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에서 제작한 과학 동영상 Atom을 감상했다.
난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자연과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마도 인간 理性이 하는 작업 가운데 하나 – 관찰과 측정 수학을 근간으로 하고, 그 과정과 결과가 매우 체계적이고 정합적이며, 전체 규모가 방대하다는 속성이 부가되리라 -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과 관련해서 지금 하는 말은 당연히 개인적이고 피상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내가 과학에 대해 갖는 태도에는 우선 놀라움이나 경외심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과학 연구가 긴 인류 역사를 놓고 볼 때 전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하던 결과물을 계속 산출해 온 것과, 근래에 이르러 그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사실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결과물이란 학문적 이론의 확립과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인 산물을 모두 포함한다.
과학은 확실히 사람의 사고 영역을 넓혀 주었고 부가적으로 생활에 복지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 그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지금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내가 생각하듯, 그러한 막강한 영향력과 발전 속도를 감안하더라도 학문의 목표인 진리와 관련해서 과학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과학적 진리를 확정하는 방법 중 하나로 어떤 사실에 대해 그것이 검증 가능하다는 것은 수학적인 과정을 제외하면 감각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하고 플라톤이 이어받은 전통에 따르면 감각적인 사물을 탐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도 궁극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하나였다가 때로는 여럿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이다가 때로는 다시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예 어떤 때는 있지만, 다른 때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지금 감상한 Atom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원자와 쿼크와의 관계가 그렇고, 쿼크가 또 다른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도 그렇고, 관찰할 때는 원자가 특정하게 있지만 관찰하지 않을 때는 어디에나 있다 –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의미와 다를 것이 없다. - 는 점도 그렇다. 그리고 물론 무거운 것으로 나타난 사물이 어떤 다른 때는 가벼운 것이 될 수도 있고, 한 단계 먼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사물이 다른 때에는 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즉 감각을 동원하여 대상을 파헤치는 탐구는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며, 이는 물론 과학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철학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가 이것이라고 대중 앞에 내놓을만한 것도 마땅치는 않다. 그러나 최소한 살면서 진리, 또는 가치와 관련하여 무엇에 주로 신경을 써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과학과는 별도로 할 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나 과학적 발견이 일반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한계는 그것이 그저 이론일 뿐이라는 관점에서도 가늠할 수 있다.
파인만이 발견한 QED에 따르면 나도, 당신도, 주위의 모든 사물도 오로지 가상 입자의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활동 결과 잠시 거품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우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비록 틀린 신념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설사 QED의 결론이 함축하는 의미, 또는 그와 유사한 의미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비중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양자 역학 이론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도 특정 종교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단지 이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달리 QED의 결론에 이르는 전 과정을 빠짐없이 따라간 전문적인 물리학자의 경우에는 어떤지 모른다. 그가 그 학문적인 과정과 결론을 얼마나 깊이 체득하고 그 내용과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어떻게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를.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과학이 사람들을 그리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인 진리의 발견이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이론과 관련하여 세계 종교가 신자에게 부여하는 삶의 태도에 관한 신념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 과학적 정보로부터 뭔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적 탐구 내용, 그리고 결과와 관련된 유비 추리에 의하여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해 과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 정도이다.
예컨대 강한 핵력의 발견에 대하여,
이처럼 강한 핵력에 비견될 만한 것이 인간사회 안에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로스를 근간으로 하는 가까운 상호 간의 우애와 끌림일까? 또한 중성자가 핵을 때리면 그 충격으로 전자기력이 핵력을 이겨 원자가 분열되듯이 무엇의 영향을 받을 때 상호 간의 결별이 생기는가?
또는 철이 우주에서 가장 안정된 원소로, 다른 원소들은 철을 닮고자 융합과 분열을 일으킨다면, 그리고 그 안정이란 것이 양성자가 중성자와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된 구조 때문이라면, 사람의 정신에 있어 가장 안정적인 상태란 무엇이며, 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중성자에 해당하는 무엇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된 구조를 가져야 하는가?
또 QED의 이 정확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운동이 일정한 시스템 안에서 구조적으로 작동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라든가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 격정, 황홀함, 따사로움, 행복감 같은 감정들도 시스템의 작동 과정 중 일어나는 부산물로써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삶의 목표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양자가 도약할 때 빛을 낸다면 사람의 혼이 도약할 때는(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 나오는가?
아니면, 러더포드가 생각한대로 원자가 태양계와 유사한 모양이라면 사람의 마음에도 핵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전자와 같이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기쁨과 슬픔, 열정과 권태, 들뜸과 차분함, 기다림과 나아감, 충만함과 허전함이 교차하며 드나드는가?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생각은 과학적인 탐구 결과를 보고 불러일으킨 것이긴 하지만, 단지 유비적 관계를 고리로 하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근거도 없는 상념에 불과하므로 별다른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사람과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더하여 이런 이야기로 내 주장을 펴는 데는 적합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뭔가 질문을 할 때, 경우에 따라 이런 생각을 다듬어서 그 바탕에 깔 수는 있다.
결국 내 관심사는 물질과 감각에 기반한 탐구가 아니라 - 그런 것을 일부러 배격하지는 않겠지만 - 실존하는 마음과 내면의 관찰을 토대로 얻은 자료를 가지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강구,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 경우 해결책이란 외부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보다는 내면의 변화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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