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포스트 국가 24의 주석 57)에서 언급한 다음 부분에 대해 검토해 볼 점이 있다.
‘einai’에는 두 가지 중요한 뜻이 있다. 그 하나는 ‘있다’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이)다’의 뜻이다.
위 두 가지 의미의 구분이 있어야 하긴 하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그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치도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어떤 관점이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항상 ( )하게 있는 것이지 그냥 있기만 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안에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어떤 모습으로 등에 해당하는 속성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즉,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와 ‘...(이)다’의 의미는 이론과 관습적으로만 구분될 뿐 실제 존재론적으로는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나무가 아름답다. → 나무가 (아름다운 것으로) 있다.
그는 우울하다. → 그가 (우울한 상태로) 있다.
그의 행동은 올바르다. → 그의 행동이 (올바른 것으로) 있다.
위에서 각각의 좌, 우는 같다.
어떤 의미에서 같은가?
위 나무에 있어서는 있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있다는 것과 우울하다는 것이, 그의 행동에 있어서는 있다는 것과 올바르다는 것이 실제 그(것)를 대하는 특정인에게 있어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물은 항상 (어떠어떠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실제로 현실에서 우리가 그 각각을 대할 때 나름대로 어떤 관점이나 방침이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면 ( )안에 들어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보자.
누군가 강력하게 말한다.
일체의 속성이 없이 그냥 ‘나무가 있다’라고.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위 문장 가운데 ( )가 있다고 말한다. 단지 그 안에 들어갈 속성이 아직 드러나거나 한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주장은 단지 ‘나무가 있다’이지만 그에 대한 내 주장은 ‘나무가 ( )로, 혹은 ( )하게, 또는 ( )한 상태로 있다’는 것이며, ( )은 아직 분명치 않거나 확정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만약 ( )안을 억지로 채워 본다면 (대기하는 자세로),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거부되기 위하여), (의미가 되기 위하여), (소가 닭 보듯이), (무덤덤하게), (쓸모 있는 것으로), (해석을 기다리며), (다시 파악되기 위하여) 등이 될 수 있다. 최초에 그것에 나무라고 이름을 붙인 것부터 그것이 (어떠어떠하게, 즉 나무처럼)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가 강력하게 ‘단지 나무가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나무는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 언명은 무의미하다.
이런 관점이 어디에 유용한가?
세계와 사물을 流動하는 존재로써 일원론적으로 파악하게 해 준다..
세계와 사물은 그냥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떠어떠하게 있으면서 그를 대하는 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상태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꽃은 그것을 보는 관찰자에게 그 시간 하나의(한 장면의) 아름다운 꽃으로 있는 것이다. 그것을 ‘꽃이 있는데 그 꽃이 아름답다‘라고 있음과 아름다움을 분리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그냥 ’꽃이 있다‘라고 말할 경우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형용사들(아름다운, 빨간, 신선한, 귀여운, 애처로운 등등)의 상태로 있지 않다는 것뿐이지 분명치 않고 확정되지 않은 다른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 순간 그러한 사물들 – 그리고 사람들 - 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삶에 있어 우리 자신의 과제가 된다.
항상 어떠어떠한 상태로 생동하면서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런 점에 주목하면 einai에 있어 ‘–있다’와 ‘-(이)다’의 구분은 반드시 필요치도 않고 오히려 그것을 굳이 구분하려는 시도가 번잡하고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 현실적으로 있음(존재, 있는 것 자체)에 참여하여 있는 것으로 되는 사물들은 항상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