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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동일률과 모순율

심각한 질문 황**

 

용수의 '중론'에 영향받은 질문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의 고유한 정체성(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동일율과 모순율이 인정되는 한, 변화(: 발생, 소멸)가 불가능하다. 발생을 예로 들자. 어떤 A가 발생했다면, A에서 발생했든가, ~A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동일률에 의해 발생이 성립되지 않는다, AA되는 것은 발생이 아니므로. 후자의 경우는 모순율에 의해 발생이 성립되지 않는다, ~A에서 A에로의 발생 순간 ~A=A라는 얘기이므로. 따라서 어떤 것의 고유한 정체성은 없고, 모든 것들의 정체성들은 서로를 의지하여 발생한다.

 

문제는 만약 모든 것들의 정체성이 상호 의지하여 발생한다면, 상호의지발생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 동일률과 모순율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율과 모순율은 개물의 독립된 정체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AA됨이 없다면, 어떻게 동일률과 모순율이 성립되겠는가?

 

심각한 질문: 위의 진술이 타당한가? 타당하다면, 도대체, 사고의 근간이 된다는 동일률과 모순율, 개물의 정체성, 개념들의 상호의지발생 등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상식과 철학사이'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아무도 응답을 안 해 주시네요. 저의 우둔함을 깨우쳐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기만을 고대합니다.

 

[re] 애매어의 오류 de anima

 

>용수의 '중론'에 영향 받은 질문입니다.

>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의 고유한 정체성(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동일률과 모순율이 인정되는 한, 변화(: 발생, 소멸)가 불가능하다. 발생을 예로 들자. 어떤 A가 발생했다면, A에서 발생했든가, ~A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동일률에 의해 발생이 성립되지 않는다, AA되는 것은 발생이 아니므로. 후자의 경우는 모순율에 의해 발생이 성립되지 않는다, ~A에서 A에로의 발생 순간 ~A=A라는 얘기이므로. 따라서 어떤 것의 고유한 정체성은 없고, 모든 것들의 정체성들은 서로를 의지하여 발생한다. >

 

일단 현재 위에서 주어진 논변만 두고 보아도, '따라서' 이하의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부합한다는 것이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논변에서 따라 나오는 결론은 '변화하는 것들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거나 (,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위배되거나), 혹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들의 정체성들은 서로를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결론은 많은 비약을 거쳐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론을 이런 식으로 고친다 하더라도 이 논변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답에 앞서 먼저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리를 해 봅시다.

 

동일률을 사물에 적용되는 존재론적 원리로 간주할 경우, 이것은 어떤 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즉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보편타당한 원리로서의 동일률은 굉장히 엄격히 적용되어야 할 원리입니다. 가령 우리가 A=A 라고 했을 때, 이는 공간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차원의 지표성(indexicality)이 엄격히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해야겠지요. 다시 말하면, 동일률은 어떤 A는 주어진 어느 시점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생이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동반하고, 변화라는 것은 다른 두 시점 t1t2의 비교를 통하여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동일률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동일률 혹은 동일성은 우리가 변화를 말하기 위하여 전제해야만 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어떤 시점에서 A가 갖는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A가 지금과는 다른 무엇으로 변화하였다는 말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모순율은 이러한 대단히 형식적인 원리로써의 동일률에 대응하는 짝 원리입니다. 보다 엄격히 정의한다면, 어떤 것이 동시에 A이면서 ~A일 수 없다는 원리이겠지요. 하지만, 모순율도 앞의 동일성에서와 같이 엄격한 지표성이 적용되는 원리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는 변화나 발생에 대한 아무런 부정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A가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때에는 어떤 두 시점 간의 비교가 개입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두 시점 t1t2에서의 각각의 AA1A2로 불러 봅시다. , A가 변화했다는 것은 A1에서 A2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각각의 시점에서 A1=A1이고 A2=A2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A1=A2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의 모순율의 위배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률에서 말하는 위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조금 느슨한 의미에서 동일성을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동일함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그 동일성은 위에서 예시한 어떤 보편타당한 형식적 원리로써의 동일률에 의해 해명되는 것은 아니며, 가령 인격동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내용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규준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동일성은, 변화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떤 변화의 와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혹은 연속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위의 예로 돌아가서, A1A2 모두를 A라고 합시다. 하지만 이때 이 둘을 모두 A이게 만드는 것은 동일률이 아니라, 인격동일성의 규준과 같은 보다 내용적인 규준을 통하여서이며, 이때 인정되는 동일성이란 것도 동일률에 의해서 말하는 그러한 엄격한 동일성이 아닙니다. 즉 이때 우리가 말하는 동일성은 형식적으로는 A1=A2의 형태로 표기되겠지만,, 그 내포는 동일률에서 말하는 동일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동일성은 모순율을 위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위에서 제기하신 질문은 전형적인 애매어의 오류(equivocation)에 기반을 둔 논증입니다.

 

[re] 애매어의 오류 황**

 

[님의 답변 전반부]

 

일단 현재 위에서 주어진 논변만 두고 보아도, '따라서' 이하의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부합한다는 것이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논변에서 따라 나오는 결론은 '변화하는 것들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거나 (,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위배되거나), 혹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들의 정체성들은 서로를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결론은 많은 비약을 거쳐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님의 답변에 대한 저의 생각]

 

신속하고 진지한 답을 주신 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따라서이하의 결론에 비약이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몇 가지 저의 선 판단이 있기 때문인데, 현재로서는 그것을 거론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리를 최대한 줄여 고쳐주신 결론 변화하는 것들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거나 (,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위배되거나), 혹은 변화는 불가능하다을 그대로 채용하더라도, 저의 심각한 질문후반부 즉 동일율과 모순율에 의한 위의 결론은 동일률과 모순율의 존립 근거를 파기한다.”가 그대로 유효한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A의 고유한 정체성(A)이 없다면, 동일률(A=A)과 모순율(~A=A 불능)이 성립 불가능합니다. 이 심각한 질문의 도전성은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고 봅니다, ‘변화라는 개념 없이 사고가 가능하다를 입증하지 않는 한.

 

[님의 답변 후반부: 님 혹은 이미 읽으신 분은 건너뛰세요]

 

그러나 결론을 이런 식으로 고친다 하더라도 이 논변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답에 앞서 먼저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리를 해 봅시다.

 

동일률을 사물에 적용되는 존재론적 원리로 간주할 경우, 이것은 어떤 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즉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보편타당한 원리로써의 동일률은 굉장히 엄격히 적용되어야 할 원리입니다. 가령 우리가 A=A 라고 했을 때, 이는 공간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차원의 지표성(indexicality)이 엄격히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해야겠지요. 다시 말하면, 동일률은 어떤 A는 주어진 어느 시점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생이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동반하고, 변화라는 것은 다른 두 시점 t1t2의 비교를 통하여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동일률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동일률 혹은 동일성은 우리가 변화를 말하기 위하여 전제해야만 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어떤 시점에서 A가 갖는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A가 지금과는 다른 무엇으로 변화하였다는 말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모순율은 이러한 대단히 형식적인 원리로써의 동일률에 대응하는 짝 원리입니다. 보다 엄격히 정의한다면, 어떤 것이 동시에 A이면서 ~A일 수 없다는 원리이겠지요. 하지만, 모순율도 앞의 동일성에서와 같이 엄격한 지표성이 적용되는 원리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는 변화나 발생에 대한 아무런 부정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A가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때에는 어떤 두 시점 간의 비교가 개입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두 시점 t1t2에서의 각각의 AA1A2로 불러 봅시다. , A가 변화했다는 것은 A1에서 A2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각각의 시점에서 A1=A1이고 A2=A2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A1=A2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의 모순율의 위배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률에서 말하는 위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조금 느슨한 의미에서 동일성을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동일함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그 동일성은 위에서 예시한 어떤 보편타당한 형식적 원리로써의 동일률에 의해 해명되는 것은 아니며, 가령 인격동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내용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규준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동일성은, 변화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떤 변화의 와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혹은 연속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위의 예로 돌아가서, A1A2 모두를 A라고 합시다. 하지만 이때 이 둘을 모두 A이게 만드는 것은 동일률이 아니라, 인격동일성의 규준과 같은 보다 내용적인 규준을 통하여서이며, 이때 인정되는 동일성이란 것도 동일률에 의해서 말하는 그러한 엄격한 동일성이 아닙니다. 즉 이때 우리가 말하는 동일성은 형식적으로는 A1=A2의 형태로 표기되겠지만,, 그 내포는 동일률에서 말하는 동일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동일성은 모순율을 위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위에서 제기하신 질문은 전형적인 애매어의 오류(equivocation)에 기반을 둔 논증입니다.

 

[저의 생각]

 

님의 답변은 시간이 존재의 변화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 같습니다. 과연 변화라는 개념 없이 시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축소하여 AB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AB의 변화 없이 t1, t2라는 설정이 가능할까요? 제가 드린 질문은 시간의 지표성(indexicality)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더 근원적인, 즉 동일률과 모순율의 근원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요?

 

님의 답변 중에 (인격)동일성과 엄밀한 동일률을 구분하시며 내용적인 규준을 징검다리로 하셨는데, 그 규준의 근거가 되는 논리는 무엇인지요?

 

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격동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내용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규준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사실, 저의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가기 위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가기 위하여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하고 싶은 마음이 질문의 동기이지요. 이후에 님과 저의 개인적인 형이상학적 규준을 얘기할 기회도 오면 좋겠네요.

 

답변의 수고를 감사하며, 가능하시다면 또 다른 답변을 기대합니다.

 

[re] A=AA=C 의 차이 de anima

 

>[님의 답변에 대한 저의 생각]

>

>신속하고 진지한 답을 주신 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

>‘따라서이하의 결론에 비약이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몇 가지 저의 선 판단이 있기 때문인데, 현재로서는 그것을 거론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

>무리를 최대한 줄여 고쳐주신 결론 변화하는 것들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거나 (, 동일률이나 모순율에 위배되거나), 혹은 변화는 불가능하다을 그대로 채용하더라도, 저의 심각한 질문후반부 즉 ““동일률과 모순율에 의한 위의 결론은 동일률과 모순율의 존립 근거를 파기한다.”가 그대로 유효한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A의 고유한 정체성(A)이 없다면, 동일률(A=A)과 모순율(~A=A 불능)이 성립 불가능합니다. 이 심각한 질문의 도전성은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고 봅니다, ‘변화라는 개념 없이 사고가 가능하다를 입증하지 않는 한.

 

// 위와 같은 선언(disjunction)적인 형태의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은, 황**님이 제안하신 논변이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렇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앞의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님의 논변이 '동일성'이라는 말에 대한 일종의 애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되므로, 님의 논변에서는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님이 제기하신 심각한 질문, “동일률과 모순율에 의한 위의 결론은 동일률과 모순율의 존립 근거를 파기한다.”는 주장은 잘못 제기된 것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저의 생각]

>

>님의 답변은 시간이 존재의 변화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 같습니다. 과연 변화라는 개념 없이 시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축소하여 AB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AB의 변화 없이 t1, t2라는 설정이 가능할까요? 제가 드린 질문은 시간의 지표성(indexicality)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더 근원적인, 즉 동일율과 모순율의 근원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요?

>

>님의 답변 중에 (인격)동일성과 엄밀한 동일률을 구분하시며 내용적인 규준을 징검다리로 하셨는데, 그 규준의 근거가 되는 논리는 무엇인지요?

>

>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격동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내용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규준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사실, 저의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가기 위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가기 위하여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하고 싶은 마음이 질문의 동기이지요. 이후에 님과 저의 개인적인 형이상학적 규준을 얘기할 기회도 오면 좋겠네요. >

 

// , 점점 어려워지는군요. 시간이 존재의 변화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래의 weezer님의 말씀대로 이 둘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weezer님이 예를 들어주신 것처럼 저의 경우는 일정한 시간의 지속 동안,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어떤 대상을 상상하는데 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런 경우를 가정하는데 에 어떤 논리적인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어찌 되었던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이 시간이 어떠한 것인가에 크게 의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황**님의 의도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런 부분이 있다면 좀 더 자세한 부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한 점은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일성 문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면 A=A 와 A=C 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A=A라는 문장은 동일률에 의해, 즉 논리만으로 그 참이 담보되는 항진(분석)문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유 혹은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형태의 동일률입니다. 하지만, 어떤 A가 어떤 변화를 거친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A라고 하는 것은, 기실 A=A의 동일성이 아니라 A=C 형태의 동일성 문장(종합문장)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일성의 참은 단순한 동일률(A=A)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확보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변화를 설명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여 우리가 A=C라는 문장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 A=A라는 동일률은 애당초 논란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가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re] '애매어의 오류' 지적에 대하여 (5월16일) 황**

 

질문자인 저 자신이 이 논의를 위한 시간배정에 곤란을 경험하면서, 친절히 응답해 주시는 Deanima님께 더욱 감사한 마음입니다. 계속적인 가르침을 주시기를 염치 불고하고 소망합니다.

 

'심각한 질문'(57) 이후 얘기되어 온 견해들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대부분, 사실, 이미 58일자 저의 응답에서 거론한 내용이지만, 좀 더 정확한 표현을 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더불어, Deanima님의 5월 11일자 답변 (제목: A=AA=C의 차이)에 대한 저의 응답도 다루었습니다.

 

1. 첫째 논의

 

1.1. Deanima님의 답변(제목: 애매어의 오류) 중간 부분: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A가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때에는 어떤 두 시점 간의 비교가 개입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두 시점 t1t2에서의 각각의 AA1A2로 불러 봅시다. , A가 변화했다는 것은 A1에서 A2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각각의 시점에서 A1=A1이고 A2=A2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A1=A2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의 모순율의 위배도 없습니다.

 

1.2. 황**의 확인질문:

 

물론, A2A1이 아닙니다. (A2=~A1). 저의 초점은 그 A2A1에서 발생/변화했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A2=~A1인데, A2A1에서 나왔다면, 변화의 시점에서 A2=A1이라는 얘기인데, 이것이 모순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모순 때문에 발생/변화라는 개념은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동일률과 모순율을 사고의 근간 법칙으로 전제하는 한. 참고로, 제가 쓰는 변화의 의미는 A~A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둘째 논의

 

2.1. Deanima님 답변의 후반부 (요약):

 

'인격동일성'과 같은 '느슨한 동일성'을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내용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규준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동일성은, 변화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떤 변화의 와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혹은 연속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A1A2 모두를 A라고 하자. 하지만 이때 이 둘을 모두 A이게 만드는 것은 동일률이 아니라, 인격동일성의 규준과 같은 보다 내용적인 규준을 통하여서이며, 이때 인정되는 동일성이란 것도 동일률에 의해서 말하는 그러한 엄격한 동일성이 아닙니다. 즉 이때 우리가 말하는 동일성은 형식적으로는 A1=A2의 형태로 표기 되겠지만, 그 내포는 동일률에서 말하는 동일성과는 거리가 있다.

 

2.2. 당혹스럼 속에서 드리는 황**의 질문:

 

위의 답변을 읽고 상당히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시간의 흐름', '변화', '내용적/형이상학적 규준' 등 규정되지 않은 용어들 때문입니다.

 

2.2.1. 질문 (1) : Deanima님의 시간의 정의는 무엇인지요? 시간의 지표성(indexicality)을 말씀하셨으니, 시간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질의 변화와 시간을 뗄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없다는 것이지요. 현대물리학 혹은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소위 atomic clock 자체가 원자의 움직임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닙니까? 저도 변화와 시간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5월 8일자 저의 응답에서 "세상을 축소하여 A와B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자. A 혹은 B의 변화 없이 시간의 흐름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의 기반입니다. Deanima님은 이에 대해 5월 11일자 답변 (제목: A=AA=C의 차이)에서 "일정한 시간의 지속동안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어떤 대상을 상상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하셨는데, "세상을 AB로 축소해 보자"는 저의 가정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님께서는 "일정 시간 동안 무변화의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다른 존재의 변화를 근거로 한 "시간"을 이미 전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님께서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이 시간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님께서 시간의 지표성을 사용하시는 한, 시간을 정의하지 않고는 님의 논변이 애매해진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실, 변화의 문제는 인과율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봅니다. 인과율은 시간을 피해서 거론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심각한 질문'은 동일률과 모순율, 그리고 인과율의 허와 실을 밝혀 보고, 이 법칙들에 의거하고 있는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조명하자는 의도가 있습니다.

 

2.2.2. 질문(2): 엄밀한 의미에서의 동일률과 모순율을 배제하고 '느슨한 동일성', '형이상학적 규준' 등을 상정할 수 있을까요? 상정 과정 중에 엄밀한 동일율과 모순율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요? 느슨한 동일성과 형이상학적 규준은 사고의 과정 중에서 엄밀한 동일률과 모순율을 선택적으로(임의로) 사용하여 발생한 애매한 관념은 아닌지요?

 

Deanima님의 511일자 답변 (제목: A=AA=C의 차이)에서 저의 "논변이 '동일성'이라는 말에 대한 일종의 애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님께서 주신 58일 자 답변 (제목: 애매어의 오류)에서 말씀하신 동일성의 정의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바로 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Deanima님의 정의: 동일률을 사물에 적용되는 존재론적 원리로 간주할 경우, 이것은 어떤 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즉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사고의 다양한 과정과 결론에 철저히 동일률과 모순율을 적용해 보고자 할 뿐입니다.

 

3. 셋째 논의

 

3.1. Deanima님의 511일 자 답변 (제목: A=AA=C의 차이)의 일부: 동일성 문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면 A=A 와 A=C 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A=A라는 문장은 동일률에 의해, 즉 논리만으로 그 참이 담보되는 항진(분석)문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유 혹은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형태의 동일률입니다. 하지만, 어떤 A가 어떤 변화를 거친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A라고 하는 것은, 기실 A=A의 동일성이 아니라 A=C 형태의 동일성 문장(종합문장)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일성의 참은 단순한 동일률(A=A)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확보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변화를 설명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여 우리가 A=C라는 문장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 A=A라는 동일률은 애당초 논란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가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3.2. 저의 재 질문: 제가 동일률을 언급할 때는 항상 그와 쌍을 이루는 모순율을 염두에 두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심각한 질문'은 위의 두 법칙과 더불어 인과율을 묻고 있는 것이지요. 위의 님의 답변이 동일률에만 초점을 맞추는 느낌을 주어 저의 사고 주변 얘기를 드렸습니다. 질문: A=C 형태의 동일성 문장('종합'문장)A=C=A라는 논리를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결국 위의 첫째와 둘째의 논의를 피할 수 없다고 보는데, 님의 견해는 어떤지요?

 

4. 저의 '심각한 질문'의 배경

 

저는 요즘 인간의 사고의 근거법칙으로 의지하는 동일률과 모순율과 인과율에 대한, 그것을 저(인간)의 삶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동일율과 모순율이 인과율에 적용될 때 상당한 혼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혼란 속에서 어둠과 빛,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여 다가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저의 넋두리가 되겠지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주시는 Deanima님의 수고를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5. 불행히도, 저의 '심각한 질문'은 적어도 저에게는 아직 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질문: 어떤 것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동일율과 모순율에 근거하여 사고하는 한 (논변과정생략). 만약, 변화가 가능하다면, 변화하는 것들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률과 모순율에 근거한 이 선언은 동일률과 모순율의 존립 근거를 파기한다, 동일율과 모순율은 개물의 고유한 정체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동일율과 모순율, 인과율(변화)과 인간의 사고와 삶의 관계가 무엇인가?)

 

[re] 하나의 관점  philebus  바람 2003-05-26 16:42:55

 

안녕하세요?

 

올라 있는 글들을 잘 읽었습니다.

저는 여기 내용 이상으로 아는 것이 없으므로 뭔가 확답을 드릴 입장은 못 되지만, 그래도 진지한 논의에 접하여 나름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주제넘게 끼어들어서 죄송하기도 하지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저도 배워보고자 하는 심정이니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황**님의 문제제기에는 저도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나마 철두철미하게 운동하고, 변화하고, 흐르고 있다면 그러한 세계를 전제 또는 대상으로 동일률이나 모순율을 내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중에 어떤 한 점을 잡아서 그 시점에서 AA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무리한 일이 된다는 뜻이죠.

A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다른 것이 되어 있는 거죠.

만약 대상이 모든 면에서 철저히 움직이고 있다면 말씀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라면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죠.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준 원자단위로 세계를 봐도 그렇겠고요.

그런데 어째서 동일률이나 모순율이 우리에게 제시되었을 때 얼핏 과연 그렇다고 인식되는가?

이것은 우리의 정신이 외부의 움직이는 사물에 비해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고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일정한 범위 안에서 외부의 흐름이 뭔가 하나 또는 여럿의 의미 있는 것으로써 연속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정신과 운동하는 사물이 서로 코드가 맞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흐름 중에서도 갖가지 정지해 있는 것들이 어떤 하나로 우리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앞마당에 있는 개를 구성하고 있는 본래의 운동 또는 흐름이 우리 정신의 어떤 선험적 구조와 만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개와 같은 개를 있게 하는 거죠.

이 점은 나무나 집이나 애인이나 비틀즈의 음악이나 다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식으로 하면 특정한 사물의 흐름(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사물은 아닌 무엇이지만)이라는 조건과 사람의 눈이라는 다른 조건이 만나 어떤 하나의 형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지 정처 없는 흐름일 뿐이었던 것은 비로소 뭔가가 되고, 우리의 눈은 보는 눈이 되며, 그 사이에 생겨난 사물은 실재하는 사물이 되고, 그 사물을 정신이 다시 인식하므로 써 그에 대한 움켜잡음과 이어지는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거죠.

이와 같은 것이 조건으로 하여 전체가 일어나는 연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사물의 해석에는 어떻든 주관이 섞여있게 마련이고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무엇, 또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것들이 일상적인 경험으로써 쌓이다 보면 그 경험들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로 올라가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동일률과 모순율의 주장이 그 시도 중 한 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동일률과 모순율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경험으로부터 유추하여 경험을 뛰어넘는 진리에 머리를 부딪친 까닭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진리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또한 유용성면에서 보면 그것(동일률, 모순율)있는 것은 있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장식하는 일종의 장신구로 보아도 타당할 것도 같지만, 반면에 감각되는 현실의 사물과 그 관계 및 의미를 해명하는 사고의 근본 원리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어쩌면 쓸모없이 괜한 군더더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논리와 추론의 능력을 괜히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죠.

예를 들어 개는 개다라는 명제는 동일률에 따라 오류가 없습니다만, 반면 ’강아지는 개다‘라는 명제도 의미상 오류가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강아지는 개와 다르죠.

우선 글자가 강아지는 셋이지만 개는 하나고 어휘가 가지는 의미도 다릅니다.

물론 개라는 집합 속에 강아지가 속한다고 말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A는 A 이다. 라는 공식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는 거죠.

, 현실적으로 AA이다 뿐만이 아니라 A'는 A이다 라는 공식도 성립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김 갑돌은 아버지다. 라고 해도 되고, 고등어는 생선이다. 라고 해도 되죠.

그럴 경우에는 실제 의미를 가려 명제의 진위를 판단해 주어야 하고 그런 일은 A는 A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옆에 할 일 없이 세워 놓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는 거죠.

요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이 바로 그 무엇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각될 때까지 뿐이라는 얘기이고, 동일률과 모순율은 이데아나 순수한 논리의 세계에서 통하는 한 가지 공식일 뿐(만일 의미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면) 현실의 사물을 거기에 대입할 때는 무의미하거나 무리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물을 대입하여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굳이 AA이다 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고요.

그냥 있는 것은 있다‘로 끝나도 충분하고, 오히려 그 간결함과 단호함 때문에 더 존재의 빛이 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 허접한 생각이었는데 제가 제기된 문제를 잘못 이해했거나 설명에 있어 미비한 점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답변을 주신다면 그에 따라 다시 생각해서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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