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크라테스 회상 3

  게다가 또 그는 언제나 집 밖에서 보냈다. 새벽부터 산책을 하거나 도장(道場)에 나가고, 시장(市場)이 붐비는 오전 중은 시장에 있으며, 그 후는 종일 언제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대개는 담론(談論)을 하여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누구 한 사람, 소크라테스가 불경(不敬)스럽게 존신(尊神)에 벗어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없다. 그는 만유(萬有)의 성질에 대해서도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의론 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다른 학자들처럼 우주의 성질을 묻거나, 개개의 천체(天體) 현상을 지배하는 필연(必然)을 묻거나 하는 일 없이,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캐고 드는 인간의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지적했다.

우선 그는, 이 자들이 인간학(人間學)을 벌써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생각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캐고 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일은 그대로 덮어둔 채 신계(神界)의 일에 골몰함으로써 사람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아가서 그는, 이 사람들은 이러한 일이 인간으로서는 발견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와 같은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 대가(大家)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결코 보지 못하고 서로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은 모양을 노정(露呈)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미친 사람은 무서운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떤 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조금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붐비는 곳에 나가기조차 꺼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역(神域)이거나 제단(祭壇)이거나 또 그 외의 어떠한 신성물(神聖物)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근처에 흩어져 있는 돌이나 나무나 짐승에게 까지도 경의를 표한다. ‘만유의 성질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들도, 어떤 자는 실재(實在)는 하나뿐이라고 하고 어떤 자는 그 수가 무한하다고 한다. 어떤 자는 만물(萬物)은 영원히 유동(流動)한다고 하고, 어떤 자는 단 한 가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자는 만물은 생()하고 멸()한다고 보고, 어떤 자는 생하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람들에게 다시 묻는다. 인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자들은 그들이 배워 아는 바를 결국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서 쓰고, 그 희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적(神的)인 사상(事象)을 탐구하는 자들도 일단 이들이 어떠한 필연에 의해 생겼는가를 알았을 때에는, 이것에 의하여 원하는 대로 바람이나 물이나 계절이나, 그 밖에 무엇이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낳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일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들 각각의 사상의 원인을 알기만 하면 족하단 말인가라고.

이 문제들에 머리를 쓰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언제나 인간의 일을 문제로 하고, 경신(敬神)이란 무엇인가, 불경(不敬)이란 무엇인가, ()란 무엇인가, ()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부정(不正)이란 무엇인가, 사려(思慮)란 무엇인가, 광기(狂氣)란 무엇인가, 용기(勇氣)란 무엇인가, 겁나(怯懦)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위정자(爲政者)란 무엇인가, 정부(政府)란 무엇인가, 통치자란 무엇인가, 그 밖에 이러한 제목(題目)을 논하고, 이것들에 관하여 아는 자는 군자(君子)요, 모르는 자는 실로 노예라고 불려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재판관들이 그를 잘못 판정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놀랄 것은 못 된다.

그러나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을 그들이 고려에 넣지 않았다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그는 심의원(審議員)이 되어 국법에 따라서 협의에 임하겠노라는 선서를 했는데, 때마침 국민회의의 의장이 되었을 때, 국민이 국법에 반하여 한 번의 투표로써 드라실로스 및 에라시니데스 등 아홉 명의 장군을 전부 사형시키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감연(敢然)히 이에 반대했다.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은 그의 태도에 분격하고, 수많은 유력자는 그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는 선서를 지키는 것이 정의를 저버리면서까지 민중의 비위를 맞추거나 권력가의 위협에 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인간에게 유의(留意)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방법과는 달리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신은 어떤 일은 알고 있고 어떤 일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신은 우리들의 말, 행위, 말없는 생각 등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곳에 계시며, 인간의 일 일체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 회상 크세노폰 최 혁순 역 중에서 -

 

이승과저승 생각 :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를 짓고 있다.”는 기소장 내용에 대해 이전 포스트에 이어지는 크세노폰의 사후 변론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여 그 분야에서 一家를 이루는 걸 자아실현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찬하는 요즘의 감각으로 보면 조금 답답할 정도로 근본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같지만, 근본이나 본질로 돌아가 생각하는 것은 어느 때고 허물을 복구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초가 될 수 있고, 자신이 하는 활동의 전반적인 의미를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크라테스 회상 5  (0) 2023.08.15
소크라테스 회상 4  (2) 2023.08.12
소크라테스 회상 2  (0) 2023.08.06
소크라테스 회상 1  (0) 2023.08.04
크리톤 3  (0) 2023.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