이야기인지 아닌지가 제대로 판단되겠지만 말의 외양과 첫 느낌만으로는 그 정체를 알기 어렵고 상대방의 의도가 진실되지 못하다면 기만당하기 쉬운 걸세.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자네가 플라톤의 말대로 그렇게 명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자네가 주변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부터 자네의 있는 陽氣를 발휘해 보게.

당분간만 지속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생각보다 빨리 자네에게 원하는 이 모일 걸세.

마치 은행이자가 복리로 불어나듯이 말이네.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이며 외부로부터 위험스러운 을 불러들이는 주문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네.

 

 

*** 위 플라톤의 말은 대화편 법률(박종현 역주) 제 5권 728C에서 인용

*** ()의 개념에는 이야기 전개를 위한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 있음

*** 마지막 단락은 일이 쉽게 풀릴 듯이 썼지만 실제로는 험난한 일이다.

夫乾天下之至健也 德行恒易以知險, 夫坤天下之至順也 德行恒簡以知阻

대저 건()은 천하의 지극히 굳건한 것이니 덕행은 항상 쉬움으로써 험난함을 주관하고,

대저 곤()은 천하의 지극히 유순한 것이니 덕행은 항상 간략함으로써 막힘을 주관한다. - 주역 계사전 12장에서 -

 

 

우우 ㅋㅋ잼 있는 詩...그대의 체험 그대로군.....호연지기와 酒....어려운 듯하면서도 이해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좋은 일들로 이어지는 나날들이길...... 2010.08.23 19:39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재밌다니 다행이야, 호연지기라는 것이 있다면 李君같은 젊은이에게 있겠지. 우우, 자네에게는 호연지기라는 것이 있는가, 혹시 젊은 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세파에 쓸려나가 남아있지도 않은가? 2010.08.24 22:59

 

우우 글쎄다. 나에게도 청춘이 있었는지. 지금은 의심(숙제)과 세속 속에서 세월만 축내고 있는 식충이가 아닐는지......이 웅덩이를 벗어날 때가 있겠지? 2010.08.25 19:03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누구에게나 청춘의 강은 있었겠지, 그 급류를 어떻게 헤치고 나왔는지 사연도 각자 간직하고 있을 거고…….

그런데 자네가 여태 웅덩이 속에 있었나? 내가 생각하기 론 외형상으로는 자넨 크게 걱정할 일이 없는 것 같고 가장으로서의 부담도 많이 경감되어 자네가 좋아하는 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데도 큰 문제가 없지 않나? 무엇이 자네의 웅덩이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군. 2010.08.25 20:08

 

우우 그으래,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할 만치 캄캄한 소년 시절의 터널을 지나 술과 시로써 달래 왔던 청년기의 몸부림......그리고 닥쳐온 숙제들......평균 1년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정신적 문제들......아무튼 이젠 서서히 알아차림(sati)을 통해 나도 불퇴전까지 가봐야지^/~ 2010.08.27 18:55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내가 듣기론 아무도 자네에게 숙제를 내준 사람은 없지 않나?

삶의 구체적인 목표가 "좋은 생활"이라면 거기에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겪을 수밖에 없거나 감당해 내야 할 고통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지. 그러나 완전히 무의미한 고통이라면 그런 것을 짊어지고 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지 않을까? 어느 쪽인가? 보다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스스로 숙제를 만들고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훗날 상응하는 이 보장된 숙제와 고통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네의 의지와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피하지도 못하고 당해야만 하는 숙제와 고통인가? 2010.08.28 22:35

 

우우 글쎄요다...대자연이 나에게 숙제를 준 것 같고....이젠 내가 숙제를 선택해 즐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어떤 사람은 전생에 내가 만나야 할 일을 만났을 뿐이라고도 하고....아무튼 지금 현재로선 sati(알아차림)에 몰두를 해야 할 때......^,^ 2010.09.01 20:53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그런가? 자네에게 편한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좋겠지. 지도법사에게도 자주 자네의 상황을 알려주거나 묻고,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내게도 좀 전해주게2010.09.02 22:18

 

우우 속편이 왜 안 실릴까를 생각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존경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만 합니다.

 

살아가는 것

숨을 쉰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

말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두가 너무나 감사하여

 

오늘 밤에는

한밤을 지새우면서라도

실컷 울어야겠습니다.

 

---살아있는 당신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11.03.25 11:02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잘 지내나? 그런데 나이 어린 시인 지망생이 쓴 것 같은 시구는 누구의 작품인가? 자네의 글이라면 아마도 2011년의 봄기운이 자네를 잠시 감상적으로 만든 모양이군.

위빠사나 수련생, 우우 잘 알아차리게나 !

이 세상에 당신보다 소중한 것은 각자 자신의 혼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할 걸세.

난 당분간은 글을 올릴 생각이 없네.

미리 글을 쓰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게 조금 피곤해서 그렇다네. 생활 속에서 충분히 검증한 뒤에 남은 걸 써야 할 것 같아. 2011.03.26 14:32

 

우우 무상(無常)한 내가 때로는 자네를 존경하고

때로는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 같다면

백곡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 하실는지......()... 2011.03.26 21:44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자네가 무상하다면 그런 자네에게서 나오는 존경심이나 그리움 또한 무상한 것이 아니겠나?

어쨌든 지나치게 흐르지만() 않는다면 자네의 호의에 감사해야지. 2011.03.27 19:31

 

우우 이제야 "논어 집주 대전"을 펼치고 있네....

5월에 사놓았는데... 하루에 한 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을 듯...

여여하신가. 백곡 선생?

그리움의 물방울이 하나 둘 고이는 듯 하이.

냇물이 되면 보아야겠지?..._()_... 2011.12.17 06:05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잘 지내나? 난 요즘 전에 읽다 남겨둔 초기불전을 읽고 있네.

자네 말대로 냇물이 불어날 때쯤 보세.

그리고 그때까지 부지런히 읽고 궁리해서 각자의 생각을 나누어보도록 하세나. 2011.12.17 23:20

 

우우 "논어 집주"를 펼칠 때면 적어도 두 번에 한 번쯤은 백곡이 떠오르는군.

이제 70쪽을 지나고 있는데, 모르는 게 태반...

그래도 재미는 상당하다오.. 소개해준 그대가 고마우이..._()_

명절은 잘 보냈겠지?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있다오.

복 많이 지으시는 나날이길 2012.02.05 19:03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재미있다니 그것으로도 좋지만 먼저 모르는 부분을 스스로에게 묻게!

어떻게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묻는 것인가?

논어 무슨 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 주자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그에 대해 유학자 아무개는 다시 이렇게 세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다른 유학자 아무개는 같은 문제를 두고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해석 중 여기까지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만 여기부터는 무슨 의미인지 그 말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상을 누군가의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면 그것은 곧 말이 되며 서로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은 대화가 되고 문답이 되네. 이 말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 밖으로 내면 그것은 독백이 되네. 그리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읊으면 그것이 사유 또는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되며, 그 말이 의문문이 아니고 서술문일 때 그 말의 끝을 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의문을 표시하므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되네.

이틀이고 삼일이고 때때로 같은 의문을 되새김하게. 그 와중에 스스로의 사유가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네.

내 말이 그럴듯하면 뒤돌아서 말대로 해보게. 내 쪽은 보지 말고 지금의 이 말도 더 이상은 기억하지 말고 말이네.

2012.02.07 11:00

 

우우 백곡. 먼저 나의 무식함을 인정해야 할 것 같으이...옥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지...보통 새벽 두, 세시에 일어나 이것저것 볼일을 본 후, '논어'에 삼, 사십 분을 투자해 맘에 들어오는 부분만을 발췌해 회사에 나가 다시 써보고 그리고 퇴근 무렵 또 보고... 이렇게 해왔는데...뜻이 잘 안 들어오는 것은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각설하고 옥편 속을 헤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하다네...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부탁하이..._()_ 2012.02.08 20:43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옥편을 찾는 것은 번역문에 뭔가 의심이 생겨서인가, 아니면 한자 공부를 위해서인가?

단순히 재미있어서라면 그에 대해 무슨 조언이 또 필요하겠나? 자네가 즐거우면 된 걸세.

조언이란 결국 내 체험에 비추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해줄 수밖에는 없지 않겠나?

그러나 자네가 즐겁게 읽는 방식이 나와 다르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걸세. 2012.02.08 23:52 수정 | 삭제

 

우우 그냥 우선 백곡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으이...한자 공부도 있겠지만 한 자, 한 자를 들여다보다 보면 그 속에서 전체 맥락이 느껴지는 때도 있고...번역문에 의심이 생길 수준은 안 되고...왠지 그냥 옥편 속을 들여다보는 게 재미있다네.(벌써 반년이 넘어가지만 ,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왠지 냉수마찰을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 그냥 일과가 되어버리듯이...) 아무튼 간간이 지도 한 수를 부탁하이...그대 같은 친구가 있는 게 난 무척 고마운 때가 많으이_()_ 2012.02.11 03:07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내가 이야기한 것은 공부를 한 끝에 얻은 진리의 한 조각이 아니라 공부 방법이나 기술에 속하는 문제겠지. 자네가 내게 호의를 가져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도나 조언이라는 등의 어휘를 스스럼없이 사용하진 말아 주게. 왜냐 하면

첫째 공부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내겐 다른 사람을 지도할만한 역량이 없고,

둘째 그런 어휘는 자유로운 양자 관계를 불필요하게 한편으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네.

그리고 감사나 칭찬조의 말도 자제해 주게.

자네가 나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자네가 얻은 만큼 뭔가를 주었다는 생각이 없으므로 그런 감사의 말이 조금 낯설게 들리는 반면 그런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쉬우니까 말일세. 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고 잘 지내게.

2012.02.11 13:47 수정 | 삭제

 

우우 백곡...우선 나의 절제되지 못한 점을 인정하네. 그리고 '자유로운 양자 관계'에 부담을 줄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인정하네. 또 감사 등도 자제하지...그런데 學이란 "알고 능한 이를 본받는 것"이 아니겠나...솔직히 말해 그대가 체득한 언어(행동 포함)를 듣고 생각할 때, 나보다 능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네. 각설하고 언어 이전의 세계를 인정하는 나로서는 또 배우고 있네. 강녕하길_()_ 2012.02.13 04:29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내가 좀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 미안하네.. 자네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내가 약간 능한 것이란 그럴듯하게 글을 쓰는 것뿐이네. 자네가 말한 알고 능한 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 공자의 제자 재아도 언어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자의 미움을 받았네.

난 성인들의 말씀을 좋아해서 그것들을 되풀이 읽느라 다른 책은 읽을 시간이 거의 없지만 그들 말씀의 무거움과 내 재주의 얕음 때문에 진퇴유곡의 지경에 빠져있다네.

예를 들면 강가에 서있는 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큰 고깃덩이가 떨어졌다고 하세.

개는 얼씨구나 하고 그 큰 고기를 덥석 물었지만 고기가 너무 커 먹을 수가 없었네.

먹으려면 고기를 놓았다가 다시 물어야 하는데 고기를 놓는 순간 그것은 강물에 떨어져 떠내려 가버릴 상황이기 때문이지. 그 개는 맛은 매우 좋지만 자신의 실력보다 훨씬 더 큰 고기를 물었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네. 그런데 내가 지금 그 개와 같은 상황에 있다고 생각되는 걸세. 어떻게 해야 할까? 물었던 부분의 단물만 먹고 그만 버려야 할까?

우우,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이번엔 자네가 내게 조언을 좀 해주게.

2012.02.13 20:00 수정 | 삭제

 

우우 지금 냉수마찰을 하고 자판 앞에 앉아 있네.3박 4일 동안 그대의 질문을 주머니에 넣고 다녀 보았네."무거움과 얕음"..."개와 고깃덩이"...먼저 자네가 예를 들은 "개와 고깃덩이"에 비유해 말하고 싶네.(여기에선 약간의 알아차림이 느껴 오는' 色不異空格物致知'가 떠오르네.)1.개에게 능력이 있다면 물었던 부분의 단물을 어느 정도 먹고 다시 하늘에 던졌다가 다시 무는 방법.2.물었던 부분만 먹고 그만 흘리는 방법.3.아예 맛보기조차 하지 않고 흘리는 방법. 여기에선 나는 생각건대 하나를 택하라면 2번일세.'오는 사람 막지 말며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그리고 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라는 의상조사의 法性偈가...이미 자네가 흡수한 "얕음" 속에 전체로서의 "무거움"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다소 때가 낀 거울이라면 매일매일을 다해 닦으면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안 닦는다 해도 거울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걱정은 접어두고' 천천히, 느긋하게 '라는 여유 부림이 필요한 게 아닐는지. 오늘은 이만 하고 요즈음 읊조리는 한 수: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물소리 노상 들어도

들을수록 좋다.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소리와 빛 가운데

평안이 있네 -고려 원감 沖止스님-

 

내가 좋은 도반이 되기를 항시 기도한다네.... 2012.02.17 03:59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질문을 3박4일 동안 생각해 준 진정성에는 감탄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네.

그리고 자네가 보여준 게송의 일부나 , 거울이나 천천히 느긋하게라는 충고 또한 나를 위해 뽑아주는 것으로 알겠네.

그런데 이런 게송이나 말들이 자네가 위에서 인정한 언어 이전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네의 말에 대해 뭔가 더 알아보려고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걸세. 언어 이전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자꾸 말을 시키는 셈이 될 테니 말이야.

자네가 보여준 게송이나 시 등을 읽으면 매우 그럴듯하긴 하지만 그만큼 애매모호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네. 위 법성게의 구절도 읽으면서 내가 느끼기에는 머물러 있으려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는 어귀이지만 나아가려는 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네

아마도 내가 조사들의 깨달음에 대해 무지해서 그럴 걸세.

하지만 궁금한 점을 그대로 두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을 덮으면서 뭔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게는 맞지 않는 것 같네.

그러니 우우, 어떻게 할까? 자네의 말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볼까? 아니면 그만둘까?

한번 생각해 보게.

2012.02.17 10:24 수정 | 삭제

 

우우 백곡!'당연히' 물어야지. 하면서 거의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위에 쓴 내 말들이 나로서도 100% 체득한 글은 아니라는 생각...그러나 읊조림이나 반복을 통해서 거의 무의식계까지 닿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예전에 말했듯이 '웅덩이'의 물이라면 흐르기 위해선 하늘에선 적당량의 비가 있어야...막힌 물이라면 스스로 수위가 올라 갈 때를 기다리고...너무 큰 바위라면 돌아가면 될 듯하고......문을 기다리네. 2012.02.18 03:46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그럼 묻겠네, 우선 자네가 내게 제시한 세 가지 방안 중 두 번째는 - 자네도 그렇게 선택할 거라고 한 - 얻을 수 있는 만큼만 먹고 버리라는 얘기겠지? 온 것은 내게 온 것이니 먹고, 갈 것은 어차피 갈 것이니 보내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그 비유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이겠나? 성인의 말씀 중 내가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현재의 내 능력으로 얻을 수 없는 부분은 그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이 그만 잊으라는 뜻이 아니겠나? 맞는가? 그렇다면 자네의 방안 중 첫 번째는 무슨 말인가? 물었던 부분의 단물을 어느 정도 먹고 다시 하늘에 던졌다가 다시 문다는 것 말이네. 기발한 얘기이긴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는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네.

두 번째는 자네가 읊은 법성게의 구절은 세상의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대비시키고 가장 작은 것 안에도 가장 큰 것에 들어있는 동일한 원리가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되나? 그래서 자네는 내가 흡수한 얕음 속에 전체로서의 무거움이 다 들어있다고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어떨까? 한 양동이의 물과 한강이나 황하의 물은 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단지 물만을 연구한다면 한 양동이의 물로도 모자랄 것이 없겠지만 큰 강에는 그 물에 기대어 사는 많은 생명체들도 있지 않은가?

자네의 답변을 기다리는 두 번째 질문은 다음일세.

작은 티끌 속에도 , 이 있고 시방세계 안에도 선악이 있는가?

아니면 그 중간 세계 - 자네나 나도 그 중간 세계의 일원이겠지만 - 에만 선악이 있나?

성인이나 조사의 마음속에도 선악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자네는 우리에게 선, 악이란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질문의 핵심에 주목하고 어떤 의견이든, 길든 짧든 솔직히 개진해 보게.

세 번째는 자네가 날마다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것은 단지 건강과 상쾌함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이 정신 수련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인가?

2012.02.18 10:58 수정 | 삭제

 

우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시험(가나다 시험 ㅋㅋ)이 있어서 좀 늦었네. 잠을 좀 설쳤지.

대답하겠네...'하늘에 던졌다가 다시 문다'는 것에 대해선 소월의 詩句 "잊었노라...잊었노라...잊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는 글이 ..."능력"이 허락하는 최대의 망각이랄까...그래도 천명이라면 다시 만나지 않을까...

두 번째, 어떤 책에선가 인체를 전자 현미경으로 촬영한 것과 우주를 천체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거의 차이점이 없더군. 그건 그렇다는 얘기고, 사실 내가 체득한 것들을 아직 명확화 하지 못한 것이 많기에 글에 마침표를 쉽게 찍지 못하는 면이 많네. 그럼에도 대답한다면... 성경의... 선악과 이전의 세계...禪詩에서 느껴오는...이젠 심심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굳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靑山인 것을 -임제 선사-

 

위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항상 평등한 마음을 지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 있으면

도는 더욱 멀어지고 업만 깊으리. -野雲 比丘-

요즘 초기 불전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해체와 분석"의 필요함을 느끼고 있네.

세 번째,'냉수마찰'은 그냥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일세. 지금 일기를 찾아보니 일 년 반 정도 되었구먼. 그냥이야.(농담 삼아 전생의 ?)

 

끝으로 오늘 마무리하고픈 두 마디:

"절이나 교회, 경전 등이란 내부의 스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일 뿐..."

"오른쪽으로 기운 나무는 언젠가는 오른쪽으로 쓰러진다."

찬바람에 몸 보중하길_()_ 2012.02.21 04:40 수정 | 삭제

 

발길 따라 우우, 자넨 어느새 道人이 다 된 것 같네. 누군가를 찾아서 인가라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가 고기를 던졌다가 다시 받는 시간은 불과 몇 초 사이일 텐데 그것을 자네는 먼 훗날 잊었다가 - 최대한 잊었다가 - 천명이 있으면 다시 만난다고 말하고 있으니 겁 단위의 시간으로 대치시킨 것이 아닌가? 먼저의 자네 말대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있다는 것을 형체가 아닌 시간을 단위로 다시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걸세. 아무튼 놀라워.

그런데 우우, 이 친구야 자네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인연이 있다면 나중에 알 수도 있겠지만 자네는 질문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답하려는 노력은 해보지 않았나?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가끔 논리와 합리, 그리고 전문용어의 분야에서 꽤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자신이 공부한 것을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 것 같더구만 자네도 그런 노력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언젠가 자네들과의 얘기에서 난 지혜를 사랑하고 앎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 같네만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무슨 뜻이겠나?

예를 들어 삶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지.

또 즐거움과 기쁨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고통이나 슬픔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말과 사실상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지를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것과 실질적으로 같은 뜻이 아니겠나? 그러나 무지를 미워하는 것이지 무지한 자를 미워하는 것은 결코 아니네.

죽음을 미워하는 자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미워하는 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지.

자네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겠네.

그리고 지금부터는 찬바람 보다 봄바람과 봄기운을 조심해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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