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플라톤의 대화편 읽기

플라톤의 대화편 읽기에 관해…….

제 개인적으로는 플라톤의 대화편은 유학에서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가 차지하는 위치를 서양철학에서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라는 현대 철학자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가장 안전한 전반적인 특징적 규정은 그것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도 역시 철학에서 플라톤의 위치를 암시해 주는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플라톤을 읽되 어떤 자세로, 어떤 식으로 읽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제가 플라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간단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읽음으로 해서 나의 정신에 어떤 유익함이 있도록 하려는 거죠.
그것만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가능하면 내가 좀 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구, 이런 마음을 유지하여야 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 다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첫째, 원전에 대한 집착을 너무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고대 희랍어로 써져 있습니다.
원전을 읽으려면 희랍어를 충분히 배워야 하는데 희랍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영역본이나 독일어본 등을 읽으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생각을 할 때 한국어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화편을 읽을 때도 한역본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영어 해독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만약 그가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에 빠졌을 때 그 생각이 한국어로 진행된다면 대화편을 읽을 때도 한역본이 좋다는 말입니다. 물론 영어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은 영역본이 좋은 것으로 됩니다.
원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은 없습니다.
어휘 하나 잘못 이해하면 전체의 내용이 왜곡되는 수도 많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희랍어 원전번역서도 아니고(현재는 국가와 티마이오스, 두 편은 원전역주서가 나와 있지만)영역본이나 독일어 본을 텍스트로 해서 다시 한역한 작품들에 대하여는 신뢰성이 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나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나 연구자들이 읽기에는 아마도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교양을 위하여 읽는다면 그렇게 못 읽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양을 위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제가 위에서 말한, 보다 훌륭한 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된다는 것을 얘기하는 거죠.
논어를 읽고 감명을 받아 나도 될 수 있으면 공자나 안회나 증자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고 열망하여 그 사상을 현재에 나 스스로 되살리려 애쓰게 되었다면 이는 논어를 읽은 공이죠.
대화편의 한역본을 읽고도 위와 같은 심정에 다다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꼭 희랍어 원전이나 영역 본을 읽지 않아도 말씀이죠.
대화편은 철저히 일상어로 되어 있고 몇 명간의 대화체로 되어 있어 그래도 다른 철학서에 비하면 원전이 아닌 번역서를 읽는데 따르는 오류의 부담이 상당히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체로 되어 일단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읽다보면 내용에 연관되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고, 제가 보기에는 원전이나 영역 본을 읽을 때보다는 모국어 본을 읽을 때 그런 사유의 순간이 더 쉽게 찾아오리라고 보는 거죠.
여하튼 타당한 이유 이상으로 한역본을 기피하지 말라는 것이 일단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70년대 초에 플라톤전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있고(지금은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는 없지만 큰 도서관에 가면 있죠), 단행본으로 나온 것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소피스트와 같은 후기 대화편도 오래전에 나와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도서관에 가시면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이고요, 필요한 부분은 복사해서 보면 될 것입니다.
한역본을 권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원전의 문체와 이야기의 흐름이 유려하고 유창하다면 그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번역서가 좋다는 거죠.
플라톤의 작품은 다른 철학서에 비하여 후기의 건조한 문체를 빼면 전체적으로 매우 문학적입니다.
진리에 관여하는 말들이 문학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면 이는 독자들에게는 굉장한 보너스라고 생각되는 거죠.
플라톤 자신이 '대화술을 사용하여 영혼에 말을 심되, 그 말 자체를 심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으매 그 씨앗에서 말들이 마음속에 각각 싹터 그것을 영원히 살게 하고, 또 그 소유자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이라고 하면서 참된 변론술이자 철학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런 말들 속에서도 유머나 여유, 반전 등 문학적 기법으로 화자의 인품을 적절히 드러내 보여주고, 논변 속에서도 대구나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여 깊은 인상과 영감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런 것도 그 분위기에 걸맞게 번역된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원전을 바로 우리말로 번역한 책도 이런 부분에서는 2차 번역서보다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 나와 있는 원전역주서인 국가와 티마이오스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영어로 세련되게 번역된 텍스트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희랍어 원전 번역서보다 더 문장이 유려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화편들은 한두 번 읽어서는 충분히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또 논어나 성경은 평생을 두고 읽는 사람들이 있고, 읽을 때마다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게는 대화편들도 그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일단 대화편을 다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화편이 어렵다고 하는 점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문장 하나하나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요.
다음은 어느 대화편이든지 전체를 읽고 난 후 그 내용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붙잡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 두 번째가 정말로 힘든 점입니다.
문장 하나하나는 이해하는데 그 내용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렬시키기가 쉽지 않은 거죠.
이건 말하자면 컴퓨터의 램이 부족하여 어떤 프로그램 전체를 띄울 수 없는 경우와 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와 같은 곤란함을 극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반복해서 읽는 거죠.
하나의 문장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우선 쉽게 생각해야 됩니다.
쓸데없이 고차원적인 생각을 미리 하지 말고 글자 그대로 쉽게 따라가라는 거죠.
플라톤은 우리에게는 어쩌면 쓸데없이 보이는, 동어반복적인 어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나중에 알고 보면 비교적 간단한데 말이죠.
하지만 그런 어구들을 충실히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성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논증의 과정에서도 읽는 사람에게는 많은 영감이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영감들이 떠오를 경우 바로 입 밖에 내지 않고 잘 펼쳐서 기억의 한구석에 보관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 이것이 요체입니다.

셋째, 해설서를 가급적 읽지 말라는 것입니다.
플라톤 전문가가 대화편의 내용에 대해 언급한 책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콘포드는 저명한 플라톤 연구가인데 그의 글은 나름대로 매우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다시 짚고 있는 글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어떤 면에서는 반대로 탐탁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의 이해가 옳다면, 그런 분명한 이해에 단지 대화편 자체를 통하여 나 자신이 스스로 도달해야 되는 것 같기 때문이죠.
이 스스로 도달한다는 점의 의미와 효용성은 무엇이냐 하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그의 사유방식을 함께 터득한다는 거죠. 그리하여 한걸음 나아가 현실 속에서 내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데 그 사유방식을 적용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제 말이 피상적으로 들릴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제게도 현재는 좀 희미하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대화편 중의 어떤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때 마침 그 부분에 대한 해설이 어딘가에 있어 참고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더 나아가 해설 전부를 읽고 대화편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였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대화편 자체를 읽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거죠.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대화편을 읽는 것을 그림을 보는 것에 비유한다면, 지금 제가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청년들과 얘기를 나누는 그림을 보고 있다고 하죠.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것과 같은 레벨의 그림이라면, 콘포드를 읽는 것은 무슨 그림이냐 하면, 위의 그림에 더하여 그림 속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큼직한 손이 가리키고 있는 또 다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그림에서 손가락은 매우 크고, 정작 소크라테스와 청년들은 한구석에 매우 조그맣게 있어 알아보기조차 어렵게 그려져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 두 장의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이 됩니다.
이와 같은 점은 같은 방식이라면 이런 얘기도 될 것입니다.
"성경의 해설서를 읽는 것보다는 성경 자체를 줄기차게 읽어 뜻을 스스로 통하는 것이 낫다. 또는 논어도 마찬가지로 그 해설서를 읽기보다는 논어자체에 충실한 것이 낫다. 해설서는 시대와 언어,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충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뜻이 있는 자는 읽고 읽어 깨우칠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달리 배울 일이다." 이렇게 말이죠.
하지만 현재로서는 저도 분명히 0,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른 책이나 사람을 통해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사유의 체험이 빠져있기 때문이죠.

넷째,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이나 사유되는 내용을 한 글자도 문자화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굽든 삶든 오로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라는 거죠.
이것은 머리 혹은 정신의 훈련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유의 과정을 글로 옮겨 한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력의 증진이나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해 내거나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거나 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사소한 것은 글로 써서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죠.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사소한 것이냐 하면, 대화편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자문자답은 중요한 것이지만 보름 후에 직장에서 간부회의가 있다는 것이나 퇴근 후에 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거나 다음 주 월요일이 결혼기념일인데 이번에 이를 잊으면 가정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등의 일은 사소한 거죠.
이런 사소한 일을 원만하게 이루어내기 위해 메모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간부회의 보고 준비에 이틀이 소요된다면 회의 이틀 전 날짜에 간부회의라고 적어놓고 매일 한 장씩 넘기는 메모장이 그 날짜에 도달하기까지는 간부회의에 대한 일체의 생각을 잊는 거죠.
퇴근 후의 약속은 오늘 메모장에 적어놓았다가 퇴근 전에, 또는 수시로 메모장을 잠깐씩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이면 약속을 잊어 당황할 일은 없습니다.
결혼기념일도 미리 몇 달 전이라도, 당해일이나 전일 메모장에 표시해 두면 아내에게 바가지 긁힐 일은 없죠. 대신 당일 메모장을 들춰보게 되는 바로 그때까지는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머릿속에 없는 거죠.
이런 사소한 일을 위해서는 문자로 남기는 것이 매우 유리합니다.
하지만 철학하는데 있어서는 그럴 필요가 없죠.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급적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으로는 내용을 가지고 조금 발언해 보겠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주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인데 그렇다고 거기 있는 말 모두가 원래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고, 플라톤 자신의 사상이 가미되어 있지만 그 경계는 좀 모호하고, 내용도 문학적으로 윤색되어 있습니다.
그럼 원래 당시에 생존했던 소크라테스의 실제 언행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냐 하면 그건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크세노폰이라는 사람이 저작을 남겼는데 이 기록이 실존의 소크라테스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는데,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작정한 사람이라면 실은 이 책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 중요한 책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저작 시기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대화편으로 나뉘는데 초기편이 대체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담고 있고 중기 및 후기 편은 플라톤 자신의 사상이 더 많이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위 대화편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중에는 읽다보면 더욱 흥미 있고 애착이 가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편은 양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플라톤사상의 종합 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대화편들도 읽어보면 그에 못지않게 흥미롭죠.
그리고 다른 대화편들을 읽지 않고서는 국가편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 중기 대화편은 생동감이 넘치고 문학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반면 후기대화편들은 보다 논리적, 기계적, 정합적인 느낌이 들고 문체가 건조하죠.
이 책들을 놓고 제가 권유하고 싶은 독서 순서 및 관심도는 이렇습니다.
우선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하면, 플라톤식 사유방법을 그대로 전수받고 더 나아가 그 방식대로 실제 내 주변의 현실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가능하면 세상살이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는 여지를 잃고 싶지 않거나 나아가 더욱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위해서 어떤 식으로 읽는 것이 좋으냐고 할 때,
먼저 크세노폰의 작품과 플라톤의 초기대화편들을 가장 중요시해야 합니다.
크세노폰의 작품은 어떻게 현실을 살아가야하는가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그대로 따라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문제죠.
아마 플라톤의 작품들이 그대로 따라하는데 우회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초기작품은 소크라테스변명, 크리톤, 프로타고라스, 뤼시스, 카르미데스, 에우튀프론, 라케스, 이온, 국가1, 에우튀데모스, 히피아스, 메논 등이고,
중기작품은 국가 2-10권,2-10권, 향연, 파이드로스, 파이돈, 크라틸로스, 테아이테토스, 고르기아스, 등이며, 후기 작품은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정치가,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법률 등인데 분류는 약간 개연적입니다.
여기서 읽는 대상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1. 크세노폰의
2. 초기대화편
3. 중기대화편
4. 후기대화편으로
위의 편들을 각각 읽는 횟수 또는 관심을 두어야 할 정도를 비례로 표시하면 위로부터 4:3:2:1이 적당하다는 거죠.
이렇게 중요도를 정해놓고 그대로 읽었을 때 무엇이 좋으냐 하면, 사유의 기초가 단단해지고 또 오만한 성격의 사람은 겸양과 온유함을 기를 수 있는가 하면, 본래 그런 좋은 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그 점을 잃지 않고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전문용어를 섞어 매우 어려운 사변을 가지고 존재와 공간, 시간, 이성, 인식, 신 등에 대해 골머리를 썩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과연 인격적으로 올바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가는 길인가 하는 데는 제가 보기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자신에게나, 누구에게나 타일러도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올바르고 덕이 있는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말이나 사유가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그 말이나 사유는 대체 어떤 형태이며, 어떤 내용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주려는 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입니다.
제가 보기에 대화편 독서의 핵심은 이데아를 얼마나 체험적으로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자질과 관심과 시간이 걸려있는 일이죠.
이상은 저의 독서체험에서 느낀 바를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썼습니다.
체험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신이 위에서 말한 만큼 올바르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산 밑에 가까이 가서 보니 봉우리들이 어느 쪽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좀 더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아마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의미전달을 확실히 하기 위해 좀 강한 톤으로 쓴 곳이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생경하고, 독단적이며, 언짢게 생각되는 부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보아주시기 바라며, 내용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면 참고하시고, 아니라면 그저 게시판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그렇고 그런 글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9장  (1) 2023.07.12
논어 - 달항당인왈  (1) 2023.07.03
소크라테스의 면모 1  (1) 2023.06.30
마하꼿티따 경  (0) 2023.06.25
국가 1권 케팔로스 옹  (0) 202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