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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오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신약성서 로마서 96~26-

 

바람 생각 : 신약성서는 구약 중 창세기, 출애굽기,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등과 함께 예전에 여러 번 읽었는데, 로마서가 철학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어 특히 영감을 받았다.

위 내용은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프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의 답변을 논박하는 부분을 연상케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게 경건함이란 무엇이냐고 묻고, 에우튀프론은 그에 대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경건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변을 수긍하지 않고 운반되는 것운반하기 때문에 운반되는 것으로 되는 것의 차이를 들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경건함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신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경건함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 로마서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이어진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요, 강퍅하게 될 만한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강퍅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또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위 구절을 빌미로 (강퍅하게 되는) 인간의 자유의지 여부와 그를 강퍅하다는 이유로 힐난할 수 있는지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만약 의심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면 학자는 이런 논란에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信者라면 내가 보기에 이런 논란을 일으키거나 그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성서의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한데, 위 구절들을 이유로 사람의 자유의지나 책임 소재 등을 따질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미 관련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는 아니지만 이 구절을 읽으며 반응하게 된 것이 난 어떤 계열에 속하는 인간일까 하는, 조금은 두려움이 섞인 의문이었다.

난 결국 강퍅하게 되는 인간의 줄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미래의 일을 어찌 재단할 수 있으랴! 좋은 말씀을 새기면 그만한 이로움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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