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사가 비싸지는 않지만 진흙을 구워 만든 대단히 아름다운 꽃병을 가지고 있었다. 이 꽃병은 그가 한 (결혼한) 여자 환자에게서 다른 많은 값비싼 물건들과 함께 선물 받은 것이다. 이 환자에게서 정신병이 명확해지자, 그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돌려주고 싶지 않은 문제의 덜 비싼 꽃병을 제외한 모든 선물을 이 환자의 가족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지극히 양심적인 이 사람에게 이러한 착복으로 인해 어떤 내부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의 무례함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꽃병은 원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포장하기도 힘들다는 등과 같은 변명으로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려고 할 뿐이었다. 그가 몇 달 후 그에게 논란이 되었던 이 환자의 치료에 대한 잔금을 변호사를 통해 청구하고 징수하려 할 때, 그에게는 자기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이 이른바 착복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일시에 엄습했다. 특히 처음 순간에 한동안 이 공포가 강력해서, 그는 착복한 대상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보다 백배나 더 높은 청구액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생각을 제쳐 둠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내었다.
좀처럼 물건을 떨어뜨려 깨지 않으며 근육기관을 잘 통제할 수 있는 그가 이런 기분 상태에서 꽃병의 물을 갈려고 하다가 이 행위와는 유기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기이하게 <서툰> 움직임으로 꽃병을 떨어뜨려 그것이 대여섯 조각으로 쪼개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일은 그가 바로 아까 저녁에 매우 주저하다가 마침내 이 꽃병을 꽃으로 가득 채워 식당의 탁자 위에 놓아 초대된 손님들 앞에 전시하리라 마음먹었으며, 깨기 바로 전에는 응접실에 그것이 없는 것이 두려워 손수 다른 방에서 들여온 이후에 일어났다! 그가 처음의 놀란 순간이 지난 후 조각들을 모아 그것들을 맞춰보면서 꽃병이 완전히 복구될 수 있다고 확인하는 순간, 두 세 개의 큰 조각들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것들은 다시 산산조각이 났고 이와 함께 꽃병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분명 이 실수 행위는 그가 빼돌렸고 더 이상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물건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소송에서 그 의사에게 도움을 주려는 당면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정신분석가에게 이런 실수 행위는 이런 직접적인 결정관계 이외에도 다른 훨씬 깊고 중요한 <상징적>결정인자를 의미한다. 이 꽃병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 작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름답고 젊으며 열렬히 사랑하던 그의 아내를 비극적으로 잃었다. 그는 신경증에 빠졌는데, 그 증세의 기본 특징은 그가 불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그가 그의 아름다운 꽃병을 깨버렸다>). 또한 그는 여성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결혼에 대한 거부감과 아울러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죽은 아내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질 지속적인 연애관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연애관계는 그가 여자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거나 한 여자가 자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등과 같은 것을 통해 합리화하였다.(이때 물론 그는 꽃병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없었다!).
그가 강한 리비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그 성격상 더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결혼한 여자들과의 관계가 그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따라서 다른 사람의 꽃병을 간수한다).
이런 상징성은 다음의 두 가지 요인들에 의해 입증된다. 신경증의 결과 그는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진흙을 구워 만든irden>꽃병이 깨지는 이야기를 한, 치료시간 후반부에 가서 그는 다시 한번 여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는 자신이 말도 안 되게 요구 수준이 높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가령 그는 여자들로부터 <현세에는 없는 unirdisch 아름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아직도 자신의 (죽은, 즉 현세에는 없는)아내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현세적인 irdisch 아름다움>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전이를 통해 그의 의사의 딸과 결혼하는 상상을 하는 시각에, 그가 어떤 방향의 보답을 원하는 가를 마치 암시하듯이 그는 의사에게 꽃병을 선물했다.
실수 행위의 상징적 의미는 가령 꽃병에 물을 채우려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아마도 전의식과 무의식에서 분리되어 작용하는 최소한 두 가지의 동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실수 행위의 이중화 - 꽃병의 떨어뜨림과 미끄러짐 - 에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 한우 옮김> 중에서
이승과저승 생각 : 20살 무렵 정신분석입문과 꿈의 해석을 읽고 흥분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이번에 새로 번역 출판된 전집을 읽기로 마음먹고 출판연도 순서대로 히스테리 연구를 가장 먼저 읽었다. 다음으로 꿈의 해석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이다. 이미 널리 그리고 그의 무의식처럼 깊게 퍼져있는 명성은 제쳐두고 책을 읽은 느낌만으로도 프로이트가 그야말로 뛰어난 지성이며 성실한 학자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의식에 대한 그의 통찰도 그렇고, 그 통찰을 자기분석과 임상을 바탕으로 견고하고 세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해 낸 것도 그렇고, 그것을 풀어쓴 글 솜씨도 그렇다.
지금까지 세권을 읽은 결과 마음에 얻어진 것은, 생활 속에서 꽤 중요한 결정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할 때 그 근본 동기를 가능한 한 철저히 파헤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공적인 일을 선뜻 떠맡으려 할 경우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려 하는가?(동네를 위해서? 학생들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공명심 때문에? 돈 때문에? 등)
자신을 향해 준열하게 캐어물은 뒤 답이 나오면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사적인 일의 경우에는 현실 여건과 동떨어진 희망을 관철하려 할 때 그 동기를 분명히 알고 목표를 뚜렷이 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독서의 결과 무의식이라는 존재에 대해 현재 희미하게나마 내 나름대로 윤곽을 그리고 있고, 그의 작용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어떤 입장이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 생활 속의 소소한 행동에 대하여 그때마다 무의식이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하면 소심하게 되거나 자의식 과잉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이 아닌 건강한 상태에서 지속적인 자기 관찰을 요한다고 생각된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파고들기보다는 차라리 간화선이나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이 괜찮을 걸로 여겨진다.
전집을 읽어가다 나중에 어떤 의미 있는 영감을 얻게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발견한 이 무의식에 대해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의 지성, 교양, 가족애, 자기분석의 예시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하지만 아마 읽다 보면 절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그러나 능력이 된다면 일상에서 자신의 우연한 행동이나 실수의 의미를 추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는 것이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어쨌든 더 나을 테니까.
지그문트 프로이트 2
그러나 <최면 후 암시post-hypnotic suggestion>라는 유명한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구분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과 더더욱 그런 구분이 소중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음을 밝혀 둔다.
베르넴H.Bernheim이 실행한 이 실험에서 한 사람이 최면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깨어났다. 의사의 지시 하에 최면 상태에 있는 동안 그는 나중에 깨어난 뒤 특정한 시간에, 예를 들어 30분 뒤에 어떤 행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깨어났고, 다시 완전히 의식을 되찾은 듯 아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최면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충동이 일어났고, 그는 이유도 모른 채,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신의 일을 척척 해냈다. 이 현상을 설명할 때 우리는, 미리 정해진 시간이 도래할 때까지는 그 시간에 어떤 일을 하라는 명령이 그 사람의 정신 속에 <잠재적인 상태in a condition of latency>로 혹은 <무의식적으로unconsciously> 존재했다가 그 시간이 되어 의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최면 상태 속에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의식에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행에 옮겨야할 행동의 표상만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 표상과 관련된 다른 모든 관념들, 즉 명령, 의사의 지시, 최면 상태에 대한 기억 등은 여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실험을 통해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가령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단순한 서술적 차원에서 이제는 <동태적(動態的)>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최면 상태 속에서 명령받은 행동의 경우, 그 행동에 관한 관념이 어떤 특정 순간에 의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관념이 점차 <활동적active>인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의식이 그 관념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그 관념은 행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행동의 실제적인 자극이 의사의 지시였기 때문에 의사의 지시에 관한 관념 또한 활동적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의사의 지시에 관한 관념은 행동에 관한 표상처럼 의식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계속 무의식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따라서 그 관념은 <활동적이면서 무의식적active and unconscious>인 관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최면 후 암시는 실험실의 산물로 인위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피에르 자네가 처음 제기하고 브로이어J. Breuer와 내가 더욱 세밀하게 다듬은 히스테리 현상에 관한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최면 후 암시의 심리학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여 주는 자연적인 사실들, 즉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많이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에 관한 노트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옮김> 중에서 -
이승과저승 생각 : 위와 같은 암시가 활동성을 띠고 피암시자를 암시의 내용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누군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유비적으로 머리에 떠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프로그램 해주면 그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의 유비추리도 가능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또는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위에 나온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뭔가 지시(암시)를 하지 않았을까?
혹시 그랬다면 그 지시의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지금 그 내용을 직접 알아낼 방법은 없을 것이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행태를 보고 추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이다. 개체보존의 욕구와 종족보존의 욕구가 그것으로 먹고 마시고 안전하려는 욕구와 성욕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면 <존재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존재하라.
그런데 이것은 꼭 인간에게만 암시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동식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우리가 보는 인간의 외형적인 삶이 동물과는 매우 다르므로 그들에게는 주지 않은 다른 암시가 하나 더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표시될 수 있는 것일까?
<일생을 통하여 좋은 것을 구하라>
이런 암시가 추가로 있었다 해도 꼭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문화와 문명이 성욕의 승화의 결과라면 승화와 관련된 능력이 무엇이며 어디에 속하는 가가 문제될 것이다.
어쨌든 위 두 가지 지시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각 개인은 평생 동안 판이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같은 지시 내용을 가지고 판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타고난 환경과 각 개인의 성향이 그 원인일 것이다.
여기서 환경은 개인으로서는 손댈 수 없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 변수로써 남는 것은 개인의 성향이다.
이 성향은 플라톤이 말한 바 우리가 죽은 뒤 저승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참된 교양이 관여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리하여 위의 암시를 포함한 원초적인 조건들 중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들여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 인생의 최종적인 결과는 두 가지 암시와 주어진 환경과 개인의 성향이라는 항목이 만든 함숫값이 되지 않을까?
성향의 예를 든다면, 배움을 좋아하는 성향과 놀기를 좋아하는 성향, 감각적인 사물에 이끌려 가능한 한 감각적인 사물에 의탁하여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려는 성향과 그 반대의 성향 등.
지그문트 프로이트 3
이러한 현상의 전 분야에 적용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나는 한 살 반 된 어린 아이가 자신이 고안한 첫 번째 게임을 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빛을 던져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관찰 이상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린아이와 그의 부모들과 몇 주일 동안 한 지붕 아래서 살았기 때문이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행위에 대한 의미를 내가 발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그를 몇 시간 동안 떠나 있어도 결코 울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손수 자신을 먹여 길러줄 뿐만 아니라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어머니에 대해서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착한 어린아이는 이따금씩 자기의 손에 잡히는 작은 물건은 아무것이나 구석이나 침대 밑 등으로 집어던지는 당혹스러운 습관을 갖고 있어서 그의 장난감을 찾거나 그것을 집어 올리는 것은 큰일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런 짓을 하면서 그 아이는 관심과 만족의 표현이 수반된 크고 오래 끄는 <오-오-오-오>소리를 냈다. 그의 어머니와 나는 이것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고 독일어로 fort(가버린)를 의미한다는 생각에 일치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놀이라는 사실과 그가 그의 장난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가게>하는 놀이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날 나는 나의 견해를 확인시켜 주는 한 가지 사건을 관찰했다. 그 아이는 실이 감긴 나무 실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뒤로 늘어뜨려서 마루 위를 끌고 다니는 일이나 그것을 마차 삼아 노는 일은 그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실패의 실을 잡고 대단히 익숙한 솜씨로 그것을 커튼이 쳐진 그의 침대 가장자리로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실패는 그 속으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인상적인 <오-오-오-오>소리를 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실을 잡아당겨 그 실패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고 그것이 다시 나타나자 즐거운 듯 da(거기에)라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라짐과 돌아옴이라는 완벽한 놀이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첫 번째 행위만 목격했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로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그 놀이의 해석은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위대한 문화적 업적, 즉 아무 저항 없이 그의 어머니를 가도록 허용하는 데서 그가 이룩한 본능의 포기(다시 말해서, 본능적 만족의 포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그 물건들이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것을 스스로 연출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 아이는 그의 어머니의 떠나감을 기분 좋은 것, 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으로 느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놀이로서 이 고통스러운 경험의 반복이 어떻게 쾌락원칙과 일치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어머니의 떠나감은 즐겁게 돌아올 것에 대한 필수적 예비조치로서 상연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 놀이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후자, 즉 어머니의 즐거운 귀환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반해서, 첫 번째 행위, 즉 떠나감의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놀이로 무대에 올려졌고, 그것도 전체적 행위보다 더 자주 유쾌한 결말과 함께 상연되었다는 관찰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하나의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편견 없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아이는 다른 동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놀이로 바꿨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처음에 그는 <수동적인> 상황에 있었다. 그는 그 경험에 의해서 압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놀이로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능동적인> 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기억이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었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 와 무관하게 별도로 작용하는 지배 본능에서 연유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그 물건이 <가버린> 상태가 되도록 그것을 던져버리는 것은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어머니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어린아이의 충동 -그의 실제 생활에서는 억압되어 있었던- 을 만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경우 그것은 도전적인 의미, 즉<그렇다면 좋소. 가보시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소. 내가 당신을 멀리 보내 드리오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1년 후, 첫 번째 놀이를 할 때 내가 목격했던 바로 그 아이가 어떤 장난감에 화가 나면 그것을 잡아 마룻바닥에 집어던지면서<전선으로 가라!>고 소리치곤 했다. 그는 그 당시 부재하는 그의 아버지가 <전선에> 가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는커녕 어머니를 혼자서 독점하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 찬부 옮김> 중에서 -
이승과저승 생각 : 프로이트 전집을 읽기 시작한 지 이미 만 5개월이지만 이제 꼭 절반을 읽었을 뿐이다. 이런 속도라면 열 달은 걸려야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전집을 한번 다 읽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그의 논문이 난해하지는 않지만 속도가 늦는 이유는 - 한 페이지 넘기는데 한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 글을 읽는 방식 때문인 것 같다. 그 방식이란 항상, 읽었던 내용 전체와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고 현재 읽는 부분을 전체 속에서 적절히 자리매김해 가면서 진도가 나아가도록 속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글을 읽기 시작할 때, 그리고 중간 중간 필요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그간 읽었던 내용을 대충 요약해 되풀이해보고- 마치 수정란이 계통발생적인 분화를 거듭하듯 - 현재의 내용을 그에 비교하고 삽입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주장이나 가설들 중 어떤 것들은 보편적이고 위대한 다른 사상과 어떤 면에서 부합하는 바가 있는지 나름대로 슬쩍슬쩍 견주어 보는 것이다. 혹시 붓다의 교설 중 어느 부분 밑에 하부구조로 편입될 수 있는지, 성서의 내용 중 어느 부분에 대한 증거나 사례로 사용될 수 있는지, 논어의 내용 중 어느 부분에 대해 대립된 위치를 차지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플라톤 대화편의 특정 부분 내용과 상통하는지 등을 판단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읽는 내용을 내 주변 현실과 경험에 부합시켜 보는 것이다. 집중하여 기억과 연관시켜 보면 위대한 사상은 대체로 경험으로 그 진실성이 확보되고 그로 인해 나도 어느 땐가는 위 어린 아이의 예에서 보듯 현실에 대한 능동성이나 상황 장악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 능력의 부족으로 성과는 그리 흡족하지 못하지만, 아무튼 위와 같은 방식으로 독서를 수양의 한 수단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 얻어지는 부산물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관련되는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것은 역시 관련되는 질문을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물론 글을 쓰는 데도 그런 식의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유에 있어 항상 전체와 근본을 염두에 두려고 하는 것과 어떤 말단의 경험이나 이론이나 주장을 그 전체와 근본에 대해 어떤 식으로 관련시키거나 종속시키거나 계열화하여 자리매김하는 것이 옳은지 따져보는 일이 버릇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되는 것을 모두 그때그때 입 밖에 내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는 아마도 덕이 자신에게 붙지 않을 것이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버리는 꼴이 되어 도량이 커질 새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를 읽는 것은 내 경우 또 다른 면에서 얻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返照하게 된다는 것이며 결코 작지 않은 소득이지만 반면에 작지 않은 압박을 동반한다.
그는 인류가 상속한 정신적 유산 중 알아서는 불쾌해지는 부분을 집중 탐구하고 있고, 그것은 곧바로 읽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인 것이다. 물론 그 불쾌해지는 부분이란 그의 말대로 유아적 욕망의 원시적 잔존물일 뿐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한 그런 것들은 굳이 들추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과 삶에 대해 알기를 원하며 뭔가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의 노작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비전문가로서 그의 주장이나 가설에 토를 단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 될 것이다.
신경증 치료와 관련된 정신분석 이론에 대해서는 전문가라도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연구는 치밀하고 완벽을 지향하면서도 성실한 과학자로서의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후반부 그의 이론을 인류의 삶 전체로 확대한 부분은 어떨까? 성실한 과학자로서의 그의 태도는 분명 칭찬받을만한 장점이겠지만 그 연구로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정신을 규정하려고 할 땐 그것이 결국 한계로 작용하게 되지 않을까?
그의 연구에 경탄하지만 매몰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는 성인들의 말씀이 너무 뚜렷하고 목표 지향적이다.
그러나 한번쯤 그의 가설과 결론들을 지렛대나 발판으로 삼아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비약해 볼 수 있을까? 어쨌든 다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 중요한 몇몇 논문들은 따로 한두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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