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
조금씩 진행이 되는 듯하기도…….*^^*
먼저 어제의 제 질문에 대해 답변이 빠진 것이 있네요.
14. 그럼 여기서 남편의 자유는 무엇이고, 남편의 욕구는 무엇인지, 또 아내의 자유는 무엇이고 아내의 욕구는 무엇인지 지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남편의 자유는 소주 더 먹기로 한 거, 우기기로 한 거 등등……. 아내의 자유는 싫다하기로 한 거, 사오기로 한 거, 가면서 궁시랑 대기로 한 거 등등...-.-;
19. 사람은 때때로 상반되는 두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일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시죠?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와 건강을 위해 끊어야겠다는 욕구, 빵을 먹고 싶다는 욕구와 다이어트를 위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욕구, 자고 싶다는 욕구와 경비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면 안 된다는 욕구 등등. 따져보면 많을 것 같습니다.
=> 언제나 항~상(엇? 태지?) 그렇겠지요.
20. 어제 질문9-13에 있었던 내용을 모조리 긍정해 주셨습니다. 즉, 사람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구하고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을 피한다는 거죠.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바란다는 거구요.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누구나가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구하지만 그 구함이 항상 성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겠죠? 시험에 떨어진다거나 구애에 실패한다거나 하다못해 도둑질에 실패한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함에 성공하는 사람은 바로 그 점에 있어 실패한 사람보다 현명하거나 지식이 있거나 지혜롭거나 능력이 있거나 한 것이 아닐까요? 운수를 제외하면 말이죠. 또한 그런 식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사의 모든 부문에 있게 마련이니까 사람들 중에는 필연적으로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또는 능력 있는 사람도, 무능한 사람도 있는 거겠죠?
=> 그렇습니다. 이런 능력의 차이도 일종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꼭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정의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예를 들자면, 높이 뛰고자 하는 사람은, 중력보다 강한 힘이 있어야겠지요.*^^*
21.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구하는데 그 좋은 것을 손에 넣었을 때 누구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이 행복하려면(행복감을 느끼려면) 무엇보다 어리석지 말고 지혜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는데 가급적 실패가 없을 테니까요.
=>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 알아야 지혜로운 것일까요? "지혜롭다"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머……. 일상용어로서, 더 많은 좋은 선택을 한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이야기는 해 볼 수 있겠습니다.
22. 그럼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얘기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은 위에 예로든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또는 지혜나 능력과 무지나 무능력은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다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제일 나은 거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은 자신 뿐입니다.. 지혜로운지 아닌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남들을 보면서 이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말하는 대로 잘 되더라." "저 사람은 잘 틀리더라." "이 방법은 잘 맞더라." "저 방법은 잘 틀리더라." 등등…….
23. 그리고 어제 님의 답변 중에서,
=>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주 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행위의 우열이나, 더 좋고 더 나쁨이나, 더 도덕적이고 더 비도덕적이냐 하는 걸 따지고, 사람들에게 더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서로 권하지만 더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가급적 금지하는 그런 행위"마저도 여러 행동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에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 어떤 경우이든 "꼭"이라는 단서는 붙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방관자나 제삼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소피스트님은 주변인들의 특정한 행위에 대해 행위의 우열이나, 더 좋고 더 나쁨이나, 더 도덕적이고 더 비도덕적이냐 하는 걸 가만히 따져보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적극 권하지만 더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적극 금지하는 그런 사람입니까? 아니면 친구든, 가족이든, 동료든 나 이외의 타인이 더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려고 할 때 그저 수수방관하는 사람입니까?
=> 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도덕적", "비도덕적"을 생각하지 않으며, 무언가 권하고 싶을 때는 권하고, 그러기 싫을 때는 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위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가 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할 것 같다면, 그리고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그가 저의 친구일 경우, 그가 상처받는 일은 저에게도 손해이겠지요. 이기주의라는 매도는 말아주시길..*^^*) 전 말리지 않습니다. 또, 소용이 된다면 비도덕적인 행동이라도 서슴없이 하는 편입니다.(소용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이라고 불리는 행동을 하고 얻는 이득보다, 그렇지 않은 이득이 더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득이란, 단순히 쾌락적이라 불리는 이득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군요. 우리가 도덕적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들을 뒤집는 것이 무척 쉽다는 생각은 해 보셨는지요. 대부분의 도덕적인 행동들은 그와 모순이 되는 다른 도덕적 행동을 갖는답니다. 때문에 갖다 붙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변명이 가능하지요. 몇 가지는 안 그렇지만. 우선 편의를 위해 위의 답변에 도덕적 비도덕적을 쓰기는 했는데, 별로 쓰고 싶은 표현은 아닙니다.
24. 그리고 소피스트님이 말씀하는 설득의 의미에 대해서인데, 다음 답변 말이죠.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설득할 수 있는"입니다. "객관적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사실, 저는 객관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로 여기에선 사용하겠습니다.)예를 들어 지금 누군가가 "이것이 삶의 목포이다."라고 주장한다고 해 봅시다. 혹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고 해 봅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완전히 긍정하게 될까요? 아마 20~30퍼센트가 안 되겠지요. 만약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만한 말을 한다면 그는 세계적인 철학자요, 역사에 기록되는 철학자로 남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정말 "철학적"이유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였는지는 고려치 않는다 하더라도 요. 그러나 그의 말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변하기 때문이요, 세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장들은 돌고 돌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한 걸음을, 반복을 위한 걸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더 옳은 사고를 위한 기반이 될 한 걸음을 디뎌보자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쌓아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설득적인 주장, 직접적인 확인이 가능한 사실부터 찾아나가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실들이 설득적인 주장, 설득할 수 있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가 행동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이라면, 그걸 하고 싶어 하는 개개인이 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정리가 되시나요?
이상이 님의 답변인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님이 "설득"이라는 어휘를 과연 무슨 의미로 사용했느냐입니다. "설득할 수 있는"이라거나 또는"설득하여야 하는"이라거나 하는 것은 지금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설득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상 그것이 무의미한 것일 수는 없고, 어떤 의미가 들어 있을 텐데 그 의미 중에서 내용이 아니라 수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거죠. 말하자면 님이 말하는 설득이란 듣는 대중의 마음과 행위를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는 힘이 있는가 하는 얘기죠.
위 답변을 보면 많은 사람이 긍정할수록 얘기를 한 사람은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거죠. 그럼 함께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일요일 오후에 쇼펜하우어나 니체나 헤겔이나 사르트르를 읽고 누군가의 사상에 흠뻑 젖어 과연 하고 무릎을 치며 그의 사상에 동조하더라도, 월요일 아침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더 이상 어떤 철학적 사상에 젖어 있지도 않고 씩씩하게 출근하여 오늘은 어떻게 영업을 전개함으로써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느냐 하는 심정으로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퇴근 후에 회식자리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즐겁게 할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젊은이는 쇼펜하우어를 매우 그럴듯하게 생각했지만 회사 내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한번 보고나서 낮이나 밤이나 그녀 생각에 들떠 있고 한편으로 그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상상을 곧잘 하게도 되지 않을까요?? 대개의 경우가 이러하다면 세계적인 철학자는 그의 구독자들에게 어떤 좋은 변화나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이건 좀 가혹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의 독자들에게 단지 립서비스를 한 것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읽는 동안의, 또는 생각하는 동안의 즐거움을 선사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 거죠. 하긴 꼭 그런 것이 아니라 쇼펜하우어를 읽고 세상에 염증을 느끼던 중 다시 불교서적을 읽고 입산하여 승려가 되든지 불교신자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사례는 20-30%가 아니라 0.1%도 안 될 것 같고요. 또 종교의 영향일 테니 철학과는 또 다른 얘기가 될 테고. 대개의 경우는 위에서 제가 말하는 대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철학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학문이 된다는 것도 "철학은 대중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는"학문이라는 말이 될 것 같은데…….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의견을 정리해서 좀 명료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그런 관점에서라면, 간단히 "상대를 변하게 함"이라고 설득을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충분히 검토를 못하고 이렇게 쓰는데, 이상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철학이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학문은 아니냐는 이야기. 그 즐겁다는 말의 범위가 궁금하군요. 진작 말씀드렸듯이, 학문적인 필요성을 인정받는다 함은, 다수에게 만족, 다른 말로 하면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즐거움을 이야기하시는 걸로 알고 말씀드리지요.(소설책을 보는 즐거움 같은 것이라면 별루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군요. 철학책은 재미없으니까.-.-;) 저의 이야기도 이러한 점에서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그래서 학문의 한 분야로서 부끄럽지 않은 학문이 되자는 것입니다.
철학이란 거, 행동을 변화시키라 한다면 그걸 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것도 대중에 대해서는. 그럼 철학이 대중을 즐겁게 하는 학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님의 말씀대로 0.1퍼센트의 사람을 즐겁게 하고, 다시 2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한다면(아마 철학이란 이야기만 들어도 눈을 찌푸리는 사람이 그 정도는 되겠죠? 철학 배우는 학생들까지 친다면…….*^^*) 그게 무슨 즐겁게 하는 학문입니까? 그러기에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거울 수 있도록 말이지요. 모두 인정하는 것들부터요.
25. 그럼 다음을 보면 이런 답변을 주셨지요,
=> 이것도 조건부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구분할 수가 없겠죠. 적어도 위치는 다르지 않겠어요?*^^* 물론, 둘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았다면, 우리는 둘이 다른 것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비교를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둘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설혹 우리가 완전히 동일한 이론으로 둘에게서 동일한 근사적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더라도.
말씀대로 비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라고 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보면 위치야 다르다고 해야겠죠.
님의 답변은 서로 완전히 똑같은 사물은 없다는 데 동의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소피스트님은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알았다는 말이 맘에 안 들면 고쳐도 되죠.
똑같은 사물은 없다는 것을 어떤 근거로 믿게 되었습니까? 라고 말이죠.
=> 흠…….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난 둘을 비교할 수 있는 상황에서, 둘의 다른 점을 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가 왼쪽에 있으면, 다른 하나는 오른쪽에 있었지요. 또 하나가 지금 있으면, 하나는 과거에 있었습니다. 전 다르지 않은 것을 비교한다는 것을 모르겠군요.
> 26. 그리고 그 이전 답변내용을 보면,
>
> 새로 말씀드리게 된 내용도 있군요.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요하시다면 또 질문해 주십시오.
>
> 그렇다면 지금 위 글을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것도, 그리고 그 글이 무슨 의미라고 이해하는 것도 모두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일뿐이라는' 얘기죠?
>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글도 아니라는 셈이 되는 거겠죠.
=>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지요. "세상을 정오로 보지 말고, 호오의 관점에서 보라! 그래야만 "답"이 있을 것이다"라고요. 전 지금 님이 이러한 관점의 사용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좋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마음에 별루 안 드시는 모양이죠? 머..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야기하는 의의가 있는 거겠죠. 그럼 안녕~!
philebus(청년학도)
주말을 잘 보내셨는지…….
문답이 진행되면서 저는 소피스트님이 지금의 주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님의 생각대로라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나, 이런 경우에는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나, 그런 생각을 하여 우리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님의 답변을 듣다 보면 명확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의 질문을 시작해 보죠. 먼저
27. 그저께부터 질문한 것인데 한 번은 답변이 빠지고, 어제의 답변은 불충분합니다.
다시 한 번 올려 드리죠.
소피스트님이 자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했는데,
말 그대로 하고픈 것을 "하.고.자.하.는.것". 이 말 대로면 자유란 욕구와 동의어가 아닙니까?
=> 아니지요. "하고픈 것"이 욕구이고, "하고자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라는 건데,
저는 왠지 아직 잘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 여기서 제가 궁금한 것은 둘의 구분이죠. 욕구와 님이 말씀하는 자유.
그래서 다시 술 사 오라는 남편의 예시 속에서 질문을 드렸죠.
그리고 묻기를,
그럼 여기서 남편의 자유는 무엇이고, 남편의 욕구는 무엇인지, 또 아내의 자유는 무엇이고 아내의 욕구는 무엇인지 지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아마 더 이해가 쉬워질 것 같으니까요.
*** 이렇게 했는데, 어제의 님의 답변에서는
=> 남편의 자유는 소주 더 먹기로 한 거, 우기기로 한 거 등등……. 아내의 자유는 싫다하기로 한 거, 사오기로 한 거, 가면서 궁시랑 대기로 한 거 등등...-.-;
*** 이거였죠. 제가 궁금해 한 것은 무엇으로 둘을 구분하는 가였는데, 한 가지 밖에 언급이 없는 거죠.
28. 전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좋다고 생각해서 행위를 했는데, 그 행위의 결과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겠죠? 어제 예를 든 것처럼 창녀와 즐겼는데, 며칠 후에 성병이 나타난 것처럼 말이죠. 또, 치과를 가지 않은 어린이가 결국 가벼운 충치를 심한 충치로 만들어 이를 뽑게 되었다면 이는 그 아이가 치과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한 적이 있었지만 종당에는 그 좋은 일이 이를 뽑는다는 나쁜 일의 원인이 되었다는 거죠.
반대로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로 연결되는 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 어린이가 치과에 가지 않으려고 도망갔는데 어머니가 찾아내어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가서 충치를 치료했다면 아이는 그토록 자신이 기피한 나쁜 일을 당했지만 그 결과 치아의 건강이라는 좋은 일을 만난 거죠.
사람은 또한 더 좋은 것, 보다 좋은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그것을 얻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상의 제 얘기를 소피스트님은 모조리 긍정해 주셨는데, 이외에도 생각해보면 지금은 좋은 일이라고 판단해서 행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이 너무도 많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생을 살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우리가 후회하게 될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후회한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생각을 안 하는 것뿐이지, 그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본다면, 사소한 일이라도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다면…….하고 생각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현재야 어쨌든 그가 그런 행위를 할 그 당시엔, 더 좋은 선택을 할 만한 그의 능력이, 또는 그의 자유가 꼭 그것 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일 테고요.
그럼, 창녀촌에 가서 성병을 옮은 어떤 젊은이가 몇 분간의 쾌락과 그보다 훨씬 긴 고통의 시간을 맞바꾼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젊은이는, 그도 혈기왕성하여 여자 생각이 간절한 때도 많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와 즐긴 다음에 오는 결과들을 미리 헤아려 보고 그 점이 부담스러워 격렬한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생활한다든가, 그게 아니라면 창녀촌에 가지 않고도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여 최소한 위의 어떤 젊은이처럼 후회할 짓을 피했다면, 결과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후회할 짓을 한 가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지혜롭다거나 도덕적이라는 말을 소피스트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제가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의 현재 생각은 이해하고, 따라서 억지로 그런 걸 강요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들여다보면, 나중에 후회할 짓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신중하여 타협을 하는 사람도 있고, 판단력이나 자제력이나 결단성이 뛰어나 그런 후회할 짓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하는 말은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의 행위는 그의 당시의 자유에 따른 것이요, 그의 총체적인 능력에 따른 것이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행동을 스스로 후회하게 된다면 행위 당시의 그의 능력이나 자유는 후회하는 시점에서 본다면 별 볼일 없는 자유요, 능력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렇다면 그러한 후회할 일의 결과를 미리 헤아려볼 줄 아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후회할 일을 막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 사람이 우습게 보이거나 아니면 충고라도 하여 도와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소피스트님도 지난 답변에서 "무언가 권하고 싶을 때는 권하고, 그러기 싫을 때는 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위 비도덕적 이라 하더라도, 그가 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할 것 같다면, 그리고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그가 저의 친구일 경우, 그가 상처받는 일은 저에게도 손해이겠지요. 이기주의라는 매도는 말아주시길..*^^*) 전 말리지 않습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이 말도 소피스트님이 상대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가 자신에게 앞으로 해로울 것 같은 행위를 하려고 할 때 그에게 충고하겠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은 같은 종류의 동물로써 각자의 생활은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감정과 좋고 나쁨의 판단은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가질 수 있는 거겠죠.
이 질문의 요지는 욕망과 소피스트님이 말씀하는 자유에 따른 행위는 바로 그 행위 당시에는 그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가져다주겠지만 뒤이어 그 행위의 결과 그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뒤따른다면 최초의 그 욕망과 자유를 우리는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 가라는 거죠.
그리고 욕구와 그런 자유는 소피스트님의 말처럼 아무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행위 당사자가 그 행위로 인하여 되돌아오는 고통이 없이 오래도록 행복감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구분되어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고요.
29. 사람은 때때로 상반되는 두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일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느냐는 어제의 질문에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는데, 그럴 경우 그는 대개 두 욕구 중 한쪽을 택하게 되고 그 택함이 그의 자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될 테죠? 또한 그의 자유는 그의 능력(힘)의 총체적인 한계 안에서 그로 하여금 그렇게 선택케 했다는 얘기가 될 테고요.
여기서 상반되는 두 욕구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히 다른 욕구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예에서처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와 건강을 위해 끊어야겠다는 욕구, 빵을 먹고 싶다는 욕구와 다이어트를 위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욕구, 자고 싶다는 욕구와 경비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면 안 된다는 욕구 등등.
어째서 명백히 다르냐 하면, 각각의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동시에 서로 반대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반대되는 행위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한 욕구는 잘 것을 요구하지만 또 한 욕구는 같은 시간에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다면 그 욕구의 동시충족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 두 욕구는 욕구하는 시점에서 각각 다른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인 만큼 구분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두 욕구 중 어느 것에 따를 경우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가?
그리고 일단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 뒤에 다시 좋지 않은 일이 뒤따르는 일이 없겠는가? 라는 것을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 가라는 말이죠.
30. 어제의 답변에서 다음 부분을 보면,
그럼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얘기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은 위에 예로든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또는 지혜나 능력과 무지나 무능력은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다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제일 나은 거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은 자신 뿐입니다.. 지혜로운지 아닌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위에 있는 제 질문 28,29번을 참고하신다면 가급적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위해서, 또는 두 욕구가 서로 다른 지시를 내리는데 대해 좀 더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누구나 배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회생활에서 어떤 선택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31.그리고 위의 말 중에서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은 자신 뿐입니다.. 지혜로운지 아닌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지요." 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목공일의 조수노릇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목수의 말대로 일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턴도 의사의 말을 따라야 할 테고, 과학도는 실험 시 과학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와 같은 모든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식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에 관계되는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는 그런 지식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조수는 목수와, 인턴은 의사와, 과학도는 과학자와 누가 더 지혜로운지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조수는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기보다 목수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제게는 이런 게 매우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소피스트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해서, 즉
그럼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얘기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은 위에 예로든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또는 지혜나 능력과 무지나 무능력은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여기 대해서 제가 답을 말한다면 이렇죠.
님이 말씀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지식이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지하거나 무능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고요.
말하자면 자유로운 사람은 단지 행위 하는 사람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가급적 더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며, 어리석은 사람은 때로는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어떤 행위를 하지만 곧 그 자신에게 나쁜 것(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이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동의하시는지…….…….
32. 설득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군요.
간단히 "상대를 변하게 함"이라고 설득을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충분히 검토를 못하고 이렇게 쓰는데, 이상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요.
따옴표를 붙인다는 건 어휘를 정의했다는 뜻인지 모르겠는데…….
상대를 두렵게 만들거나 화나게 하는 게 설득은 아닐 테죠.
그러니 위 얘기는 별 뜻이 없는 것 같고,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려는 님의 의도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상황에 맞는 의미가 담겨 있어야 얘기가 통하겠죠.
지금은 철학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고, 여기서의 설득이란 화나게 하거나 두렵게 만든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말이죠.
그리고 설득에 대한 님의 최종적인 얘기는 다음이란 말이죠?
저의 이야기도 이러한 점에서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그래서 학문의 한 분야로서 부끄럽지 않은 학문이 되자는 것입니다.라고요.
남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님의 솔직한 의견으로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럼 다음과 같은 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죠.
갖가지 학문과 예술이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과연 어떤 내용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 말이죠.
수학은 수에 관한 기호와 말로써 즐거움을 주고 있고, 물리학은 사물의 물리적 성질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생물학은 생물에 관하여, 미술은 그림으로,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음악은 노래로, 건축학은 집을 짓는 데 관한 말로……. 이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철학은 무슨 내용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을까요?
지난번에 님께서도 썼었지만, 인생의 목표라거나, 의미라거나, 인간 세상의 본질이라거나, 생각이나 인식에 대해서 그것이 허상이라거나, 현상계의 존재자체가 허상이라거나, 희망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라거나, 초인이 된다거나, 대강 이런 얘기들이죠.
그럼 주목해 보세요.
철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평소 생각과 행위에 대해 거슬리거나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게 아니지만, 철학은 님의 말대로 하면 읽는 사람의 평소 행위와 생각, 가치관 등에 대해, 거의 모든 경우에 거슬리거나 반대되거나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음으로써 그를 즐겁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셈이죠. 지금까지 철학의 주제와 내용이 거의 그런 거니까요.
어째서 그래야 할까요?
철학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님이 처음에 말씀했고, 그 의미의 추적결과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이라는 말로 변한 거죠.
그렇다면 제 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 주시죠.
사람들은 이미 여러 가지 것들로 즐거워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행위와 생각에 모순되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즐겁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를 말이죠.
33. 그리고 다음으로 전에 드린 아래와 같은 질문은…….
소피스트님은 누군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서로 완전히 똑같은 사물은 어디에도 없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다고 믿습니까?
이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위치가 다르니 다르다는 건 아니고, 어제 보았던 것을 오늘 보는 것이니 다르다는 말도 아니고, 예를 들어 강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조약돌 중에서 서로 모양과 색이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조약돌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필요하다면 같은 시점에서라는 말을 넣죠.)
즉, 님의 직관으로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물건은 조약돌이든 무엇이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34.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답변 내용,
=>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지요. "세상을 정오로 보지 말고, 호오의 관점에서 보라! 그래야만 "답"이 있을 것이다"라고요. 전 지금 님이 이러한 관점의 사용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좋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마음에 별루 안 드시는 모양이죠?
말 자체로 마음에 안들 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얘긴 제가 위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렸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에 있어, 욕망과 님이 말씀하는 자유와 그 자유로운 선택을 왠지 항상 믿기는 어렵다는 식으로요.
아무튼 그 부분은 계속 얘기해 보면 뭔가 드러나겠죠.
그런데, 지금의 얘기는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지금 위 글을 글자모양 그대로 보는 것도, 그리고 그 글이 무슨 의미라고 이해하는 것도 모두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일뿐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글도 아니라는 셈이 되는 거겠죠.
라는 건데…….
말하자면 님의 주장도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어째서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함이나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고에서 떠나 호오로 향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옮겨가야 하는 논리적 필연성이 있습니까?
님의 의견을 추측할 때, 지금 정확한 얘기는 "우리는 현재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모르고 있다."라는 정도의 말이 될 것 같은데(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논의를 위해), 거기서 바로 어째서 정오를 버리고 호오로 가야 하는지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특히 님이 얘기하는 구분 없는 욕구의 충족으로 말입니다.
이건 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아요.
소피스트님은 제가 보기엔 뭔가 건너뛰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의견을 보여 주시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님의 솔직한 답변이 부담이 없어 좋습니다.
글을 좀 길게 쓰게 되긴 하지만…….
번호별로 답변하시면 되니까 요약은 안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소피스트
와! 오늘은 무척 길군요!
주말에는 몹시 바빴답니다.*^^*
훗.. 노력은 많이 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별로 안 좋았던 주말이었습니다.T.T
어떻든 열심히 읽고 힘닿는데 까지 답변해 보겠습니다.
27. 그저께부터 질문한 것인데 한 번은 답변이 빠지고, 어제의 답변은 불충분합니다. 궁금해한 것은 무엇으로 둘을 구분하는 가였는데, 한 가지밖에 언급이 없는 거죠.
=> 앗! 그랬군요! 또 잘못 읽었습니다.-.-;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그럼 예에서 욕구와 자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남편의 경우에서 구분을 해보죠. 남편은 술을 더 마시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욕구입니다. 그러고 보니, 맘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마누라와의 약속, 예상되는 아내의 잔소리 등등……. 이것들 때문에 그는 술을 마시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것도 그의 욕구입니다. 그는 고민했지만, 결국은 술을 더 마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의 자유입니다. 그러고 보니 또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술은 마시고 싶은데 일어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의 맘속에 떠오르는 선택항들이, 여러 욕구가 뒤엉켜있는 선택항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아내한테 사 오라고 하기로.. 그러고 보니 아내의 저항, 아내가 가기 싫고, 술 더 주기도 싫어서 선택한 자유를 밀어주는 힘이 그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만큼의 힘을 얼마나 사용할지, 다시 여러 욕구들이 얽혀있는 선택항들을 저울질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였습니다. 역정을 내기로. 그리고 그의 힘이 아내의 힘을 눌렀습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습니다.(아이고 숨차라…….-o-;)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28. 전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좋다고 생각해서 행위를 했는데, 그 행위의 결과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겠죠? 어제 예를 든 것처럼 창녀와 즐겼는데, 며칠 후에 성병이 나타난 것처럼 말이죠. 또, 치과를 가지 않은 어린이가 결국 가벼운 충치를 심한 충치로 만들어 이를 뽑게 되었다면 이는 그 아이가 치과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한 적이 있었지만 종당에는 그 좋은 일이 이를 뽑는다는 나쁜 일의 원인이 되었다는 거죠. 반대로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로 연결되는 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 어린이가 치과에 가지 않으려고 도망갔는데 어머니가 찾아내어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가서 충치를 치료했다면 아이는 그토록 자신이 기피한 나쁜 일을 당했지만 그 결과 치아의 건강이라는 좋은 일을 만난 거죠. 사람은 또한 더 좋은 것, 보다 좋은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그것을 얻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상의 제 얘기를 소피스트님은 모조리 긍정해 주셨는데, 이외에도 생각해 보면 지금은 좋은 일이라고 판단해서 행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이 너무도 많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생을 살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우리가 후회하게 될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후회한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생각을 안 하는 것뿐이지, 그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본다면, 사소한 일이라도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다면…….하고 생각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현재야 어쨌든 그가 그런 행위를 할 그 당시엔, 더 좋은 선택을 할 만한 그의 능력이, 또는 그의 자유가 꼭 그것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일 테고요. 그럼, 창녀촌에 가서 성병을 옮은 어떤 젊은이가 몇 분간의 쾌락과 그보다 훨씬 긴 고통의 시간을 맞바꾼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젊은이는, 그도 혈기왕성하여 여자 생각이 간절한 때도 많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와 즐긴 다음에 오는 결과들을 미리 헤아려 보고 그 점이 부담스러워 격렬한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생활한다든 가, 그게 아니라면 창녀촌에 가지 않고도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여 최소한 위의 어떤 젊은이처럼 후회할 짓을 피했다면, 결과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후회할 짓을 한 가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지혜롭다거나 도덕적이라는 말을 소피스트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제가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의 현재 생각은 이해하고, 따라서 억지로 그런 걸 강요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들여다보면, 나중에 후회할 짓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신중하여 타협을 하는 사람도 있고, 판단력이나 자제력이나 결단성이 뛰어나 그런 후회할 짓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하는 말은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의 행위는 그의 당시의 자유에 따른 것이요, 그의 총체적인 능력에 따른 것이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행동을 스스로 후회하게 된다면 행위 당시의 그의 능력이나 자유는 후회하는 시점에서 본다면 별 볼일 없는 자유요, 능력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렇다면 그러한 후회할 일의 결과를 미리 헤아려볼 줄 아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후회할 일을 막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 사람이 우습게 보이거나 아니면 충고라도 하여 도와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소피스트님도 지난 답변에서 "무언가 권하고 싶을 때는 권하고, 그러기 싫을 때는 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위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가 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할 것 같다면, 그리고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그가 저의 친구일 경우, 그가 상처받는 일은 저에게도 손해이겠지요. 이기주의라는 매도는 말아주시길..*^^*) 전 말리지 않습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이 말도 소피스트님이 상대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가 자신에게 앞으로 해로울 것 같은 행위를 하려고 할 때 그에게 충고하겠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은 같은 종류의 동물로써 각자의 생활은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감정과 좋고 나쁨의 판단은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가질 수 있는 거겠죠. 이 질문의 요지는 욕망과 소피스트님이 말씀하는 자유에 따른 행위는 바로 그 행위 당시에는 그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가져다주겠지만 뒤이어 그 행위의 결과 그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뒤따른다면 최초의 그 욕망과 자유를 우리는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 가라는 거죠. 그리고 욕구와 그런 자유는 소피스트님의 말처럼 아무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행위 당사자가 그 행위로 인하여 되돌아오는 고통이 없이 오래도록 행복감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구분되어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구요.
=> 님의 이야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럼 한 가지 여쭤볼까요? 님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어떤 선택을 한 일이 있습니까? 님은 정말 알면서도, 그걸 모르고 선택을 한 일이 있습니까? 음.. 답변을 해야 하니까 대답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예상되는 반박(단지 예상입니다.)에 대한 설명을 드리지요. 님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후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과 그 가능성, 일이 잘 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과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잘 될 거라 생각하였기에 "자유롭게" 선택을 한 것이지요. 또한 님은 알고 있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잘못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님은 선택을 하는 순간에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선택을 한 것이지요.
전에 이야기했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것이 "연속되는 행동의 패턴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그것을 미분화하여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학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곡선이 연속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고, 그 곡선 자체의 방정식을 알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도함수로부터 추론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섣부른 추측은 큰 오류로 이어지기 일쑤이니까요. "후회"나 "예측"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대상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훗날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곡선 위의 현재라는 한 점에서의 도함수일 뿐이지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순간순간,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예측할 뿐이지요. 이 과정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되는 도함수가 바로 위에 사용한 선택과 자유와 지금 알고 있는 것의 관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때 알았던 것 같다고요? 그걸 증명할 재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부정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걸 학문적으로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는 셈입니다. 단지 자기 위안을 위해 받아들인다면 이해하겠습니다만.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라면.
"그는 그가 알고 있던 사실로부터 자유롭게 선택을 하였고, 그의 예측은 빗나가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경우에 이러저러한 선택을 한 경우 빗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한 가지 예가 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 선택에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한 가지 팩터로 삼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배웠다."
29. 사람은 때때로 상반되는 두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일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느냐는 어제의 질문에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는데, 그럴 경우 그는 대개 두 욕구 중 한쪽을 택하게 되고 그 택함이 그의 자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될 테죠? 또한 그의 자유는 그의 능력(힘)의 총체적인 한계 안에서 그로 하여금 그렇게 선택케 했다는 얘기가 될 테고요. 여기서 상반되는 두 욕구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히 다른 욕구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예에서처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와 건강을 위해 끊어야겠다는 욕구, 빵을 먹고 싶다는 욕구와 다이어트를 위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욕구, 자고 싶다는 욕구와 경비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면 안 된다는 욕구 등등. 어째서 명백히 다르냐 하면, 각각의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동시에 서로 반대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반대되는 행위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한 욕구는 잘 것을 요구하지만 또 한 욕구는 같은 시간에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다면 그 욕구의 동시충족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 두 욕구는 욕구하는 시점에서 각각 다른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인 만큼 구분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두 욕구 중 어느 것에 따를 경우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가? 그리고 일단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 뒤에 다시 좋지 않은 일이 뒤따르는 일이 없겠는가? 라는 것을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 가라는 말이죠.
=> 물론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필연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인간은 더 나은 것이 아니면 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그가 어느 것을 더 많이 좋아했는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30. 어제의 답변에서 다음 부분을 보면,
그럼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얘기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은 위에 예로든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또는 지혜나 능력과 무지나 무능력은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다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제일 나은 거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은 자신 뿐입니다.. 지혜로운지 아닌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위에 있는 제 질문 28,29번을 참고하신다면 가급적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위해서, 또는 두 욕구가 서로 다른 지시를 내리는데 대해 좀 더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누구나 배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회생활에서 어떤 선택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선택에 불과하겠지요. 또 한 번 풀어서 써 볼까요? "나는 이것 중 어느 것이 나은지 잘 모르겠다. 이럴 경우에는 누구누구가 이야기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낫더라. 그에게 물..어...보...(다른 욕구와 저울질 합니다.*^^*)는 게 낫겠다."
31. 그리고 위의 말 중에서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은 자신 뿐입니다.. 지혜로운지 아닌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지요." 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목공일의 조수노릇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목수의 말대로 일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턴도 의사의 말을 따라야 할 테고, 과학도는 실험 시 과학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와 같은 모든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식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에 관계되는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는 그런 지식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조수는 목수와, 인턴은 의사와, 과학도는 과학자와 누가 더 지혜로운지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조수는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기보다 목수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제게는 이런 게 매우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소피스트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해서, 즉 그럼 여기서 소피스트님이 얘기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은 위에 예로든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또는 지혜나 능력과 무지나 무능력은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여기 대해서 제가 답을 말한다면 이렇죠. 님이 말씀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지식이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지하거나 무능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라고요.. 말하자면 자유로운 사람은 단지 행위 하는 사람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가급적 더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며, 어리석은 사람은 때로는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어떤 행위를 하지만 곧 그 자신에게 나쁜 것(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이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동의하시는지…….…….
=> 크헉! 그게 아닙니다. 제가 "유일한 지성"을 이야기한 것은, 당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님의 선택을 해 주었다고 말하는 상황에서도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은 님이고, 어떤 힘이 두려워 어떤 일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결국 그렇게 움직인 것은 님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에 한 이야기는 한 가지 예만 더 들겠습니다. 말 한 마리가 물가로 끌려가 물을 마시게 되었다 합시다. 사람들이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말이 물을 마시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은 그냥 물 안 마시고 죽는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 경우 "물을 마신 것은 말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님이 보기에" "그 사람 말이 맞을 확률이 큰 거 같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님이 보기에" "그 사람 말이 맞을 확률이 낮은 거 같은 사람"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실제로 둘이 어떤 선택을 하였을 때 누가 맞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판단의 주체인 "나"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요.
다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의 관점에서 보십시오. 그러면 둘의 차이는 없습니다. 둘 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였고, 거기서 어떤 결과를 얻었을 뿐이지요. 이해하시겠습니까?
32. 설득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군요. 간단히 "상대를 변하게 함"이라고 설득을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충분히 검토를 못하고 이렇게 쓰는데, 이상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요. 따옴표를 붙인다는 건 어휘를 정의했다는 뜻인지 모르겠는데…….상대를 두렵게 만들거나 화나게 하는 게 설득은 아닐 테죠. 그러니 위 얘기는 별 뜻이 없는 것 같고,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려는 님의 의도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상황에 맞는 의미가 담겨 있어야 얘기가 통하겠죠. 지금은 철학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고, 여기서의 설득이란 화나게 하거나 두렵게 만든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말이죠.
=> 그렇습니다. 그 점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설득에 대한 님의 최종적인 얘기는 다음이란 말이죠? 저의 이야기도 이러한 점에서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그래서 학문의 한 분야로서 부끄럽지 않은 학문이 되자는 것입니다. 라고요. 남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님의 솔직한 의견으로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럼 다음과 같은 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죠.
갖가지 학문과 예술이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과연 어떤 내용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 말이죠.
수학은 수에 관한 기호와 말로써 즐거움을 주고 있고, 물리학은 사물의 물리적 성질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생물학은 생물에 관하여, 미술은 그림으로,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음악은 노래로, 건축학은 집을 짓는 데 관한 말로……. 이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철학은 무슨 내용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을까요? 지난번에 님께서도 썼었지만, 인생의 목표라거나, 의미라거나, 인간세상의 본질이라거나, 생각이나 인식에 대해서 그것이 허상이라거나, 현상계의 존재자체가 허상이라거나, 희망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라거나, 초인이 된다거나, 대강 이런 얘기들이죠. 그럼 주목해 보세요. 철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평소 생각과 행위에 대해 거슬리거나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게 아니지만, 철학은 님의 말대로 하면 읽는 사람의 평소 행위와 생각, 가치관 등에 대해, 거의 모든 경우에 거슬리거나 반대되거나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음으로써 그를 즐겁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셈이죠. 지금까지 철학의 주제와 내용이 거의 그런 거니까요. 어째서 그래야 할까요? 철학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님이 처음에 말씀했고, 그 의미의 추적결과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이라는 말로 변한 거죠. 그렇다면 제 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 주시죠. 사람들은 이미 여러 가지 것들로 즐거워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행위와 생각에 모순되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즐겁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를 말이죠.
=> 제 말은 이미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건 제가 보기에 진실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철학 그 자체로 인해 즐거워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철학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거기서 무한한 학문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데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철학이 말장난에만 매달려 아무런 실질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님이 전술하신 "인생의 목표라거나, 의미라거나, 인간세상의 본질이라거나, 생각이나 인식에 대해서 그것이 허상이라거나, 현상계의 존재자체가 허상이라거나, 희망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라거나, 초인이 된다거나, 대강 이런 얘기들"이고 "지금까지 철학의 주제와 내용"인 것입니다. 왜 이런 걸로 설득을 하면서 즐겁게 해야 하냐고요? 저의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왜 이런 걸로 즐겁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특히 요즘처럼 즐거워하지도 않는 때에?
33. 그리고 다음으로 전에 드린 아래와 같은 질문은…….
소피스트님은 누군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서로 완전히 똑같은 사물은 어디에도 없다 " 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다고 믿습니까?
이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위치가 다르니 다르다는 건 아니고, 어제 보았던 것을 오늘 보는 것이니 다르다는 말도 아니고, 예를 들어 강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조약돌 중에서 서로 모양과 색이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조약돌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필요하다면 같은 시점에서라는 말을 넣죠.)
즉, 님의 직관으로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물건은 조약돌이든 무엇이든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 쩝.. 지난번 답변을 잘 이해 못 하셨군요...-.-;...-.-; 제 불찰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습니다. 만약 님께서 정말 비슷하게 생긴 조약돌 두 개를,, 혹은 기계로 똑같이 깎은 돌 두 개를 가지고 "이것이 아까 그것"이라고 저를 속이신다면 저는 그냥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그 옛날 낙지 이야기 때처럼, 저에게 있어 두 돌은 둘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였지요. 전 둘이 다를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못하니, 둘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돌이 옮겨오지는 못했을 거 같은 상황에서, 같은 돌을 보았다면, 저는 그 돌이 둘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 둘인지 아닌지는 알 도리가 없죠. 그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둘을 비교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두 돌을 한꺼번에 보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저는 돌이 두 개라고 확신하고 둘을 비교할 것입니다. 어떻게 비교가 가능하냐고요? 둘이 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저는 둘을 비교할 수가 있고, 어쩌면 다른 차이점들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정리하자면,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에야 저는 두 돌의 존재를 알았고, 그때는 이미 서로 다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세상에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서로 같지 않은 것입니다. 색이 완전히 똑같은 조약돌, 모양이 완전히 같은 조약돌이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공장에 가 보십시오. 님이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예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님은 손에 쥔 두 개의 제품이 다른 것이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서로 다른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요.
34.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답변 내용,
=>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지요. "세상을 정오로 보지 말고, 호오의 관점에서 보라! 그래야만 "답"이 있을 것이다"라고요. 전 지금 님이 이러한 관점의 사용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좋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마음에 별루 안 드시는 모양이죠?
말 자체로 마음에 안들 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얘긴 제가 위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렸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에 있어, 욕망과 님이 말씀하는 자유와 그 자유로운 선택을 왠지 항상 믿기는 어렵다는 식으로요.
아무튼 그 부분은 계속 얘기해 보면 뭔가 드러나겠죠.
그런데, 지금의 얘기는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지금 위 글을 글자모양 그대로 보는 것도, 그리고 그 글이 무슨 의미라고 이해하는 것도 모두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일뿐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글도 아니라는 셈이 되는 거겠죠.
라는 건데…….
말하자면 님의 주장도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어째서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함이나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고에서 떠나 호오로 향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옮겨가야 하는 논리적 필연성이 있습니까?
님의 의견을 추측할 때, 지금 정확한 얘기는 "우리는 현재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모르고 있다."라는 정도의 말이 될 것 같은데(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논의를 위해),거기서 바로 어째서 정오를 버리고 호오로 가야 하는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특히 님이 얘기하는 구분 없는 욕구의 충족으로 말입니다.
이건 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아요.
소피스트님은 제가 보기엔 뭔가 건너뛰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의견을 보여 주시죠.
=> 네 건너뛰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 추론해 보면 오래지 않아 나올 내용이기도 하지요.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는 한도 내에서 분석해 보면 우리가 아는 것은 호오의 관점으로 귀결되고 더 이상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는 것으로 보이는 최종의 것인 호오의 관점에서 보자는 이야깁니다. 아무 얘기도 아니지요?
그럼 제가 문제하나 낼게요. *^^*(헛.. 정말 발칙한 놈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아는 듯이 선택을 하며 산다. 난 대체 무엇을 아는 것인가? 난 무엇을 선택한 것인가? “
단, 확실한 것으로만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멋진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Bye~!
philebus(청년학도)
잘 보았고요,
오늘은 지금까지 주고받은 얘기에서 나타난 소피스트님의 주장을 나름대로 일단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님의 주장은,
1.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는 것.
2. 여러 가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이 있고, 자유에 의해(자유롭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것.
3. 어느 행위나 본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며, 그 행위 시점까지 가지고 있는 본인의 능력의 총체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4.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
이 정도인 것 같은데…….
그리고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했지요.
- 새로운 생각과 더 옳은 사고를 위한 기반이 될 한 걸음을 디뎌보자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쌓아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설득적인 주장, 직접적인 확인이 가능한 사실부터 찾아나가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실들이 설득적인 주장, 설득할 수 있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 그 설득을 위해서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유의 예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의 예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민감한 부분이기에 오히려 당장은 설득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간다는 것이 어떤 힘의 발휘하는지는 배척받던 과학이 지금 어떠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님이 말씀하는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란 위 정리 중 1-3번인 것 같습니다.
위의 내용이야말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해서 제게 말씀해 온 것들이니까요.
그것들을 토대로 그 밑에 있는 새로운 생각과 더 옳은 사고로 나아가자는 말씀인 것 같아요.
(지혜로움이나 올바름이란 어휘를 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았는데, 위에서는 더 옳은 사고란 말을 사용했군요.)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훌륭하디. 훌륭한 소피스트님.
위 4번에 의하면 1-3번도 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하면 님 자신에게도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님은 그것을 가지고 위에서처럼 이렇게 말씀하는 거죠.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쌓아보자는 것이지요......라고요.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보다 조금 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절대적인 진실을 모르는 이상, 현재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을 그렇다고 믿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지,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이 될지, 아니면 조만간 가장 나쁜 것으로 변할지 아무도 모르죠.
그냥 한번 짚어본 겁니다.
님의 걸음이 하도 빠른 것 같아 발목을 잡아 좀 더디게 하려고요.
저는 토론의 승리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무언가 한 가지라도 배울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뒤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저는 님의 주장 1-3번이 현실을 관찰하고, 또는 책을 통하여, 또는 남에게 들어서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4번 주장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어 있죠.
그런데, 경험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얻어진 결론은 4번과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얻을 수가 있죠.
그건 무슨 얘기냐 하면 인간들은 경험, 경험의 해석, 앞으로의 선택을 위한 피드백, 논리적 직관 등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얘기가 통하는 거고요..
그리고 그렇게 얘기가 통할 경우, 4번과 같은 주장은 신중하게 사용해야죠.
제가 1-3번 주장의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행위로 환원시켜 그 행위는 결국 그 사람에게 있어 좋다고 생각되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은 님의 얘기대로 일단 간편한 주장이죠.
제가 보기엔 좀 견강부회이긴 하지만 자유라는 말을 님의 방식대로 쓴다면 옳은 주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겠죠.)
그런데 님은 제가 보기에 지금 그 주장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제의 28번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그렇게 느껴집니다.
님의 답변은 말하자면 위 1-3번 주장을 강조한 거죠.
하지만 제 글 속에는 결과가 나쁠 것을 알면서, 또는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면서 나중에 생각했을 때 좋지 못한 결과가 오는 그런 선택을 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님의 주장을 다 수용하는 말들을 그 안에 써놓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거죠.
그럼 질문의 의도는 무엇이냐 하면, 님과 같은 주장만으로 욕망에 대한 얘기를 끝내도 좋으냐 하는 겁니다.
즉, 욕망은 전체로 하나이며 모든 사람은 그 욕망을 자유롭게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으며, 또 욕망에 따른 행위 직후에 필연적으로 큰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그런 욕망도 있고, 따라서 욕망도 구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제 말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답변이 없는 거죠.
그리고 위 4번과 같은 주장으로 올바름이나 도덕이나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배움의 필요나 하는 것들을 봉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4번을 강력히 주장하면 1-3번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님의 주장대로 사람들을 설득했을 때 무슨 실익이 있는지, 어떤 좋은 점이 있을 건지 매우 막연한 거죠.
님의 주장대로면 남을 비판할 필요도 없죠. 비판의 근거가 없으니까.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건드릴 이유가 없죠.
헤로인을 맞든, 중학생이 몸을 팔아 귀걸이를 사든, 아비에게 폭행을 하든 말이죠.
제가 보기엔 모두가 님의 말대로 자유롭게 행동했을 때, 각자 그 개인에게 어떤 결과가 올는지에 대해 충분한 숙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따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한번 생각해 볼까요.
하나하나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 뿐, 정말로 좋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된 의미에서 좋은 것이란 현실적으로는 항상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10억 원의 돈이 생긴다고 해서 그에게 꼭 좋은 일이 뒤따른다고 누가 장담할 것이며 금덩어리를 도둑맞았다고 해서 그에게 그것이 나쁜 일이 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라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절대 선을 부정하고 위 4번과 같은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주장만을 계속 녹음기처럼 되풀이한다면 그는 현실을 충분히 파악하기도 전에 곧바로 어딘가 천상의 논리로 올라갔다고 핀잔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한번 짚어보면, 도둑이 남의 금덩어리를 훔쳤을 때 도둑맞은 사람은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죠.
천상의 논리에 의하면 그것이 결국 해가 될지 반대로 득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도둑은 소피스트님의 말대로 하면 자유롭게 욕구충족을 한 거지만 그렇다고 그가 피해자에게 "금을 잃어버렸다고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라고 주제넘게 얘기할 처지는 아니죠.
왜냐하면, 그렇게 보면 그도 역시 금을 가짐으로써 그에게 좋은 일이 될지 반대가 될지 스스로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금을 훔친 게 되기 때문이죠.
즉, 당사자끼리는 해를 당한 자와 해를 입힌 자가 되는 겁니다.
어떠한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아도 말씀이죠.
또 사람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한 것을 선택한다는 말과 같은 비중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을 피한다는 말이죠.
그 말은 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는 황금률로 표현될 수도 있는 거고요.
해를 입혔다는 것은 그가 피하려고 하는 것을 그에게 주었다는 얘기가 될 테고요.
그리고 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반드시 그 생각에 의거해서 무슨 행동이 나오게 마련이죠.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통상은 경찰서에 고발하는 것이 되겠죠.
말하자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행위는 대체로 범죄가 되죠.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도둑질하는 사람 자체로만 보아도 천상의 논리를 적용하면 그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즉, 금을 훔쳐서 보유하는 것이, 또는 팔아서 쓰는 것이 그에게 정말로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는 모르죠.
하지만 훔칠 당시에 그는 타인이 자신으로 하여금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겠죠.
그리고 이런 것이 제가 말하는 구분되어야 하는 욕망의 한 종류이고, 구분되어야 할 필요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타인의 체험이나 대중 매체나 책과 같은 간접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좋고 나쁜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배울 수 있고, 하나하나의 간접경험에서 배운 바를 함께 모아 일반화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마약이 나쁘다는 것을 TV를 통해서 거듭 보고, 중독자의 얘기도 들어보고, 유통경로도 알고, 마약을 할 때와 그 후의 느낌을 자세히 들어보면 마약은 결코 입에 댈 것이 못 된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언젠가 마약에 관해 호기심을 가장한 욕망이 다이어트와 같은 핑계를 매개로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겠죠.
반면에 그러한 간접 체험이 전혀 없던 사람은 마약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중독자가 될 수도 있죠.
제 이야기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무시하고 소피스트님 차원의 주장을 하여, 위와 같은 모든 욕구 충족이 동등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경우 어떤 좋은 점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얘기고요.
그다음으로 무엇보다 님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할 경우 우선 그 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는 거죠.
지난번에 드린 첫 질문이,
1.우리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어떤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설득하거나 길을 들이거나 변화시키거나 이용하려고 한다면 우선 그 대상에 대해 필요한 만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면 우린 그 대상에 대해 어떠한 의미 있는 행위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것이었죠. 그리고 죽 그 아래까지 잘 긍정하시다가 욕구를 구분한다는 부분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대답 이후 지금까지는 맨 위 1-3번 주장만 되풀이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님은 이런 주장도 했어요.
이유도 없는 해야 한다들을 쓸어버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따질만한 것들은 따질 만하다고 인정해 버리고,
좀 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주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라고요.
여기서 "좀 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주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라는 건데
그러려면 좀 더 세밀한 관찰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자유로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는 말만으로 어떻게 그런 기준을 만들겠어요?
소피스트님의 주장이 현실을 관찰하여 나온 결과라면 저도 현실을 살펴본 결과 욕구에는 종류가 있고, 어떤 욕구는 인간 개인이나 사회가 더 나아지는데 필요하지만 어떤 욕구는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거죠.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설득 대상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인간을 안다는 것이며 인간을 알 수 있는 길은 곧 그 정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님은 욕구충족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만 강조할 뿐 무엇으로 어떤 욕구를 각각 충족시키는가, 어떤 욕구들은 서로 반대이며 그 욕구 소유자로 하여금 선택을 위한 어려운 판단을 요구하고 있고, 인간은 보다 나은 도덕적 판단을 위해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거죠.
제 말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님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긍정해 주지만 그것으로는 도저히 충분치 못하고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고요.
다음은 대중의 설득에 관한 문제인데, 더 이상 뚜렷이 논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소피스트님은 처음에, 철학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시 다른 종류의 설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고 했고, 어제는 그런 철학은 그만두자고 한 거죠.
소피스트님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어떤 뜻으로 새기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거나 쓰는 것과 떠오른 것을 나름대로 타당성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음미하여 말하거나 쓰는 것은 다르고, 지금과 같은 토론 시 생각한다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 님이 어떤 스타일인지 모르겠지만 위 설득에 관한 말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면 머리에 떠오른 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어요.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님은 상당히 명석한 것 같은데, 생각을 하고 쓴 것이라면 그 명석함으로 보아 그렇게 쉽게 말을 바꾸어야 할 그런 말을 애초에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죠.
아무튼 철학이 대중을 설득한다는 문제는 단지 님의 견해에 제가 질문을 한 것뿐이니 그것으로 현재의 철학과 같은 것은 그만두자는 주장을 바로 펼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은 극히 일부분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저로서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님과 따져볼 얘기는 없는 것 같지만 님이 다른 얘기를 하신다면 들어 보죠.
그리고 33번 질문도 제 의도를 이해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다시 설명드리면 이렇죠.
소피스트님이 전에 보았던 하천이나 강변을 다시 기억에 떠올려 보시라는 겁니다.
TV에서 보았던 장면도 좋고요.
그리고 많은 자갈도 함께 떠올려 보시고요..
그런 강과 자갈들이 세계도처에 널려 있다고 확대해서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많은 자갈들 중에서 모양과 색이 완전히 똑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판단해 보시라는 거죠.
경험적으로 비교 관찰한다는 문제가 아니고요.
완전히 똑같다는 것은 그 사물들을 같은 각도로 놓고 보는 한 모양과 색이 똑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죠.(복잡함을 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물에 대해서라고 한정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갈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똑같은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지, 있을 수 없는지 말입니다.
답변은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할 수 없다, 모르겠다는 것들 중 하나가 되겠죠.
그리고 제게 마지막에 주신 질문에 답변을 해야겠네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아는 듯이 선택을 하며 산다. 난 대체 무엇을 아는 것인가? 난 무엇을 선택한 것인가? “
답변은 그때그때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나는 좋은 것이라고 알며 그것을 선택한다.는 거죠.
이 답변이 님에게는 마음에 들 것 같은데…….
님의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해 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계속 말씀드렸듯이 님의 이 말은 별 다른 게 아니죠.
님의 기분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님의 주장은 멋진 발견입니다.
저도 의미를 알아요.
그런데, 그 이상으로는 나가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이죠.
님의 주장 경계 끝까지는 위 4번, 즉,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 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 보려 하면 이 말을 내세워 불필요하다고 막는 것 같다는 말이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도덕인지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 것을 말입니다.
일단 님의 말이 틀리는 것은 아니에요. 저도 올바르다거나 도덕이란 말을 직접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님과 같은 분을 상대하면서 그 정도로 촌스럽진 않죠.
하지만 님이 현실을 토대로 무언가를 알아보려고 한다면 불가지론을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제 말은 인간을 모르면 인간을 올바르게 설득할 수도 없고 인간을 알려면 그 정신을 탐구해 보아야 하는데, 소피스트님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란 곧 욕구이니까 욕구를 잘 살펴봐야 하지만 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님과 같은 주장을 사람들에게 설득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님은 알 수가 없다는 얘기가 돼요..
왜냐하면 자유롭게 욕구 충족하는 존재라는 것 외엔 님이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죠.
어떤 욕구를 어떤 자유에 의해 선택하며, 그리하여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결과는 다시 어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지, 주변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님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소피스트님의 주장은 일단 타당하지만, 인간을 알거나 설득하는 데 있어 그것은 단지 기초공사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
대중의 설득 문제는 더 이상 얘깃거리가 없다는 것.
똑같은 자갈의 문제.
오늘은 질문이 아니라 설명조로 썼습니다.
님이 지금까지의 제 질문 전체의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기에 말이죠.
님의 자유로운 답변을 들어보고 다시 질문을 드리든지 설명을 하든지 해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