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잠언 1
2001년도에 어느 홈페이지에서 주고받은 내용 중 일부입니다.
바람(philebus)
답변에 감사드리고요,
초보자로서 자꾸 질문하기도 뭣하니 이 홈페이지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고 생각나는 점을 소감과 의문의 혼합 형태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냥 입을 봉하라는 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지어다'라고 말하거나 '사유에 한계를 그으라거나 혹은 사유가 아니라면, 사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현실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누군가와 대론하면서, 또는 혼자 자문자답으로라도 자신이나 상대의 사유에 한계를 그어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잠언은 역사 이래로부터 바로 현시점까지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철저한 검토와 사유를 끝마친 사람에게 졸업장을 수여하는 말처럼 들리고, 그 이하 철학의 초보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는 거죠.
자고로 그렇게 스스로 사유의 한계를 그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단지 설명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의 뱃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모조리 꺼내게 닦달하여 차례대로 그 말들이 무의미하거나 모순됨을 밝혀서 상대로 하여금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더 이상 못 견디고 도망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처럼 말하는 것과 그 말대로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죠.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아마 철학의 역사를 통째로 꿰고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고 나서 한 말일 테니 그 말이 자신에게는 합당하다고 해야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철학에는 그의 잠언이 어떤 영향을 가져다줄까요?
아마도 누군가 위의 잠언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사유를 미리 포기한다면 그는 현명하다고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소크라테스에게 반박당한 사람만큼 깨끗해지느냐 하면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의 열정이나 욕구와 편견 등은 직접적인 지시의 말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어린아이에게 직접적인 지시조의 훈계가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침묵하라고 말하는 것과 침묵시키는 것은 별개이며, 실제로 개개인이 사유의 한계를 긋는 작업은 혼자 하든 누가 도와주든 특별한 기술과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작업이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간주하여 입 밖에 내는 좋지 않은 버릇과 영원히 결별하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사람의 경우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진실로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한 가지를 발견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깨닫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거죠.
이런 불만은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의 설명 철학의 전통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점에서 반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도 역시 입을 열어 허공에 대고 말한 이상 그런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거죠.
파르메니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선이나 미와 같은 것의 정의를 위해서, 또는 이데아론의 문제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더욱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제논이 그에 맞장구치며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이 모든 영역을 두루 헤매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사유해 보지 않고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안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요는 일단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요긴한 말인가라는 데 의문이 있다는 얘기지만, 이건 아마 그에게 하소연할 문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의 잠언을 증명한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그의 말이 자체로 옳으냐 그르냐 하는 판단은 유보해야 되겠습니다.
제게 그럴만한 능력은 아직 없으니까…….
다음은 한계의 양 측면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언어 밖의 다른 부분은 단지 무의미하다는데 대해서 약간 이의를 제기하자면,
사유는 사유의 내용 외에 그 사유가 지향하는 대상이 있다고 하며, 따라서 우리가 사유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그 부분을 관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와 제논, 그리고 다른 구경꾼들에게 자신이 말한 엄격한 철학의 훈련을 직접 시연해서 보여주게 되는데요,(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그 내용은 아시겠지만 '하나가 존재한다면',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는 가정을 놓고 웬만한 단편소설 1권 분량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으로, 하나와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해 온갖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는 거죠.
논의에 따라, 하나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의 양상에 의해 온갖 결과가 긍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하는데, 말하자면 사유의 이행 도중 그 사유의 내용 너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 비트겐슈타인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것을 힐끗힐끗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왜냐하면, 내용상으로는 모든 것이 긍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함으로써 하나의 존재에 대해 결론으로써 모순 없이 말할만한 것이 없지만, 그러한 사유를 듣고 난 뒤와 듣기 전을 비교하면 마음 상태가 다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존재에 대해 전보다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마음이든 아니면 전보다 더욱 모르게 되었으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든 그건 상관하지 않기로 하고요.
단, 실제적인 결론이 정리된 형태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 사유를 통하여 사유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다고 하면 언어 밖의 다른 부분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단정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얘기죠.
이건 어느 정도 체험이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되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잠언에 비하면 좀 불분명하고 촌스런 말이라고 여겨지긴 합니다.
하여튼 뭔가가 있지만, 그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고, 뭔가가 있다든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있다는 말을 그가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다시 따져볼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의 존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중에는 훌륭히 말해진 것도 있고 더러는 보다 못하게 말해진 것도 있다는 생각이 세계의 존재에 대해 말해진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하는 주장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거죠.
또한 그의 앞뒤 말을 모두 생략하고 단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침묵할 지어다 라는 말만 놓고 본다면, 그 말할 수 없는 것이란 하나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니까요.
나는 본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비트겐슈타인 덕분에 한마디 하게 되는 거죠.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라고요..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논법에 따라 하나가 있다면 그것의 운동과 정지, 전체와 부분에 따른 여럿의 생성, 자신과 타자에 대한 동일함과 다름, 대와 소, 늙어감과 젊어짐 등 모든 현상이 가능하게도 되고, 불가능하게도 되고요. 따라서 그 모든 현상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도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비유나 은유로 말하는 것은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파르메니데스가 그들의 단편에서 세계에 대해서나 있는 것에 대해 말한 것들과 같은 내용이나 또 붇다나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선이나 덕이나 지혜에 대해 제자들에게 얘기한 것들 말이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말을 통하여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말할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곳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비트겐슈타인 관련 내용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썼습니다.
대가의 사상에 대해 초보자가 그 책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매우 가소로운 일이겠죠.
하지만 생각난 것을 입 밖에 내야 양의 방향으로든, 음의 방향으로든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에 다시 감사드리고요,
좀 난삽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만 안녕히…….
비트겐슈타인의 잠언 2
바람(philebus)
성의 있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의견을 정리하여 4가지로 보여주신 것 중 (1) 비트겐슈타인이 침묵하라고 이야기한 주장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서로 구분된다. 라는 내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다른 관점에서 보충해 보고자 합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해 온갖 문헌을 뒤져 알아보고 그가 당시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그러한 언행이 철학사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 등을 정확히 추측해 낸다고 하는 것과 소크라테스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신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은 지금 말하는 이런 차이점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이 예상외로 쉽지 않고, 마치 중간고사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자신이 외우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해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힘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저도 가끔 혼란스러워지므로 우선 제 자신에 대해 그러한 개념을 분명히 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현재 소크라테스와 동일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는 공원이나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컴을 통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인터넷을 통하여 말을 주고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때 그 말의 소재와 내용을 유추해 보면, 2400년 전의 그는 주로 의사, 항해사, 선장, 제화공, 실 잣는 사람, 피리 꾼, 군인, 양 치는 일, 의술, 등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사건을 예로 들며 그에 얽혀있는 정의와 부정을 고구하고, 인간으로서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구하려 애써야 하는지를 상대방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것처럼 현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마도 대화에 사용되는 말속에는 예전의 것들에 더하여 컴퓨터 조작자, TV의 화면에 보이는 것들, 로켓과 인공위성, 다이어트, 현대 청년들의 생각과 놀이, 자본주의적인 모든 생활방식 등 현대 일상인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을 예로 들며 논의를 이끌어 갈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상대방이 어떤 편견이나 무지에 사로 잡혀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뜯어내기 위해 질문을 퍼붓겠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대의 소크라테스가 (2400년 전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지금의 독특한 생활환경과 그 각각의 사물과 사건들을 어떤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예시로 그때그때 사용하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로서는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부정인가를, 허공에 대고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특별한 개인을 관찰하고, 그에 합당한 말들을 주고받겠지만 그 말들에 쓰이는 소재들을 그답게 제대로 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바로 그 점이 현대의 소크라테스가 예전의 소크라테스와 동일한 정신의 소유자인가 아닌가라는 구분을 할 수 있는 외적인 기준의 하나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는 거죠.
그에 반하여 이번에는 소크라테스를 연구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서재에 앉아 인터넷으로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구하고, 책을 읽고, 소크라테스가 2400년 전에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언행을 한 것일까에 대해 나름대로 궁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도 벌이겠지만, 그 내용과 소재는 어디까지나 예전 소크라테스의 언행과 철학사적으로 그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의 사상에 머물러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를 연구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이란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일단 양자가 생각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이죠.
현대의 소크라테스 머릿속에는 아마 아침에 자신이 만났던 사람,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 내용, 또 어제저녁 우연히 본 TV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 자신이 읽은 신문과 책의 내용에 대한 사유 및 분별 등이 들어있겠지만 소크라테스 연구가의 머릿속에는 소크라테스가 예전에 한 것으로 전해지는 말, 그 말의 의미에 대한 판단 등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는 사물에 대한 定義라든가, 귀납법을 확립했다든가 독특한 문답법을 사용했다든가, 죽을 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제자)들을 위로했는데 막상 같이 있던 친구들은 그의 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던가 하는 내용들이 자신이 새로 창조해 낸 어휘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얘기죠.
즉, 두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환경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있는데, 그 각각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크게 다르다면 그 둘은 그만큼 크게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를 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연구가는 철학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설사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소크라테스와는 전혀 다른 철학자가 되는 거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합니다.
소크라테스 연구가를 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아니거나 다른 철학자가 되는 거겠죠.
얼핏 생각하면 두 사람은 최소한 유사하게도 보일 것 같지만 저로서는 왠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 연구가를 배척한다는 말은 아니고 둘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은 것뿐으로, 요는 현대에서 누군가 소크라테스를 흠모하여 가능한 그와 꼭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을 참조하여야겠지만, 그가 도중에 중단하지 않고 계속 그 길로 나아간다면, 중간지점 어디에선가 속된 말로 은총이라도 내리지 않는 이상,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일한 인물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소크라테스 연구가와 같은 인물이 된다는 거죠.
이상의 얘기는 비단 소크라테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거의 모든 경우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면, 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에 대해 위와 같은 요소가 다분히 섞여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의 경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다르고 또 그 후대의 사람들이 역시 앞의 두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람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면 생각도 다르다는 점을 넘어서 우리가 그들 모두에 대해 같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취급하고 있지만, 실은 동일한 명칭을 주는 것이 좀 한계를 넘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순전히 저의 주관이지만,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소크라테스는 덕의 소지자요, 그 사용자라고 생각되지만 플라톤은 단지 그 덕의 관조자라고 생각되는 거죠.
플라톤은 자신이 말만 앞세우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두려워 현실정치에 참여하려고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인물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전자가 후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아리토텔레스와 그 후대 사람들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 연구가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을 연구하기보다 자신이 직접 온갖 개별학문의 시조가 되긴 했지만 내용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철학하는 자와 그가 하는 철학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독립된 것으로 되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거죠. 학문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이 점을 크게 대상과 용어의 면에서 살펴보면, 일단 사유의 대상이 형이상학적인 이데아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땅에 있는 것들로 바뀌었고 그리하여 그 사유의 결과 철학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역시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고요.
비록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한편으로 이어갔다 하더라도 그 방식이 플라톤과는 매우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쪽에서도 역시 철학자는 다른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밖에 없게 되죠.
용어의 면에서 보면 플라톤은 철저한 일상어와 대화체를 사용하므로 써 철학하는 사람이 사유의 결과와 자신의 일상행위를 큰 무리 없이 연결시킬 수 있게 되어 있죠.
말하자면, 그의 대화편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동조하는 마음이 있다면 행위가 그에 뒤따라 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발심하게끔 한다고 할까요.
이것은 철학하는 자가 일상어와 일상인의 행위를 주로 발판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과 대화체라는 서술방식에 따라 현실 속에서 하나의 개인으로써 현실감을 잃지 않고 사유에 참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꽤 중요한 일인 양 새로운 용어를 이것저것 만들어냄으로써 일단 철학이라는 강물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는데, 그렇게 용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는 일종의 창조자가 되고, 바야흐로 전지전능한 연구가의 입장에 들어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경우는 사유의 결과가 자신에게로 귀착되어 행동의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용어 창조자의 경우는 그렇게 되기가 어려운 것이, 철학하는 자가 낯선 용어에 의해 철학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거죠.
그리하여 철학의 결과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대체로 그는 전지한 주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들끼리 그들의 용어로 논란을 이어가게 됩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형태의 철학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그렇더라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에까지 그의 말이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말씀 중에 다음 부분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가령 우리가 자유라고 형이상학적 논증하면서 과학의 결정론을 피해 가는 세련된 논증을 제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가 자유임을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진의입니다.'
저는 다른 철학카페에서 자유 또는 자유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담배를 지금 피울까, 아니면 30분 후에 피울까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 자유죠,
즉, 3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담배 피울 시기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고, 담배 피울 시각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서죠.
그러나 내가 담배를 이 순간부터 확실하게 끊어버릴까 아니면 계속 피울까 하는 결정과 그 실천은 되는 경우가 있고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담배를 끊길 원하지만 흡연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경우는 담배를 끊을 자유가 내게 없는 거라는 얘기죠.
어떤 계기로 끊겠다는 의지가 강해져서 실제로 끊는 데 성공했을 경우 나는 금연에 관하여 자유를 되찾은 거죠.
이젠 담배를 피우는 것과 피우지 않는 것이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담배를 지금 피우느냐 30분 후에 피우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는 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종류의 자유의지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애매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한 종류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내게 별다른 가치가 없는 거죠.
반면에 담배를 끊을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고, 담배를 끊는 것이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자유의지는 내게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자유의지는 나로 하여금 보다 좋은 것을 향하도록 하는 힘이 되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건강, 쾌적함, 내게도 능력이 있다는 자의식의 고양, 주변사람들로부터 신뢰의 증진 등, 담배를 피울 때와 비교해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위와 같은 예는 그 밖에도 지나친 술이나 도박 등에도 적용할 수 있을 테지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저로서는 자유나 자유의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군요.
'그가 현재보다 더 좋은 상태로 옮겨갈 수 있는 여지 또는 능력'이라고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인간에게 있어 좋은 상태라거나 좋은 것이라거나 좋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인간은 그러한 좋은 상태로 옮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치해도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은 말씀하신 세련된 형이상학적 논증은 아니지만 다분히 듣는 이의 의표를 찌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제로 듣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의 발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그 카페에서 별다른 찬성도 반박도 얻어듣지 못했지만 이런 말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게 들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막연한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한다면 자유란 형이상학적 개념은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말해서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죠.
소득의 양적인 대소는 불문하고요.
하려고만 들면 위의 말에 살을 더 붙일 수도 있고 일문일답식으로 스텝을 밟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독단적으로 내세울 수는 없고, 반박의 여지도 있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말할 수 없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에 따라 귀담아듣는 사람도 있을 거란 얘기고, 그렇다면 저로서는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또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누구라도…….)
철학적인 논증이 꼭 과학적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합리적이면 된다고 저는 생각하지만(이 경우 합리란 욕망의 시녀로서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하는 그런 합리는 아니고) 누구의 합리든 그 합리에 모든 이가 다 손을 들어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고로 과학적 언명과 같이 모든 이에게 명료하게 참과 거짓이 드러나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포함해서 성찰과 사유와 문답에 의해 한층 인격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다시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죠.
그리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실천하기에는 인간은 방향감각이 모자라고, 진실과 단지 진실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지럽게 섞여있다는 점이 너무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