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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작은 철학 토론 1

20년 전 sophie.co.kr에서 패기 있는 젊은 분과 나눈 문답.

 

philebus(연못) 의견

남자와 여자의 특성상 남자의 덕과 여자의 덕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려볼 수 있을 겁니다.
육신의 건강이라는 점에서 남자의 건강과 여자의 건강이 다른가?
남자든 여자든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적당한 양분과 적당한 움직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을 올바르고 유익하게 해주는 덕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지혜가 덕의 일부분이라면 그것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덕이 아닌가.
또한 용기나 절제가 덕이라면 역시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올바름이 덕이라면 이 또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정신에 악덕이라는 것이 있어 이를 물리쳐야 한다면 남자는 이를 멀리해야 하지만 여자는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일까?
비겁함이나 만용이 악덕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쓸 일이다.
부정이나 사치가 악덕이라면 역시 그러할 일인 것이다
인간은 모두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남녀의 구분이 있을까?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의 말대로 신체기관의 특성을 제외하면 여성은 보다 약하다는 것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가 보다 강하긴 하지만 강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그 강함이 올바르게 쓰였을 때만 좋은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뛰어나게 좋은 일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이며,
반대로 인류사에 지독히 나쁜 일을 한 사람도 남자이다
이것이 강함을 어떻게 사용했는가하는 본보기일 것이다.
반면에 여자들은 가장 뛰어난 일도 하지 못했지만 가장 나쁜 일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이는 약함의 결과인 것이다.
이 경우에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못하는) 약함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강함보다 낫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성 답변1

잘 읽었습니다. 덕이 주체에게 다르게 투영될 수 없다는 지론인데요. 맞죠. 행복? 남자, 여자 불문하고 모두 누리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사회적인 욕망이든지, 리비도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픈 욕망이든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예요. 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행복에 귀결되겠죠.
하지만 연못님, 연못님께서 인정하시듯이 남자는 여자보다 생물학적인 우위에 서 있으며 사학적으로 고찰해 보아도 인류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시금석들은 주로 '남자'였습니다. !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가장 뛰어난 일도, 가장 나쁜 일도 저지르지 못한 여자들과는 달리 남성은 자신의 정력을 사용하여 역사를 여러 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비단 인류를 변화시킨 신석기 혁명은 물론이요, 코페르니쿠스 혁명, 휴머니즘으로써의 도약이나, 정보화 사회에 있어서의 발전적이고 성장적인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겠죠. 헤겔의 변증법만 보더라도 ''이 존재하는 한, ''의 성장은 끝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 ''도 남성이 이룩했습니다. 권력에의 맹종으로써라도 행동주의가 더 낫다고 보는 것도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 '반' 도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의 전제 조건이 되었으니까. 나쁜 일을 저지르는 강함도 고착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메커니즘이란 말이에요..
현재 세계는 프래그머티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듀이가 제창했듯,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도약'말이지요. 시장 자본주의, 능력 본위의 자유 경제 체제가 세계화의 조류에 입각해 나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만 좋다면 남자를 더 취직시키고, 더 엘리트로, 부르주아로 만드는 건 죄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공리성을 무시하는 거겠죠.
역사는 만물의 척도입니다. 이성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역사는 비판할 수는 없어요. 칸트가 순수 이성과 판단력을 비판했어도 역사를 뒤집어엎으려는 사상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처럼. 또한 사학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도 부인 못하죠. 예츠 카가 역설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는 상호작용하는 터이니까. 그렇다고 제가 유물론을 제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지가 옆으로 약간 샜네요.
아무튼 능력 본위의 공리성이 중시되어야 하는 것은 확고부동하고도 자명한 이치로써 세계화의 조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생존 경쟁 싸움에 입각해 있으며,, 남자든지 여자든지 개인의 아파테이아는 오직 개인의 문제인 거고 남자가 역사에 이바지했다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philebus(연못) 답변1

, 답변 감사하고요.
주요 내용별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세계는 프래그머티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듀이가 제창했듯,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도약'말이지요.
시장 자본주의, 능력 본위의 자유 경제 체제가 세계화의 조류에 입각해 나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만 좋다면 남자를 더 취직시키고, 더 엘리트로, 부르주아로 만드는 건 죄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공리성을 무시하는 거겠죠.>
현재 세계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프래그머티즘으로 향해 달려간다고 하셨는데, 잘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말씀의 요지로 보면 보다 풍족하게 산다는 게 아닌가 합니다만 그동안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건 사실이고 거기에다 더 풍족하기 위해, 또는 현재의 풍족함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애쓰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추세로 나간다면 최소한 백 년이나 이백 년 후에 인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네요.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여유를 잃고 기계 부속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는 아마 많이 들어 식상할 정도일 테고요.
환경과 공해 문제도 잘 아실 겁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문제점은 생략하죠.
과학과 물질문명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선악이 가려지는 거죠.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닐 겁니다.
이천 오백 년 전보다 지금의 인간이 과학 문명의 발전만큼 정신적으로 더욱 발전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핵심적인 문제에 관한 한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됩니다만…….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것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공리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올바르게 산다는 점을 제쳐두고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로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그 삶의 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세계가 모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내가 그런 방향으로 덩달아 나가야 한다는 것과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세계가 나아가는데 애써 저항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쪽이 옳다는 판단은 분명한 결과가 드러나기까지는 보류할 것입니다.
<역사는 만물의 척도입니다. 이성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역사는 비판할 수는 없어요. 칸트가 순수 이성과 판단력을 비판했어도 역사를 뒤집어엎으려는 사상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처럼. 또한 사학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도 부인 못하죠. 예츠 카가 역설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는 상호작용하는 터이니까.>
위 얘기는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좀 쉬운 말로 하시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를 들어, 과거에 어떤 큰 도둑이 나타나 상호신용금고를 털어 해외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면 미래 어느 시점에 다시 그러한 도둑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뜻입니까?
<아무튼 능력 본위의 공리성이 중시되어야 하는 것은 확고부동하고도 자명한 이치로써 세계화의 조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생존 경쟁 싸움에 입각해 있으며,, 남자든지 여자든지 개인의 아파테이아는 오직 개인의 문제인 거고 남자가 역사에 이바지했다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우월하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 말이라면 다른 꼭지에서 벌써 언급했지요.
남자 전체는 여자 전체보다 우월하다고 플라톤이 말한 바 있다고요.
문제는 남자라는 집합이 우월하다고 해서 개개인의 개별적인 경우까지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는 거고요.
또한 어떤 점에서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비열함이나 무지함이나 독선이나 착각이 게재되어 있다면 과연 그 우월함은 무엇 때문에 있는 건지 의문이죠.
위에서 잘 산다는 말이 있었지만 어느 한 부류가 아니라 가급적 전체가 잘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올바름은 빠져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올바름이 빠져버리면 부당한 쪽만이 현실적으로 더욱 잘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지성 답변 2

잘 읽었어요!^^ 답변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연못님의 논지는 객관성을 벗어나는 게 몇 가지 있어요. , 프래그머티즘의 주관적 해석에 쌍방으로 작용하는 패러독스.
저는 잘 살기 위한 것을 단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잘 살기 위한 것은 물질적 생산도 이에 들어가겠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킨다던지, 스토아학파처럼 욕망을 줄여나간다던지 말입니다. 이게 다 행복의 전제조건이자 '잘 사는 것'이라는 개념에 투영될 수 있는 거예요.
아마 이건 그쪽에서 제 논지를 잘못 파악하신 듯하고, 그보다도 프래그머티즘이 현대판 파우스트를 양산해 낸다니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있다면 이것도 패러다임에 속하겠죠. 부인 못할 문젭니다. 과학 기술이 환경오염을 가져왔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프래그머티즘 적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치부시키는 것은 너무 단일화된 인과관계랄까. 왜 꼭 프래그머티즘이 환경문제를 양산했을까요?
매우 궁금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이라든지 다른 동기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논지의 객관성에 벗어납니다.
. 그리고 올바르게 사는 문제가 잘 사는 문제하고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올바르게 사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한마디로 행위의 동기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일례로 자신의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살인범이 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는데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올바릅니다. 왜 올바르냐.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하지만 공리성이 없잖아요! 친구가 곧 죽을 텐데. 바보겠죠.
그리고 사학적으로 고찰해 보아도 행위의 동기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 봉창보다 윤봉길이 더 유명한 것은 이봉창이 일본 천황 암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죠. 윤봉길은 성공했지만. 행위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말이에요.. 님이 내신 논지의 상당수는 성급하게 제 논지를 올바르게 사는 것을 무시하는 논지로 일반화시킨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별로 비판할 게 없네요.
,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가끔 공리성을 추구하다 보면 독선이나 편견이 나올 수도 있어요. 파시즘이나 종교 분쟁같이. 나쁘지요. 하지만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기는 힘들겠죠.
신채호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때때론 반항도 필요한 겁니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 사상에서 보듯이. 이런 걸 역사에서 유리된 독론으로 내세워서는 물론 안 되겠지요. 도그마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도 있으니.

philebus(연못) 답변 2

답변 감사하고요,
그럼 저의 방법대로 다시 한 구절씩 따져보도록 하죠.
어차피 오해를 가능한 줄이려면 차근차근 세밀히 볼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다음 구절에 대해서,
<저는 잘 살기 위한 것을 단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잘살기 위한 것은 물질적 생산도 이에 들어가겠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킨다던지, 스토아학파처럼 욕망을 줄여나간다던지 말입니다. 이게 다 행복의 전제조건이자 '잘 사는 것'이라는 개념에 투영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첫 번째 지성님의 글에서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다음 구절을 보고서였죠.
<가장 뛰어난 일도, 가장 나쁜 일도 저지르지 못한 여자들과는 달리 남성은 자신의 정력을 사용하여 역사를 여러 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존하는 한, ''의 성장은 끝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 ''도 남성이 이룩했습니다. 권력에의 맹종으로써라도 행동주의가 더 낫다고 보는 것도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 '반' 도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의 전제 조건이 되었으니까. 나쁜 일을 저지르는 강함도 고착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메커니즘이란 말예요.>
현재 세계는 프래그머티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듀이가 제창했듯,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도약'말이지요.>
<시장 자본주의, 능력 본위의 자유 경제 체제가 세계화의 조류에 입각해 나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만 좋다면 남자를 더 취직시키고, 더 엘리트로, 부르주아로 만드는 건 죄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공리성을 무시하는 거겠죠.>

, 남성은 가장 뛰어난 일도, 가장 나쁜 일도 저질렀다.
정도 반도 남성이 이룩했다.
반도 정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메커니즘도 살아 숨 쉬는 것이다.
현재 세계는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장자본주의, 능력본위의 자유경제체제에 부응하는 것이 공리성에 입각한 일이다.
위의 말들을 보면 올바른 일과 올바르지 못한 일의 구분이 없어 보입니다.
정과 반이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 올바름을 강조하거나 굳이 따로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장자본주의, 능력 본위의 자유경제체제에 따르는 것은 물질적 풍요를 구하는 외에 다른 목적을 둘 수는 없어 보입니다.
저의 그런 판단에 대해 지성님은 두 번째 글에서 비로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잘 살기 위한 것을 단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잘 살기 위한 것은 물질적 생산도 이에 들어가겠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킨다던지, 스토아학파처럼 욕망을 줄여나간다던지 말입니다. 이게 다 행복의 전제조건이자 '잘 사는 것'이라는 개념에 투영될 수 있는 거예요.>
<님이 내신 논지의 상당수는 성급하게 제 논지를 올바르게 사는 것을 무시하는 논지로 일반화시킨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별로 비판할 게 없네요.>
저는 지성님의 말을 억지로 제 마음대로 해석한 것은 아니고요.
대부분의 말이 물질이나 경제, 공리성 등에 할애된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죠.
사실 물질은 삶의 전제조건일 뿐이지 않습니까?
물질이 전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요?
물질은 삶의 조건일 뿐 좋음의 조건은 아니라는 거죠.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좋은 삶일 텐데요.
좋은 삶에 대해 언급하려면 물질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그것이 육신의 유지에 필요한 그만큼) 오히려 뒤에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킨다던지, 스토아학파처럼 욕망을 줄여나간다 던지'하는 말을 더 많이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그렇게 판단할 일이 없겠죠.
그리고 다음으로,
<과학 기술이 환경오염을 가져왔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프래그머티즘 적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치부시키는 것은 너무 단일화된 인과관계랄까. 왜 꼭 프래그머티즘이 환경문제를 양산했을까요?>
저는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치부한 것이 아닙니다.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말했죠.
인간이 사용하기에 따라서 선도 되고 악도 된다고 했죠.
그리고 환경문제는 결과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온 거죠.
그렇다고 그것이 물론 과학기술의 잘못은 아니고요.
잘못은 인간의 무지에 있겠죠.
편리함은 알지만 그것이 자연계 전체에 미칠 영향을 미리 알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 말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한마디로 행위의 동기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일례로 자신의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살인범이 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는데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올바릅니다. 왜 올바르냐.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하지만 공리성이 없잖아요>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그 예를 드셨는데요,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은 초등학생 수준의 윤리가 아닙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예도 저는 많이 알고 있어요.
전투에서 아군이 결정적으로 불리할 때 이틀 뒤면 구원 군이 온다고 거짓말을 하여 군의 사기를 유지시킨다든가, 늙은 조부가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을까 두려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하지 않는다든가, 정신이 좀 이상해진 친구가 칼을 빌리러 왔을 때 없다고 거짓으로 말한다든가 하는 거 말이죠.
이때는 거짓말을 하는 게 올바른 거죠.
공리성이고 뭐고 용어를 덧붙일 것도 없이 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올바름은 글자 그대로 올바름 자체 그 관념이죠.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특정행위를 붙인 올바름이 아닙니다.
그럼 위의 예는 별다른 뜻이 없게 되었지만 얘기가 나온 김에 올바르게 사는 것 보다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면 말이죠.
<그리고 사학적으로 고찰해 보아도 행위의 동기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봉창보다 윤봉길이 더 유명한 것은 이봉창이 일본 천황 암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죠. 윤봉길은 성공했지만. 행위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말예요.>
모든 조건이 같다면 결과가 좋은 것이 결과가 나쁜 것보다 우월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위의 예를 들며 그런 설명을 한 것에 다른 의도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동기나 과정이 서로 다른 두 일에 있어 결과도 한쪽은 성공이지만 한 쪽은 실패일 때 동기나 과정에 하자가 있어도 결과가 좋은 쪽이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리고 지성님의 글에는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오고 전문용어도 꽤 등장하는데,
일상용어로 하신다면 더 알아듣기 쉽고 오해도 덜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가끔 공리성을 추구하다 보면 독선이나 편견이 나올 수도 있어요. 파시즘이나 종교 분쟁같이. 나쁘지요. 하지만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기는 힘들겠죠. 신채호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때때론 반항도 필요한 겁니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 사상에서 보듯이. 이런 걸 역사에서 유리된 독론으로 내세워서는 물론 안 되겠지요. 도그마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도 있으니.>
라고 했을 때,
신채호를 모르면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죠.
저는 사실 모르거든요.
그리고 까뮈의 철학사상에서 라고 하는데 까뮈의 철학사상도 해석하기 나름 아닙니까?
그 사상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지성님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위의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
'가끔 전체를 위하다 보면 강하긴 하나 치우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대체로 나쁘지만 긍정적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 측면을 따로 전체의 유기적인 구조에서 떼어내 주장한다면 독단적이고 교조적인 인간이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아마도 이런 말은 배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용한 이론일 겁니다.
, 삶의 현장에서 크든 작든 개별적인 사건에 부딪혔을 때,
또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처지에 임했을 때,
어떠한 결정이 과연 공리적인지, 아니면 비판받을 독단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말이죠.

 

지성 답변 3

재미있군요. 연못님, 일단 답변 감사합니다.~
철학이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이 되느냐'란 문제를 가지고 각자의 주관적 견해에 의거한 지론을 맘껏 펼칠 수 있어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과학은 좀……. 딱딱하잖아요.~ ^^ 확고부동한 진리로써의 매력은 있지만. 이에 반해 철학은 종합적으로 현상을 고찰하는 학문이니까.
, 그리고 제 닉이 '지성'인데, 이거 제 이름이에요, 지성할 때 그 지성이 아니라, 고상한 티 내는 닉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지성이라서…….^^;
약간 딴 소리를 많이 했군요. 그럼 본론으로 가서 님의 의견을 비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잘 살기 위한 것을 단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입니다. 물질적 성숙은 잘 살기 위한 방편이에요. 하지만 위의 문장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저는 '단지' 라는 수식어를 첨가함으로써 문장을 자명하게 해 놓았습니다. 잘 살기 위한 것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잘 사는 것과 물질적 성숙이 필요충분조건에 귀결된다고는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충분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예시해 놓은 헤겔의 변증법은 남성의 악()적 메커니즘의 실용성을 대두시키기 위한 겁니다. 이런 예시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일과 올바르지 못한 일의 구분이 없어 보인다는 논지는 무슨 근거를 전제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건지? 정과 반이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올바름을 따로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는 것입니까? 요컨대, 존재는 속성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님이 아울러, 핵심 논지가 남녀평등 찬반론인 이상, 사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인류가 어떤 과제에 당면해 있는지,, 그리고 현재 국제 정세가 어떠한 지를 명쾌하게 직시하고 예시하지 못한다면 논지가 흐려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프래그머티즘을 고찰한 거예요. 논지의 주제를 직시하시길.
그리고 잘 사는 것(선악), 올바르게 사는 것(정사)의 개념에서 혼선이 빚어질 수 있으니 정의를 분명하게 해 두도록 합시다. 서점에 널려있는 철학 개론서 몇 권만 읽어보셔도 아시겠지만 잘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은 분명 다르며 논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허나. 잘 사는 것과 올바로 사는 것은 철학이 당면한 목표이며 잘 사는 것을 중시한 이론은 고대 소피스트들의 절대권력 예찬론에서 출발하여, 경험론, 공리주의, 실용주의로 이어졌고요. 올바로 사는 것을 중시한 이론은 그리스-로마의 소크라테스 철학부터 합리론과 관념론을 거쳐 발전하게 된 거죠. 이 둘 모두 실생활에서 유리시킬 수는 없어요. 잘 살기도 해야 하겠고, 올바른 삶도 필요하지요. 다 아시겠지만 용어를 명쾌히 규정하기 위해서.
그럼 다음을 봅시다. 전자는 제 의견. 후자는 님.
<과학 기술이 환경오염을 가져왔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프래그머티즘 적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치부시키는 것은 너무 단일화된 인과관계랄까. 왜 꼭 프래그머티즘이 환경문제를 양산했을까요?>
<저는 과학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치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환경문제는 결과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온 거죠.>
님의 말씀대로 님께서는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논지는 님께서 그냥 사전적 의미의 과학기술이 아닌 실용주의적, 프래그머티즘 적 과학 기술을 오용 적으로 치부시키셨다는 것이고 이것이 단일화된 인과관계에도 투영될 수 있는 비판받기 용이한 논지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환경 문제는 결과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온 거죠'라는 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셔도 알 수 있듯이 님께서는 물질문명의 발달이 환경 문제에서 왔다는 것을 찬동하고 계시며, 저는 이것을 단일화된 인과관계라고 규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논지에 다른 예시로 애국지사 두 명, 이봉창과 윤봉길이 나오는데요. 전 이 두 명의 활동 내역이 같은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고 규정한 적 없습니다. 이 봉창은 '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윤봉길은 '일본 공사관''암살했습니다. 동기는 이봉창이 우세하나, 결과는 윤봉길이 좋은 것이죠. 모든 조건이 같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아래에 있는 님의 논지도 성급한 일반화.
<모든 조건이 같다면 결과가 좋은 것이 결과가 나쁜 것보다 우월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닙니까? >
, 그리고 까뮈 이야기. 까뮈의 철학 사상도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해석기반, 즉 베이스를 이루고 있는 사상이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전 그것을 '반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예시하였고요.

philebus(연못) 답변 3

답변 감사하고요,
저는 지성님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좀 더 확실히 알고 싶으니 다시 한번 따져 봐야겠네요.
그러고 나서 만약 괜찮다면 다른 방법으로 좀 더 검토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잘 살기 위한 것을 단지 물질적 성숙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입니다. 물질적 성숙은 잘 살기 위한 방편이에요. 하지만 위의 문장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저는 '단지' 라는 수식어를 첨가함으로써 문장을 자명하게 해 놓았습니다.>
'단지'라는 수식어는 지성님의 두 번째 답변에서 쓴 것 아닙니까?
저는 그전에 쓰신 첫 번째 글에서 제가 나름대로 판단했던 근거를 이미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그리고 제가 예시해 놓은 헤겔의 변증법은 남성의 악()적 메커니즘의 실용성을 대두시키기 위한 겁니다. 이런 예시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일과 올바르지 못한 일의 구분이 없어 보인다는 논지는 무슨 근거를 전제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건지? 정과 반이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올바름을 따로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는 것입니까?>
첫 번째 글에서 올바름을 언급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한 도약'말이지요.> 이 부분뿐입니다.. 그 외에는 말씀대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 해석에도 무리가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하긴 다음 글에서 올바름을 거짓말의 예를 들어 비유한 것을 보면 올바름에 대한 저와 지성님의 개념 차이가 오차를 불러왔다고 생각은 됩니다.
<그리고 잘 사는 것(선악), 올바르게 사는 것(정사)의 개념에서 혼선이 빚어질 수 있으니 정의를 분명하게 해 두도록 합시다. 서점에 널려있는 철학 개론서 몇 권만 읽어 보셔도 아시겠지만 잘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은 분명 다르며 논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허나. 잘 사는 것과 올바로 사는 것은 철학이 당면한 목표이며 잘 사는 것을 중시한 이론은 고대 소피스트들의 절대 권력 예찬론에서 출발하여, 경험론, 공리주의, 실용주의로 이어졌고요. 올바로 사는 것을 중시한 이론은 그리스-로마의 소크라테스 철학부터 합리론과 관념론을 거쳐 발전하게 된 거죠. 이 둘 모두 실생활에서 유리시킬 수는 없어요. 잘 살기도 해야 하겠고, 올바른 삶도 필요하지요. 다 아시겠지만 용어를 명쾌히 규정하기 위해서.>
이 부분은 제가 지난 답변에서
'그럼 위의 예는 별다른 뜻이 없게 되었지만 얘기가 나온 김에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면 말이죠.' 라고 물은데 대해 쓰신 것 같은데요, 하신 대답을 한번 잘 보세요.
잘 사는 것이 무엇이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문장은 긴데 말이죠.
정의를 분명하게 해 두도록 합시다라고 해놓고 분명한 말이 없어요.
철학 개론서에 다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제가 짐작컨대 철학개론서에도 명쾌한 답변은 아마 없을 겁니다.
지금 위와 같은 긴 얘기는 많이 있을지 몰라도요.
<님의 말씀대로 님께서는 과학 기술을 오용적인 학문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논지는 님께서 그냥 사전적 의미의 과학기술이 아닌 실용주의적, 프래그머티즘 적 과학 기술을 오용 적으로 치부시키셨다는 것이고 이것이 단일화된 인과관계에도 투영될 수 있는 비판받기 용이한 논지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환경 문제는 결과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온 거죠'라는 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셔도 알 수 있듯이 님께서는 물질문명의 발달이 환경 문제에서 왔다는 것을 찬동하고 계시며, 저는 이것을 단일화된 인과관계라고 규정화하였습니다.>
위에 관해 제가 한 얘기는,
'환경과 공해문제도 잘 아실 겁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문제점은 생략하죠.
과학과 물질문명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선악이 가려지는 거죠.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닐 겁니다.'
,
'그리고 환경문제는 결과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온 거죠.
그렇다고 그것이 물론 과학기술의 잘못은 아니고요.
잘못은 인간의 무지에 있겠죠.
편리함은 알지만 그것이 자연계 전체에 미칠 영향을 미리 알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 말입니다.' 라는 정도인데요.
위의 말들이 어떻게 프라그마티즘 적 과학기술을 오용 적으로 치부시켰다는 얘깁니까?
말 중의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물질문명의 발달이 없었다면 환경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말은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밑에 잘못은 인간의 무지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과학기술 또는 프라그마티즘 적 과학기술을 오용 적으로 어떻게 했다는 말이 된다는 겁니까?
<그리고 제 논지에 다른 예시로 애국지사 두 명, 이 봉창과 윤봉길이 나오는데요. 전 이 두 명의 활동 내역이 같은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고 규정한 적 없습니다. 이봉창은 '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윤봉길은 '일본 공사관'을 '암살 했습니다. ‘ 동기는 이봉창이 우세하나, 결과는 윤봉길이 좋은 것이죠. 모든 조건이 같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아래에 있는 님의 논지도 성급한 일반화.>
위의 말은 예를 들어, 사냥꾼 두 사람이 각각 호랑이와 여우를 잡으러 나갔는데 한 사람은 호랑이를 잡는데 실패하고 한 사람은 여우를 잡아왔다면 결과적으로 여우를 잡은 쪽이 그만큼 더 가치가 있다고 하는 말과 같다고 할까요.
그야 특별한 말도 아니고 당연한 말이죠. 사냥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이고, 일이 다 끝난 뒤에 아무것도 없는 빈손보다는 여우가 들려있는 쪽이 더 구경거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저도 달리 할 말은 없네요.
그럼, 서두에 말한 대로 다시 한번 처음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어려운 말들을 피하여 쉬운 말로 제가 먼저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성차별이라는 주제에 관해 남녀의 덕에 차이가 없다라고 얘기한 데 대해 먼저 지성님의 첫 번째 글 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못님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많은 가치 있는 일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한 겁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는 시장자본주의, 능력본위의 자유경제체제에 입각하여 움직이고 있지요.
그러니 이 시점에서 여자보다는, 우월한 남자를 더 취직시키고,, 엘리트 부르조아로 만든다고  나라 전체로 보아 나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최대한 능력본위로 사람을 써서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적합한 방법일 테니 말입니다.'


이 글에서 더할 점이 있으면 더하고 빼야 할 점이 있다면 빼보시죠.
그럼 이해가 훨씬 쉬워질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쉽게 말해달라고 해서 재미가 없다면 그만두어도 좋습니다.
저는 상대를 괴롭게 하면서 까지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지성 답변 4

답변해 주셨군요,.~
일단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논지의 개념이 어떤 주제에 입각해 있는지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듯 하니 제 사상 근간의 처음부터 쉽게 정리하겠습니다. 님께서 제 글을 따지시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제 사상에 대해서 사색하시길 원하시는 것 같으니. 그러면 오해도 풀릴 수밖에 없겠죠. 사실 이건 제 첫 답변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내용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님께 답변을 드린 이유는 형이상학적 고찰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왜 남녀를 평등하게 보아야 하는지 관념의 반항을 촉발한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논지를 완벽하게 직시하고 개괄하려면 처음부터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다루는 수밖에 없겠죠. 님께서도 그것을 암묵적으로써도 원하시고 계신 듯하니 약간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수반하더라도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의탁한 관념은 '범신론'입니다. 스피노자가 제창한 사상으로써 모든 사물이 으로써 주체성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저는 님께서 스피노자의 철학 사상 중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범신론의 기본 베이스를 아신다고 전제한 후, 논지를 되도록이면 빠르게 전개하고자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야 하는지, 아니면 불평등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일단 왜 그런 현상이 대두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고찰할 수밖에 없겠죠. 남녀평등, 불평등 론은 사회학적인 문제지만 거기서 일단락 짓지 않고, 인식론, 형이상학적 측면까지 문제를 끌고 가는 겁니다. 좀 더 광범위한 문제 해결을 촉발하기 위해서 이 세계의 참모습을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계기를 통해 재론할 때 로버트 마이어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일정량의 에너지이고 당연히 에너지는 본성상 끝없이 운동하겠죠.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양자 역학에 따라 Energy(앞으로는 간단히 E로 표기)1은 E2를 만들고 E2E3을 만들고 E3E1을 만들었다고 설명해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생태계의 에너지 순환처럼, 모든 생명을 창조한 에너지도 이와 같이 순환 논증에 결부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제와 관련된 것을 최대한 간략하게 다루기 위해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님께서 범신론을 인정하신다면 (그럴 가능성은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곧 신이요, 에너지라는 것을 직시하실 수 있을 터이고, 에너지가 움직인 것을 기록한 시간은 운동에서 표상되고 산출된다는 것까지 인정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약간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필요하지만 님께서는 이 정도는 아시리라 생각하며 설명을 일단락 짓습니다. 그럼 저의 소신은 어디에서 피력되느냐. 역사에서 피력됩니다. 사학에서 피력됩니다.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기록이며, 에너지가 움직인 것을 사유할 수 있는 인류의 기록입니다. 카알 마르크스의 사상 중에서도 역사를 절대시 하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과도 투영될 수 있겠네요.
카알 맑스의 사상 중에서 가장 맘에 듭니다. , 그리고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이지만 카알 마르크스가 한 명언 중에 기가 막힌 것이 있더군요. 정말 멋집니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으나.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제가 말씀드리는 논지와는 별로 관련이 없지만 하도 명언이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
그리고 헤겔 사상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간략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신채호 사상과도 약간 비슷합니다. 신채호에 대해서 잘 모르신다고 하셨는데,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말은 '나와 내가 아닌 다른 관념과의 싸움이 촉발됨에 따라 나는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헤겔 사상은 너무 유명하지요. 그의 변증법을 잘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겠죠. 正(절대 정신)이 정립되면 그에 하는 사상, 그에 모순된 사상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反正(반정립)입니다. 그리고 의 필연적인 싸움에 따라 , 보다 이상적인 정신이 촉발되는데 이것이 바로 입니다. (종합정신) 신채호 사상과 비슷하지요. 역사를 투쟁 속에서, 모순 속에서 변천하는 것으로 본 겁니다. 역사는 생과 실존의 기록이고 역사가 투쟁의 변천이라면 생은 투쟁입니다. 투쟁 속에서 생이 진화하고 보완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홉스도 이렇게 말했지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니까.
그리고 투쟁을 야기시키는을 죽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을 도출시키기 위해서는 이 필요한 법이니까. 안 그러면 은 도태되어 멸망하겠죠. 성장하고 진보하지 않는 가치는 퇴색하는 법입니다. 전 사실 생존 경쟁 예찬론자예요. 사실 이런 가치는 이미 인류의 감성 곳곳에 스미고 있습니다. 시장 경제주의와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은 그것의 예시가 되겠죠.
그것을 절대시 한 것이 아니에요. 에 반하는 관념이 나오면 그것은 다른 이 되겠고 그 에서 보다 발전된 변증법적 지양을 거쳐서 나온 것이 새로운 으로써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은 변증법에서 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죠. 모든 관념은 성장하고 진보합니다. 에너지도 마찬가지예요. 놀라운 인과율로 말이죠.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이런 명언을 남겼잖아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평등은 관념의 정체이고 정체는 성장에 반대되는 개념이며 성장하지 않는 관념은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도 그런 개념이 있더군요. 제행무상이라고.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남자가 생존하기 유리하다면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것도 에너지 순환의 한 과정이니. 그리고 변증법적 지양을 거치겠죠. 이쯤 설명드렸으면 제 사상에 대해 대충 아실 법도 합니다.
그리고 잘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의 정의를 해드리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님께서 경험론이라든지 합리론이라든지 이런 개별적 사상이 총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베이스 적 사상에 대해 아시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따로 주석을 안 붙인 건데요. 제가 사실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합니까…….^^; 님께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시거나, 아니면 그 이상이라면 윤리 교과서에서 의무론적 윤리설과 목적론적 윤리 설을 배우셨을 겁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의무론적 윤리설의 윤리적 목표가 되겠고, 도덕 법칙에의 일치 여부를 중시하고, 도덕 법칙의 예외를 불허하며, 보편타당한 행위의 법칙을 근본 문제로 삼고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며 단점으로는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억압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잘 사는 것은 목적론적 윤리설의 윤리적 목표가 되겠고, 최선의 결과 초래 여부를 중시하고 (제 입장이군요.),
도덕 법칙의 예외를 허용하는 상대론적인 측면에 입각하였으며, 근본 문제는 인생의 보편적 궁극 목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심리를 존중하는 장점을 지닌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물질문명의 발달이 없었다면 환경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말은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님께서 프래그머티즘을 오용 적으로 치부시키셨다는 근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프래그머티즘이 물질문명의 발달을 양산했거든요. 미국 경제 외교론을 모르십니까.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이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현재의 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적 이데올로기의 근간입니다! 공산주의 국가, 예를 들어 북한 같은 경우 마르크시즘이 지배한다면 미국은 프래그머티즘이 지배하는 국가란 말이에요.. 님께서는 물질문명 (과학 기술)의 프래그머티즘 적 발달을 반대하셨습니다. 부인하시지 마세요.
더 이상 필요하신 설명이 있으십니까?

philebus(연못) 답변4

답변을 주신 성의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걸었던 기대가 깨졌네요.
제가 쉬운 말로 얘기를 나누어 보자고 제의한 데 대해서 여전히 사람 이름과 전문용어가 많이 섞인 글이었기 때문에요.
그리고 잘 살고, 올바르게 사는데 대한 정의도 너무 상투적인 거죠.
명쾌한 정의 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정의라고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실 겁니다.
위에 하신 말들은 단어 하나에도 의문이 수없이 내포될 수 있는 여지가 있죠.
따지고 보면 아마도 아무 내용도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겁니다.
지성님이 제 쉬운 말 토론 제의에 응해 주신다면 일문일답식으로 따져 드릴게요.
그 대신 사람 이름(철학자들)이 들어가는 말은 하지 않고 전문용어는 최대한 쓰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곤란을 겪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지성님의 사상 근거로부터 마르크스의 명언까지 소개해 주셨는데요.
대단히 미안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세계에 관해서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계가 무엇이고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거창한 이론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유일한 주제는 저 자신이며, 인간입니다.
저 자신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면 미루어 다른 사람도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있다면 역시 그 내용이 저에게까지 미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 아는 내용을 뗏목으로 삼아 생이라는 바다를 건너면서 가능한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하며, 부당한 일을 덜 저지를 수 있을 겁니다.
이것도 단지 희망사항이며, 희미한 안갯속에서의 방황과 같은 것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그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마르크스가 한 말이라면서요?
마르크스 사상 전반을 염두에 두지 않고(사실 전 전반적으로는 몰라요. 그래서 이런 단서를 답니다.) 오로지 위의 말만 따져본다면,


철학자 중의 철학자인(그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소크라테스는 세계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속 개별 인간의 영혼과 덕을 탐구하는 일에 평생을 보냈죠.
완벽하게 언행일치를 구현한 인물이었고요.
젊은 시절 한때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진 적이 있지만 곧 탐구를 포기했죠.
아마 잘 아실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잘 알고 계신 듯하니까.
그럼 가장 훌륭한 철학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이 세계를 알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해본들 그게 그리 권위 있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죠.
말투는 당당하지만 내용은 그에 못 미치는 거죠.
이성은 없고 기개만 있는 꼴입니다.
더욱, 다음 말을 보면 그게 증명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짓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컨대 말을 전혀 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 말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선다면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말을 치료할 수 있는 자는 말의 종류와 그 신체구조와 생리에 대해 정통하고 그 습관과 기호 등에 관해서도 잘 알며 말이 걸릴 수 있는 질병에 대해서도 두루 알고 마지막으로 그 치료법까지 완벽히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섣불리 알고 달려들었다간 말을 고치는 게 아니라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게 아닙니까?
마르크스가 인간을 잘 알고 그 인간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애썼는지, 또는 세계를 잘 알고 그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애썼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의 저 말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우습다고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지성님과 가급적이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예처럼 얼마 길지도 않은 글에 수십 명의 사람 이름을 거론하며 이런저런,, 일반인이 보기에는 생경한 어휘를 구사하며 하는 방식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에게 이로움은 전혀 없고 피곤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게 되면 저만 아니라 지성님도 갑갑하겠죠.
말은 통하는 사람끼리 해야 할 겁니다.
제 방식이 맘에 안 맞으시면 지성님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테죠.
저도 역시 저와 궁합이 맞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 되고요.
이만 줄입니다.

 

지성 답변 5

잘 살고, 올바르게 사는데 대한 정의가 너무 상투적인 것이라, 명쾌한 정의로써 직시될 수 없다는 거군요. 만약 모든 철학자들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는지 정의를 완벽하게 내렸다면 그 이상 철학자가 양성될 필요성이 있었을까요? 님의 말씀대로라면 인간은 이미 진리에 도달했겠군요. 이것은 그들 철학의 근간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철학의 목표가 어떻게 해야 잘 사느냐, 올바르게 사느냐를 연구하는 것인 이상 그것을 명쾌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까다롭겠죠. 단지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리고 제가 전에 사상의 연원부터 흐름까지 말씀드린 바 있지만, 철학사상의 조류는 크게 두 가지예요.. 그 두 사상은 당연히 입장의 차이가 있겠고, 저는 그 입장의 차이를 님께 말씀드린 겁니다. 진리를 촉발하는 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질 문제가 아니지요. 님께서 빈 껍데기라고 하신 말씀은 약간 위험하군요. 현재까지 이뤄온 인간의 철학을 빈껍데기라고 명명 짓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철학은 미지의 것 또는 부정확한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입니다.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고안해 내는 지식이 과학이라면 여러 가지 목적을 비판하고 조절하는 지혜가 철학인 것이죠. 예컨대, 미국이 성공적인 경제 대국이 되기 위해 존 듀이의 철학 사상이 필요했듯이. 그리고 세계에 대해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편협합니다. 제 관점에 입각해서 볼 때는 자신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은 정저지와 꼴입니다. 이에 대해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님의 시야를 제 시야로 만들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으니.
, 그리고 마르크스 이야기.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님께서는 마르크스의 이 논지를 비판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예증하고 계십니다. 그가 세계에 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때 시대와 지금 시대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고대의 일화를 현재에 미루어 예증하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과대망상증 (이것도 패러다임이겠죠.)으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는군요. 그때야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 등의 철학자들이 활동한 시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대인데, 세상의 근원이 불이나 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자연과학과 지금 자연과학을 비교하시는 것은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고요. 그리고 소크라테스 빼고 다른 철학자들이 세계를 탐구했다고 해도 권위 있는 말이 못된다고 하셨는데요, 아주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니힐리즘에 젖어 계신 듯합니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짓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위는 님의 말씀입니다. 비판 대상이 흐려지고 있음을 주시하세요. 마르크스의 명언을 비판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님께서는 이 의견 위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 가장 훌륭한 철학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이 세계를 알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해본들 그게 그리 권위 있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죠.
말투는 당당하지만 내용은 그에 못 미치는 거죠.
이성은 없고 기개만 있는 꼴입니다.
더욱, 다음 말을 보면 그게 증명됩니다. '
마르크스의 명언은 오직 마르크스의 독자적인 생각에 투영될 수 있는 지론이지, 이것이 고대, 중세,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사상가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하신다니 대단한 오차이십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가지고 철학자들을 비판하시다니, 한 사람의 개인적을 가지고 역사 속의 대 철학자들을 다 뒤집어놓는다는 것인지? 말투는 당당하지만 내용은 그에 못 미치는 것이라니. 세계의 권위 있는 철학 석사, 박사들이 놀라시겠습니다. 이성은 없고 기개만 있는 꼴이다? 합리론 철학자들이 얼마나 이성을 중시했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데카르트의 명제만 해도 그렇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이성에서 나왔습니까? 기개에서 나왔습니까? 전혀 근거 없는 논지이군요. 비판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 자신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가 세계를 바꾸는 것을 중시한 것은 세계를 알고, 세계를 바꾸는 순리적 배열을 역행한 것이 절대로 아니에요. 중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세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음. 저는 제가 얼마 길지도 않은 글에 생경한 어휘를 많이 썼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중요한 어휘라고 해봤자 5~6개 정도. 철학사의 근간이 되는 어휘이며 저는 그것을 다 일일이 풀이해 놓았습니다.. 헤겔의 변증법만 해도, 요점만 간단히 간추려서. 그런데 생경하다니. 그리고 적어도 이 홈페이지에 오시는 분이라면 기본적인 철학사에 대해서는 아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리고 기대가 깨졌다니. 처음부터 님께서는 무엇을 바라시고 제 논지에 접근하신 겁니까?
요컨대, 저도 가급적이면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네요.
철학은 미지의 것 또는 부정확한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입니다.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고안해 내는 지식이 과학이라면 여러 가지 목적을 비판하고 조절하는 지혜가 철학인 것이죠. 예컨대, 미국이 성공적인 경제 대국이 되기 위해 존 듀이의 철학 사상이 필요했듯이.
님께서는 마르크스의 이 논지를 비판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예증하고 계십니다. 그가 세계에 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때 시대와 지금 시대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고대의 일화를 현재에 미루어 예증하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과대망상증 (이것도 패러다임이겠죠.)으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는군요.
그리고 소크라테스 빼고 다른 철학자들이 세계를 탐구했다고 해도 권위 있는 말이 못된다고 하셨는데요, 아주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니힐리즘에 젖어 계신 듯합니다.
마르크스의 명언은 오직 마르크스의 독자적인 생각에 투영될 수 있는 지론이지, 이것이 고대, 중세,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사상가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하신다니 대단한 오차이십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가지고 철학자들을 비판하시다니, 한 사람의 개인적을 가지고 역사 속의 대 철학자들을 다 뒤집어놓는다는 것인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이성에서 나왔습니까? 기개에서 나왔습니까? 전혀 근거 없는 논지이군요. 비판할 여지도 없습니다.

philebus(연못) 답변 5

잘 들었고요.
대화를 계속하고 싶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제 입장과 의견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마르크스의 명언이라는 걸 제 나름대로 비판한 방식을 아직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위의 말을 마르크스가 했다고 여기지 마시고, 옆집 담배 가게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말이라고요.
그리고 잠시 지성님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울러 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진 않았지만 무슨 말이든지 들으면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 그 타당성을 여러 각도로 따져보길 좋아하는 성격이라고요.
그럼, 위의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니 마르크스의 독자적인 사상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철학사적으로 다른 철학자의 사상과 연계시킬 것도 없으며, 더욱이 지성님은 그럴만한 능력도 없는 셈이니,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이성으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위 명언 중 첫 번째 구절은 사실 비판할 필요나 가치가 없는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구절이죠.
단지, 말이 함께 붙어 있어 제가 덤으로 한마디 한 거죠.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등장했던 거고요.
하지만 제 말이 문맥으로 보아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성님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쓰는 컴퓨터가 현재 메모리가 부족하여 인터넷의 속도가 느리다.
그런 점에서 이 컴퓨터를 보다 성능이 좋게 만들려면 현재 16메가의 램을 32메가로 바꾸어 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컴의 사용자가 인터넷만 간신히 하는 초보자이고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라면 그는 스스로 이 컴을 좋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스스로 배워서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컴을 모르고는 컴을 좋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우리 먼 인척이 당뇨병을 앓고 있는데 그의 당뇨병 증세가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어 그의 건강이 호전된다면 이건 그를 좋게 하는 일이다.
내가 조언해 주고 싶지만 나는 당뇨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는 아마도 의사로부터 지시를 들어 병의 관리를 하고 있을 테니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은 없겠지…….
그런데 이건 말하자면 누군가를 나쁘게 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를 좋은 쪽으로 향하게 하려면 그 원인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병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그의 원래의 건강상태와 기호, 식습관 등에 대해서도 알아야 효과적인 조언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알고 나서야 조언도 할 수 있고 좋게 개선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사례는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세계를 모르는데 그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지 무슨 수로 아는가?
한라산의 지리를 모르면서 '등산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빨리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충 이런 생각 말이죠.
어떤 명제가 나타나면 가능한 그것을 철학사적으로 연결시키지 말고 항상 그 자체로만 먼저 분석해 본다는 거죠.
권위 있는 다른 철학자의 말을 전혀 배제한 채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번 글에서 '마르크스 사상 전반을 염두에 두지 않고(사실 전 전반적으로는 몰라요. 그래서 이런 단서를 답니다.) 오로지 위의 말만 따져본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뜻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진행시켜 왔고 지성님도 그런 식으로 해주어야 서로 말이 통할 것이라는 말을 지난번에 한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나간 철학자들의 글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나간 사상들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이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부연하기 위해 저에게 있어 철학은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제 입장에서 철학은 종교와 유사합니다.
단지 종교가 고유의 외형적인 의식을 행하고, 기도나 믿음을 강조하는 편이라면(주로 기독교 쪽이겠지만) 철학은 이치와 논리가 따르는 사유가 중심이라는 거죠.
종교에 구원이라는 목표가 있다면 철학에는 영혼의 정화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철학 활동이라고 해도 그러한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철학은 미지의 것 또는 부정확한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입니다.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고안해 내는 지식이 과학이라면 여러 가지 목적을 비판하고 조절하는 지혜가 철학인 것이죠.' 라고 말하는 지성님의 입장과는 다른 거죠.
그리고 제 방식의 철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러한 사유에 있어 독특한 즐거움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 즐거움은 요란하진 않지만 매력이 있어 예컨대 술을 너무 마시거나 목청높이 노래를 부르거나 코미디를 보며 웃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구하지 않게끔 해 줍니다.
그러니 제가 우울한 니힐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솔직히 제가 정신적으로 될 수 있으면 성숙하고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그런 듯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그런 사람 말이죠.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이요.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힘닿는데 까지 할 생각이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에든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목표는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거나 그런 생각을 철두철미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어려움이 많죠.
그래서 저는 자신을 감당하기에도 벅차다고 생각하고, 다른 일에나 사상에는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거죠.
이제 어느 정도 제 입장을 이해하실 걸로 생각합니다.

데카르트 얘기도 나왔지만 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도 다른 사상을 덧붙이지 않고 위에서 예를 들어본 대로 그 자체로 분석해 보자면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원하신다면 다음번에 얘기해 보죠.
만약 제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셨다면 말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지성 답변 6

역시 답변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마르크스 명언을 비판하셨는데, 여전히 논점은 같습니다.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나가는지 알지 못한다면 세계를 구할 수 없다는 것. 맞습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먼저 해야 할 것을 따진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따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의학기술을 알고 환자를 고치는 것은 당연지사 한 순리이지만, 의학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환자를 고치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런 관점인 거예요.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게시판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이곳 카페에서, 혹은 대화방 같은 곳에서 말씀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소개 좀 해주세요…….^^; 뭐 굳이 싫으시면 안 해주셔도 되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는지. 남자분이신지, 여자분 이신지.
님의 사상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글들을 읽으면서 솔직히 깊은 공감대를 느꼈습니다.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 철학을 하신다라……. , 저도 그렇겠죠. ^^
이만.

philebus(연못) 답변 6

, 잘 읽었습니다.
게시판에서는 더 이상 글쓰기가 되지 않아 메일로 쓰겠습니다.

어떤 말이 명언이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가치 있다면 그 내용이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지성님은 제 말을 수긍하는 듯이 말하면서 여전히 마르크스의 말이 어떤 뜻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학 기술을 알고 환자를 고치는 것은 당연지사 한 순리이지만, 의학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환자를 고치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런 관점인 거예요.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위의 말대로라면 그 말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위의 말을 다시 논점에 맞게 부연하면, '어떤 환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보다 그 환자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말이 되는 거죠.
이 말의 실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이 말이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까?


관점을 바꾸어서,
이 말이 마르크스의 명성에 걸맞은 의미를 지닌다고 굳이 간주하려면 이 말을 듣는 대상이나 또는 들을 자격이 있는 대상을 한정해야 할 것입니다.
, 어떤 환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으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고치지 않고 있는 의사 말이죠.
그런 사람에게 라면 이 말이 걸맞은 충고가 될 것입니다.
그럼 지성님이 이 말을 좋아한다고 하니 하는 말이지만, 스스로 이 말을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여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인 즉, 지성님이 세계를 알고,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갈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굳이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냐는 거죠.
만약 지성님이 그런 사람이라면 이 명언은 지성님에게 합당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건 억지로 한 가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언을 지금 이런 뜻으로 사용하려면 첫 문장을 그 취지에 맞게 바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죠.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이죠.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복잡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지성님의 답변 중에 단서가 되는 말이 있으니 안 할 수도 없네요.

 

저에 대해서는 물어보신 내용에 대해 윤곽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자입니다,
이곳에 있는 분들이 대체로 보통 코스를 밟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라면 그분들보다는 훨씬 많은 나이지만 늙은이들로부터는 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나이죠.
닉네임 연못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고, 여기서 보니 주제가 성차별이더군요.
그런데 제 논지가 본성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취지이기 때문에 어쩌면 여성들에게 호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연못이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던 거죠.
연못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상징을 분석하는 대로 한다면 여성을 상징한다는 얘길 들은 것 같아서 말이죠. 정확한 건 아닙니다.
또는 연못을 들여다보는 것은 호기심을 의미한다고도 하더군요.
저는 아직 대화방엔 들어가 본 일이 없고 타이핑이 상당히 느립니다.
제겐 좀 부담스럽죠.
하기야 이곳 게시판은 특정 주제를 위한 곳이라 문답이 길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이나 게시판지기가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가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서 말을 끝내는 것도 꼬리 없는 닭이 될까 해서 계속 썼었는데, 만약 토론을 더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다면 메일을 주세요.
아니면 다른 게시판도 좋고요.
저로서는 철학적인 얘기란 서두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음미하는 쪽이죠.
그럼 이만,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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