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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작은 철학 토론 2

 지성 답변 7

닉이 고상하네요, '장자의 나비'. 일단 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함을 늦게 열어 보느라 답변이 늦은 것 이해해 주시고요.
마르크스의 명언을 고찰하려면 절대론적 관점에만 입각해서 보면 해석하기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이론에 투영시켜 보는 반영론적인 관점에서 더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으리라 사려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체적이고 가변적인 혁명을 중시한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현실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못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현실 생활 문제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데아나, 합리론, 관념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것에서, 실천 없이 세계를 고찰하려는 '공리공론'보다는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현실 파쇄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안다는 것보다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이른바 '혁명'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석의 유연성이 필요한 거겠죠. 전 맑스의 유물론에 찬동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 너무 기계적인 메커니즘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명언에서는 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견해에 대해서 말 입니다만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탁상공론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되더라도 행동주의가 더 낫다는 게 제 개인적 견해란 겁니다. 추측컨대, 마르크스도 보수적, 점진적인 개혁이 아닌 확실한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입장에 입각했습니다. 환자를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도, 환자를 고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의학기술을 배우는 이유는 환자를 '고치기 위한 것'이고, 이건 양자에 다 해당되는 겁니다.
토론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더 토론할 의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주제를 바꾸는 것이 어떨는지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좋은 사유 늘 함께 하시길.

philebus(연못) 답변7

메일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지성님은 주시하고 있는 곳이 주로 외부 사회인 반면 저 자신은 저의 내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글이 더욱 그런 생각을 짙게 해 줍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탁상공론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되더라도 행동주의가 더 낫다는 게 제 개인적 견해란 겁니다. 추측컨대, 마르크스도 보수적, 점진적인 개혁이 아닌 확실한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입장에 입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실효성 없는 탁상공론을 하지만 행동주의자는 그 행동의 결과가 설사 선이 아닌 악이 되더라도 해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사고에는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탁상공론보다는 행동주의가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전혀 사전 계획이 없는 행동이라면 성공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빚이 더 많아지는 거죠.
어쨌든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준비가 있다면 과감한 행동이 주효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그의 경제이론이 주안점이며, 현실 속 노동자들의 비참함에서 그의 감정적 에너지가 움직였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철학적 기반인 유물론은 사실 초라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경제를 위한 행동주의라면 그것도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지만, 한걸음 나아가서 행동 주의자에 의한 어떤 행동의 결과가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자신이나 다른 인간의 정신을 보다 선량하게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작용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면 과연 스스로 메피스토펠레스가 될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감수할만한 역량 있는 행동주의자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메피스토펠레스가 될 확률이 100이라면 아무도 행동주의자가 되지는 않겠죠.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악이 될 확률이 100이라는 얘기니까요.
탁상공론보다 행동주의가 낫다고 할 수 있으려면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4:6이나 5:5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관해, 정의와 부정에 관해, 고귀함이나 비천함에 관해 행동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고려와 예측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죠.
행동의 결과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보다 선량해진다거나 보다 지혜로워진다거나 보다 올바른 사람이 된다면 그는 행동하는 철학자로 귀감이 될 겁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결과 자신이나 사람들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훌륭하게 변화할 가능성이 몇십 프로라도 있다고 판단하여 행동할 때 그 결과 실제로 그렇게 되든지 아니면 더 나빠지게 됨을 감수하여 메피스토펠레스가 되든지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그러나 그러한 정신의 진보에 관한 사전 계산이 없이 행동하려 한다면 저로서는 무모하다고 하거나 모호하다고 해야 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반면, 물질적인 풍요나 경제에 주안점을 둔 행동주의라면 일단 논의의 외곽에 속하는 문제죠.
지금 논의는 어디까지나 철학에 관해서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삶이나 잘 사는 삶이나 좋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그런 삶이란 경제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저는 지성님의 행동주의가 궁극적으로 어디를 지향하는 건지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행동주의인지, 무엇을 위해 메피스토펠레스를 불사하려 하는지 말입니다.
주제를 바꿔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글을 보다 보니 지성님은 생존 경쟁 예찬론자라고 스스로 밝히셨더군요.
그래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는데요,
생존 경쟁의 결과 승리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누리며, 거기서 무엇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패배한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게 되며, 무엇을 잃게 됩니까?
철학적인 얘기는 본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주제도 논의가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여기저기 드나들며 맛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토론도 그런 식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제에 관한 설명도 좋고 에피소드나 경험담도 좋고 고전의 인용도 좋고요.
상대의 글을 읽어보고 바로바로 답을 해도 좋고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이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느슨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즐기고 싶다는 거죠. 논의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함께 얘기하면 될 테니까요.
저는 이번 주에 아마 일주일가량 집을 비우게 될 것 같아서 메일은 다음 주에나 또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가는 곳에서도 컴을 만질 기회가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성님의 글은 스피디하고 박력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답신에 감사드리며, 이만 안녕히…….

 

지성 의견

()과 국가

 

조각조각 나뉜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왜 세계는 통합될 수 없는 걸까. 왜 전쟁을 치르면서 까지 국가 체제를 다극화시키려는 걸까.
그리고 헤겔이 변증법의 최종 산물을 세계가 아닌 국가를 최고로 매듭진 것에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인간 개인이 가족으로, 가족이 시민 사회로, 시민 사회가 국가로 진화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허나,
왜 세계가 아니라 국가가 변증법의 가장 진화된 산물일는지.
하지만 이제 알 것도 같다. 변증법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 ()
혹은 경쟁의 요소, 경쟁을 촉발시키는 요소. ()
세계가 인문 총체의 가장 진화된 산물이라면, ()이란 요소가
빠져버리는 것이다. ? 인류가 사는 세계는 하나니까.
인간은 경쟁을 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존재이다.
경쟁 상대가 없으면 경쟁 상대를 만들어서 그 생을 더 고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인문 법칙도, 자연법칙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국가란 체제를 통합할 수 없는 이유.
그건 '경쟁'을 위해서다. '경쟁'이 없으면 국가도 그 체제를 지탱할 수 없다.
'국가'란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깨달은 건 전례에 없었던 것 같다
 
 
philebus(연못

Re: ()과 국가


안녕하세요,
지난 마지막 메일에서 생존경쟁에 대해 질문을 드린 것 같은데 아직 답신이 없어서.......
별로 재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 글에서도 경쟁 얘기가 나와서 한 가지 다른 면으로 물어볼까 하는데요,
인간은 경쟁을 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존재라고 했는데, 경쟁이란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씁니까?

아니면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입니까?
또 모든 일에서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하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부문에서만 우월해지려고 하는 겁니까

 

 
지성 

연못님께


안녕하세요, 연못님. 오랜만에 뵙니다.
일주일 동안 일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여유 있게 답장드리려고 하다가
늦었습니다. 이해해 주실 걸로 믿고요.
모든 사물은 제각각 테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본적인 틀로써, 제각각 가지고 있는 방향성. 자연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물을 예로 들자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든지, 증발하여 비로 내리는 순환을 계속한다는 것. 이렇게 사물이 약동하는 방향성을 지닌 것처럼, 테제도 그 성향을 지양하고 발전시켜 더욱 높은 차원인 '진테제'를 만듭니다. 하지만, 사물이 발전해 나가는 양상을 보면,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안티테제(). 테제의 성향과 대립되는 '대립물'인 것이죠.
안티테제()의 단계, , 테제의 모순이 자각되어 해결하려는 투쟁의 단계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진테제가 완성됩니다. 이 단계는 테제와 안티테제가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의 식물(테제)이 병충해의 고통(안티테제)을 이기고 더 훌륭한 품종으로 진화하는 것(진테제)>
요컨대, 자연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모든 사물은 그 내부에 서로 대립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양 측면의 투쟁을 원동력으로 하여 변화 발전하고 있는 것이죠.
,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발전하려고 하며, 유연성을 지닙니다. 경쟁이란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주체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누구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하나의 '과정'이란 해석 과정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hilebus(연못)  

경쟁과 발전..(지성님께)


답글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질문에는 전혀 구체적인 대답이 없네요.
저는 경쟁의 내용을 묻고 있는데........
테제가 안티테제와 투쟁하여 진테제로 발전한다는 개념을 식물을 예로 들어 잘 설명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경우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물은 거죠.
제 질문은,
'인간은 경쟁을 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존재라고 했는데, 경쟁이란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씁니까? 아니면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입니까?
또 모든 일에서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하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부문에서만 우월해지려고 하는 겁니까?'  라는 것이었는데요.
그에 대한 답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발전하려고 하며, 유연성을 지닙니다. 경쟁이란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주체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누구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하나의 '과정'이란 해석과정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거죠.
제 질문은 경쟁이란 단독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쓰이는 말은 아니고 경쟁상대가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니 그 경쟁 상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는 거죠. 지성님은 스스로 생존경쟁 예찬자라고 지난 글에서 주장한 바 있으므로 저는 그 경쟁상대가 같은 인간이라고 판단한 거죠.
제가 듣고 싶은 답은 경쟁이란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는 투의 말이 아니고, 경쟁상대가 특별히 무엇이냐 하는 것과 무엇을 놓고 경쟁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이미 한 질문의 의미는 충분히 다시 설명드린 것 같으니 이번에는 좀 질문의 의도에 적중하는 답을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제 질문이 이해가 안 가신다면 다음에는 제가 답변의 예시를 들어드리죠이만…….

 

 

지성

Re: 경쟁과 발전..

답변 감사하고요.
저에게 연못님은 경쟁에 대한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으로 사려 되었기 때문에, 경쟁의 필요성을 안티테제란 개념으로 답장드렸습니다만, 연못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답글에는 부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생존 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인간만이 공유하는 경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 틀을 사물에서 뺀 적도 없습니다.
일단, 제가 받아들이고 있는 경쟁이라는 개념, 제가 사용한 생존 경쟁에서 사용한 '경쟁'이란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겠습니다. 연못님께서 생각하시는 경쟁의 의미와는 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의 내리고 있는 경쟁의 의미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성()적 욕구(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위한, 프로이트가 말한 자가 본능의 욕구)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개체의 성장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발전 과정입니다. 모든 만물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조물주에 의해서 잘 만들어진 창조물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한 사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사물이라도 완전해지려고 하는 불문율의 법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이 진테제로 진화하려고 하고, 성장에 봉착하기 전에 (자신)가 아닌 非我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티테제입니다. 대립물이죠.
'인간은 경쟁을 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존재라고 했는데, 경쟁이란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씁니까? 아니면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애쓰는 것입니까?
:또 모든 일에서 상대방을 능가하고자 하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부문에서만 우월해지려고 하는 겁니까?'
연못님의 이 질문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경쟁이란 개념 정의>
<경쟁의 주체, , 경쟁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놓고 경쟁하느냐>
이 정도일 겁니다. 그리고 이번 글을 보니 경쟁의 객체, , 경쟁 상대도 궁금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더하겠습니다.
<경쟁의 객체, , 경쟁 상대는 누구인가>
요약하자면, 경쟁이란 개념 정의는 제 생각에 입각한 한, 윗글과 같습니다. 경쟁의 주체, 즉 경쟁자는 테제이며, 경쟁 상대는 안티테제입니다. 경쟁의 연유랄까, 그런 건 테제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입니다.
제 고찰은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고찰한 건 아닙니다. 철학적인 의미, 그중에서도 형이상학에 입각해서 고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경쟁이란 단어도 '자신을 보다 높은 질로 나아가게, , 자신을 진 테제화 하는 과정'이라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지성님께)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도 지난 글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거죠.
테제와 안티테제 얘기는 지난번부터 한 건데 이번에도 경쟁의 객체는 안티테제라고만 하였을 뿐, 그 안티테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해명이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성님의 말씀에 따를 때, 인간은 성장을 위해 경쟁을 필연적으로 해야 하지만 무엇이 무엇과 경쟁을 해야 하며, 경쟁 결과 무엇을 얻기를 바라야 하는지(말하자면 성장이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공허한 이론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말씀대로 성장에 봉착하기 전에 가 아닌 안티테제인 非我를 만나게 되어 경쟁을 해야 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지금 자기 행위의 주체로써 또는 동기 부여자로써 의심 없이 믿고 있는 현실의 자기란 존재가 어쩌면 경쟁의 주체가 아니라 반대로 극복되어야 할 안티테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해도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만약 똑같이 되풀이되는 지성님의 글이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의 끝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론을 어디에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죠.
혹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죠.
인생이란 경쟁이나 투쟁을 통해 성장 발전하게 되어있으므로 스스로 죽는 건 잘못이라는 투로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사물의 본성을 탐구하고, 분별하여 선악과 가치유무를 판별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경쟁은 필연이며 경쟁 결과 테제와 안티테제가 진테제로 된다.'고 말할 뿐, 무엇이 테제이며, 무엇이 안티테제이고 무엇이 진테제인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면, 듣는 사람은 혼란을 일으켜 차라리 안 듣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성

Re: 경쟁과 발전..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일단 제가 지난 글을 쓴 취지는 제가 생존 경쟁이란 어휘를 사용할 때, 입각한 사고관을 말씀드리는 것이었지, 인간이 경쟁을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고찰하려는 목적관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당위적인 목적을 수립하는 것이 아닌, 제가 사용한 경쟁이란 어휘의 뜻을 피력하였던 것이지요. 님께서 제게 질문하신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경쟁이란 개념 정의>
<경쟁의 주체, , 경쟁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놓고 경쟁하느냐>
위의 것만 봐서는 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제가 지닌 경쟁관 개념 설명을 원하시는 건지,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공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제 의견을 물으시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 명증하게 해당 사항을 말씀해 주셨다면,, 저로써는 답변을 드리기가 수월했겠죠. 개념 정의와 그 개념의 활용 방법을 해명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요.
인간 개개인에 비추어 어떻게 경쟁해야 되는지를 명제화하긴 힘듭니다. 윤리도, 제도도, 풍습도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이니까. 그래서 그런 것을 인간의 행위 방침으로 절대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컨대, 저는 그것을 가치관에서 피력하고 싶습니다. 자신만의 행위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윤리, 제도, 풍습, 이런 게 도구적인 역할을 해 줄 수 있겠죠. 독자적인 가치관으로 세계를 내다보며, 자신의 가치관에 하는 가치관, , 부조리, 모순에 저항하는 겁니다. 가치관이 뚜렷한 인간은 거의 경쟁에서 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자면, 정체를 통치에 적합한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도 경쟁입니다. 시대가 군주를 요구하면 군주정을, 민권을 요구하면 민주정으로 바꾸어 나가는 겁니다. 저는 인간과 인간의 소산인 체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순을 과감히 뒤집어야 한다는 이론에 동조합니다. 마키아벨리가 그랬지요.
<말씀대로 성장에 봉착하기 전에 가 아닌 안티테제인 非我를 만나게 되어 경쟁을 해야 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지금 자기 행위의 주체로써 또는 동기 부여자로써 의심 없이 믿고 있는 현실의 자기란 존재가 어쩌면 경쟁의 주체가 아니라 반대로 극복되어야 할 안티테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해도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동시 테제, 안티테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없습니다. 테제인 사물이 동시에 안티테제일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남에게 도움만 주는 사람도, 피해만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절충된 존재로써,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고 극복하며, 나약한 정신을 보다 확고부동하고, 실용적인 정신으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일례로, 다윈의 진화론을 생각해 보시면 어떨지요. 한때는 유익했던 생물의 기관도 퇴화되는 법이니까요.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급한 일이 있어서, 깊이 설명드리지 못한 바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쓰도록 하죠.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

바쁘신 것 같은데도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제 질문을 이해하신 듯하네요..
제가 아마 주체라든가 객체라든가 공리적이라든가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알아듣기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가급적 평범한 일상어를 쓰는 것이 글자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훨씬 더 알기가 쉽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정형화된 용어는 피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또 그런 용어를 많이 구사하다 보면 한 가지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쉽다는 거죠.
이건 지성님의 경우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그간 제가 죽 느껴왔던 점이고 스스로 경계하는 사항입니다.
아무튼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무엇과 경쟁하느냐, 무엇을 놓고 경쟁하느냐에 대한 뚜렷한 설명은 없고, 독자적인 가치관, 또는 자신만의 행위 법칙에 따라 경쟁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바람직한 걸로 되어 있네요.
이것은 말하자면, 전에 몇 번 벌어졌던 우리나라의 국회 청문회에서 나와 증언한 사람들 중 일부가 답변마다 모릅니다, 기억에 없습니다. 로 일관하여 신문에 그들을 모르쇠로 지칭한 것이 생각나는데, 법정이나 국회에서 증언하는 많은 사람들 중 그렇게 모른다로 일관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니, 청문회의 그들을 독자적인 가치관의 소유자, 또는 자신만의 행위법칙을 가진 자들로 분류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청문회에 부른 부조리한 세력과 싸운 거죠.
그래서 또한 일정 부분 승리한 거고요.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은 지지 않는다고 지성님도 그랬으니까요.
또한 그들은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제자들도 길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청문회에 나선 일부 사람들도 그들의 독자적인 행위법칙을 보고 배운 것처럼 행동하는 듯이 보였거든요.
시대가 아직까지는 모르쇠를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그들을 보고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겠죠.
아직까지는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에 반발하는 셈이 되니까.
어쨌든 지성님은 스스로 매우 명확한 듯이 말씀하지만 저로서는 모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개념 정의와 그 개념의 활용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하셨는데, 정의된 개념이 내용이 모호하거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없다면 그 정의가 올바르다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지성님의 말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옛날에 어떤 의사가 있었는데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풀에는 약초와 독초가 있다.
약초는 대체로 병을 낫게 하는 데 쓰이고, 독초는 먹으면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약초도 잘못 쓰면 오히려 병을 더 깊게 할 수도 있고 독초도 쓰기에 따라서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 거죠. 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겁니다.
, 약초에는 무슨무슨 종류가 있고, 독초에는 무슨 종류가 있으며, 어떤 약초를 어떤 환자에게 어떤 분량만큼 어느 기간 동안 주어야 한다든가 어떤 독초는 어떤 경우에 얼마만큼 쓰면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데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그것은 다 제자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판단에 따라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죠.
그렇게 독자적인 처방에 따라 치료하다 보면 반드시 병을 고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요.
이는 해괴한 의사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 의사라고 할 수가 없겠네요.
그는 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이 다만 풀에는 약초와 독초가 있다는, 극히 상식적인 얘기만 알 뿐이니까.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좋지만 무엇이 모순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고는 해결도 없죠.
대다수가 모순이라고 말할 때는 이미 병은 깊어진 상태고 뒤집어질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뒤집는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필연적인 일이 되는 거죠.
그러한 상황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맡는 인물은 헤겔식으로 말하면 세계정신이나 민족정신의 자기 전개에 따르는 사주를 받아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필연적인 일이란 글자 그대로 당해야만 하거나 통과해야만 하는 일일 뿐 선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를 경우 제가 극단적인 예라고 말한 부분, <말씀대로 성장에 봉착하기 전에 가 아닌 안티테제인 非我를 만나게 되어 경쟁을 해야 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지금 자기 행위의 주체로써 또는 동기 부여자로써 의심 없이 믿고 있는 현실의 자기란 존재가 어쩌면 경쟁의 주체가 아니라 반대로 극복되어야 할 안티테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해도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지성님은 분명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지금 헤겔의 생각에 기초하여 경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스스로 경쟁 예찬론자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 하는 지성님이 이른바 세계정신의 위치에서 볼 때는 안티테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이거나 사라져야 할 생각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냐하면 지금까지 경쟁이란 무엇에 대한 경쟁이며, 무엇과의 경쟁이냐 라는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는데 따르는 결과, 제기될 수도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경쟁이라는 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얘기지만, 역사를 관찰하여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사실과 그 배후에 있는 힘을 일괄하여 합리적으로 관계 짓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드러난 현상들이 최선의 것인가라는 점은 따로 연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존재란 원래 경쟁하고 투쟁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인지, 아니면 원래는 서로 우애 있는 관계에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변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죠.
만약 원래의 화목한 관계를 되찾는 것이 목표라면 화목해지기 위해 경쟁하거나 투쟁하거나 저항한다는 묘한 얘기가 될 겁니다.
바쁘신데 방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
얘기에 급할 건 없으니 피차 편한 대로 주고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만........

 

 

지성

Re: 경쟁과 발전..

매번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정형화된 용어를 사용하는 건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용어 사용을 어느 정도는 하지만, 제가 굳이 용어 사용을 고려하고자 했다면 틀린 말이 되겠죠. 누구나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그 동기가 빗나가면, 장문의 글도 쓸모가 없게 되니까요. 쉽게 풀어쓰는 글을 좋아하는 것은 여타 동기가 없는 한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제가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제가 용어를 사용하면서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되겠지 다른 동기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지요. 실제 딱 떨어지는 용어 사용을 하면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보는 사람이 요지 정리를 하기가 오히려 쉽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저의 경우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점이 있다면 그것을 간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회 청문회의 증언과 '모르쇠'를 예로 들어 말씀해 주셨는데,, 그들은 독자적인 행동법칙에 따랐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이 자신이 나아갈 길을 파악하고, 또 그렇게 실천되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부합한 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몰라서 모릅니다. 라고 했든, 변명을 했든 그렇게 행동해서 얻을 수 있는 순이익이 정직하게 답변한 것보다 낫다면, 그들의 행위는 비록 정사에 흔들렸을지라도, 잘못된 행위라고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참말을 하는 것이 옳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도덕 준칙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도덕 준칙을 지키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되면, 도덕 준칙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도덕 준칙도 결국 인간이 만든 체제이고,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더 나은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서 만든 체제이니까, 결과를 보고 바꿀 수도 있다는 겁니다. 참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요. 파쇄하고 자신이 준칙을 만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제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따지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행동거지를 종합해 보고 따질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유연성 있게 자신의 모습을 카멜레온처럼 바꾸어나가지 않는다면, 그 상황의 희생양이 될 뿐이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그들이 '모릅니다.'라고 한 말만 조명해 본 것이고, 청문회에 나서게 된 이유까지 살펴본다면, 그들의 행위는 결코 추구해야 할 경쟁상에 대해서는 싱싱한 실례가 못됩니다. 제 의견은 어디까지나 제 가치관에서 보는 것이지만, 저로써는 뇌물 치레나 정경 유착, 그런 것에 역정이 나면 몰라도, 호감은 못 느낍니다. 가치관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저는 가치관에도 그 , 혹은 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뇌물 받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뇌물 수수를 부당한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고, 그것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뇌물을 받는 것보다 정당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 행위가 사람들 마음속에서 진 테제화 된 거죠. 이런 것은 모든 상태의 존재와 생성에 내재하는 원인인 반면, 동일한 종류의 유한한 상태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근원적인 추진력으로 다른 자연 속에서 사물이 질서대로 되어가고, 생성에 기여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점점 진 테제화 하여 갑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려 하는 한, 점점 테제에서 진테제로 나아가는 것이고, 설령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다수에게 유익한 것이 거의 명증하게 판명되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탄생한 지 억겁의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뇌물을 주는 행위가 부당한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진테제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는지. 역사란 가치관을 잡는데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에선 지당합니다. 올곧지 못한 가치관이 경쟁에서 지는 건 그 가치관이 이 적은 가치관이라는 근거겠죠. 요컨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경쟁이라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경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고, 더 높은 차원의 가치관에 희생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예시로는 의사 이야기를 들고 계시는데요, 약초와 독초 이야기. 만약 이 예시가 저의 설명을 모티브로 한 거라면, 약초는 테제가 되겠고, 독초는 안티테제가 되겠죠. 그리고 약초가 사람을 더 악화시키고 독초가 사람의 병세를 치유할 수 있다는 말씀은 테제도 안티테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의문 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테제와 안티테제라는 것이 명증하게 산물로써 존재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테제가 될 수 있고, 안티테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지론임에 반해, 약초라는 사물은 일견되어지는 하나의 사물이요, 오직 공통되는 하나의 속성으로 분류될 수 있는 개체입니다. 경쟁이라는 개념을 우주의 萬有(만유)적 존재, , 모든 것에 이루어지는 속성이자, 가득 찬 우주의 양태라고 보았기 때문에, 굳이 저 예시에 집어넣자면 우습지만 환자도 약초를 먹고 나을 수 있으며, 약초도 사람의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모든 사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테제와 안티테제라는 속성을 정하면 정하였지, 그걸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자리매김한 것이죠. 약초가 무슨무슨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헤겔도 변증법에서 정반합이란 개념을 딱히 무엇 무엇이라고 설명하였습니까. 모순을 해결하는 것도 좋고 무엇이 모순인지 분명히 아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이 세계는 워낙 커서 그 모순이라는 것을 일괄적으로 제시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모순이라는 것을 함의적으로 안티테제라고 제시드렸다는 것. 그 모순이란 것을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뭘 지 정말 궁금합니다. 연못님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제시를 해주실 수 있다면 그것은 연못님께서 제시한 약초 상에 맞는 이야기가 되겠죠. 물론, 저에게 물어보신 <무엇에 대한 경쟁이며, 무엇과의 경쟁이냐>에 대해서도, 연못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

, 잘 읽었습니다.
지성님이 정, , 합이나 테제나 안티테제나 경쟁이라는 개념을 우주 전체에 걸쳐있는 만물의 속성으로만 파악할 뿐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저는 그렇다면 그러한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쓰일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었던 거죠.
나아가서, 지성님은 생존경쟁 예찬론자라고 하며 생활에 있어서도 경쟁을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그것이 어떤 경쟁인지 모르는 한, 그 경쟁의 결과가 본인에게 유익할 수 있는 만큼, 반대로 유해할 수도 있다는 암묵적 가정 하에 지성님께 집요하게 질문을 하고 있는 거죠.
청문회의 예에 대해서는, 모르쇠들이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모릅니다로 일관한 것을 두고 거짓말을 했다고 꼭 잘못되었다 말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 근거로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도덕 준칙을 지키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되면, 도덕 준칙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한 부분이 되겠고요.
그럼에도 뇌물을 주고받음이 옳지 않다는 것이 오랜 기간 동안의 인류생활에 비추어 진테제에 가깝기 때문에 모르쇠들의 가치관은 그러한 그들의 것보다 큰 가치관에 희생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럼, 여기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죠.
첫째 만약 모르쇠들이 과거에 뇌물을 주고받았지만, 그 후에 지성님의 말씀대로 카멜레온처럼 잘 변신하여 겉으로 드러나 사건화 되지도 않고, 따라서 청문회에도 나오지 않고, 벌도 받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는 경우,
둘째, 과거에 뇌물을 주고받았고, 그 사실이 드러나 청문회에도 불려 다니고, 검찰에서 조사받은 결과 구속되어 감방에서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경우,
셋째, 과거에 뇌물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고, 따라서 뇌물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익을 얻은 적도 없지만, 반면에 벌을 받을 일도 없는 경우.
위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총괄적으로 따져보아 모르쇠 자신에게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어느 것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는 어느 것인가 하는 겁니다.
지성님이 잠시 모르쇠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판단해 보시라는 겁니다.

다음에, 약초의 예에 따르는 얘기가 되겠는데............
언젠가 지성님께 말씀드리길 저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고, 단지 저 자신과 인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 적이 있죠.
그리고 지금의 이어지는 토론에서도 저는 인간이나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지성님은 우주 전체의 보편적인 성질에 관해 얘기하고 있고요.
인간은 소우주라고 말해지기도 하니까 인간에 대해 안다면 그만큼 우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저는 동물이나 식물의 발전에 관해서는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인간의 필요에 의해 특별한 품종을 개량하는 것은 당연히 별개의 문제죠.)
자연의 조화에 맡기는 것이 온당하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그들을 어떤 발전된 형태나 완성된 형태로 바꾼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죠.
반면에 동식물과 달리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느니 만큼 모든 개인의 역량을 자신의 발전과 나아가서 가능하다면 타인의 발전을 위해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깁니다.
우주의 구조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말이죠.
만약 우주의 구조에 대해 신경 씀으로 해서 인간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그도 가한 일이죠.
결국 여기서 다시 한번 지성님의 이론에 제가 거푸 질문을 던지는 의도가 명확해집니다..
지성님의 우주적인 안티테제와 경쟁이론이 과연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되느냐를 묻고 있는 거죠.
그것이 우주적인 속성을 말할 뿐 구체적인 행위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인간 개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공허한 이론에 그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지성님이 말미에 제게 제시한 두 가지 질문도 저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모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제 의견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지금이 아니라 뒤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걸로 생각되므로 미루어 두겠습니다.
다음에 무엇과의 경쟁이며, 무엇을 놓고 하는 경쟁인가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 답변의 예시를 들어 드리겠다고 말한 바 있으므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람이 경쟁을 하는데 누구와 경쟁하는가?
아마도 고대 희랍의 시인이 말한 대로 동류는 동류와 경쟁하며, 투쟁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인은 시인과 경쟁하고, 장사꾼은 장사꾼과 경쟁하며, 거지는 거지와 경쟁하고, 정치가는 정치가와 경쟁하며, 10대의 튀는 행동의 개성표현은 또한 그들끼리 경쟁하고, 나머지도 모두 그와 같은 것이다.
동류는 원래 우호적이며 친밀감을 느끼도록 되어 있지만 어느 순간 일변하여 지나친 타자성이 그들을 갈라놓고, 더하여 그들이 행하는 같은 업이나 행위에 대해, 그 성과를 기준으로 시간이라는 일차원의 직선 위에 서열이 정해지도록 강요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경쟁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놓고 경쟁하는가?
그들의 행위가 목적하는바 성과의 크기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다.
시인은 보다 뛰어난 감흥과 예술성과 진리의 표현을 위해 경쟁하고, 장사꾼은 보다 많은 이익을 위해 경쟁하며, 거지는 보다 많은 동정을 위해 경쟁하고, 10대들의 개성은 보다 많은 시선을 위해 경쟁하며 정치가는 업적을 위해 경쟁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지속하는 한, 각자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맘에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이 내용이 꼭 맞는 다기보다는 제가 원하는 답변의 예시로 보시면 됩니다.
그럼 예시를 들어 드렸으니 다시 한번 제 질문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생각해 보시죠.
인간은 무엇을 상대로 경쟁하며, 무엇을 위하여 경쟁하는지 말입니다.
오늘은 이만.......

 

 

지성

Re: 경쟁과 발전..

안녕하세요.
이런 이론이 현실적으로 효용성 바깥쪽에만 머무른다면, 이른바 '탁상공론'이나 '미봉책'에 그치겠죠. 제가 말씀드린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디에 쓰일 수 있겠냐고 물으신 대로. 전의 카알 마르크스 이야기도 그렇지요.
"세계를 아는 것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 연못님도 이것에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경쟁을 장려할 수 있다는 것, 부조리한 현실을 과감히 탈피할 수 있는 역량을 옹호해 줄 수 있는 것만 봐도 우주적인 테제와 경쟁 이론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걸로 생각하고 미루어 두겠습니다.
청문회 모르쇠에 대한 세 가지 예 중에 제 가치관에 부합하는 건,
<셋째, 과거에 뇌물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고, 따라서 뇌물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익을 얻은 적도 없지만, 반면에 벌을 받을 일도 없는 경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부존자원을 낭비하는 이들을 경시합니다. 배금주의 사상에 젖어, 보다 자극적이고 향락적인 인생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 말이죠.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런 것은 소크라테스도 그랬지만 수단적인 가치밖에 못하는 겁니다. 수단적 가치 중에서 그보다 더 큰 효용을 가진 것이 있다면 과감히 그것을 탈색하고 전환을 모색해야 하겠죠. 고상한 삶을 살기 위한 부존 가치물로써 저는 오히려 부자보다는 인텔리가 되고 싶습니다. 진정한 쾌락의 연원은 지식이나, 봉사, 그런 게 아닐는지.
하지만 미국의 존 듀이가 제창한 프래그머티즘이 경쟁에 있어서 싱싱한 실례가 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미국이 경제대국이 된 것도 그의 철학 때문이니. 물질적 성장을 이룩하는 데에도, 지름길이 있는가 하면, 돌아가는 먼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지난번 주제로 회귀하여 말씀드리자면, 남자가 여성보다 사회적으로 잘 대우받는 것도 연못님께서도 말씀하시듯, 남성의 능력이 보다 우월하다는 데 그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고요. 아울러 프래그머티즘의 한 방편으로써 효용 가치가 높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를 쌓는 방법만 제시하다가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되어 자멸하고 말 겁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지만, 능력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손실을 입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올바른 경쟁의 상()이 아니나, 경쟁의 부작용이라면 그렇게도 치부될 수 있겠지요. 경쟁의 결과는 탁월이 유익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해로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로운 면을 피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지 않는다면, 전혀 발전을 가져오지 않게 되겠죠. 테제는 진테제가 되지 않고 여전히 테제로써 머무를 뿐이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의 감각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보수적인 모습은 제 가치관으로 판단하건대, 결코 올바른 사회상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경쟁을 예찬하여야 하겠지만 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유연성 있게 기로를 우회하는, 그런 경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를 택한다면 주저 없이 세 번째를 택합니다.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사를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데요. 인간이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만 보면 된다. 라는 건 저로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일단 인간이 소우주라는 명제 자체도 인간의 관점에서 피력된 것이기 때문에 의심-베이컨이 역설한, 종족의 우상과도 같은-할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소우주를 볼 수 있고, 대우주를 볼 수 있다면 두 가지를 함께 고찰해야지, 왜 소우주만 고찰할지도 의문의 여지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토론 재미있습니다. 저는 되도록이면 연못님의 경쟁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만.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

토론이 재미있다니 감사합니다.
제가 최소한 상대를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마르크스의 명언 얘기에 대해서는 지성님이 메일을 통해 제 견해를 바꿀만한 별다른 의견을 추가로 내어 놓은 것이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여전히 그것이 알맹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르쇠의 선택에 대해서는 반쪽만 답변해 주셨네요.
가장 바람직한 유형을 다음 것으로 말이죠.
<셋째, 과거에 뇌물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고, 따라서 뇌물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익을 얻은 적도 없지만, 반면에 벌을 받을 일도 없는 경우>

덧붙여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도 선택해 주시길 바랐었는데…….
미안하지만 한 번 더 선택의 수고를 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 두 경우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인지 말입니다.
그럼 제가 지성님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 확실히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모르쇠 건에 대한 제 견해와 반박을 일괄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진정한 쾌락의 연원은 지식이나 봉사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말씀은 매우 차원 높은 말인 것처럼 들립니다.
아마 참된 지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철학도 하는 거겠고요.
하지만 전 아직 초보자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성님이 만약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저뿐만이 아니라 지금 몇 안 되는 토론의 구경꾼들을 위해서라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또한 결코 적지 않은 봉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 이후의 말씀은 제가 경쟁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방향과는 다른 얘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질문을 통하여 지성님이 주장하는 경쟁이란 과연 무엇인가?
, 그 본질에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지성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그게 아니라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경쟁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경쟁에는 유익한 면이 있고 해로운 면이 있지만 해롭다고 경쟁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제 말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안 연후에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불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인 거죠..
한 가지 지나간 일로 예를 들면,
제가 다른 철학 카페에서 잠깐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다른 닉네임으로였죠) 이윽고 주제가 바뀌었습니다.
뭔고 하니, 자유와 평등 중에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하는 가였죠.
저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유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인가'가 논해지고 그 정의가 내려져야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는 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쪽이 각각 무엇인가를 알아야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거란 얘기죠.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기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나 또는 대중적이고 피상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서로 어긋난 방향에서 논란을 벌이다가 시간만 흘러갈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아마도 그중에는 우선 자유와 평등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논제 자체가 이미 그 단계를 지나 있기 때문에 별 소득 없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저는 참가하지 않았었죠.
제 생각에는 그러한 경우, 위와 같은 논제보다는 차라리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논제가 훨씬 우리로 하여금 철학적인 성찰을 깊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지금의 경우도 저는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 보려고 하는 거죠.
저는 질문을 통하여 지성님이 말하는 경쟁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능한 자세히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거죠.
말미에 제 견해를 듣고 싶다고 하셨는데, 저는 경쟁이란 것에 대해 제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고 당장에는 견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단지, 지성님과 함께 그 의미를 탐구해보고 싶은 것뿐이죠.
제가 지난 글에서 '동류는 동류와 경쟁한다.'고 한 것은 시인 헤시오도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지성님의 경쟁 개념에 접목시켜 본 겁니다.
만약 지성님이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지고 경쟁이라는 개념을 달리 설명할 것이 있다면 해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미 드린 경쟁의 예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되는지 견해를 밝혀 주시면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옳다고 생각된다든지, 아니라고 생각된다든지, 아니면 어떤 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주문을 까다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가능한 경제적인 토론을 위해서 제 나름대로 단계별로 한정을 짓고 싶은 거죠. 양해 바랍니다.
이만…….

 

 

지성

Re: 경쟁과 발전..

잘 읽었습니다.
마르크스의 명언 이야기는 아직 수용 못하시는군요.
<세계를 아는 것보다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명제에 찬동 못하신다면,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보다 세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이 명제에 찬동하신다 해도 맞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알기 위한 것은 ''일까.
, 수많은 철학자들, 과학자들이 세계를 알기 위해 상아탑에 그 오랜 역사 동안 갇혀 있었을까.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면서 세계를 알기 위해서 고군분투해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학문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를 준다고. 어떤 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학문하는 것은 삶을 검토하는 것이며,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수많은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꾸려고'.
'바꾼다.', '현재를 바꾼다.','변화를 모색한다.'. 진리를 통해서 불만족스런 상황을 타진하고 보다 만족스러운 상황을 가져오는 것, 이것이 많은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의 결론이라고 보았으며, 연못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미루었냐면, 연못님께서 테제에 관한 글을 보시면서 '이론은 실효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실효성이 있는 것이 이론이라는 것은, 실효성이 없는 이론은 이론이 아니란 얘기고, 실효성 없는 이론이 이론으로 인정될 수 없다면, 그때는 이론의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론은 필요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무엇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론이란 단어를 달리 말씀드리면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무엇을 알고자 하는 과정'에 준하겠습니다. 실효성은 무엇으로 여겨지는가?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실효성 없는 이론이 이론의 가치 여부를 떠났다면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를 바꿀 필요가 없다면 세계를 알 필요도 없다.' 이런 명제까지 결론으로 도출되면 자명해집니다. 세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르쇠의 선택은 하나밖에 답변 못했습니다. 그건 글을 유심히 못 읽은 제 불찰이라고 밖에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역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답변드린 대로, 뇌물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으며, 벌을 받은 일도 없는 경우이겠으나, 저로써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는 둘째 항입니다. '저로써'란 각주를 단 것은 이것이 정사를 판별하기가 어려운 난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쉬이 해답을 내놓는 것은 대단히 실례일뿐더러 저도 그렇게 쉽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 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상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그들 둘 다 개인적으로 소상히 도덕적이고 미려한 인생을 살았으며,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둘 다 아테네 귀족정의 법에 걸려 중죄를 선고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 다 고심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도망가라는 제자 플라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약을 먹고 자결했습니다. 부당한 판결을 받았으나, '악법도 법이다'란 유언을 남기면서 죽은 것이지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은 중죄판결을 받았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위배되는 판결을 논할 수 없다' 면서 배를 타고 이웃나라 마케도니아로 도망쳐 목숨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누구의 행위가 정당하며, 누구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은 것일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 땅에서 죽었다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포함한 그의 저서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남지 않았겠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픽션에서 논해지는 것이지만, 일단 제가 뇌물을 받았다면 경우에 따라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불가피한 외곬에 치달아 뇌물을 받은 경우와, 사적 이익을 중시하여 뇌물을 받은 것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제가 뇌물을 먹게 되었다면 저는 그것으로 처벌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처벌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거스른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이럴 때는 진정 '카멜레온'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적 이익을 중시하여 뇌물을 받은 경우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응보를 받는다 해도 오히려 참회하고, 반성하여 앞으로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공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제 견해입니다.
진정한 쾌락의 연원은 지식이나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자가 이상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물어본다면, 저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쾌락을 얻느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는 지식에 대해서 아는가, 봉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어느 누가 물어본다면 대단히 부끄럽겠습니다. ()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주저 없이 설파하고 다녔거니와, 저는 그것에 감히 비견될 바가 아니지요.
'경쟁이란 무엇인가',사실 이것도 고심스러운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시인 헤시오도스의 견해대로, 동류와 능력을 겨루는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모순율과의 투쟁이라고 하고 싶네요. 주체에게 모순이 주어졌을 때,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행위 말입니다. 무역을 들어볼까요. 무역을 하는 이에게 여타 무역인들에게 상권이 위협받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지만, 외교적인 방법이든지, 전쟁이든지 상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 , 모순을 극복한 과정 (전에 말씀드린 진테제)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바로 경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동류'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필요성에도 이의를 제기해야겠습니다. 동류끼리 경쟁을 하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반례가 너무도 많습니다. 동류가 단결을 하여 타류와 경쟁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고요. 일례를 들자면,
부정 선거 추방운동 같은 시민 단체의 활동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시민들은 그들의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부정 선거라는 모순율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지하지만, 정치인들 또한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서 그들의 가치관에 방해되는 모순율인 시민들이 달갑게 보이지는 않겠죠. 경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치관에서 피력되는 모든 행위에도 이 있고, 그 차가 있는 연유로 말미암아 모든 테제가 이런 소상한 방식으로 진테제가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진테제에 반하는, 소위, 엔트로피가 되기도 하겠죠.
신년을 맞아 다음번에는 답변이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연휴 보내시길……. 이만.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

, 잘 읽었는데요,
마르크스 얘기는 제가 예시도 들 만큼 들었고, 원론적으로는 더 이상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간단하죠.
변화시키려고 하기 전에 그 대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대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대상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변화시키기 이전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란 뜻입니다. 그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 대상을 좋은 방향으로…….' 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거죠. 어렵게 생각할 것 전혀 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지성님의 이의 제기로 인해 논란이 길어지므로 아마도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고 할 때, 그 좋은 방향이란 것이 무엇인가 저와 지성님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19세기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이게 아니다 싶어 눈에 보이는 현 상황을 보다 합리적인 제도나 투쟁으로 바꾸어 보고자 하는 태도를 세계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좋은 방향'이라는 말의 의미를 저와 지성님이 다르게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성님이 그때그때 불합리하고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상식에 맞게 고쳐보고자 하는 것에 대해 좋은 방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저는 그 좋은 방향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사용합니다.
, 이 우주를 통틀어 본다면 위와 중간과 아래가 있는데 일반 대중은 중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아래에서 중간으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중간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거죠.
못 먹고 못 입고 착취당하며 굶주린 생활을 하며 느끼는 감정을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 잘 먹고 잘 입고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중간에 있다고 말하는 거죠. , 중간과 아래의 생활은 인간들 서로의 노력과 필연적인 흔들림에 따라 그 위치를 서로 바꾸며 오르내리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좋은 생활은 모른다는 겁니다.
위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아래에서 중간으로 이동하면 그들은 성공이라 여기고 자신이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반면 중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몰락이라 생각한다는 겁니다.
위란 말하자면 절대적인 좋음을 말하는 거죠.
실제로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역사상 극소수라거나 위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도 매우 적다고 하여, 철학을 한다면서 그러한 절대적인 좋음을 폐기할 순 없다는 거죠.
부연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에 비분강개하여 현실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을 보다 안락한 위치에 끌어다 놓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실 의 발현이겠지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을 좋게 만드는 것인가 하는 점은 잘 알 수 없다는 거죠.
만약 그런 것이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좋은 방향이라고 한다면 좋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개념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웬만큼 풍족하게 하여, 인심을 느긋하게 만들어 주면 다 좋은 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좋은 생활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성님도 잘 아실 겁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따라서 좋은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한번 풍족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하지 않다는 것도 아실 테고요.
반면에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지라도 화목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요.
좋은 생활이란 대체로 당사자의 마음에 달려 있는 거죠.
그 좋은 생활을 위한 마음의 조성에 저도 지식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좋은 생활이란 저의 개념에서 볼 때 중간에서 위로 향하고자 애쓰는 생활이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꼭 중산층을 거쳐야 좋은 생활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요.
정신적으로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하는가 하는 얘기죠.
말하자면, 인간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려면 인간의 성정을 알고 그 성정을 합당하게 위로 유도해야 할 테지만 마르크스는 무엇을 가지고 인간을 진정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나 하는 것이 의문이라는 거죠.
어떤 식으로든 혁명에 의해 물질과 환경 조건을 좀 더 개선하는 것으로 인간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길 기대했다면 인간이라는, 단순하지만 개개의 행동에 있어서는 복잡한 존재를 그가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 역시 의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러나 어쨌든 행동하는 것이 가만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세계를 아는 것보다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언하고서 뭔가 행동을 촉구하는 자세를 취했다면,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과 인간을 알고 행한 행동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 곧 철학은 아닐 텐데 말이죠.
아무튼 이상의 말은 혹시나 좋다는 것을 저와 지성님이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아 한번 부연해 본 거고요..
제가 애초부터 말씀드린 대로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달리 덧붙일 여지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거죠.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설사 결과적으로 무언가 인류에게 좋은 것을 일정 부분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에 의한 것은 아니고 우연이라고 해야 할 테죠.
왜냐하면 알고 난 후에 행동한 게 아니고 단지 좋게 만들려고(어떤 게 좋은 건진 모르지만)일어 섰는데 우연히 좋게 된 것뿐이니까.
그런 것을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너무 야박하게 말한다고 언짢아하진 마세요.
그의 명언이라는 것이 문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모르쇠 건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불가피하게 뇌물을 받을 경우가 과연 어떤 경우인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얘기한다면 뇌물을 받는 개개인이 모두 할 말이 있을 텐데 말이죠.
어떤 경우에 뇌물을 받고도 카멜레온처럼 변신하여 벌을 피할 것인지, 어떤 경우에는 참회하며 벌을 받을 것인지…….
논의가 어딘가 비상구로 빠져 멀리 가버린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지성님은 뇌물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뭐라고 할 말이 없죠.
어떤 때는 받아도 부끄럽지 않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받으면 벌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고 한다면 듣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거죠.
지성님은 심각하게 말씀한 것인지 모르지만 사실은 음미할 만한 여지가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또 한 가지 그와 관련하여 불분명한 것은 지난번에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오랜 인류의 역사상 진테제에 가깝다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하신 대로 불가피하게 뇌물을 받을 경우, 그것이 아예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죄는 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므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드셨는데, 적법한 절차에 의한 판결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 ' 정의에 위배되는 판결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은 그저 자신의 말일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자신이 정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거죠.
지성님의 의견대로라면, 즉 자신만의 행동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타당한 행동의 원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경쟁에 대해서는 모순율과의 투쟁이라고 하셨는데, 하신 말씀을 가만히 보면 결국 욕구충족에 방해가 되는 것을 모순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리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얘기죠.
만약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욕구라는 것에 대해 의논해 보아야 되겠네요.
지성님의 경쟁이란 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성님이 줄기차게 써오던 경쟁이란 말이 그렇게 의미상 꼭 들어맞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왜냐하면 정치인과 부정선거 감시인인 시민들을 경쟁관계라고 한다면,
정작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정치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들이야말로 원래의 의미에서 경쟁자들이 아닙니까?
정치인이 차지하려고 하는 위치를 부정선거 감시인이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테죠.
정치인의 경쟁상대는 역시 정치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낙선운동을 벌이는 사람은 제삼자고요..
저로서는 헤시오도스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군요.
그 말에서 동류라는 것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고 경쟁은 필연적으로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게 마련 아닙니까?
이해관계가 다른데 경쟁이 생겨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동류가 단합하여 타류와 경쟁한다고 해도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면 그 점에서는 동류인 거지요.
만약 목표가 서로 다르다면 경쟁할 이유가 없을 테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경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잘 살펴봐야겠네요.
저는 지성님의 생존경쟁이라는 말을 듣고 대체로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지성님은 그 외에 욕구충족적인 삶에 있어서 어떤 방해물 같은 것을 첨가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언지 저는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저도 설을 다른 곳에서 쇠느라 컴을 오래 붙잡고 있을 겨를이 없네요.
주말쯤 다시 뵙지요.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시길...........

 

 

지성

Re: 경쟁과 발전..

설 잘 보내셨는지……. 오랜만에 답글 올립니다.
전 마르크시즘이나 유물론을 지지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 우리가 나아가야 할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급급하여, 학문의 본래 목적을 소지하지 못한 공리, 공론자들에게 마르크스의 명언이 그 의미를 다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 해서 부자들의 재화를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면, 부자들은 시혜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수혜자가 되므로,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지 수단에 대해서도 그렇게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며, 되도록이면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스스로가 각성하고, 능력을 계발하여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화시키기 전에 전제로써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견지에는 찬동합니다만, 전제의 한계점을 어디다 그어야 할지도 남는 문제입니다. 전제라는 건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데 필요한 메커니즘의 부속물의 역할에서 그치는 겁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다 보면 그 전제의 상한선, 하한선을 가지고 싸우는 예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런 것을 가지고 부존자원을 낭비하기보다는 실효성 있는 일을 하자는 겁니다. 이성 중심론과 경험 중심론, 성리학자들이 일삼은 주리론, 주기론 당파싸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싸움, 자원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과학 문제 전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패러독스의 외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마르크스가 얼핏 보면 공허해 보일지도 모르는 명제를 내놓은 것의 의의를 실로 절감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절대성을 논하기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르쇠건도 그렇습니다. 저 예시 말고, 아무런 부가 상황도 없이 행동방침을 결정하긴 힘든 일이지요. 연못님께서도 마르크스의 명제를 비판하시면서 알아야 행동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경쟁을 위한 동영의 생활지침으로써 하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을 법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에 따라서, 저는 인간과 인간의 소산인 체제는 상황에 따라서 그 맥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 그라운드가 등장인물의 행위에 그만큼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지요.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드셨는데, 적법한 절차에 의한 판결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 ' 정의에 위배되는 판결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은 그저 자신의 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자신이 정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거죠.>
저는 그 자신이 피안의 세계로 향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연못님의 말씀을 듣자니, 여쭙고 싶습니다만. 연못님은 어디에서 정의를 찾으시겠습니까?

욕구충족에 방해가 되는 것이 모순이냐고 질문하셨는데, 답글을 드릴 수가 없는 것이 제가 '욕구'라는 것을 확실히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무엇인가, '평등'이 무엇인가를 논하지 않고서야 자유와 평등의 우열관계를 논할 수 없듯이. 또한, 동류가 단합하여 타류와 경쟁한다고 해도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면 그 점에서는 동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래서야 동류와 타류라는 개념의 띠가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류냐, 타류냐를 논할 의미도 없겠습니다. 동류, 타류의 선이 명쾌하게 그어지지 않고 뒤범벅된 것은 동류라고 이름붙일 의의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또한, 어차피 경쟁은 이해관계가 같은 것에서 얽히게 되겠지만, 동류, 타류의 문제는 이해관계의 문제와는 유리된 개념, 별개의 개념이라고 해야 맞는다고 봅니다.

philebus(연못)

Re: 경쟁과 발전..

잘 보았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에 대해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따위의 공리공론보다는 실효성 있는 일을 하자는 취지로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는 이해하지만 철학적인 말이란, 무엇인가에 반발해서 그 반대 방향의 것을 취하는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공리공론(글자 그대로 허망한 말이라면)도 별 볼일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그에 반발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 해보자고 나서는 것도 중심을 지나쳐 버린 행동이란 말이죠.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좋은 것을 찾아다니는 일은 마르크스가 시키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개인이건 국가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건 본성이 아닙니까?
아니,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효성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은 누구나 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다시 말했다는 것뿐, 별 대단한 말도 아니라는 거죠.
공리공론에 반발한 말이라면, 그것은 곧 그 공리공론자들에게나 궁합이 맞는 얘기죠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말로는 알맞은 얘깁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좌가 있으면 우가 있게 마련이고, 공리공론이 있으면 실효성이란 말이 등장하게 마련인 거죠..
결국, 실효성 있는 일을 하자는 말 자체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아무런 특별한 말도 아니죠,
그럼 그 실효성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폭력혁명이란 걸 제시한 셈이 되겠네요.
그게 타당한 해법이었는지, 그 결과로 보아 그의 인간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테니 그의 명언에 대해서는 이만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토론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지성님의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어 알고 싶다는 것뿐 다른 건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표시하는 말인지, 아니면 얼핏 보아 진리처럼 보이는 현상을 표시하는 말인지, 그렇잖으면 아무것도 아닌 말인지 말입니다.
헤겔이 등장하고 테제와 안티테제가 등장하고 경쟁이란 말이 나왔기에 그 경쟁이란 무엇을 말함인가를 인간과 관련시켜 알고자 하는 거지요.
그에 대해 현실과 관련해서는 뚜렷이 의미 있는 말이 없고 단지 자신만의 행동법칙이나 독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하면 된다고 해서 거기서 약초와 독초 얘기가 나오고 모르쇠 얘기가 나온 거죠.
모르쇠도 자신만의 행동법칙을 가지고 밀고 나간 사람이니까.
저로서는 어쩐지 모르쇠처럼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아요.
, 자신만의 독자적인 가치관을 갖는다는 개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가치관보다 대중의 가치관이 옳을 땐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고 대중의 그것을 따라야 하지 않겠어요?
지성님이 '독자적인 가치관' 또는 자신만의 행동법칙' 이라고 말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경쟁이라는 말이 그 한마디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리고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불가피하게 받을 수도 있다고 해놓고, 그 불가피한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 뇌물을 받는 것이 죄가 아닌지, 죄이면서 처벌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어요.
해명이 없을 바엔 불가피하게 뇌물을 받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글자 수는 많은데 듣는 사람이 수긍할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 거죠.
경쟁이나 생존경쟁이란 말도,, 독자적인 가치관이나 자신만의 행동법칙이란 말도 키워드로서 지성님이 제공한 거고요, 제가 그 의미를 자세히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경쟁에 대해서는 전에 상대방을 능가하려는 거냐고 물었을 때 지성님이 아니라고 하셨죠. 그리고는 특별히 할 말씀이 없는 것 같아 제가 헤시오도스의 예를 들어 드린 거죠.
그런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닐 것도 없는데 말이죠.
동류의 규모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을 겁니다.
남대문시장의 장사꾼들이 단합하여 동대문시장의 상인들과 경쟁한다면 이것은 일부 동류와 동류가 단합하는 예가 되죠.
하지만 결국 다시 동류끼리 경쟁하는 거고요.
만약 우리나라의 모든 장사꾼들이 단결하여 세금 경감을 위해 정부와 투쟁한다면 그건 본래의 의미에서 경쟁은 아니죠.
지난번에 말씀드린 정치인과 시민연대의 예와 같은 얘기가 될 겁니다.

그런 점에서 또한 모순이란 욕구 충족에 있어 방해물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던 거고요.
지성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에 대해 물었는데 지성님은 욕구의 정의를 몰라서 답변할 수 없다고 하신단 말이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얘기에 피안의 세계로 향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애매하고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말인지 깨닫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그런 얘기 하나 나올 때마다 질문은 더 많은 가지를 치게 되어 있어요.
저는 평범한 말로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에 대해 엉뚱하고 낯선 개념이 추가된 거죠
그런 점이 제게 있어서는 비경제적인 토론이 되는 겁니다.
지성님은 한마디 던지면 끝날지 모르지만 저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야 하거든요. 피안의 의미로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그럴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 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의 질문도, 추가된 질문도, 어느 것 하나 그 의미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방황만 하다 끝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지금까지 지성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생존경쟁이란 말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성님의 얘기는 테제와 안티테제로 끝났고 그 뒤로는 얘기에 중심이 없는 거죠.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처음이라고 생각하시고 말씀해 주시죠.
헤겔에서 비롯된 경쟁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 사회 속에서 누가 무엇과 경쟁하며,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지(또는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만약 답변할 말씀이 없다면 지성님이 힘주어 주장한, 발전을 위한 경쟁이나 생존경쟁이란 말이 단지 현상계에서 그런 듯이 나타나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알맹이도 없고 누구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 부분을 해결하고 난 뒤에 다른 얘길 하고 싶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지성

Re: 경쟁과 발전..

안녕하세요, 답론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제가 2월 초에 토익 시험을 보게 되어
토론을 잠시 유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늘 좋은 사유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philebus(연못)

지성님께…….

지금까지의 토론내용이 너무 뒤로 밀려가버려 혹시 지성님이 찾아들어가 답변하시기가 불편한 게 아닌가 하고 전문을 앞으로 옮겨놓았는데, 그사이에 토론을 유보한다고 답글을 올려놓으셨네요.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시험 잘 보시고요,
저와 얘기 나누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메일 주십시오.
환영하겠습니다.

지성

연못님께.

그동안의 토론 정말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토론은 서로 간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한다는 것에서 유익하기도 하지만 정말 탁월이 즐거운 것도 같습니다.
특히 연못님과의 토론에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사실 이 홈페이지에 와서 처음으로 토론 상대를 해주신 분도 연못님인 셈인데……
줄리어스 시저가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뵌 연못님은 다방면에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던 것 같고요.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바로 토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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