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 2003년 11월
곳 : 아고라 한 구석
등장인물 : 김 선생, 이군
김 선생 : 이보게, 무척 즐거운 표정인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이군 : 안녕하셨습니까?
방금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김 선생 : 흠……. 꽤 재미있는 영화였던 게지, 그래 무슨 영화였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나도 간접적으로나마 자네의 재미를 함께 느껴보세.
이군 : 그러죠. 어차피 집에 일찍 가봐야 별일도 없으니까요.
제가 본 영화는 매트릭스였습니다. 한참 전에 나왔던 첫째 편에 이은 후속 편이죠..
선생님께선 못 보셨습니까?
김 선생 : 아, 그 영화라면 나도 1편은 보았네. 하지만 그 후편들은 아직 보지 못했네.
이군 :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본 후속 편에 대해 내용을 알려드려야겠군요.
아니면 그냥 직접 보시겠습니까?
김 선생 : 그래그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좋지. 그러나 그전에 자네에게 한 가지만 물어볼 게 있네.
내가 보기에는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두고 매스컴에서 호평이 잇달았고, 인터넷상에서도 그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하여 나름대로 의견 개진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네.
자네도 그런가? 그 영화의 어떤 점이 그토록 우리에게 철학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안겨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한번 얘기 좀 해보게. 그 후편의 내용을 듣기 전에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이군 : 예, 그러시다면야 그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죠.
제 생각에 그 영화가 철학적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현실세계가 바로 그 영화 속의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의 세계가 아닐까, 그리고 참된 실재의 세계는 어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그 영화가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렇다면 영화 속의 기계장치나 스미스요원과 같은 존재가 현실에도 있어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참된 삶을 원한다면 영화 속의 네오나 몰피어스, 트리니티가 매트릭스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과 같이 현실 속에서도 그와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 : 그렇군, 자네 말이 옳을 걸세.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져보고, 장자의 나비 이야기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런 생각은 항상 그저 그런 수준에서 끝나게 마련이네.
그리고 그에 관해 뭔가 토론이라고 해봐야 역시 결과는 뻔하네..
이 현실의 세계를 실재라고 주장하건 반대로 꿈이라고 주장하건 서로에 대한 진실을 우리는 입증할 수 없고, 결국 피차간에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게 될 걸세.
이군 : 사실 그렇습니다.
김 선생 : 우리가 밤에 꿈을 꾸면서 꿈속을 현실로 여기고 그 안에서 놀다가 아침에 문득 잠이 깨면 그것이 부질없는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
그렇다면 머리가 꽤 좋은 사람들이 존재라는 것의 위상이 꿈과 현실의 두 가지로만 되어 있는 것일까? 꿈이 있고 현실이 있듯이 지금의 현실을 역시 꿈이라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명료한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안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죽는 순간 마치 아침에 꿈을 깨듯이 깨어나 지금보다 훨씬 더 존재감 있는 세계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엉뚱한 상상만은 아니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단지 꿈과 현실이라는 위계를 자신이 한 단계 더 임의로 늘려서 생각한 것일 뿐, 근거가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네.
그렇다면 내게 말해 주게, 자네가 만일 현실이 꿈이거나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가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의심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의심을 하는지 말일세.
만약 자네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런 의심을 하게 되었다면 나는 필히 자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네.
아니면 그냥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 번씩 그런 얘기를 하니까 자네도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뿐인가? 그렇잖으면 옛날에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의심을 하였다니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인가?
이군 :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뚜렷이 이거다 하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무를 만질 때의 촉감이 가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고, 장미의 향기가 실재하는 향이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개를 개가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죠.
감각적인 모든 사물에 대해 생각할 때 다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보고 느끼는 그것이 가상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죠.
모든 것은 변화하며 한 순간이라도 제 자리에 정지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은 참으로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나 자신의 몸도 매 순간 세포가 죽고, 새로이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쇠약해져 이윽고 죽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대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래? 그럼 자네가 설악산이든 지리산이든 산을 멀리서 바라볼 때 그 산이 어떻게 변화하던가? 산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는 굴러내려 평지로 떨어질지 몰라도 산이라는 그 점에서는 변화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자네가 죽기 전에는 변하지 않을 걸세.
그리고 강도 마찬가지네.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은 맞네. 뒤따라오는 물이 앞서 발을 담근 바로 그 물은 아니니까…….
그러나 역시 강물이라는 점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고 물이 흘러간다는 것, 흐름이라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으로써 있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세포가 매일 무수히 죽어 소멸하고 그만큼 다시 생성되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가? 아마도 아닐 테지? 자넨 자율적인 몸의 변화는 대부분 느끼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는 걸세.
요는 자네나 다른 사물이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이론상 틀림없겠지만 우리가 각 사물을 하나의 고정된 사물로 의식하고 감각적으로 느끼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 그 한도 내에서 자네가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각은 진실한 것이며, 그것을 체험 상 가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는 없다는 말일세.
자넨 내 말을 이해하겠지?
이군 : 그럼요, 이해합니다.
제가 말한 변화는 이를테면 원자물리학과 같은 입장에서는 옳겠지만 우리의 체험으로 보면 모든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하는 것이므로 그 와중에 경험되는 갖가지 사물에 대한 느낌이나 감각은 그 자체로는 의심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죠?
김 선생 : 그렇지, 바로 말했네.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만약 지금의 현실을 매트릭스의 가상세계라고 강하게 의심할 경우 원자 물리학과 같은 이론은 제외하고, 우리의 체험 상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의심할 수 있겠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이군 : 생각이야 해볼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뾰족한 무엇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테죠.
저를 불러 세우고 제게 질문을 하실 때부터 뭔가 말씀을 해주시려고 그런 게 아닌가요?
어서 얘기해 주십시오.
김 선생 : 이 사람! 그렇게 넘겨짚는 수도 있는가?
이군 : 제가 선생님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한두 번 말씀을 들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김 선생 : 내가졌군.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의견을 말하면 자넨 내게 감사하겠는가?
이군 : 그야 백번이라도 감사하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요.
김 선생 : 과장하지 말게.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道가 있겠는가?
단서를 잡아 생각하는 것뿐이지.
그럼 생각하는 바를 말할 테니 자넨 내 질문에 답변하게.
이군 : 예, 준비는 되었으니 묻기만 하십시오.
김 선생 : 예를 들어 자네가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 모델의 사진이나 그림을 본다고 하세. 자넨 대체로 그 그림 안의 모델이 아름답다고 느끼겠지?
이군: 그렇죠. 저도 눈이 있고 무엇보다 건강한 젊은 이니까요..
김 선생 : 그럼, 그때 그 그림 속의 모델은 아름다운 것으로써 자네에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겠나?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게, 그 그림은 언제나, 항상 자네가 볼 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가, 아니면 어떨 때는 그저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박스럽게 보이기도 하는가?
이군 : 솔직히 때에 따라 천박하게, 저질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김 선생 : 그때 그 그림 속의 모델은 천박하거나 추한 것으로써 자네에게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건 이유야 어떻든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 보는 시기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말이지?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오래된 위스키가 있다면 자네는 그 술에 대해 가능한 찬사를 보내고 마시고 싶어 할 것이 아닌가? 자넨 술을 꽤 좋아하니까.
이군 : 아무렴요.
김 선생 : 그럼 그때 그 술은 좋은 것으로써 자네에게 있는 것일세.
이군 : 그렇습니다.
김 선생 : 하지만 전날 자네가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셔 다음날까지 숙취가 풀리지 않아 무척 고생한다면 어떻겠나?
그때 그 위스키를 보아도 역시 똑같이 그 술을 찬양하고 마시고 싶어 지겠는가??
이군 : 아닙니다. 당분간은 술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질 겁니다.
혹시 타고난 술꾼이라도 그 술을 찬양은 하되 마시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럼 그때 그 위스키는 좋지 않은 것으로써, 혐오의 대상으로써 자네에게 있는 것이겠지?
이군 : 역시 그렇죠.
김 선생 : 자네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는 필요한 사람으로, 자네에게 좋은 사람으로, 반길만한 사람으로 자네에게 있겠지만 건강한 몸이라면 의사는 자네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무의미한 사람이 될 걸세.
그리고 어떤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어 월 100100만 원을 준다면 자네는 그 돈을 크게 생각하고 일을 할 텐가?
이군 : 물론 하죠. 저같이 궁한 사람에게야 매우 큰돈이니까요.
김 선생 : 그러나 부자에게 그 돈은 그다지 큰돈이 아니겠지?
그리고 자네가 몇 년 후에 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면 지금의 그 10010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겠나?
이군 : 아마 그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김 선생 : 그럼 지금의 자네에게는 100100만 원이 많은 것으로써 있지만 미래의 자네에게는 같은 돈이 적은 것으로써 있게 될 걸세.
그리고 자네의 관심거리인 연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
누구에게든 결혼하기 전의 애인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나? 왜냐하면 아름답지 않다면 피차 애인으로 사귀지도 않을 테니 말 일세.
하지만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대체로 그 시기는 다르지만 언젠가는 예전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네. 자넨 경험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군 : 저도 말은 많이 들어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합니다.
그렇지만 제 애인은 아무쪼록 오래도록 아름답게 같은 모습으로 남아주길 바라죠.
김 선생 : 그러게, 자넨 젊으니 미리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야 있겠는가?
아무튼 내 말이 뜻하는 바는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네.
위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연애 중일 때의 애인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그에게 있지만, 결혼하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난 후의 배우자는 같은 사람임에도 예전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있지는 않는다는 말이 되는 거지.
그러면 지금까지의 얘기를 모두 종합해 보기로 하세.
이런 유의 얘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그건 이런 걸세.
즉,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보이는 것이 구체적인 사물에 첨부될 경우, 그것이 대립되는 양자 중 무엇이라고 말하건 진리나 실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지.
여기서 서로 대립되는 성질이란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올바름과 옳지 못함, 많고 적음, 빠르고 느림, 길고 짧음, 무거움과 가벼움, 하나와 여럿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네.
즉, 같은 그림을 놓고 어느 때는 아름다운 것으로 취급하고, 어느 때는 추한 것으로 취급하네. 그러나 그 그림은 이때나 저때나 사실 동일한 것일세.
그 그림에 대해 아름다운 것이라 말해도, 추한 것이라 말해도 어느 쪽도 진리나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걸세.
그리고 100100만 원이 어느 때는 많아 보이고 어느 때는 적게 보이네.
또 누군가에게는 많은 것으로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적은 것으로 있게 되네.
그러나 절대 액수 100100만 원은 항상 불변이며 동일한 걸세.
자네는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림이나 돈 100100만 원으로부터 아름다움과 추함, 많음과 적음을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군 : 충분히는 아니지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뭔가 새삼스레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김 선생 : 플라톤에 의하면 자네는 철학에 입문하고 있는 걸세.
아무튼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현실의 문제이므로 그리로 돌아가세.
우리가 손가락을 보고 이것이 실재인가 가상(꿈)인가 하고 묻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일이 될 걸세.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양측이 언제나 같은 얘기를 되풀이할 수 있을 뿐, 더 이상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네.
그리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일은 정상인에게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런 점은 나무나 돌이나 개나 말이나 다 마찬가지이네.
그럼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그 각각의 사물에 앞서 말한 대립되는 성질이 첨부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세.
즉, 손가락이란 긴 것인가, 짧은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도 보편적인 진리(실재)와는 거리가 멀게 되네.
그것은 경우에 따라 긴 것으로도 되고 짧은 것으로도 되기 때문이네.
하지만 손가락이란 긴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된 믿음을 간직하는 셈이 되고 스스로 손가락에 가상적인 성질을 덧붙여 결국 손가락에 관한 한 가상의 세계에 관여하게 되는 걸세.
그럼 다시 내게 답변해 주게.
돈이란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이군 : 그럼요. 좋은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까?
김 선생 :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좋은가? 아니면 사용할 때 실제로 좋은가?
이군 : 당연히 사용해야 좋은 것으로 되죠.
만일 평생 동안 가지고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애물단지가 되겠죠.
화장지로도 못 쓸 테니까요.
김 선생 : 그럼 생각해 보게, 무엇이든 사용할 때는 옳게 사용할 수도 있고, 그릇되게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나?
톱이나 대패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 있고 그에 따라 사용해야 이득을 얻을 것이 아닌가?
피아노나 기타도 올바르게 연주하는 법이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때도 함부로 줄 수도 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주어야 또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 아닌가?
이군 :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돈을 올바로 사용한다거나 반대로 올바르지 못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요?
김 선생 : 그건 비교적 간단하네.
돈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나 남에게 이득을 주면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되고, 해를 주면 올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네.
만약 누군가 수십만 원으로 질펀하게 술을 마시고 윤락가에 들러 연애를 했는데, 며칠 후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판명되어 그날을 후회한다면 그는 돈을 잘못 사용했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가?
그때 그런 돈이 없었다면 그는 숙취나 성병으로 고생하게 되지는 않았겠지?
이군 : 그야 그렇죠.
김 선생 : 그리고 누군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맛있는 것을 잔뜩 사주어 거리낌 없이 먹게 한 결과 그 아이가 비만과 소아 당뇨병에 걸렸다면 그런 때도 그 아버지는 돈을 잘못 사용했다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 돈이 그런 정도로 없었다면 아이는 보다 건강했을 텐데, 돈의 지나친 사용으로 오히려 질병을 안겨주었으니 말일세.
이군 : 그도 역시 그렇습니다.
김 선생 : 그럼 더 이상 예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돈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사용할 때 좋은 것이 될 수 있으며, 올바르게 사용할 때 비로소 좋은 것이 되네.
즉, 돈을 사용함으로써 善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그 돈은 선에 참여하여 선한 것으로 되는 걸세.
그렇지 않은 경우 돈은 원칙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올바르지 못하게 사용하여 악한 결과가 생겼을 때 그 돈은 악에 참여하여 악한 것으로 될 걸세.
이군 :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들었습니다만, 제 마음은 아직 긴가민가하고 있군요.
김 선생 : 자네나 나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은 누구 말마따나 멀고도 험한 길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네. 일단 이해가 되었다면 그건 그렇다고 해두세.
그럼 지금까지 논의된 바에 의하면 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인가, 가상인가 하고 묻는 것은 역시 어리석은 일이 되겠지만 그와는 달리 돈이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어느 편이라고 대답해도 진리(실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것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좋은 결과를 불러올 때는 좋음에 참여하여 좋은 것이 되고 나쁜 결과를 불러올 때는 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네.
자, 이제는 우리의 현실과 관련하여 어떤 점에 대해, 우리가 실재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내가 생각하는지 짐작하겠는가?
이군 : 아직 분명히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말씀해 주시죠.
김 선생 : 이젠 별로 어렵지 않네.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을 원래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사물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올바르다거나 올바르지 못하다거나 하는 성질을 과도하게 덧붙여 보게 될 때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서 살게 되네.
즉, 돌멩이나 나무나 산이나 집이나 소나 내 자식이나 이 모든 감각적인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것은 일단 의미가 없네.
그러나 여기에 좋음이나 나쁨이나 아름다움이나 추함이나 올바름이나 올바르지 못함 등이 덧붙을 경우 사정은 일변하여 만인이 각각 같은 대상에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고 각자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게 되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구축한 덧붙은 이미지들로 세계와 사물을 해석하여 스스로 매트릭스를 만들고 그 속에 안주하며, 그 안에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얻길 바라지만 사실 그것은 요원한 희망 일세.
내 말을 알아듣겠지?
이군 : 예, 이젠 말씀하시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한 가지만 여쭤봐야겠습니다.
누군가 이 세상은 어차피 진정한 실재가 아니며, 우리 영혼의 본향은 원래 다른 곳에 있고, 뭔가 사유가 있어 잠시 이 땅에 내려와 육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뿐이라고 하며, 우리는 언제고 다시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선생님께선 그에게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또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진흙탕 속에 빠지는 것처럼 두렵게 여기고 태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이 세계의 사물들은 실재로써 인정하시고 단지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김 선생 : 여보게, 자네가 말하는 문제는 사실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일세.
능력이 닿지 않는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자네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군 : 그야 선생님의 말씀이 지당하지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나 “내가 볼 때는…….” 이나 “내 의견으로는…….”이라는…….” 조건을 앞에 붙인다면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저는 진리를 말씀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니까요.
물론 아무런 의견도 없다면 말씀하실 것도 없겠지만 말이죠.
김 선생 :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용기를 내어 말해야지.
그럼 다시 한번 내 질문에 답하게.
자네는 이 세계의 악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비롯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알고 있나?
이군 :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김 선생 : 그것은 자네가 평상시에 잘 듣던 말일 걸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과도한 욕심 말이네.
이군 :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군요.
김 선생 : 그에 더하여 분노와 어리석음을 거기 보태어 말하기도 하네.
이군 : 역시 옳은 말씀입니다.
김 선생 : 그럼 그 근원적인 악이 만약 어떤 위대한 섭리나 힘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고 상상해 보게.. 그런 상태로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을 한다면 어떤 형태로 살아가게 되겠는가?
이군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김 선생 : 어리석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혜와 이성이 온전히 자기 몫을 하게 되겠지?
이군 : 그렇죠.
김 선생 : 분노 또한 사라지고 대신 온유하지만 합당한 자존감이 들어설 걸세.
이군 : 또한 그럴 겁니다.
김 선생 : 탐욕이 없어지고 욕구는 원래 자기 몫의 일만을 하게 될 걸세.
즉, 배고프면 먹을 것을 요구하고, 피곤하면 잘 것을 바라지만 그 이상은 욕망이 우리의 생활을 좌지우지하지 않게 될 걸세.
부연하면, 무엇이든 먹을 것이면 되지 특별히 맛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졸리면 자면 되지 특별히 안락함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란 말일세.
그리고 성욕은 인간의 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제 역할을 하도록 지도되고, 그 이상은 자신의 역할을 확대하지 않게 될 걸세.
그리하여 인구가 정도 이상으로 불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각 집단이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지 못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도 없을 것일세.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활하고, 지금과 같은 불필요하고 나쁜 생활습관에서 해방되므로 대부분 천수를 누리고, 죽을 때는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갈 걸세.
천수를 다하고 죽는 사람들은 대개 고통이 없이 죽는다고 하니까.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혜롭고 깨어있는 사람들이므로 친족이 늙어 죽는 것을 그다지 슬퍼하지는 않고 순환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써 당연하게 여길 걸세.
그들은 필요한 만큼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들의 지혜에 걸맞은 철학적인 대화나 관상으로 소일할 걸세.
또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본래적인 우애로 서로 사귀며 살아갈 걸세.
이와 같이 인간에게 근원적인 악이 소멸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선한 생활을 영위하며 세대를 이어 살아가게 될 걸세.
어떤가? 내 말이 그럴듯한가?
이군 : 예, 제 마음에 듭니다.
김 선생 : 그렇다면 생각해 보게.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그 사람들도 기본적인 감각은 우리와 같겠지?
사과를 보면 붉다고 느끼고, 돌멩이를 만지면 단단하다고 느끼며, 산을 보면 푸르고 서로의 몸을 만지면 부드럽지 않겠는가?
이군 : 아마도 당연히 그렇겠죠.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조건도 되니까요.
김 선생 : 만약 그런 소박하고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세계를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란다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돌멩이나 소나 집이 실재니 가상이니 하면서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거짓을 용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네.
기술상 잠시 거짓을 허용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영혼이 통째로 뭔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네.
즉, 내 말은 인간으로서 바로 이 땅 위에 가장 바람직한 세계를 가지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아마도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위대한 다른 힘이 능력을 나타내야 하겠지만) 아니면) 자네가 말한 대로 궁극적으로 인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천당이든 극락이든 원래 우리의 혼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의 양자택일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걸세.
만약 예컨대 천당이나 극락이 존재론적으로 이곳보다 더욱 충실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의 혼이 원래 그런 환경에 있는 것이 합당한 것이었다면, 이곳의 사물들과 이 사물을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 혼의 일부분은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원래적인 우리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네.
반면에 우리가 위에서 상상한 대로 이 땅 위에서 우리가 가장 지혜롭고 조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은 기본적으로 있는 그대로 충실히 존재하는 것이 되며 가상이니 환상이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 될 걸세.
내 말을 이해하겠지?
그리고 자네는 지금 제시된 두 가지 선택 중 어느 하나를 자신 있게 골라잡을 수 있겠는가?
이군 : 글쎄요,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저도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결론은 우리가 원래 이 땅위에 사는 것이 합당한 존재인 한, 주변의 모든 사물의 실재성은 의심할 바가 없으며 단지 사람들이 그 사물들에 대해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등의 성질을 부자연스럽게 부가하여 파악하는 바람에 진실이 왜곡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 매트릭스를 만들어 왜곡된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씀이죠.
또한 우리가 이 땅 아닌 다른 - 예컨대 무형의 정신세계 - 세계에 사는 것이 본래의 우리 생활이었고 이 땅에는 어떤 연유로 잠시 들른 것이라면 주변의 사물들은 원래적인 의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김 선생 : 자넨 잘 알아들었네. 그럼 우리에게 있어 매트릭스 논의는 거칠지만 일단락된 셈인가?
애초에 자네가 오늘 본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는데 시간도 많이 지났네.
이군 : 글쎄요. 말씀을 죽 듣고 보니 왠지 영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매트릭스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 뿐이며, 따라서 스미스 요원이나 복잡한 기계장치나 전투 같은 것은 설사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物化시켜 대중의 재미에 영합하고 있을 뿐이므로 더 이상 흥미를 갖고 싶지는 않습니다.
김 선생 : 그런가?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
실은 논의 주제에 비추어 우리의 대화가 너무 간략히 다루어진 느낌이 있으니 나는 돌아가 다시 한번 처음부터 생각해 보아야겠네.
이군 : 그러시죠. 저도 머리가 오락가락하여 집에 가서 지금의 대화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김 선생 : 그러게, 그리고 내 말과 관련하여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다음에 말해 주게.
이군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김 선생 : 자네도 잘 가게. 다음에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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