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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화택규 火澤睽

 

위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위치한 식당의 앞마당에 있는 나무다.

마치 莊子無用之用을 연상시키는 듯, 수령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지만 나무 밑동부터 여러 갈래로 갈려 나와 큰 나무이면서도 마치 다른 줄기로 촘촘한 관목처럼 목재로는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일찌감치 베이지 않고 제 수명을 다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마당의 넓이는 대강 700정도 되는데 주변은 전부 양지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지만 마당만은 그늘이라 항상 주위로부터 바람이 알맞게 불어온다.

요즘 같은 한 여름, 식당에서 보신탕이나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고 여기 나무 밑에 나와 앉으면 배와 마음이 모두 느긋한 포만감에 젖게 된다.

이곳엔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C와 가끔 함께 점심을 먹고 쉬다 가는데 최근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근처 절에 가 등을 달면서 나무 佛法이라는 기원문을 적어 넣었다. “나무란 귀의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내겐 특정 종교가 없었다.

어딘가 등록을 하고 다니는 곳이 없는 것이다.

단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일한 종교 행위이고, 유가의 경전 중 논어와 주역을 좋아하는 정도다.

초파일이라고 절을 찾아 등을 단 것도 처음인데 그것은 초기불전(4부 니까야)을 읽으면서 마음이 움직인 탓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가끔 주역 점을 쳐 내 상황을 살펴보곤 하던 터라 이때도 점을 쳐 볼 생각이 들었다.

불가에 귀의한다면서 점을 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내 생활을 따져본다면 빈약하나마 역시 儒家의 전통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감탄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요 뿌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유가에서 불가로 근본을 바꾼다고 할 수도 있는 이 상황을 주역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괘를 제시할까?

점을 쳐서 화택규(火澤睽) 괘를 얻었는데 4효가 변하였다. 점사는,

 

九四 睽孤 遇元夫 交孚 厲无咎

九四는 어긋남에 외롭다. 장부를 만난다. 믿음으로 사귄다.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象曰 交孚无咎 志行也

상에서 말하길 믿음으로 사귀어 허물이 없다는 것은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火澤睽는 전체적으로 불과 못이 함께 있지만 각자의 길을 고집하여 어긋나는 꼴이라 占者에게 그다지 좋은 괘상은 아니다.

그러나 단()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天地睽而其事同也 男女睽而其志通也

萬物睽而其事類也 睽之時用大矣哉

천지는 어긋나도 그 일은 같으며, 남녀가 어긋나도 그 뜻은 통하며,

만물이 어긋나도 그 일이 같으니, 규의 사용하는 때가 크도다.

 

이것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으니 그 용도가 크다는 뜻이다.

점사로 돌아가 살펴보면, 이번에도 점은 내 상황과 잘 맞았다.

점사에서 元夫란 요즘 들어서는 한 달에 한두 번 위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는 C를 말한다.

C10여 년 전부터 몇 년간 LCD 라인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노동자다.

그는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평생을 힘을 쓰는 생산직이나 현장 노무자로 일해 왔다.

그는 혼자 살며 말이 거의 없다.

밥을 먹고 두세 시간 나무 밑에서 쉬거나 졸아도 거의 말이 없다.

말을 해도 일자리에 관한 말이 전부다.

일을 해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고, 부르지도 않고, 언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고, 자치단체에서 하는 희망근로마저 신청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그가 함께 일했던 기억을 꺼내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몇 마디 이야기한다.

그는 특별한 취미도 없다.

전화를 해서 지금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동네를 산책하든지 TV를 본다고 한다.

술을 마시긴 하지만 과음하지는 않고 먼저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병을 얻어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담배도 끊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초저녁에 잠들고 새벽 3-4시에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밥값을 내가 조금 더 부담하려 해도 그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 서로 교대로 한 번씩 내는 걸 고수한다.

그는 일할 때 그럴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다 싶으면 지적도 곧잘 했다.

나도 그에게서 한 번 지적받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 걸 한 번 봤는데, 그 때문에 그는 한참 아래인 젊은이와 시비가 붙을 뻔도 하였다.

언젠가 내가 평생 현장 노동하면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그동안 몸 건사는 잘했다고 칭찬하자 그는 엷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배운 것은 없으나 근본은 두텁고 훌륭하다.

 

다시 점사에서,

厲无咎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는 것은 그와의 관계에서도 통할 수 있는 말이지만, 유가의 경전과 플라톤을 읽으며 잘 있다가 갑자기 나무 佛法이라며 불가로 뜻을 옮긴 것과도 관련이 있다.

내 생각엔 불가로 옮겼어도 그것을 단지 마음속의 일로 축약하여 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는 걸로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절에 가 법당의 불상에 절을 하고, 뭔가 예식을 행하고, 108배와 같은 걸 했다면 아마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믿음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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