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랜만에 아내와 관악산에 올랐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일요일마다 혼자 아니면 아내와 북한산을 찾았는데, 지난해 봄에 이곳 변두리로 발령받아 와서 두 집 살림을 차린 다음부터는 주말부부가 되어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아 줄곧 산행을 하지 못했었다. 아직 어두운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울대 입구에서 연주암을 향해 걷는다. 북한산에서는 항상 나보다 뒤처져서 같이 가요를 연발하던 그녀가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앞서서 리드한다. 그동안 처제와 함께 관악산을 자주 왔었다더니…….연주암에 들어서니 날이 다 밝았다. 절에도 등산객들로 제법 붐빈다. 등산로의 돌계단에 올라서자마자 법당을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신심 깊은 사람들. 등산객들에게 커피를 끓여주는 아줌마들. 스피커를 통해 알맞은 크기로 울려 나오는 청량한 염불소리. 도가 깊은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가 전에부터도 듣기 좋았지만 오늘은 더욱 그윽하다. 염불은 곡조가 없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완만한 높낮이가 있다. 높진 않으나 폭이 넓은 파도가 느리게 넘실대듯 끊임없이 나지막하게 오르내리는 고고한 소리. 나는 그 단순하게 반복되는 운율이 좋다. 그것은 갑작스런 변화나 또는 여럿의 변화가 한꺼번에 닥쳐올 것이라는 우려나 기대를 거의 가지지 않게 한다. 비틀즈나 디퍼플이나 킹 크림슨도 좋지만 난 염불소리가 더 좋다. 염불의 내용은 둘째로 하고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나지막하면서도 분명한, 폭이 넓으면서도 높낮이가 얕은 놀이 유장하게 흘러가면서 만들어 내는 곡조가 좋다. 아내가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 등산객들을 위해 아침과 점심을 지어주는데 돈은 받지 않고 그냥 준다고 한다. 입구에 불전함이 있는데 식사를 하고 나오다 돈을 거기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그만이다. 배추를 넣은 된장국에 밥을 말고 그 위에 단무지를 몇 조각 얹어 준다. 새벽에 4km 산길을 걸은 뒤라 그 맛을 다른데 비할 수 없다. 위장이 비면 우리의 욕망은 단지 그 위장을 채울만한 음식물을 원하는 것일 뿐, 결코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떠오른다. 본성은 원래 단순하지만 없어도 좋을 것이 굳이 붙어있는 바람에 복잡해진 것일까. 식사를 마치고 절 구경을 하고 다시 능선을 따라 걷다 안양 유원지 쪽으로 내려간다. 앞서가는 아내에게 느닷없는 얘길 했다. “난 더 가난해지고 싶은데..”아내가 뒤돌아 빤히 보며 대답한다. “우리 지금 가난해요.” “그런가?”아주 가끔 실없는 얘길 하는 나를 잘 아는 아내는 별로 이상한 기색도 아니다. 잘 판단이 안 서는데, 생각해 보면 아주 가난한 편은 아니고, 잘 사는 편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괜찮게 사는 것 같은데…….아마 아내는 결혼하면서 가져온 17년 된 장롱, 벼룩시장에서 산 중고 구형 로터리식TV, 동서 네가 쓰다가 우리 쓰라고 준 절전형 냉장고, 역시 벼룩시장에서 산 중고 386 컴퓨터, 전용면적이 10평 남짓한 작은 집, 이런 것들 속에서 살다보니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그렇지만 난 아내가 돈 때문에 불평하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돈을 적게 벌어다 준다고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적도 없다. 매월 내가 가져다주는 돈은 일정하며 그 이상은 돈을 더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이 내게 전혀 없다는 것을 아내는 잘 알고 있다. 요 몇 년은 아내도 집 근처 조그만 공장에 나가 월 40만 원인가를 받고 일한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몇 푼이라도 벌어서 아이들 과일이라도 더 사 먹일 수 있어서 좋고, 자신도 집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낫다면서. 난 결혼을 일찍 한 편이었는데 결혼 후에 온천이 있는 한적한 시골에서 근무하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만 조직사회에 적응을 못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가치가 미미하거나 전혀 불필요한 일에 대해, 또는 천박하게까지 보이는 일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보통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모나지 않게 사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이라니! 나는 아내에게 순진하게 그렇다고 얘기했다. 직장 다니기 싫다고……. 얼마간 얘기하다 맥없이 바라보는 나에게 나이 어리고 순박한 시골처녀였던 그녀, 배운 것도 별로 없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쥐어짜듯 외친다. “자긴 현실도피자야…….!” 그 말이 비수가 되고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깊이 박혔도다. 현실도피자라…….내가? 그로부터 지금까지는 내가 현실도피자가 아니라는 것을 최소한으로 아내에게 입증하였다. 또한 그로부터 10년간을 일상적인 다수에 끼지 않으면 현실도피자나 또는 그와 유사한 사람이 되는지에 관해 잊지 않고 되새김질하였다.―.― 다수에 끼어 흘러갈 때, 창랑의 물이 맑든 흐리든 그와 함께 흘러갈 때, 대체 내 영혼은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 영혼이 어디를 향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좀 더 쉽게 얘기해 보게. -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지. 즉, 이 땅 위에서 내가 무엇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고 무엇에 대하여 또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건가를 묻는 걸세. 송신탑을 밑으로 돌아 능선을 타고 간다. 조금 가다 나니 이내 내리막길이다. 내려가다 보니 오면서 아내가 말한 절이 보인다. 위치가 후미져서 그런지 연주암보다는 훨씬 조촐하고 사람도 별로 없다. 아내가 다니는 공장에 한 뚱뚱한 아줌마가 자식이 대학에 붙게 해 달라고 매일 쌀을 한 말씩 등에 지고 백일 간을 이 절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올라오다 쉴 때도 쌀을 땅에 내려놓으면 정성이 새나간다 하여 등에 진채로 앉아 쉬었다고 한다. - 그래서 붙었나? - 아니요, 떨어져서어 전문대학 갔대. 점도 보러 다녔는데 다 효과가 없었고…….우리 애도 점 한번 보까? - 무슨 점? - 고등학생도 됐으니까 대학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점은 그럴 때 보는 게 아니다. 대학에 가거나 국회의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을 때 보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인을 아내로 얻거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부자가 되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일종의 광기이다.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것이 결국 그에게 좋은 일이 될지, 또는 국회의원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그에게 좋은 일이 될지, 그 반대가 될지는 오로지 신들만이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점을 치려면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 붙을까 떨어질까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 또는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 좋은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에 관해서 신께 물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나 위와 같은 일종의 광기를 전제로 하여 신께 물어보는 것은 경건치 못한 일이라는 말이지. 또한 점을 칠 때는 신의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를 찾아 한번으로 그쳐야 한다고 들었다. 아내에게 대강 위처럼 설명하고 새옹지마의 고사를 더하여 들려주었다. 잠시 생각하던 아내가 알아들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그녀는 점을 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진리에 대해 두루 통찰할 수 있고 그 진리를 잊히지 않는 불멸의 것으로써 영혼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나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희망) 그때 난 진정한 의미에서 내 몫을 다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알맞은 상대에게 그 얘기를 전해줄 수도 있다. 그가 만약 내 말을 듣고 그의 생각을 바꾼다면 난 내 몫의 인생 외에 2배나 혹은 3배의 실적으로도 살아가는 셈이 될 것이다. 2배나 3배는 얼마나 많은 것인가? 4000만 인구 중에 몇십 퍼센트나 또는 보다 많은 수의 보다 나은 행복을 이루는데 내가 기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책할 일이란 나에게 없다. 이상은 희망사항이다. 나는 우선 나에게 좋은 것을 찾고 싶다. 나에게 좋은 것을 찾는 작업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 후에 그것이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거의 다 내려오니 여기가 서울 농대 실습 수목원이라고 한다. 나무마다 이름이 팻말에 쓰여 정리되어 있다. 아내가 또 묻는다.― 자긴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뭐 되고 싶어? 난 꽃이 되고 싶은데, 한철 피었다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지는 꽃. - 흠……. 자기다운 생각이군. 난 다시 나와야 한다면 지혜를 갖춘 자로 나고 싶다.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온전한 지혜를 구하는 자로 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새가 되고 싶다. 높이 나는 새.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오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막내가 쟁반국수를 먹고 싶어 하여 시켜서 네 식구가 먹었다. 내가 현실도피자인가에 대해서는 잠정적으로 결론이 나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자로서, 꿈속에서도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는 자로서. 명을 따르며 때를 기다리는 자로서.
philebus : 96년 하이텔 너른 터에서 지식인 논쟁 중에 올렸던 글입니다. 먼저 올렸던 '지식인과 개'를 읽고 누군가 다른 동료에게 가슴이 뜨거운 글을 올려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읽고, 그럼 이런 건 어떨는지…….하는 마음으로 올려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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