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에 이어 agora에 올렸던 제 글입니다.
김 선생 : 우리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거나 술을 원하여 마시고 취할 경우 그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군 : 술을 마시고 취할 경우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신 알코올은 위와 소장에서 흡수되어 혈액을 타고 몸 전체에 퍼지게 되고 뇌에도 도달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데, 알코올에 의해 그 일부 작용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대뇌 피질은 기능적으로 항진한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말이 많아지거나, 혹은 감정이 고양되어 행동이 거칠어지기도 하고요. 그 밖에 알코올은 후각이나 미각, 냉각, 통각을 약화시키는 작용도 하며. 알코올의 산화에 의한 대사 작용 중 1차 산물인 아세트알데히드는 말초혈관의 확장작용으로 얼굴을 붉게 하기도 하고 두통을 유발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실 경우는 수분이 식도나 위에서 흡수되어 혈액 속으로 들어가면 체내에 수분이 들어왔음을 뇌에 알려 만족감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적당히 마시고 그치게 되겠죠. 그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도 체내에 수분이 부족할 경우 뇌의 관할 부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 우리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일 테고요.
김 선생 : 흠, 그것이 자네의 설명인가?
이군 : 그렇습니다. 과학적인 설명이죠.
김 선생 : 과연 그렇군, 그럼 그런 상황을 철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도 자네는 알고 있는가?
이군 : 철학적인 설명이라고요? 그런 것도 철학적인 설명이 있습니까?
저는 철학이라면 신이나 우주나 세계 전체나 정신 또는 이성이나 기호나 말의 의미 등에 관한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요.
김 선생 : 그런 것만은 아니라네.
내 말을 들으면 자네도 전에 읽은 기억이 되살아날지 모르지.
이군 : 궁금하군요.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 선생 : 그래, 그럼 내가 묻는 대로 답변해 보게.
우리는 목이 마를 때 마실 것을 원하지 않는가?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겠지?
이군 : 예.
김 선생 : 그런데 그것은 어떤 욕망인가?
그 경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내 말은 이런 걸세. 우리는 단지 물을 마시는 것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물을 마심으로써 얻게 되는 만족감을 원하는 것인가 하는 것 말이네.
이군 : 예, 그건 아마 물을 마심으로써 얻게 되는 만족감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선생 : 그리고 배가 고플 때 우리는 또 먹을 것을 원하지 않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 경우에도 우리는 단지 먹는 행위를 원한다기보다 먹음으로써 생겨나는 만족감을 원하는 것이 되겠지?
이군 : 예.
김 선생 : 목이 마르다거나 배가 고프다는 것은 또한 결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이군 : 그렇게 생각됩니다.
김 선생 : 그럼 욕망이란 일종의 결핍이며, 결핍된 사람은 그런 상태와는 반대되는 상태를 원하게 되네. 배가 고픈 사람은 배부른 상태를 원하며,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마셔 갈증이 해소된 상태를 원하는 걸세.
즉, 결핍된 상태는 충족된 상태를 원하며, 일반적으로 욕망은 만족을 원하는 걸세.
이군 : 옳은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럼 욕구하는 사람, 목이 마른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물과 음식이라고 해야 할까?
이군 : 그게 아닌가요?
김 선생 : 우리는 위에서 목이 마른 사람은 갈증이 해소된 상태를 원하며, 배고픈 사람은 배부른 상태를 원한다고 동의하지 않았나?
결핍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에 반대되는 상태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일세.
이군 : 예, 방금 그랬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잘 생각해 보게, 배고픈 사람을 이끌고 가는 것은 음식이기 이전에 배가 불러 만족한 상태였던 예전의 기억이라는 것을 말이네.
그 만족했던 기억이 그를 음식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걸세.
목마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네.
목이 마른 사람 - 결핍되어 있는 사람 - 은 만족을 원하며, 예전에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고 만족해했던 기억이 그를 마실 것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가는 걸세.
이군 : 역시 옳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럼 현재 결핍되어 있는 그를 이끌어 가는 그것은 신체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겠지? 그의 신체는 현재로서는 물이나 음식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만족한 상태를 모른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결국 우리가 말한 대로 목마른 사람을 끌고 가는 충동이 향하는 곳은 현재의 목마른 상태와는 반대되는 상태의 기억이라네.
그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신체는 현재 수분이 부족한 상태 그대로 묵묵부답이니까…….
그리하여 욕망이든, 만족이든, 만족을 향하여 우리를 끌고 가는 충동이든, 모두 신체가 아닌 영혼에 속한 문제가 된다는 것일세.
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도 일종의 결핍이자 욕망이며 그것은 만족을 바라지만, 신체는 단지 결핍된 상태이므로 욕망은 신체와는 관계없이 예전에 술을 마시고 취하여 기분 좋은 상태였던 기억에 이끌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술을 찾게 만들고, 그는 술을 마셔 취하게 됨으로써 과거의 만족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이 비록 서론에 불과하긴 하지만 자네의 과학적인 설명에 대비되는 철학적인 설명이라네.
이군 :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나는 군요.
대화편 필레보스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옳게 생각해 내었네.
나도 기억에 따라 그 내용을 어느 정도 각색하여 말한 걸세.
그럼 자네의 그 과학적인 설명과 지금까지의 철학적인 설명은 각각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유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과학은 철학이 지향하는 문제 해결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궁극적인 의문이 될 걸세.
이군 :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것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위와 같은 문제는 철학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는 논의해 봐야 모두 쓸데없는 얘기가 되지 않겠나?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알겠으며, 과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그리고 과학이 어떤 점에서 철학이 이루고자 하는 바에 유용한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이군 : 그야 물론 알 수 없죠.
김 선생 : 자네는 가끔 인터넷 게시판에서 철학이란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겠지?
이군 : 여러 번 본 적이 있죠.
김 선생 : 그럼 그런 질문에 대해 뭔가 시원한 답변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군 : 없습니다.
김 선생 : 어째서 답변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군 : 아마도 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질문에 답변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묻거든요, “저기여~ 기말 셤 땜에 그러는 데여, 철학이란 무엇인지 갈켜주세염.”이라고요.
그래서 남에게 듣는 것보다 스스로 찾아보는 것이 본인들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답변을 안 해주는 듯싶습니다.
김 선생 : 그런 이유도 있겠지, 그러나 때로는 진지한 질문도 있네.
진지한 질문에는 진지한 답변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만약 답을 알고 있다면 말일세.
이군 : 그렇죠. 혹시 사람들이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정해진 답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전문가라 할지라도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할까요.
김 선생 : 아니, 그것은 매우 이상한 얘기가 되지 않겠나?
우리가 목수에게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긍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나?
목재를 가지고 유용한 것들을 만드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말일세.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더 이상 그에게 부가하여 캐묻지는 않을 걸세.
또한 의사에게 그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같은 식의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라고 말일세.
요리사에게 그의 일을 물어도 마찬가지로 수긍할 수 있는 답변이 나오겠지?
재료를 가지고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말이네.
경제학자에게 그의 일에 관해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할까?
그는 아마도 재화의 흐름에 관해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겠나?
상인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말할 테고, 공장 노동자는 상품의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할 걸세.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즉 철학이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그것도 일종의 불가사의가 아니겠나?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평생토록 그 일에 매달린다는 것 말일세.
이군 : 하긴 그러네요, 저도 지금 매우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김 선생 : 그러니 자네가 애초에 잘못 생각한 걸세.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라네.
이군 : 어째서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김 선생 : 아마 인터넷상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나? 아마도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논문 같은데 보면 다 나와 있을 걸세.
이군 : 그럴까요? 그런데 그런 건 글자가 너무 많고 어려워서…….
김 선생 : 이 사람아, 가치 있는 일로써 쉬운 건 아무것도 없다네.
모르는 건 다 자네가 열심히 파고들어 탐구하지 않는 탓이지.
어쨌거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 얘기는 그만두고 우리끼리 문답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나?
자네는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군 :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철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김 선생 : 내 생각에 자네가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 걸세..
서양철학 쪽에서 보면 최초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탈레스로부터 현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그 수많은 철학자들의 위세에 눌려서 자네는 붙잡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단 말이네.
이군 : 위세에 눌려서 붙잡아야 할 것을 놓치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김 선생 : 그것은 그런 철학자들이 긴 시간 동안 서로 논란을 주고받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다 쏟아놓았기 때문에 자네는 그 많은 상이한 말들을 이것저것 읽어 보며, 그 내용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어떤 공통적인 것을 철학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일 걸세.
이군 : 그럴까요?
김 선생 : 내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볼 테니 들으면서 답변해 보게.
어느 마을에 농부가 순종 진돗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네.
그런데 그 개가 성장하여 교배시기가 되었지만 마을에 진돗개라고는 그것 한 마리뿐이어서 순수한 혈통을 지켜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네.
결국 농부는 어느 외국산 개의 피를 이어받은 다른 개의 씨를 얻어 진돗개의 새끼들을 낳게 했네. 그리고 그 새끼들이 자라서는 각각 셰퍼드나 포인터나 스피츠나 삽살개나 또는 다른 잡종 개들과 짝을 맺어 다시 새끼들을 낳았네.
그리고 그 새끼들이 다시 자라서 또 다른 개들과, 또는 형제나 사촌끼리 짝을 지어 번식을 계속했다네.
그 결과 농부는 100여 마리의 개들을 한 울타리 안에서 키우게 되었는데,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우리 개들은 모두 진돗개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네.
말은 맞지 않는가? 어쨌든 한 마리의 진돗개로부터 나온 자손들이니 말일세.
이군 : 하기야 맞는 말이죠.
김 선생 : 그리고 그 농부는 자네에게 이렇게 말한 다네.
나의 이 모든 개들을 자세히 보고 진돗개란 어떤 특징을 가진 개인지 말해 보라고 말이네. 자신이 기르는 100여 마리의 개가 모두 진돗개의 혈통이므로 그 개들을 잘 살펴보고 나서 진돗개의 특성을 알아내 보라는 주문인 걸세.
자네는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이군 : 알기 어렵죠. 온갖 모습의 개들이 다 있을 테니까요.
김 선생 : 자네가 그 개들 중 털이 긴 개를 가리키며 진돗개란 저렇게 털이 긴 개입니다.
라고 말하면 그 농부는 대뜸 그중 털이 짧은 다른 개를 지적하며, 진돗개 중에는 저렇게 털이 짧은 개도 있네 하고 반박할 걸세.
그리고 자네가 키가 훤칠하게 큰 개를 가리키며 진돗개란 저렇게 키가 큽니다.라고. 말하면 이번에 그 농부는 다시 키가 작은 다른 개를 가져와 보이며 반박할 것이 아니겠나?
자네가 귀엽게 생긴 개를 가리키면 농부는 험상궂게 생긴 개를 들어 보이고, 자네가 검은 개를 가리키면 그는 흰 개를 말할 걸세.
그리하여 자네는 결국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개들을 다 돌아보고 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걸세.
“진돗개란 단지 개처럼 생긴 개일뿐입니다.”라고 말이네.
이군 :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김 선생 :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나? 한 가지 방법이 있네.
이군 :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 선생 : 그 농부에게 묻는 걸세.
이군 : 무엇을요?
김 선생 : 이 개들을 있게끔 한 그 시조始祖는 어디 있느냐고 말이네.
이군 :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개들에게 최초의 조상이 되는 개를 농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거군요.
김 선생 : 그렇지, 그 방법 밖에 없지 않겠나?
자네가 묻기만 하면 농부는 알려줄 걸세. 그럼 그가 가리키는 개를 보고 자네는 진돗개의 특성을 알 수 있지 않겠나?
자네는 그 개를 보고 말하겠지? 머리는 팔각형이고 귀는 쫑긋하며, 꼬리는 짧으면서 한쪽으로 말렸고, 몸 색깔은 황갈색이거나 백색이고, 매우 힘차고 용맹하게 보인다고 말일세.
이군 : 그렇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김 선생 : 철학에 관해서도 사정은 같다고 나는 생각하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려면 그 시조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걸세.
이군 :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김 선생 : 누군가 자네에게 유학이란 무엇에 관한 학문인가라고 묻는 다면 어떻게 답변하겠나?
이군 : 修己治人의 학문입니다라고 말하죠.
김 선생 : 유학의 이상인 仁에 관해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안회에게 무엇이라고 가르쳤는지 아는가?
이군 : 克己復禮라고 가르쳤습니다.
김 선생 : 유학도 하나의 철학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린 지금 서양철학을 위주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 선생 : 그야 그렇지. 그러나 시조로 올라가게 되면 그다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또 불가의 이상이 무엇인지도 아는가?
이군 : 제가 듣기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김 선생 : 열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가?
이군 : 열반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한 뒤 이를 수 있는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팔정도를 통하여 그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압니다.
김 선생 : 자네 말이 옳겠지.
그럼 서양철학 쪽에서는 누구의 말을 따라가야 철학의 진면목에 접근할 수 있겠나?
누가 그 대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군 : 아무래도 소크라테스가 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 인격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철학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누가 그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김 선생 : 아마 그럴 걸세.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통해 주로 알려지고 있다네.
그러니 그들이 남긴 말을 고찰해 봄으로써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변하는 것이 의미 있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이군 : 그럴 것입니다. 한번 해보죠.
김 선생 : 그럼 내게 다시 한번 정식으로 묻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본 바,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내 나름대로 풀어서 말해볼 테니까.
이군 : 그러죠.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김 선생 : 그것은 일종의 정화라네.
이군 : ..............!?
김 선생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가?
이군 : 정화란 깨끗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김 선생 : 그러네. 좋은 것은 남겨두고 좋지 않은 것들은 내보내거나 제거하는 것일세.
이군 : 그런데 철학이 어떻게 해서 정화란 말입니까?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김 선생 : 자넨 몸이 더러우면 목욕을 하거나 샤워를 해 씻을 것이 아닌가?
이군 : 그야 물론이죠.
김 선생 : 그것은 우리 신체의 외부를 깨끗이 하는 일종의 정화가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리고 우리가 병들었을 때 의사는 우리에게 약을 주지?
병에 따라 수술도 하고, 주사도 놓고, 침도 놓고, 마사지를 하거나 음식을 가려 먹도록 하거나 운동을 권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것도 역시 쉽게 말해 우리 몸 안에 대한 일종의 정화가 아니겠는가?
이군 : 역시 옳은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렇다면, 우리의 몸에 대해 그런 정화가 있다면, 우리의 정신, 또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정화라고 부를만한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네가 자연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례관계에 주목한다면 내 말이 낯설게 들리지는 않을 걸세. 이쪽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면 저쪽에도 그와 유사한 그런 것이 있다는 것 말이네.
이군 :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 사람들 중에는 비교적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고, 올바르지 못한 정신의 소유자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비교적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있는 것인가?
또한 비교적 순수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도 있는 반면, 세속적인 탐욕에 찌든 사람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지혜나 올바름이나 건전한 인격과 관련하여서는 누가 더 낫고 말고 할 것이 없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군 : 예, 저는 그런 저런 차별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힘써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고요.
김 선생 : 철학이란 바로 그런 정신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걸세.
정신에 있어 무지를 제거하여 순수함을 되찾는 것 말이네.
자넨 철학이란 말의 어원을 가지고 그 의미를 풀이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지?
이군 : 그렇습니다. 그것은 고대철학의 발상지인 희랍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죠.
김 선생 : 그 풀이 그대로라고 나는 생각하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자이므로 그 점에서 더 이상 무지한 자가 아니라는 얘기일세.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말일세.
그는 무지의 진흙 속에서 돼지처럼 뒹굴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며, 오히려 자신이 유식하다고 믿는다는 얘기라네.
이군 : 두려운 말씀이군요.
김 선생 : 아무렴, 가히 두려운 얘기지.
그럼, 그 무지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세.
자넨 플라톤이 무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는가?
이군 : 예,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어디서 나오는 말이더라……. 그것이?
김 선생 : 어디서 한 얘기인지는 지금 나도 잘 모르겠네.
아마도 테아이테토스편인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나?
자넨 내 말을 귀담아듣고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동의하고, 틀린다고 생각되면 반박하면 되는 걸세.
그것이 예전에 누가 어디서 한 말이었는지는 아무래도 큰 문제가 되지 않네.
자네가 논문을 써서 참고문헌과 인용한 부분을 자세히 밝혀야 할 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처럼 둘이 문답을 나눌 때는 단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을 잘 살피고, 그에 대해 가부를 표시하거나 질문하거나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걸세.
거기에 제삼자,, 즉 과거에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라고 하며, 애써 다른 이름을 끌어들일 필요가 별로 없다는 말이네.
어떤 철학자를 자네가 좋아하여 그의 말을 끌어다 쓰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네.
단지 그럴 때는 그 철학자의 견해를 상대방이 공박할 경우, 그 견해를 자네의 의견처럼 간주하고 맞대응하여 자네 스스로 그 견해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할 걸세.
반면에 문답의 결과 그 견해가 틀렸다고 입증된다면 그 철학자가 아니라 자네 자신이 논파된 것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심사숙고해보는 것이 자네에게 유익할 걸세.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유명한 철학자 누구의 말이라고 하며 거론하였다가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논박당한 것은 결국 자네가 아니라 그 철학자가 될 것인데, 지금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 또는 멀리 떨어져 있어 얘기를 나누기도 어려운 사람을 논파한다는 것은 그 해당 철학자에게나 자네에게나 별 의미가 없는 셈이 된다네.
즉, 자네는 자네의 책임 하에 문답을 나누고, 그로부터 상대방을 논파하여 자네의 지혜를 과시하든지 아니면 자네가 논파당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든지 하는 것이, 이미 죽어 사라졌거나 또는 맞대놓고 불러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남의 말을 가지고 객관적인 자세로 오랜 시간 왈가왈부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네.
이군 : 예, 그것도 정화와 관련된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김 선생 : 자넨 눈치도 어지간히 빠르군.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세.
무지의 두 가지 종류란 어떤 것인가?
그중 첫째는 다음과 같은 걸세.
자네가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면 자네는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식이나 회계업무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역시 자네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닌가?
또 불어나 독어와 같은 외국어에 대해서도 그렇고, 수학이나 역사, 물리나 화학과 같은 일반 학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은가?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학에 대해서도 그러네.
철학에 대해서도 자네가 모른다면 모른다고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걸세.
즉, 모든 일반 사항이나 학문에 대해 자네는 아는 것만큼을 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생각할 걸세.
그리고 만약 그것들 중 어느 것이건 자네에게 필요해졌을 경우, 자네는 힘써 독학을 하여 지식을 확보하거나, 아니면 아는 사람을 찾아 배우려고 할 걸세. 그렇지 않은가?
이군 : 예, 당연히 그래야죠.
김 선생 : 그럼 위와 같은 것들을 무지의 첫 번째 종류라고 하세.
자신이 무엇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며, 필요할 경우 역시 스스로 그에 관련된 지식을 배우려고 하는 그런 무지 말이네.
그럼 두 번째 무지란 무엇인가?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모든 종류의 앎에 덧붙어 따라다니는 듯이 보이네.
그것은 자신이 사실 어떤 무엇에 관해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로 인해 그는 정작 그에 관한 지식을 배워야 함에도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게 되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주로 어떤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무지가 붙어 다니는가?
그것은 내 생각에 대충 이런 걸세.
우리의 인생에 있어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을 얻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즐거움과 善은 같은가, 다른가? 또 고통과 惡은 같은가 다른가?
무엇이 올바른 것이며 무엇이 올바르지 못한 것인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며 무엇이 아름답지 못한 것인가?
우리에게 그때그때 좋은 것은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좋은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 말이네.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는 만인이 각각 암암리에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쉽게 그 견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네.
그리하여 그 견해가 작든 크든 현실에서 충돌할 때 모든 종류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네.
이군 :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예를 잘 드시니 이번에도 한번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김 선생 : 그럴까?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세.
여기 젊은 마라토너가 한 사람 있다고 하세. - 꼭 마라토너가 아니라 다른 운동선수라도 좋고 연예인이나 특정 기술자라도 상관없네. - 그는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마라톤 훈련에 쏟았네. 그 결과 국제대회에서 몇 번 우승도 하고 돈도 꽤 벌고 유명인사가 되었네.
그래서 한 방송 리포터가 그에게 성공의 비결과 함께 이렇게 물었네.
“당신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라토너는 이렇게 말했네.
“그것은 인내와 그리고 자신과의 투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자네는 이 마라토너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럴듯한가?
이군 : 예, 그럴듯하기야 하죠.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김 선생 : 그의 말은 그 자신 고유한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 뿐, 그가 보편적인 인생과 인간정신과 삶의 조건을 깊이 고려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해야 할 걸세.
왜냐하면 그는 마라톤 훈련에 온 정신과 시간을 투자하느라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설사 심사숙고한다고 해도 자질이 뛰어난 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
그러니 그의 말은 어떤 한 가지 면에서 들을만한 가치는 있겠지만 진리나 지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일세.
하지만 그 마라토너는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런 문제에 대해 배우려는 마음을 쉽사리 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네.
이군 : 그렇군요. 좋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리고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을 보게.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보이네.
그리고 돈이나 재물, 명예, 재미있게 웃고 떠듦과 같은 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네. 그들 중 누군가 설사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의 생활과 행위는 그런 점을 보여주는 듯하네.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두 번째 무지와 연관된 갖가지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나?
이군 : 그렇게 생각됩니다.
김 선생 : 그럼 그러한 견해가 옳은 것인가?
사람들 각자는 그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만큼 숙고했다고 우리는 생각할까?
이군 : 알 수 없죠.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뭔가 자신을 떠밀어, 밀리듯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생각할 만한 여유도 없이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럼 철학을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즐거움 중에서도 어떤 즐거움은 좋은 것이지만 어떤 즐거움은 좋지 않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 돈이나 재물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또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좋지 않다고 말해야겠지?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리고 명예나 권력도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삿된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그를 이용하거나 누릴 수 있지 않겠나?
이군 : 역시 그렇습니다.
김 선생 : 이와 같은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그에 관해 깨어있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은 무지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을 걸세.
이군 : 그럴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선생 : 그리고 이런 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
자네는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에게 불경죄로 고발당했을 때, 아테네의 배심원들 앞에서 행한 유명한 변론을 알고 있지?
이군 : 물론 알죠.
김 선생 :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당시 희랍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확인해 보기 위해 정치인과 기술자들과 시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했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들 모두 지혜롭지 못한 자들로 판명되었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말이지.
그들 중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기술과 관련해서는 지혜롭다는 것이 틀림없었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기술과 관련된 지혜를 전체로 확대해서 다른 면에서도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더라는 얘기지.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얘기가 아니겠나?
우리가 어떤 한 가지에 대해 지식을 얻었을 때 그 앎(안다는 것, 앎 자체)이 느닷없이 우리의 정신 전체로 확대되어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부문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일까?
이군 :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각자 자신의 관찰에 의해 증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어떤 분야에서 지금 알고 있는 것만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 외 다른 분야에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갖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걸세.
그래야만 필요하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유용한 새로운 배움이 시작될 수 있을 테니까.
이군 : 옳은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리고 또 하나, 여보게, 난 때때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가 있다네.
이군 :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 선생 : 들어 보게, 아마도 지금 우리의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는 얘기일 걸세.
누구든지 자기 집에 전기제품이나 뭔가 다른 것이 고장 났을 때 자신이 아는 것은 직접 고치고 모르는 것은 기사를 불러 고치든가 수리 점으로 가져가 고칠 것이 아닌가?
이군 : 당연히 그렇게 하죠.
김 선생 : 바둑이 재미있어 보이는데 둘 줄 모른다면 잘 두는 사람에게 배우려고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여럿이 하는 운동이나 게임도, 예컨대 배구나 야구나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모르면 구경을 하든지 아니면 게임 방법과 규칙을 배워서 하려고 들지 않겠나?
또 이런 것들은 가벼운 것이지만 의술이나 약학과 같은 것은 어떤가?
그것들은 의사나 약사가 취급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아닌가?
문외한이 잘못 손댔다가는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이군 : 아주 당연한 말씀이죠.
김 선생 :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에 관해서는 어떤가?
사람들은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전문지식이 있는 지식인들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군 : 유권자가 뽑아주기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리고 정치를 하려고 희망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정치를 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면, 자신이 그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달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군 : 글쎄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점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정치를 하면서 조금씩 배워서 잘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뭐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느냐……. 뭐 이런 심정으로 말입니다.
김 선생 : 과연 그럴까? 자넨 정치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군 : 그야 국민의 행복이죠.
김 선생 : 그럼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인지 분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리로 이르는 길이 어디로 어떻게 나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참으로 분명한 논리가 아니겠나?
또 자네는 사람의 기분이 수시로 변한다는 것도 깨닫고 있겠지?
잠시 행복한 기분으로 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롭거나 짜증 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이군 : 그렇습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도 그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김 선생 : 그럴 경우 그 행복은 참된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나?
단지 잠시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진정한 행복과 잠시 행복한 것으로 느껴질 뿐인 행복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걸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는 잠시 동안 느껴질 뿐인 행복을 국민에게 주려고 애쓰면서 그 당시에는 국민들에게 칭송을 받다가도 나중에 상황이 변해 국민들이 고통을 느끼게 될 때는 거꾸로 비난을 받게 될 걸세.
이군 : 아마도 그렇겠죠.
김 선생 : 그럼 그와 같은 이치나 행복에 대한 통찰도 없이 정치를 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자네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가?
만약 진지하게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행복이란 정신의 문제인지, 재물의 문제인지, 정신의 문제라면 인간 정신이 어떤 구조와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지, 현재 국민의 정신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어떤 상태로 나아가도록 유도해야 할 것인지 등에 관해 소상하게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군 : 당연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선생 : 그리고 그런 사항들은 하루 이틀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네.
플라톤이 참된 철학자가 권력을 잡고 정치를 하기 전에는 인간에게 불행의 종식이란 없을 것이란 말이 빈 말이 아닌 걸세.
물론 이것은 지금에 와서는 이론뿐이지 현실적으로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걸세.
그러나 어쨌든 원칙과 사정이 이런데 자네 말대로 현장에서 배워가면서 정치를 해보겠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이군 : 그야 그렇게 생각하면 우습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때 묻은 사람들보다는 깨끗한 사람, 또 때가 묻었어도 덜 묻은 사람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런가? 자네의 그 말에 토를 달려면 또 길어지겠지만 그 문제는 이쯤에서 그치세.
아무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정치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내겐 불가사의하게 보이네.
사람들은 예로부터 거대한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두고 세계 7대 불가사의니 8대 불가사의니 하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치에 투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불가사의는 그런 7대 불가사의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게 생각되네.
이군 :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얘기하던 중이었나?
이군 : 두 번째 무지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무엇에 대해 실은 무지하면서도 본인은 잘 안다는 듯한 기분으로 있는 것 말입니다.
김 선생 : 그렇지.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무지를 타파하고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정화라고 불리는 것이며 그것이 본래 철학의 본령이라네.
이군 : 그렇다면 정화에 있어 그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 됩니까?
김 선생 : 그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뭔가 모르면서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걸세.
그럼 질문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그의 생각을 보다 잘 음미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가 무슨 대답을 하든 같은 사물의 같은 부분에 대해, 같은 관점에서 반대되는 면이 있으므로 그의 답변이 모순이라는 것을 문답으로 논증해 보여주면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큰 고집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일세.
그를 붙잡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같은 방식으로 온갖 방향에서 문답을 계속하면 결국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자기 자신에게는 화가 나게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점잖아진다고 하네.
이군 :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요?
김 선생 : 자네는 누구든지 그런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가 아까 얘기한 유학의 修己治人이라는 목표 중 언제나 修己가 治人보다 먼저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얘기가 아니겠나?
자신을 정화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정화시키겠는가?
만약 무리하게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지도 못한 채, 남의 병을 고치려고 뛰어다니는 꼴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는 자신의 병이 어떤 병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병이 어떤 병인지도 분명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해야 할 텐데 말이네.
그도 어리석은 인간의 한 종류임이 확실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이군 : 그렇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비록 그 동기가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보면 어리석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정화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김 선생 : 사실은 자네도 나도 철학에 있어서는 초보자에 불과하다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거나 듣고 머릿속에서 적절히 섞어 옮기는 것뿐이지 않는가?
자네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듣거나 읽었으면 바로 실천하라는 그런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이 간명한 방법이 아니겠나?
실천을 하면 할수록 흔히 말하는 그의 양심이나 선의지가 더욱 힘을 얻게 되고, 반대로 삿된 마음은 줄어들어 점점 더 선한 활동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그야 옳은 말씀이겠습니다만, 저는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깊은 이해는 자연스럽게 실천력을 동반한다고도 믿고요.
김 선생 : 자네는 실천가이기보다 탐구자인 것 같군.
이군 : 전에 플라톤을 읽어보라는 말씀을 듣고 읽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미흡하다고 생각됩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만 대화편의 어느 부분을 어떤 식으로 주목해서 읽어야 할까요? 한 말씀 조언을 좀 해주십시오.
김 선생 : 별다른 조언은 아닐 테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특히 내가 느낀 바를 얘기하지.
자네는 소크라테스가 고발을 당하고 나서 변론 중에, 멜레토스나 아니토스 등 드러난 고발자들 말고 등 뒤에 숨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중상해 온 보이지 않는 고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를 중상했다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이군 : 예, 그가 하늘과 땅 밑의 모든 일을 탐구해서 약한 이론을 억지로 강하게 만든다고 비난한 걸로 압니다.
김 선생 : 거기서 약한 이론을 억지로 강하게 만든다는 말을 일단 기억하게.
그리고 자네가 읽어본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와 올바름(정의)에 관해 논전을 벌인 것을 상기하게.
이군 : 예,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 : 그럼 한번 솔직하게 답변해 보게.
자네는 그 논전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나, 아니면 트라시마코스의 열변, 즉 정의란 곧 강자의 이익이라는 그 논리가 더 마음에 닿는가?
이군 : 솔직히 소크라테스의 논증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어쨌거나 나중엔 겨우 이해하기는 했지만 제겐 트라시마코스의 그 대중성 있는 논변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더군요.
김 선생 : 그런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비난받았던 심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보여지네..
사람들이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인식에 매몰되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가 소크라테스가 교묘한 논리를 이리저리 휘둘러 그런 덩어리 큰, 그러나 억견에 불과한 대중적인 상식을 이리저리 찌르고 논파하자 사람들은 불쾌하게 여겼지만, 그 앞에서는 논박을 못하고 뒤에서 중상을 일삼으며, 그를 두고 약한 이론을 강하게 만든다고 비난했던 것 같네.
좌우간 자네가 플라톤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앞으로 철학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그런 부분을 가능한 철두철미하게 파악하여 논리적인 이해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완전히 소크라테스의 논증이 옳다고 확신하게끔 되어야 하네.
그것이 독서에 의해 대중성, 보편성, 막연한 억견을 넘어서 자네의 길을 갈 수 있는 열쇠가 될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다른 대화편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네.
고르기아스 편에서 카리클레스가 주장하는 부분이 그렇고,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등장하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또 그럴듯하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제법 잘 알려진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라는 여인에게서 들었다는 에로스에 대한 논증적인 연설도 별도로 새겨둘 만하네..
거기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희극적인 얘기, 즉 옛날엔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합쳐서 한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한 몸에 머리가 둘, 팔이 넷, 다리도 넷이었으나 그들이 교만해져 제우스에게 반항하였으므로 제우스가 그들을 각각 반으로 잘라 지금과 같은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지금 남자와 여자가 같이 붙어있던 예전의 모습을 갈구하여 서로 그리워한다는 그 얘기도 흥미 본위로 그럴듯하여 간혹 신문의 잡문 같은 데서 인용되는 걸 볼 수 있지만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요긴함에도 불구하고 인용되는 걸 보기 어렵네.
그 외에 초기 대화편 모두에 있어 각각 분량은 적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은 상당히 까다롭네. 그리고 역시 때때로 약한 이론을 강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네.
그러나 이 모든 부분에 있어 자네는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놓치지 말고, 가능한 끝까지 따라가 완전히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자네 마음속 곳곳에 쓰러지지 않는 이정표로 세워두는 것이 좋을 걸세.
이군 : 잘 알겠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이로써 자기 정화를 위한 작은 한 가지 방안을 - 플라톤 읽기를 통한 - 말한 걸로 하세나.
그리고 다음으로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서 배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네.
아까는 무지의 정화를 위해 질문을 던진다고 했지만 그건 뛰어난 문답가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지, 우리 같은 초보자는 정말로 배우기 위해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 하는 걸세.
자네가 적당한 문제를 진지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면 대개 상대로부터 적당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걸세.
1년을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다 한번 구체적으로 물어서 배우는 것이 나을 테니, 질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해야 되네.
그리고 그런 질문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언제 어떤 상대에게라도 질문할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지면 그것도 철학을 위한 하나의 훌륭한 능력이 되는 걸세.
이로써 정화에 대해서는 능력껏 얘기할 만큼 한 셈인가?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우린 처음에 술 마신 사람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과 철학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나?
그리고 과학은 철학이 지향하는 문제 해결에 어떤 보탬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초점이었지? 그리고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 무지를 타파하는 일종의 정화라고 말했네.
술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누군가 술을 끊고 싶은데 잘 안 될 경우, 철학과 과학은 각각 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나?
철학은 주로 설득에 의해 도움을 주게 되지 않겠나?
철학적인 설명에 의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술을 마시게 되는 메커니즘을 나름대로 이해하며, 그래서 술에 이끌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봄으로써 단주에의 의지를 더욱 다질 수 있지 않겠나?
그에 반해 과학적인 설명은 알코올이 간에 미치는 영향이나 건강을 해치는 정도를 강조함으로써 설득을 하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극단적이고 진짜 과학적인 방법으로 금주를 시키려 하지 않겠는가?
이군 : 진짜 과학적인 방법이라니요?
김 선생 : 그야 알코올의 흡수를 차단하거나 방해하는 약물을 복용시킨다든가, 술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일으키는 약을 먹인다든가 하는 것 말이네.
이군 : 그렇죠. 그렇게 해서라도 술을 안 먹게 되면 당사자에게는 좋겠죠.
김 선생 : 부작용만 없거나 적다면 그건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네.
누가 몇 년을 붙들고 설득해도 안 되는 일을 약간의 약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리고 듣기로는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도 약물에 의한 치료효과가 매우 높아졌다고 하네.
오랜 기간 동안 격리수용하며 상담으로 치료해 보아도 잘 안 낫던 질환이 얼마간의 약물로 주목할 만한 차도가 있다면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 아닌가?
이런 것은 과학의 발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군 : 불가능하죠.
김 선생 :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약물은 지금도 효과적인 것이 여러 가지 있다고 하네.
과학이 더욱 발달하는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놀랄만한 약물들이 나올지도 모르네. 자네가 길거리를 가다 그냥 기분을 좋게 만들어 호탕하게 웃고 싶으면 언제든지 작은 알약 하나만 먹으면 일정한 시간 동안 그런 상태로 있게 되지 않겠나?
지금도 마약을 하면 비슷한 상태가 된다니까 말이네.
거기서 중독성이나 부작용을 최대한 줄이면 되지 않을까?
이군 : 글쎄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 테죠.
김 선생 : 그럼 즐겁고 싶을 때 언제든지 즐겁게 해주는 약이 있다면 그야말로 놀랄만한 발명이며 과학의 승리라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이군 : 그럴까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어째 잘 안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의존성이나 부작용이 없는 약을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을 매번 같은 분량의 약으로, 같은 정도로, 이유 없이 웃고 흐뭇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뭔가 순리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런가? 듣고 보니 자네 말도 그럴듯하네..
그리고 우린 아까 즐거움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도 있지.
그에 관한 논증은 기회가 있으면 또 소개하기로 하고, 우리는 또 수차 사람들 중에는 비교적 올바른 사람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으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지 않았는가?
이군 : 그랬습니다.
김 선생 : 그럼 누군가 좀 더 지혜롭거나 올바르거나 사려 깊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에 대해 과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과학은 자신의 지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 덕택으로 그들이 좀 더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군 : 글쎄요, 이 경우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이란 대충 어떤 사람일까요?
김 선생 : 전통적인 미풍과 법률을 존중하고, 오만하거나 무례하지 않고, 자기 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사려 깊게 숙고하여 중용의 길을 택하며, 고전을 읽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새겨들어 바르고 깊은 뜻을 수용하며, 스스로 자신의 장, 단점을 돌아보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이군 :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선생 : 자네는 또 불가의 수행자들이 일종의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아마 그들은 올바르다거나 인격적이라거나 하는 어휘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네.
그들은 무상이나 열반이나 空이나 일체유심조와 같은 말을 잘 쓰고, 일반인이 알아듣기 어려운 선문답도 잘한다고 하니까.
그러나 또한 그런 것은 단지 용어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걸세.
그들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상태를 가장 올바르며 가장 지혜로운 상태라고 하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용어나 낱말을 가지고 불필요하게 왈가왈부할 것이 없는 걸세.
그들은 감각적인 사물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위에서 말한 자기 정화를 위해 가장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방법을 채택한 사람들인지도 모르네.
이군 : 그렇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선생 : 그럼 그런 사람들에게 과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과학의 발달로 인류가 물질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고, 지금도 얻고 있고, 앞으로도 얻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우리는 과학자들과 그 관련자들에게 그 점에서 감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걸세.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자기정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약물이나 전자파나 두뇌 속에서의 물질이나 입자구조의 변화를 통해 우리를 올바르고 지혜롭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이군 : 글쎄요, 그럴 수 있을까요?
김 선생 : 그렇게 되려면 우선 모델이 있어야 할 게 아니겠나?
즉, 본받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뇌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뇌의 구조와 활동을 완전히 알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야겠지?
이군 : 그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우선 누가 그렇게 전 인류가 본받을 만큼 지혜로운 자인지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죠.
예전의 성인들이나 현인들을 보아도 당대에 대중에게 전폭적으로 환영받은 사람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대중은 눈이 어두워 그런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당대에 지혜롭기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을 뽑는다 해도 나중에 실제로 그런 인물이 아닌 걸로 판명 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 듯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아무튼 그 문제는 운동 경기에서 시합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구경꾼들이 페어플레이 상을 받을 선수를 선정하는 것과 유사한 꼴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규칙을 모르므로 반칙을 하지 않는 선수보다는 몸동작이 우아하고 세련되게 보이는 선수를 뽑을 가능성이 더 큰 거죠.
그리고 설사 본받을 만한 사람을 잘 선정했다 하더라도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그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미 조건 지워진 어떤 정신에 지혜나 올바름을 넣더라도 서로 반응하여 결과는 다른 무엇이 되겠죠.
체세포 복제를 하더라도 복제 인간이 성장하는 환경이 그 임자인 지혜로운 자가 성장한 환경과는 다를 테니, 역시 나중에 꼭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럼 과학적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이나 남을 지혜롭거나 올바르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군 : 제겐 그렇게 생각됩니다.
김 선생 : 과학자들이 우주나 인간에 대한 비밀을 완전히 풀어서 뭔가 실상이 이렇다고 확실하게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그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우주에 대한 실상을 알고 궁극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런 지식을 얻더라도 여전히 인간에게 분수를 모르는 탐욕과 어리석음은 남아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탐욕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빚어지는 온갖 분쟁과 암투도…….?
이군 : 아무래도 그런 것은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주가 어떻고 인간의 뇌가 어떻고 해 봐야 본인이 각자 눈앞에서 느끼는 현실을 누가 어떻게 조정하거나 간섭하거나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약간의 설득이나 조언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만요.
김 선생 : 그럼 결국 정화에 관한 것은 누가 뭐라 하던 각자 자기 몫이란 얘기가 아니겠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같은 길을 가는 사람 중에서 좀 더 지혜로운 자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물어 배우는 일이 요긴하다고 해야 할 걸세.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각자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우리 마음의 올바르고 건전한 상태를 위해서 말이네.
철학이란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군 : 아주 고전적인 얘기인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것 같으니까요.
김 선생 : 그럼 철학이 정화라는 이야기는 이만 하기로 하세.
그런데 우리가 지난번에 나눈 이야기에 대해 자네는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았는가?
이군 : 어떤 얘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김 선생 : 좋음과 다른 좋음에 관한 얘기 말이야, 자네 동생이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은 좋지 않음을 어떤 점에서 좋음으로 간주한 그 기준에 따른 좋음에 참여해서 좋은 것이며, 정상적인 식사나 운동은 원래의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이라고 한 그 얘기 말이네.
자네는 그 얘기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군 : 예, 제가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합리적이고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을 다시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까?
김 선생 : 내가 다시 생각할 땐 우리가 아무래도 플라톤이 비웃으며 말한 저 질이 나쁜 수탉과 같은 행위를 한 것이 아닌 가해서 마음이 편치 않네.
이군 : 질이 나쁜 수탉이라니요.
김 선생 : 상대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옳고 그름을 가려서, 완전히 상대의 이론을 제압하기도 전에, 어설프게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여겨 횃대에 올라가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어리석은 수탉 말이네.
이군 :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그런 수탉과 같은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까?
김 선생 : 그야 우리의 말을 아무도 반박하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자네와 내가 의기투합하여 너무 서둘러 뭔가 결론을 내려고 덤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군 : 그렇습니까? 그럼 지난 얘기 중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인가요?
김 선생 : 그럼 그 이야기와 관련하여 자네는 다시 한번 내 질문에 답해 보게. 어떤 것을 좋다고 생각하거나 느낄 경우,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주체가 있지 않겠나?
단맛의 케이크를 좋아하는 자네 동생이 케이크를 먹을 때, 그 케이크는 좋음에 참여하여 자네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으며, 그럴 때의 좋음이란 원래는 좋지 않음이지만 유사성에 의거 좋음으로 간주된 좋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 아니었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그 케이크를 좋은 것으로 느끼는 주체는 자네 동생이 아닌가?
이군 : 역시 그렇죠.
김 선생 : 그렇다면 만약 케이크나 사탕을 지나치게 밝히지 않고 간식으로 적당히 먹을 땐 어떻게 되는가?
자네가 염려하는 것이 동생의 건강이라면 케이크든 사탕이든 적당히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나?
그럴 때의 케이크는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간주한 그 좋음이 아니라 원래의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이 되는가? 건강에 나쁠 것이 없을 테니까.
이군 : 그렇다면 그렇게 말해야 되겠죠.
김 선생 : 그래서 혹시 자네 동생이 마음을 고쳐 잡아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거나, 케이크를 적당히 먹고 식사를 제때 하고 운동도 할 경우엔 이렇게 될 걸세.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그 식사나 지나치지 않고 적당히 간식으로 먹는 케이크나 공부나 운동이나 모두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으며 동생이 각각의 그것들을 실제로 좋아할 것이 아닌가?
이군 : 예, 그렇게 됩니다.
김 선생 : 그럴 경우 공부도 운동도 적당히 먹는 케이크도, 모두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자네 동생에게 있겠지만, 그때의 좋음이란 자네 말에 의하면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간주한 그 좋음이 아니라 원래의 좋음이 아니겠나?
이군 : 그야 그렇죠.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이니까요.
김 선생 : 적당히 먹는 케이크나 적당히 하는 게임은 좋은 것이고, 지나치게 먹는 케이크나 지나치게 하는 게임은 좋지 않다는 말이지?
그리고 전에 자네 동생은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했단 말이 되는 거지?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또 다음 내 말을 잘 듣게.
감각적인 모든 사물을 우리가 지각할 때, 즉 어떤 무엇을 자네가 볼 때, 그것을 봄으로써 일어나는 감각과 그 감각에 부가되는 인상은 자네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나?
다른 누가 그 같은 사물을 본다 해도 자네가 보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군 : 그것도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어떤 사물을 볼 때 나타나는 느낌이나 인상은 보이는 사물과 보는 자네의 시각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고유한 어떤 것이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나는 인상이나 느낌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바로 자네 자신이 아닌가?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보이는 사물이 있고, 보는 눈이 있고, 그 사이에 생겨나는 보이는 그대로의 모양이 있고, 그 모양을 인식하는 주체가 있네.
그런데 이는 자네 동생과 케이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네.
맛보는 혀가 있고, 케이크가 있으며, 혀와 케이크가 합쳐져 고유한 어떤 맛을 내고, 그 맛을 인식하는 주체는 자네의 동생이라네.
그리고 동생이 그 맛을 즐기는 때, 그 케이크가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한 걸세.
이군 : 말씀대로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런데 자네 말에 의하면 적당히 먹는 케이크는 원래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먹는 케이크는 원래는 좋지 않음인데 유사성에 의해 좋음으로 간주된 그런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으로 있다는 말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런데 지나치게 먹는 케이크도, 적당히 먹는 케이크도, 케이크로써는 다를 것이 없는 같은 것이 아닌가?
이군 : 같은 거죠.
김 선생 : 그리고 지나치게 먹을 때나 적당히 먹을 때나 맛보는 주체도 같은 사람이 아닌가?
자네 동생 말이네.
이군 :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김 선생 : 또 지나치게 먹을 때나 적당히 먹을 때나 먹는 혀도 같은 혀이고, 혀와 케이크가 합쳐졌을 때 나타나는 맛도 같은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같다고 해야죠.
김 선생 : 그리고 그런 단 맛을 보고 자네 동생은 먹고 있는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그 케이크가 좋음에 참여하여 자네 동생에게 좋은 것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군 : 예, 맞는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럼 이어지는 내 말을 다시 잘 듣게.
그 케이크가 좋음에 참여하게 된 조건들이 모두 같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같은 케이크를 두고 어떤 때는 좋음에 참여한 것이고 어떤 때는 좋지 않음을 유사성에 의해 좋음으로 간주한 그런 좋음에 참여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내 말은 케이크를 적당히 먹을 때나 지나치게 먹을 때나 모든 조건이 같지 않느냐는 걸세.
두 경우 다 같은 케이크이며, 같은 혀이며, 같은 인식주체이며, 같은 단 맛이 아니냐는 말이지.
따라서 두 경우 모두 동생이 느낄 때 좋은 것은 똑같이 좋은 것이 아니겠나?
그럼 똑같이 좋음에 참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한 경우는 원래의 좋음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또 다른 경우는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간주한 그런 좋음에 참여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만약 적당히 먹을 때를 좋음에 참여했다고 하고 지나치게 먹을 때를 유사한 좋음(좋지 않음)에 참여한 것이라고 하면 각각 전체(케이크, 혀, 맛, 인식주체의 합)로서의 두 경우는 그만큼 서로 달라야 하지 않겠나?
좋다고 하는 그 원인이 유사하긴 하지만 분명히 서로 다르니까.
이군 : 그렇죠. 각각 전체를 비교할 때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김 선생 : 그럼 어디가 다른가?
케이크가 다른가? 지나치게 먹을 때의 케이크와 적당히 먹을 때의 케이크를 제과점에서 달리 만들었단 말인가?
이군 : 그건 말이 안 되죠.
김 선생 : 그럼 맛보는 혀가 다른가?
지나치게 먹을 때의 혀와 적당히 먹을 때의 혀가 다른 혀인가?
이군 : 그것도 역시 얘기가 안 됩니다.
김 선생 : 그럼 혀와 케이크 사이에 나타나는 맛이 다른가?
그러나 적당히 먹을 때와 지나치게 먹을 때 모두 맛있으니까 먹는 것이 아니겠나?
똑 같이 달디 단 케이크 맛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그럼 조건 중 남은 하나는 맛을 느끼는 인식주체가 아닌가?
적당히 먹을 때의 자네 동생과 지나치게 먹을 때의 자네 동생은 서로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그래서 한쪽은 좋음에 참여한 케이크를 먹고, 다른 한 쪽은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간주한 그런 좋음에 참여한 케이크를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까지 말해도 무방할까?
이군 : 글쎄요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사람을 둘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실익이 없는 무의미한 말이 되기 쉽습니다.
김 선생 : 그럼 이번에는 그 외 다른 경우를 살펴보세.
자네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고, 복이 변하여 화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겠지?
세상만사 불변하는 좋은 것, 불변하는 나쁜 것은 없다는 말일세.
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게 되어 죽음을 면했다는 얘기나 기르던 말이 도망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얼마 후에 암말을 끌고 돌아온 것은 좋은 일이라는 얘기도 있네.
남을 돕는 것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도움을 준 사람을 배신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네.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죽을 사람을 애써 살려놓으니, 그가 얼마 후 고약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귀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걸세.
반대로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고 슬퍼해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에게 좋은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네. 세상사는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매우 오묘하여 인간의 머리로는 그 실상을 알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걸세.
보통사람이 행복과 관련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즐겁다는 것과 고통스럽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뭔가 그 이상을 바라고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그런 셈이 되는군요.
김 선생 : 지난번에 남을 돕는 것이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일로 있는 것이라고 말했고 도둑질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간주한 좋음에 참여하여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처럼 만약 도와준 사람이 배신하여 쓴 맛을 본다거나 도둑질을 당한 결과 전화위복으로 뭔가 좋은 일이 뒤따랐다면 좋음과 좋지 않음의 그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일의 원인이 되고,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반전하여 좋은 일의 원인이 되는 셈이니 말이네.
이군 : 사실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돕는 것이 무의미하다거나 도둑질을 해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지난번에 했던 말이 실질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우리가 기본을 무시하고 서둘렀기 때문이라네.
우리는 먼저 좋음이란 무엇인가?
좋다는 것으로 표시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선 탐구해야 하는 걸세.
그렇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좋음이니, 다른 좋음이니 하고 구분을 하고, 현실에 그것을 적용하며 폼을 잡았던 걸세.
현실은 대부분 상식이 해결하겠지만 우리가 이데아를 끌어다 억지로 상식에 부합시키려 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옳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군 :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쩐지 지난번에 들려주신 바도 다 팽개쳐 버리고 싶지는 않군요.
김 선생 : 그런가?
아무튼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네.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좋게 보일 때, 그 사물이 본래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음 자체에 참여함으로써 좋은 것으로 있거나 된다는 것으로부터 말일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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