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acaphilo.or.kr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에 대해 제가 달아본 답변입니다.
등록자 김**
진 중권 선생님의 <미학강의 1>에 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 중권 선생님의 미학강의를 수강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학부에서 철학을 부전공하면서 혼자 책을 읽다 보니 기초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쉬운 표현과 예로 설명해 주시는 진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크리스마스이브까지 헌납(?)한 학생입니다.
그럼 질문입니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흠모한 나머지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구애자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육체로 그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끝내 그러한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물리치고 알키비아데스 자신은 이 때문에 그를 극찬해마지 않을 수 없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에로스가 육체적 사랑에 기초한 '아프로디지아'에서 정신적 성장인 '필리아'로의 나아감을 의미하는 존재미학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와의 육체적 관계를 극복(혹은 거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찬양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애자들(젊은 소년들)을 대화를 통해 능동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들과 자유로이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것이 바로 절제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다지 미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왜 굳이 소크라테스가 필리아를 강조하는 것(동시에 그는 알키비아데스의 육체를 거부했지요, 절제라고도 볼 수 있지만)이 극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아마도 강의 시간에 지적하셨듯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여겨왔던 '플라토닉 러브'가 성립하도록 하는 것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기인하는 것 같은데. 좀 더 명확한 개념 설명이 제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있어 에로스란 건전한 육체적 관계에서 정신적 고양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분명 육체적 관계인 아프로디지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을 거부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플라톤은 플라토닉 러브가 성립하는 것에 대해 모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존재미학으로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다시 해석하려 한다면 이 같은 소크라테스의 행위(판단)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philebus(독자) 답변
진 중권 선생님의 <미학강의 1>에 관한 질문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릴 테니 한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에 따르면 실존의 소크라테스는 음식이나 게으름이나 성에 관한 쾌락 등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성에 관한 쾌락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러한 쾌락과 사려분별(지혜)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거였죠.
그의 친구인 크리톤의 아들 크리토불로스가 어떤 미남에게 키스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당시엔 동성애가 일반적이었음) 그를 책망하면서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1년간 외국에 나가있을 것을 권고했죠.(지금 보기엔 매우 엄한 조치였죠)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던 크세노폰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바로 도망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정 육체가 원할 때는 말썽나지 않을 사람을 상대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작품 중에서 육체적인 성관계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자세히 언급한 부분은 없는 걸로 기억됩니다.
그냥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철학자가 음식이나 성에 대한 쾌락 같은 것에 빠져도 좋겠는가?라고 묻고 제자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걸로 그치는 정도죠.(파이돈)
다른 대화편에서도 대체로 그런 수준으로 한두 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레보스 편에서는 선에 대해 논하면서 마지막 결론 부분에 가서 첫 번째가 조화와 중용, 두 번째가 균등, 세 번째가 이성이나 지혜의 부류,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지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쾌락이며 여섯 번째에 가서는, 여섯 번째는 노래를 멈추라는 얘기(피타고라스인지 오르페우스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를 인용하며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얘기로 미루어 보면 여섯 번째 것은 음식과 성에 관한 쾌락 등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는 쾌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에로스에 대해 논한 작품은 향연 외에도 파이드로스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에로스의 양면에 대해 각각 변론하고 있습니다.
우선 천박한 사람이 사랑할 경우 일어나는 갖가지 폐해를 지적하고 나서 고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환심을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성적인 사람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려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영감을 받아 에로스도 일종의 신이라는 생각에, 앞에서 한 말을 불경하다고 취소하고 에로스를 찬양하여 이번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좋은 결과를 드러내고 있죠.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천박한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라 고상하고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서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신화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육체적인 관계를 직접 연상시킬 만큼 노골적인 표현은 없고 끝에 가서는 이러한 사랑이 우리가 이데아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도됨으로써 해피엔딩이 될 것으로 말하고 있죠.
위와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육체적인 사랑이 플라토닉 러브(지혜를 향한 사랑)로 그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 성욕은 타고난 것으로 그 고유한 역할이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따라서 육체적인 사랑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애써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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