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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소피스트 4

소피스트

*^^* 7


예리하십니다. 이래서 님과는 이야기하는 보람이 있어요.
맞습니다. 기초공사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반이 될" 한 걸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 쉽게 말하자면 "기초공사 좀 제대로 해 보자"는 거였지요.
그것을 아셨다면 제가 님에게 이게 옳다 저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특별히 드리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단지 다른 모든 것들을 단정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위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좀 더 열린 생각으로 접근할 수 있으시길 바랄 뿐이지요.
이것이 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에 있어 저의 관점이 주는 이점입니다.

.. 기초공사이긴 한데……. 님의 기초가 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니 보수 좀 해볼까요? 우리의 명석하디 명석한 청년학도님.*^^*(~ 주제 넘는군..-.-;)

"1-3번도 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하면 님 자신에게도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

=> 설익게 알아들으셨군요. 지금 저에게 절대적 진실이며, 타인에게는 물론 절대적 진실이 아니나, 다른 여러 것들 보다 보편적인 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누가 감히 이게 절대적 진실이라는 것입니까! 제가 혼내주겠습니다!

"경험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얻어진 결론은 4번과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얻을 수가 있죠.
그건 무슨 얘기냐 하면 인간들은 경험, 경험의 해석, 앞으로의 선택을 위한 피드백, 논리적 직관 등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얘기가 통하는 거고요.
그리고 그렇게 얘기가 통할 경우, 4번과 같은 주장은 신중하게 사용해야죠. “

=> ……. 제가 보기에는 4번이 그 공통분모라고 부르신 것과 부딪히지는 않는 것 같군요. 제가 이 말씀을 안 드려서 그런가……. 님은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주변의 모든 것들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하고요. 답을 구하셨습니까? 한번 저에게 들려주시겠어요? 님이 제시하신 증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셨을 리는 없으니까.) 이것도 확인할 수 없는 사실 중의 하나겠지요. 이것도 인정하지 마십시오, 학문적으로는. 이건 4번에 포함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그럼 가정해 봅시다. 님 주변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래도 있는 것 같다는 건 변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들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실 뿐이라고 가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님은 위의 공통분모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거 있기나 한 건가요?
잘 안 될 거 같으니 넘어가 보죠. 다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떻든 존재하는 것처럼 믿어지기는 하니까, 별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이렇게 가정할 수밖에는. 이 경우, 공통분모는 무엇인가요? "존재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것들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성향."입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역시 모르겠지만, 있는 것처럼 믿어지니 있는 것이라고 합시다. 이젠 되셨습니까? 4번을 그런 것 같은 사실로서 인정하였지만, 공통분모의 존재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이야기에서(머..지금도 그러긴 했지만..-.-;) 이 부분은 빼고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맨 처음의 존재의 가정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요.

"그 욕망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으며, 또 욕망에 따른 행위 직후에 필연적으로 큰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그런 욕망도 있고, 따라서 욕망도 구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제 말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답변이 없는 거죠. “

=> 흠…….이번에는 조금 갑갑합니다. 그 필연적이라는 것이 욕망에는 결부될 수가 없습니다. 님의 말씀 마다나 행위에 대한 것이고, 그것도 그저 높은 확률일 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각각의 욕망은 어떠한 행동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사람마다 같은 것은 아니지요. 정말 사람 수 * 시간만큼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구분하실 겁니까? 어떤 욕망이 그의 행위를 불러왔는지 어떻게 알아내실 겁니까? 행위를 한 당사자도 님이 질문할 때 즈음엔 잘 모를 텐데요? 방법이 있으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그렇다면 저는 모든 생각을 때려치우고 그 방법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발 힘겹게 안 되는 걸 하려고 좀 하지 마십시오. 욕망을 어떻게 알겠다고 그걸 구분까지 하겠다는 것입니까? 님이 아실 수 있는 건 님이 보신 행위, 뒤얽힌 욕망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행동 패턴을 분석하십시오. 전 이거 하지 말자고 한 적 없습니다. 실제 님이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의 욕망을 이야기해 보시겠습니까? 제 행동을 분석하지 마시고, 그냥 보시는 대로요. 전 안 된다는데 피자 한 판 걸겠습니다.

"님의 주장대로 사람들을 설득했을 때 무슨 실익이 있는지, 어떤 좋은 점이 있을 건지 매우 막연한 거죠.
님의 주장대로면 남을 비판할 필요도 없죠. 비판의 근거가 없으니까.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건드릴 이유가 없죠.
헤로인을 맞든, 중학생이 몸을 팔아 귀걸이를 사든, 아비에게 폭행을 하든 말이죠.
제가 보기엔 모두가 님의 말대로 자유롭게 행동했을 때, 각자 그 개인에게 어떤 결과가 올는지에 대해 충분한 숙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따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인 것 같아요. “

=> 크악! 어떻게 이런 결론이! 제 문장의 무능함에 울고 싶을 지경입니다. 비판? 물론 못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난 저게 싫어"는 가능합니다. 설득도 당연히 할 수 있지요. 행동 패턴을 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것을 보이고, 그것이 그에게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보이면 되니까. 이것도 맨날 하는 일 아닌가요? 왜 비판하고 도덕 운운하면서 떠들어야만 건드릴 수가 있는 겁니까? 맘에 안 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님은 얼마든지 건드릴 자유가 있습니다. 깡패들도 마찬가지냐고요? 물론이지요! 또 지가 하겠다는 데 어쩌겠습니까? 님이 패주시기라도 할 겁니까? 맞는 수밖에요.-.-;
제가 보기엔 모두가 저의 말대로 자유롭게 행동했을 때, 각자 그 개인들이 어떤 결과가 올는지에 대해 충분한 숙고를 할 거 같습니다. 제가 그걸 대신해야 합니까? 대신할 수나 있습니까? 내 거 숙고도 완전히 못하는 주제에요? 님은 하실 수 있으세요? 우리……. 제발……. 못하는 거 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행위는 대체로 범죄가 되죠.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도둑질하는 사람 자체로만 보아도 천상의 논리를 적용하면 그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 금을 훔쳐서 보유하는 것이, 또는 팔아서 쓰는 것이 그에게 정말로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는 모르죠.
하지만 훔칠 당시에 그는 타인이 자신으로 하여금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겠죠. “

=> 훔치고 싶은데 어쩌겠습니까. 훔치고 싶어 할 수밖에요. 그러나 훔치고 싶다고 훔치는 것은 아닙니다. 제발 이걸 하나로 묶지 마세요. 그 사람은 물론 "천상의 논리(?)"로 보아 무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훔치고 싶어 졌다는 것은 알아요. 사실인데 어쩝니까? 그러나 훔치지는 않지요. 이유야 많겠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그게 범죄라는 점을 들 수 있겠군요. 범죄? 별거 아닙니다. 다들 "싫어해서" 그거 하는 놈은 몰매를 때리자고 하는 것이 범죄입니다. 맞기 싫으면 안 하는 수밖에요. 욕구를 구분하는 신적인 일을 안 해도 얼마든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타인의 체험이나 대중 매체나 책과 같은 간접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좋고 나쁜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배울 수 있고, 하나하나의, 간접경험에서 배운 바를 함께 모아 일반화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마약이 나쁘다는 것을 TV를 통해서 거듭 보고, 중독자의 얘기도 들어 보고, 유통경로도, 알고, 마약을 할 때와 그 후의 느낌을 자세히 들어보면 마약은 결코 입에 댈 것이 못 된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언젠가 마약에 관해 호기심을 가장한 욕망이 다이어트와 같은 핑계를 매개로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겠죠.
반면에 그러한 간접체험이 전혀 없던 사람은 마약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중독자가 될 수도 있죠. “

=> .. 동물이 간접체험을 못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맞습니다. 간접이네 직접이네 하지만, ""의 관점에서는 "경험했고,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비추어 판단하고 새로이 알고 있는 것으로 편입시킨 것"이지요. 전 일반화는 늘 하는 것이라 했지, 그게 쓸모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행동 패턴과 결과를 분석하는 행위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이것도 욕망의 구분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마약에 취해 산 것이 나쁜 것입니까? 전 그것을 싫어하지만, 그게 나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군요.

"…….긍정하시다가 욕구를 구분한다는 부분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대답 이후 지금까지는 맨 위 1-3번 주장만 되풀이되고 있는 겁니다. “

=> 님이 못 알아들으시고 질문하시는 것 같기에..*^^* 지금 봐도 이해하신 거 같지는 않군요.

"여기서 "좀 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주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라는 건데
그러려면 좀 더 세밀한 관찰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자유로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는 말만으로 어떻게 그런 기준을 만들겠어요?
소피스트님의 주장이 현실을 관찰하여 나온 결과라면 저도 현실을 살펴본 결과 욕구에는 종류가 있고, 어떤 욕구는 인간 개인이나 사회가 더 나아지는데 필요하지만 어떤 욕구는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거죠.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설득대상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인간을 안다는 것이며 인간을 알 수 있는 길은 곧 그 정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님은 욕구충족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만 강조할 뿐 무엇으로 어떤 욕구를 각각 충족시키는가, 어떤 욕구들은 서로 반대이며 그 욕구 소유자로 하여금 선택을 위한 어려운 판단을 요구하고 있고, 인간은 보다 나은 도덕적 판단을 위해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거죠.
제 말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님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긍정해 주지만 그것으로는 도저히 충분치 못하고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고요. “

=> ~론 그렇습니다. 전 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기 어려운 일일뿐더러,, 그렇기에 범용적인 설득력도 갖지 못하니 좀 다른 방법을 써보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 더 연구하다 보면 멋진 것들이 더 나올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나올 수 있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는 "내가 무척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옳기에 한다." 라고요? 그게 옳은 게 맞습니까? , 이것도 모르고 하니 세월이 흐른 후 운이 좋지 않으면 후회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님께서 무언가 특수한 행동패턴과 그 결과를 실제적 이유로 제시하고 싶으시다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도 생각해 보고, 함께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대중의 설득에 관한 문제인데, 더 이상 뚜렷이 논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소피스트님은 처음에, 철학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시 다른 종류의 설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 되자고 했고, 어제는 그런 철학은 그만두자고 한 거죠. “

=> 누차 말씀드렸지만,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들 인정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전화선을 쓰는 관계로 전의 글을 꼼꼼히 읽어 가면서 답변 못 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다른 종류의 설득은 누구나 한다는 것은 "이게 좋은 거야!"라고 막무가내로 이야기하는 것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둘이 같은 것이 아니죠. 딴에는 구분해서 쓴다고 했는데 이상했던 모양이군요. 또 저는 즐거움을 주는 학문을 그만두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두자는 것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그만 두자는 것이었지요. 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점에는 동의하시는지요?

"완전히 똑같다는 것은 그 사물들을 같은 각도로 놓고 보는 한 모양과 색이 똑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죠.(복잡함을 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물에 대해서라고 한정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갈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똑같은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지, 있을 수 없는지 말입니다. “

=>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그런 의미로 친다면……. 저의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그러나 공장제품 중에는 제가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한 말도 이건데...-.-; 역시 저는 착실히 대답이나 하고, 생각은 님이 하시는 게 나을까요?)

"답변은 그때그때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나는 좋은 것이라고 알며 그것을 선택한다. 는 거죠.
이 답변이 님에게는 마음에 들 것 같은데…….
님의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해 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계속 말씀드렸듯이 님의 이 말은 별 다른 게 아니죠.
님의 기분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님의 주장은 멋진 발견입니다.
저도 의미를 알아요.
그런데, 그 이상으로는 나가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이죠.
님의 주장 경계 끝까지는 위 4, ,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해 절대적인 진실을 알 방법은, 혹은 그게 절대적인 진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 '믿어지는 것'을 믿을 뿐이다. 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 보려 하면 이 말을 내세워 불필요하다고 막는 것 같다는 말이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도덕인지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 것을 말입니다.
일단 님의 말이 틀리는 것은 아니에요. 저도 올바르다거나 도덕이란 말을 직접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님과 같은 분을 상대하면서 그 정도로 촌스럽진 않죠.
하지만 님이 현실을 토대로 무언가를 알아보려고 한다면 불가지론을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

=> ! 틀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답 중의 하나는, ""그때그때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나는 좋은 것이라고 알며 그것을 선택한다."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입니다. 그리고 이건 여러 답 중의 하나이고, 님이 님의 생각을 이야기하셨다면, 저는 그걸 읽어보고 판단해 보았을 것이나, 님의 생각이 아닌 모양이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요.-.-;
. 불가지론은 정면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생각 없는 자들, 말장난 좋아하는 자들의 행동일 뿐이지요. 불가지론은 바탕에 깔 때에야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지론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 물어보겠습니다. "왜 그런데?" 무언가 대답을 하면 또 물어보겠습니다. "왜 그런데?" 또 대답이 나오면 또 물어볼 겁니다. "왜 그런데?" 비생산적인 질문이라고요? 그러나 잘못된 질문도 아니지요. 다 알면 대답하면 될 게 아닙니까? 그러나 모르지요. 이것이 불가지론입니다.. 나는 모른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만한 것. 데카르트는 말했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유의 제 일 법칙이라 하던가요? 번역이 잘못된 건지, 데카르트 생각이 그 정도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좀 바꾸겠습니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요. 이런 것부터 시작하자는 겁니다.(왜 이런 걸 하다 말았는지 몰라...-.-;) 이것이 불가지론을 바닥에 깐 채로,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부터 시작하기입니다.

~ 오늘도 무지막지하게 길어졌습니다.
벌써 다 보셨다고요? 꼼꼼히 보셨어요?
그러셨으면 좋을 텐데... 그럼 이만~!


philebus(청년학도)

문답 4

, 아무튼 소피스트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재미는 있습니다.
님의 말을 제가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요.
달리 말하면 알아듣기는 하겠는데, 왜 그렇게 그 점을 열심히 강조하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먼저 그 부분에 대해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35. 전에 님의 말씀 중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니네 다 자유롭다! 맘대로 해라! 한다면 이에 설득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거나 "! 내가 너희들을 설득하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니 맘~대로 해라!" 라고 한다면? ~! 아마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없을 것입니다. 어떤 규범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자유에 따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제가 반론한 것은,

혹시 단지 반박을 위해서 사용하신 건 아닌지…….
알맹이도 없고 현실성이 없으니까 말이죠.
지금의 토론이 자기 논리나 동어반복과 같은 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보여주는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컨대 그 말을 들은 어떤 시민이 이렇게 되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왜 지금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거였죠.

현재까지의 님의 주장도 위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제게는 생각되는 겁니다.
어제 제가 정리한 님의 주장은,

1.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는 것.
2. 여러 가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이 있고, 자유에 의해(자유롭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것.
3. 어느 행위나 본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며, 그 행위 시점까지 가지고 있는 본인의 능력의 총체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이건데, 이 말을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이 저 위에 있는 자유 얘기와 비슷하다는 거죠.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욕구를 자유롭게 충족시켜라." 라고 외쳤는데,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은 현재 그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니냐는 거고요.
그렇다면 어제는 제가 님의 주장을 기초공사라고 했지만, 지금 보면 기초공사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 는 거죠.
그러니까 소피스트님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외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될 것을 바라고 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한 거죠.
아니면 누군가 이렇게 반문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얘기도 되죠.
"그래요? 그래서 어쩌라고?, ????? “

36. 다음은 욕구의 구분에 대해 질문을 드리죠.

승려들은 세속적인 모든 즐거움을 끊고, 그런 즐거움을 얻으려는 욕구조차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

소피스트님의 입장에서 보면 승려들의 그런 의지도 역시 욕구의 하나이며, 그것을 그들이 끊으려 하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향한 욕구와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거겠죠.
그런데 제게는 그 각각의 욕구가 향하는 대상이 너무 달라 보이는 겁니다.
승려들의 의지는 그들의 말을 빌면, 적멸이나 열반이나 깨우침이나 이런 걸로 향하고 있고, 그들이 끊어내려는 욕구는 술이나 여자나 과식이나 명예욕이나 이런 걸로 향하고 있거든요.
이런 걸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님의 주장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이 너무도 분명하여 구분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색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구분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들리거든요.
그리고 끊어 없애 버리려고 하는 욕구는 주체로써, 그 끊어 없어짐의 대상이 되는 욕구는 주체가 아닌 타자로써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무얼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죠.
정말 어떤 경우에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지또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건지 다시 생각해봐 주시죠.
저는 현재 구분만을 얘기하고 있을 뿐, 승려의 욕구나 세속적인 욕구의 가치문제는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37.그리고 불가지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불가지론입니다.. 나는 모른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님이 말씀하는 불가지론이란 "우리는 알 수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현재 모르고 있다."라는 말입니까?

38. 지난 34번 질문에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말하자면 님의 주장도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어째서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함이나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고에서 떠나 호오로 향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옮겨가야 하는 논리적 필연성이 있습니까?
님의 의견을 추측할 때, 지금 정확한 얘기는 "우리는 현재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모르고 있다."라는 정도의 말이 될 것 같은데(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논의를 위해),거기서 바로 어째서 정오를 버리고 호오로 가야 하는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특히 님이 얘기하는 구분 없는 욕구의 충족으로 말입니다.
이건 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아요.
소피스트님은 제가 보기엔 뭔가 건너뛰신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님이 대답하기를,

=> 네 건너뛰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 추론해 보면 오래지 않아 나올 내용이기도 하지요. 라고 하신 거죠.

그럼 무엇을 건너뛴 건지 간단히 한번 말씀해 주시죠.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제가 질문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욕심이 많아 한 번에 많이 알려고 해서 그런 거죠.
이제부터는 질문 개수도 줄이고, 주제도 단일한 것으로 한정해서 좀 집중을 해봐야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좀 얻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소피스트님도 동의해 주실 테죠?

이만 안녕히.

 

소피스트

Re: 문답4

35. 어쩌라는 거냐고요? 그렇게 당연한 것을! 맘대로 하라는 거죠 뭐. 나도 맘대로 할 테니까 니도 맘대로 하라고요. 뭐 대놓고 그런 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그냥 말해주겠습니다. "아니~ 그냥 니 맘대로 살라고……."머 그거 말고 다른 할 말이 있나요? 그리고 그 사람은 내 말에 따라 살겠지요. 본래 제 맘대로 살던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니까.
그러나 기초공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그러고 살아가되,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어이없는 일이고 철학을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지요. 이걸 바로 잡는 것은 기초공사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그걸 인식하게 만드는 데에는 위와 같은 설득을 써서는 안 되겠지요.

36. 승려들의 의지는 그들의 말을 빌면, 적멸이나 열반이나 깨우침이나 이런 걸로 향하고 있고, 그들이 끊어내려는 욕구는 술이나 여자나 과식이나 명예욕이나 이런 걸로 향하고 있지요. 그리고 열반이나 깨우침은 내적 만족으로 연결되어 있고,, 여자나 과식이나 명예욕도 내적 만족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님은 혹시 필름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색상을 인버트 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다른 색을 보게 되지만, 마찬가지로 다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이 처음부터 필름 같은 세상을 보아왔다고. 그래도 그 사람은 님과 같은 곳을 가리키며 같은 색 이름을 말할 것입니다. 님은 그가 님과 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그렇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가 어떤 욕구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타인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라는 거지요. (~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님의 욕구라면 얼마든지 구분하십시오. 뭐 하라고 안 해도 하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남을 보면서 어떤 결과는 어떤 욕구 때문이다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은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구분일 뿐이니까요. 제가 드리고픈 말씀은 그것입니다. (도움이 될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저는 집에서 닦달하는 게 싫어서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었답니다.)

37. 당연하지요. "우리는 현재 모른다. 이것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모를 거 같기는 하다."이죠. 혹시 압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될는지? 근데 지금 생각에는 암만해도 모를 거 같네요.

38. 뛰어넘은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것이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논의입니다. 호오는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처해있는 State일 뿐이지요. 무언가 정당화를 하려면 쓸모없는 설득의 과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설득은 불가능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호오를 기준으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지금 나는 oo를 원한다." - 여기에는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호오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oo을 원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가 있고, 모든 행동이 설명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했다." 이것이 어떤 행동에 대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이라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의혹을 제기하더군요.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것이냐고요. 저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러자 그는 묻더군요. 그럼 사회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도덕과 윤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요. 님도 그렇게 물으실 것입니까? 이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도덕이나 윤리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의무를 규정하고 책임을 부여합니까? 이것이 회의론에 따른 규범의 부정이 됩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틀마저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도덕과 윤리는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질서는 힘으로 지키면 됩니다. 모두들 모여서 하고 싶은 대로 몰매를 때리면 되는 것이지요. 모두들 하고 싶은 대로 할 때, 그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기 싫어하게 될 강력한 이유를 부여해 주면 되는 것이지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는 본래부터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이는 거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호오로 우리는 모든 문제를 풀 수가 있습니다. 호오는 적어도 확실한 것이니까요.

정당화(이거 정오라고 안 썼다고 무슨 소린가 하시지는 않으시겠져?)를 버리면 일이 쉬워집니다.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정당화 없이 어떻게 서로 설득하느냐고 누군가가 질문했던 기억이 있는데, 위의 글을 읽어보시면 답을 아시겠죠?

그럼 이만 줄입니다.
짧으니까 좋네요…….*^^*


philebus(청년학도)

문답 5

이번 답변을 보니 소피스트님의 생각이 더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님은 세상을 좀 간편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설명을 살아생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나도 어쩌면 죽기 전에 님의 설명을 차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을 굳이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면 솔직히 저로서는 크게 관심을 두고 싶지는 않네요.
왜냐하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님의 설명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보다 더 잘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가 전혀 없는 걸로 보인다는 거죠.
여기서 잘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죠.
돈을 버는 일도, 권세를 잡는 일도, 명예를 얻는 일도, 건강을 유지하는 일도, 아니면 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일도, 내가 그 무엇을 하려 해도 님의 얘기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님의 얘기 주제인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자 해도 지금의 말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님 자신이 답변에서 지금과 같은 설득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아무튼 님이 기초공사라고 하니까 저도 동의해 드리죠.
사이버 상에서 사귄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우린 토론의 친구이고, 친구의 일은 함께 하는 거라니까요.
하지만 만약 님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설득시켜 그 사람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인식하게 만드는데, 지금과 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설득 방법을 발견했다면 우선 제게 먼저 알려주시고, 시험 상대로 삼아 주시길 부탁드리죠.

39. 그리고 욕구의 구분 얘기는 님이 더 이상 하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님이 원치 않으면 저도 억지로 할 수는 없죠.
그런데, 님의 답변 중에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는 데가 있어서 할 수 없이 한번 물어야겠습니다. 다음 부분인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가 어떤 욕구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타인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라는 거지요. (~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님의 욕구라면 얼마든지 구분하십시오. 뭐 하라고 안 해도 하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남을 보면서 어떤 결과는 어떤 욕구 때문이다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은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구분일 뿐이니까요. 제가 드리고픈 말씀은 그것입니다.

그럼, 축구 선수가 경기가 끝난 후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보고, 제가 "저 사람은 지금 갈증(마실 것에 대한 욕구)이 일어나 저렇게 물을 들이켜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생각이 되는 걸까요?
, 한강에서 물놀이 중에 깊은 곳으로 잘못 들어가 팔을 힘껏 휘두르며 허우적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지금 살려는 욕구로 인하여 저렇게 허우적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생각일까요?

40.불가지론에 대한 님의 대답은, "우리는 현재 모른다. 이것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모를 거 같기는 하다."이죠.

그럼, 사람들이 흔히 귀납법을 비판할 때 어제까지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랐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데, 위의 얘기도 마찬가지겠죠?
지금 아무도 절대적인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앞으로도 아는 사람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라고 말입니다.
저로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실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만약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하고 그를 다그친다면 그야말로 논리를 모르는 사람의 말이 될 거고요.

그런데 님은 이런 말씀을 했죠.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만한 것.

이 말은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주장할만한 얘기죠.
그리고 "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님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각자 자기주장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불가지론에 대한 님의 설명을 따르는 한 말이죠.

그럼,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위의 두 가지 주장은 같은 내용의 주장입니까? 서로 다른 내용의 주장입니까?

41.무엇을 뛰어넘었는가?? 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뛰어넘은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것이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논의입니다. 라고요.

절차상으로는 맞는 답변입니다.
하지만 제가 뜻하는 건너뜀은 조금 다릅니다.
위 논의 결과 님의 주장에 따라 욕구가 원하는 대로, 하고픈 것에서 시작하여 그렇게 행위를 함까지 사이에 있어야 할 것, 또는 있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음에 이어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쉬운 얘기를 하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도덕적인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아왔죠..
정직해야 한다거나, 나보다 약한 아이를 패주고 들어오니까 그 아이 엄마가 쫓아와서 어른 싸움이 된 다음, 약한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꾸중을 듣는다거나, 허락되지 않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든가, 아니면 그냥 남을 돕는 올바른 사람이 되라든가, 빌린 것은 되돌려주는 것이 올바르다든가, 해서 무엇이 올바른 행동이고 무엇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인지 그때그때 가르침 받으며 살아온 거죠.
그럼 여기서 누군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가르침 받아온 대로 정직하다든가, 규정을 지킨다든가 하는 각각의 행위 하나하나가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올바른 행위가 될 때도 있지만 반대가 될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전쟁 시 아군에게 정직한 것은 올바른 행위이지만 적에게 정직한 것은 오히려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옆집에서 빌린 돈을 갚는 것은 올바른 행위이지만 옆집에서 빌린 칼을 그 집에 사는 미친 아들이 달라고 할 때 주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올바름과 관련한 절대적인 진실을 알 수 없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행위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사람들이 그때그때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행위를 올바르다고 믿을 뿐이다.

이 주장에 동의하시는지,, 아니면 달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2.마지막 질문입니다.

TV에서 동물의 세계를 가끔 보면 아프리카 세렌게티 평원에서 생활하는 맹수들의 얘기가 나오죠.
풀을 뜯는 임팔라와 톰슨가젤이 나오고 그들을 사냥하는 치타가 나옵니다.
(보니까 이 얘기가 제일 자주 나오는 것 같데요.)
짐승 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치타가 전력 질주하고, 새끼 가젤은 지그재그로 도망치죠.
하지만 결국 앞발에 채여 쓰러지고 목을 물려 죽습니다.
치타 가족은 배를 채우게 되고, 배부른 새끼 치타는 그들끼리 놀죠.
그러나 재수 없을 때는 가젤을 잡자마자 하이에나가 등장합니다.
먹이를 잡느라 전력 질주한 치타는 지쳐서 잡은 먹이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순발력과 속도가 장기인 치타가 힘과 무리에서는 하이에나를 이기기 어려운 점도 있죠.
결국 애써 잡은 먹이를 내주고 물러나야 하죠.
새끼가 자라 발정기가 되면 어김없이 암컷은 냄새를 피우고, 수컷은 그런 암컷을 찾아내고, 쟁탈전을 벌여 암컷과 짝짓기를 합니다.
그리고 새끼를 4마리 정도 낳습니다.
어떤 때는 치타 새끼가 사자에게 물려 죽습니다.
치타나 표범 새끼는 사자에게 보이면 죽음이죠. 라이벌 관계라 그런가 봐요.

그리고 다른 동물도 나오는데, 독수리도 나오고 어류도 나옵니다.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이런 동물의 생활을 보면서 그들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결국 무엇에 집약되느냐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답변은 생존이라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 존재함을 위해서" 라는 거죠.
사냥을 위한 전력 질주도, 그 사냥을 피하기 위한 달아남도, 먹이를 빼앗는 하이에나도, 하이에나에게 다치기 싫어 먹이를 내주고 물러나는 치타도, 그리고 먹히는 가젤은 많은 새끼를 낳지만 치타는 그보다 적게 낫는 것도, 종으로써의 가젤과 종으로서의 치타가 계속 생존하기 위함이죠.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보존이 그들 행위의 대원칙이 되어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점은 동물의 일종인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배고프면 먹고자 하는 것도 그렇고, 병이 들면 낫고자 하는 것도 그렇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뭔가 무서운 것을 보았을 때 갖게 되는 공포도, 연애의 감미로움도,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깊은 모정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살고자 하는 욕망과 종족 보존을 위한 욕망, "이 땅 위에 계속 존재하고자 함"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너무 쉬운 질문이라고 언짢아하지 마시길…….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안녕히.

 

소피스트

Re: 문답 5

39. . 그럼요. 그게 진짜 불가지론의 진실인 걸요. 우째 압니까? 그걸?

40. 같은 주장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알고 싶다고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누가 알아다 갖다 주는 것도 좋죠.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하고 싶다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물론 제가 막고 싶다면 막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별로 막고 싶지가 않군요.
어떻게 보면 그렇겠군요.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만한 것."이라는 저의 말은 절대적 진리를 찾는 더 나은 길을 따르자는 저의 주장일른 지도 모르지요.
저는 "현재 모른다. 이것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모를 거 같기는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고 싶기는 하니까"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낮은 가능성에 매달려보는 거겠지요. 사실 별로 할 일도 없고…….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41. .. 제가 뭐라고 할지 아시면서 물어보신 거죠? 전 마지막 말에 긍정하겠지만, 위의 예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에서 정한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은 화자의 선택일 뿐, 칼을 빌린 사람이나, 적에게 정직했던 군인의 선택이 아니니까요.*^^*

42. 동물의 왕국이라……. 저도 가끔 보는 프로네요. 어릴 적엔 매일같이 봤는데 매일 비슷한 것만 하니까 질려 서리..*^^*
여기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생존. 의미가 큰 말입니다. 다들 죽기는 싫어하죠. 그러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동물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들은 "생존"을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갈까 하는 점입니다.(동물이 생각할 줄 모른다는 말씀은 당연히 안하실 거라 믿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생존"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단지 배가 고프니 먹고, 졸리니 잘 뿐입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도 확장이 가능할는지 모르겠군요. 우리의 모든 욕망들은 "생존"으로 귀결된다고요. 돈을 벌려는 것도, 학문을 얻으려는 것도, 명예를 바라는 것도 모두. 어떻든 우리가 일상에서 "생존"을 떠올리며 살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것들이 거기에 귀결 됨에도 말이죠. 그렇다면 "생존 욕구"는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욕구"의 바닥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저는 동물과 인간의 행동패턴을 분석해 추측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생존! 생존!"하며 사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 점이야말로 생명의 가장 신비한 부분이고,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의식하지 못하되 어떤 의지가 담긴 행동을 한다는 것 말이죠.

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각할 거리를 하나 드릴게요. 님은 어느 수준부터 "인식""단순 반응"을 구분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벽에 부딪혀 튀겨 나오는 돌멩이는 인식하는 것일까요? 신경을 따라 흐르는 전류는 인식한 것일까요? 호르몬 반응은 인식한 것일까요? 화학반응은 인식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식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philebus(청년학도)

문답 6

그렇죠. 모두가 생존이란 것을(또는 그 말을) 떠올리지는 않고 그에 관련된 갖가지 절박한 행위들을 하고 있죠.
그것은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식하지는 못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또한 그것은 아마 또 적지 않은 경우에 자신의 행위를 그토록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반면에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인지 또는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다시금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누군가 평소 동료들이 돈을 걸고 화투놀이를 자주 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끼고 싶어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나 늦은 귀가 등으로 인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한번 화투에 손을 대면 빠져나오기 힘들 거라는 이미지 등이 합쳐져서 그를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항상 먼발치에서만 보곤 했지만, 급기야 어느 날은 어찌어찌하다 그 판에 끼게 됩니다.
그래서 퇴근 후 패거리들과 술을 간단하게 한잔씩 먹고, 여관에 가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담요 곁에 둘러앉는 거죠.
그리하여 막 패를 돌리고 돈을 걸려는 찰나 그에게 순간적으로 어떤 반성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는 고민이 많아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사 모으는 등 장기간에 걸쳐 준비를 한 사람이 막상 약을 털어 넣으려는 순간에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위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닫고 일어서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죠.
이외에도 따져보면 적지 않은 예를 들 수가 있을 테지만, 관성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깨우침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인간 행위들과 생각들을 음미해 보길 좋아했습니다.
, 위의 예에 든 사람처럼 자기 앞에 닥쳤을 때 뭔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라 미리 일상 속에서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이나 행위를 보고 그 생각이나 행위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기를 즐겨했던 거죠.
아마도 그래서 그의 자제력과 언변이 그토록 뛰어 났던 건지도 모르고요.

43. 이상은 여담이고, 다시 소피스트님과 씨름을 해야겠습니다.

답변에서 다들 죽기는 싫어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 얘기는 누구든 자신의 현존재를 부인 당하는 일이 일어나면 극도로 싫어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새끼 가젤이 치타에게 쫓기면서 사력을 다해 도망한다는 것은 치타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가 부인당할 거라는 느낌이 있어서겠죠.
사람도 마찬가지죠.
칼을 들고 찌르려하면 도망하거나 반항할 테고, 병이 들면 열심히 병원을 찾아다니겠죠. 그리고 칼로 찌르려 한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앞으로는 병을 피하려 애쓰겠죠.
그럼, 소피스트님의 이론으로 돌아가서 사람은 그때그때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만, 한편 그와 같은 정도로 또한 자기가 싫다고 여기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겠죠?
앞의 것은 호오의 문제 중에서 ""에 해당한다면 뒤의 것은 ""에 해당하는 문제니까 말씀이죠.
그럼 어쨌든 님은 현상을 보고 동물이나 인간이나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안거죠.
안다는 말이 마음에 안 들면 그러려니 하고 믿고 있는 거죠.
그런데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뒤집으면 삶을 좋아한다는 것, 바로 살려는 욕구가 아니겠어요?
"생존 욕구"는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욕구"의 바닥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님도 얘기했으니까요.

하지만 님의 불가지론에 따르면, 우째 알겠습니까그걸?
치타에게 쫓기는 가젤이 운동 삼아 뛰는 게 아니라 죽기 싫어서 또는 살려고 뛴다는 것을…….

이 애기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지난 제 물음에,

, 한강에서 물놀이 중에 깊은 곳으로 잘못 들어가 팔을 힘껏 휘두르며 허우적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지금 살려는 욕구로 인하여 저렇게 허우적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생각일까요?

아래와 같은 님의 답변.

. 그럼요. 그게 진짜 불가지론의 진실인걸요. 우째 압니까? 그걸?

이라는 답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뜻이죠.
이러는 저를 싫어하지 마세요.
저도 자꾸 토 다는 게 별론데, 할 수 없어요.

얘기가 통일이 안 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니까요.
아무튼 가젤이 살기 위해 뛴다는 것을 님이 인정한다면 물에 빠진 사람도 살기 위해 허우적거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고, 아니면 물에 빠진 사람이 왜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정말 모른다면 가젤도 왜 그렇게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는지를 몰라야 할 것 같아요.
양단간에 해명을 바라고…….

44. 또한 "다들 죽기는 싫어한다."는 님의 말씀을 전제로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님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죽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데, 이런 사실은 따져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다 님만큼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를 얹고 다니는 이상 말이죠.
이런 질문은 근본적으로 지난번에 한번 드린 이야기인데…….

인간들은 경험, 경험의 해석, 앞으로의 선택을 위한 피드백, 논리적 직관 등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얘기가 통하는 거고요.

이 얘긴데, 말하자면 내가 부주의로 개에게 물려서 상처를 입은 다음 개에게 물린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사람도 개에게 물리면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도둑맞는 것이 내게 싫은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싫은 일일 거라고 믿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대화도 통하는 게 아니겠어요?
밤새 도둑 안 들었어? 하면 듣는 사람은 ", 이 사람이 내가 도둑맞았을까봐 염려해 주는구나."하고 알아듣고, 개에게 물리지 않았어? 하면 "이 사람이 내가 개에게 물렸을까봐 염려해 주는구나 하고 그 뜻을 안다는 거죠.
말하자면, 내가 체험한 바를 유추하여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냐는 말입니다.
님의 불가지론으로는 아마 전혀 불가능하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다시 말하면 제 얘기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일반적인 말은 통한다는 관점에서 봐 주세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다고 느끼는 전제가 없다면 아예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저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죽이러 이리 오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반응을 나타낸다는 거죠.
도망을 가든지 정말이냐고 되묻든지, 당신은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든지 말이죠. 이것은 그가 죽음이란 것을 심각한 위해로 믿고 있다는 거고,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역시 그렇게 믿고 있을 거라고 추정한 거죠.
주변에서 죽는 사람을 본 간접체험을 바탕으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런 추정이 현실적으로 통한다는 거죠.

45.그리고 다음은,

"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과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만한 것." 이것이 같은 주장이라는 건데…….

소피스트님이 절 시험하시는 거 아닙니까?
님은 이미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쳤지 않습니까?

1.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는 것.
2. 여러 가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이 있고, 자유에 의해(자유롭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것.
3. 어느 행위나 본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며, 그 행위 시점까지 가지고 있는 본인의 능력의 총체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이상을 사실이라 쳤고, 이 사실을 토대로 행위 하자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님이 보기에 가장 그럴만한 사실이니까.
그래서 누군가 그럼 뭐 사람을 패고 싶으면 패도 좋으냐고 했을 때 님은 그래도 좋다고 했고, 사회가 어떻게 지속되겠냐는 둥 물었을 때 님이 또 답답하다는 듯이 뭐라고 답변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는 님이 주장하는 그런 사실이나 다른 사실을 채택한 적이 아직 없어요.
말하자면, 전자는 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아직 꿩을 찾고 있는데, 님은 이미 꿩 대신 닭을 들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 닭으로 인해서 꿩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둘은 다른 내용 아닙니까...

46.그리고 님이 제게 주신 질문에 대해서 한번 보죠.

어느 수준부터 "인식""단순 반응"을 구분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벽에 부딪혀 튀겨 나오는 돌멩이는 인식하는 것일까요? 신경을 따라 흐르는 전류는 인식한 것일까요? 호르몬 반응은 인식한 것일까요? 화학반응은 인식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식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건데, 질문이 좀 자세해야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님은 질문을 하면서 "인식"이라는 말을 님이 이해하는 정도와 같은 정도로 제가 이해하리라고 전제하고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이는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이상한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축구선수가 물을 마시는 이유가 목이 말라서, 즉 갈증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마실 것을 향한 욕구 때문에 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한 소피스트님이 "인식"이라는 용어를 제가 님이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리라고 단정했다는 것은, 무어라고 해야 좋을 까요.

그리고 의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도 공간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지, 무의식이나 전의식이나 의식이나 지각이나 하는 흐름 속의 한 부분을 말하는지, 아니면 저는 잘 모르지만 호르몬 이름 비슷한 갖가지 이름들을 들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반응할 때 생기는 것인가를 묻는지도 분명치 않죠.
질문은 적당한 예를 들어 말하든지 아니면 가능한 범주를 좁혀줘야 할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질문의 의미도 그렇고 어느 방향의 답변을 원하는지 모르는 고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서 보충해 주시죠.

그럼 이만 안녕히.

 

소피스트

Re: 문답 6

43. 이 질문에서는 남아있는 오해 몇 가지가 눈에 띕니다. 제가 남들과 이 이야기로 문답을 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 진행 과정이 잘못된 듯합니다. ^^; 죄송…….
저는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제가 중학교 시절에 떠올렸던 생각이 있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알고 있는지도 몰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어."라고요. 이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옛날 장군들은 멋진 최후를 맞고는 해.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그냥 살려고 발버둥친 건데 멋있어 보인 건 아닐까?"하고요.*^^* 역시 답은 "우째 압니까?"겠지요. 한강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지금 살려는 욕구로 인하여 저렇게 허우적대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모르는 것이지요. 학문적인 경우라면 이건 진실성도 없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그러하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현실 생활을 하면서 그런 말까지 다 구분하려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사실 그런 것은 몸이 다 알아서 판단해주는 것들이지요.
. 저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쓰이는 모든 말들을 다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학문적인 경우에서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구분을 통해, 일상에서 쓰는 말 속에 이러이러한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족한 것입니다. 한강에 누가 빠진 것 같습니다. 왜 저러고 있을까요? 모릅니다. 그러나 곧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하고 싶습니까?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혹 노는데 방해한다는 욕을 먹을지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까? 그럼 생각해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버릴 지라도.
. 이러한 분석은 정말 학문적인 것일 따름입니다. 실생활에서, 인간은 하고 싶은 것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단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것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판단의 폭을 넓히고, 쓸모없이 복잡한 사실들을 좀 간단하게 해 줄 따름이지요.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많은 행동들을 할 것입니다. 이런 범위는 학문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철학이 화장실을 가는데, 밥을 퍼먹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과학이 가려운 곳을 긁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신학이 엎드려 잘지 누워 잘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 학문은 유용성을 갖지 못하는 거지요. 학문의 유용성은 그게 이로울 때에 있는 것입니다. 좀 복잡한 것을 생각할 때에, 얼른 풀기 힘든 문제를 풀어 나갈 때에. 님과 저는 정말 일상적인 많은 예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그런 예들을 통해서 보편적이라 생각되는, 확률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법칙"들을 찾아내고, 다른 상황을 분석하여 맞는지를 확인하고, 필요할 때 하나하나 따져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상의 별 생각 없는 일을 할 때, "믿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생각이 끼어들 게제가 없는 일입니다.

44. 물론 그러한 추정은 "매우 자주" 통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떤 규칙이라 생각지도 않았겠죠. 그러나 이른바 의외의 상황이라는 것은 매우 자주 있습니다. "개에 물리지 않았어?" 그랬더니 "니가 개를 풀었구나!"하면서 달려들 수도 있고, "밤새 도둑이 들지 않았니?" 하니까 "너 내가 새로 단 샤시가 그렇게 맘에 안 드니?"할 수도 있는 겁니다. 실제로도 이런 상황은 정말 "매우"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훨씬 적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학문적으로 "진실"이라 판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예외가 있으면, 그것은 근사적 법칙일 뿐, 절대법칙이 아니니까요. 일상적으로는 허용이 되지만, (허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학문적으로는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45. 사실로 치자는 말이 있었군요. -.-; 공리 같은 것으로 삼자는 이야기로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46. 허헛..^^ 같은 의미로 이해하실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서 한 말인데 안 그런 모양이네요.*^^* 정정하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님은 정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설명 좀 해 주십시오. “


* 오늘은 한마디 덧붙일 생각입니다.
1. 님은 불가지론은 인정하십니까? 만약 아니라면 왜 아니라 생각하는지 다음번에 이야기해 보십시다.
2. 님은 인간이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 다음번에 이야기해 보십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이제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해 주십시오. 님의 주장을 가지고요. , 님이 제가 황**씨에게 그랬듯, 단지 제 이야기를 부정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시는 것이라면 안 그러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걸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요.*^^* 하지만, 조금은 확실한 이야기가 되려면 그게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럼 이만.

 

philebus(청년학도)

문답 7

말미에 이제 빙빙 돌리지 말고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해 달라고 하셨으니까 이번 주제는 아마도 마무리 지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자꾸 질문만 하다가는 님이 싫어하실 것 같아요.
어제 님의 답변 중에서 지적하고 싶은 곳이 있지만 어차피 종합적인 비판을 드리는 거니 그 점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면,
과학이 인간에 기여한 바를 두 가지 동기(욕구)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고 한 저의 요청을 소피스트님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신데서 시작 되었죠.
그리고 아울러 논의된 대중의 설득 건에서는 설득의 의미를 따져보다가 철학이 대중에게 그렇게 모순된 즐거움을 굳이 주어야 하는가라는 데서 얘기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욕구와 자유에 대한 님의 주장이 주 논제가 된 거죠.
님의 주장을 제가 이해한 대로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밑바닥에 놓읍시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때그때 그가 좋다고 믿는 것을 얻으려 하고, 그가 좋다고 믿는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행위 하는 인간은 그의 자유에 따라 행위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욕구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면 됩니다.

여기까지죠.

여기에 대해 제가 주로 물어본 것은 소피스트님은 욕구를 단일한 것으로 취급하셨지만 그것은 구분이 가능하고 또 구분되어야 님의 주장도 뭔가 알맹이를 가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위의 주장은 공허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님은 기초공사라고 하셨고, 저는 우정에서 그에 동의해 주었지만 사실은 역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거죠.
님의 말은 옛날 님의 원조 격인 프로타고라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주장했죠.
"누구든 그에게 그렇게 지각되는 것은 그에게 그렇게 있는 것이기도 하다."라고요.
이 말은 존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주장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각자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렇게 그에게 있다는 뜻이죠.
어떤 것이 진짜로 있는 것인지 따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럴듯하죠.
하지만 외곽에서부터 조여가면 결국 별게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별게 아니라는 것은 이 말이 완전히 거짓이나 오류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는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점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진술이 조금이라도 유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하면 프로타고라스는 그야말로 진리라는 넓은 바다에 접한 해변에서 조약돌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되는 거죠.
그가 그 이상의 무엇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단지 그런 류의 주장에만 매달려 있고,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꽤 깊은 것을 아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지 해변 가의 조약돌 하나를 움켜쥐고 기뻐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생각된다는 거죠.

님의 주장은 제가 보기엔 위 프로타고라스의 말과 유사합니다.
단지 프로타고라스는 존재의 상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에 님은 가치의 상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이 다르죠.
프로타고라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는 데도 동의했고, 우월한 상태나 열등한 상태가 있다는 데도 동의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자이므로 돈을 받고 남을 가르친다고 말했죠.
그래서 그의 주장이 어쨌든 현실적으로 당장은 위험하거나 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을 벌고 그의 지지자들이 뒤를 따라 다녔죠.

하지만 님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좀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맘에 안 드시겠지만 그냥 들어주세요.
제가 님의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말이니까요.
여기서 님이 말하는 욕망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는 욕망의 뜻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님은 욕망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욕망을 끊어버리려는 욕망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죠.
작용하는 것과 작용 받는 것으로써 논리상 같을 수가 없는 걸로 생각되는 데도요.
그리고 반대되는 두 욕구가 같은 사람에게 동시에 작용하여 그를 번민에 빠뜨릴 때도 그 두 욕구를 구분하려 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 행위 하든 그의 자유에 따른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욕망이나 욕구를 단지 세속적인 것으로만 알아듣기가 쉽습니다.
인간이 자제력을 풀어헤쳐버렸을 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갖가지 추잡한 욕망을 마음대로 채우라는 말로 들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개인은 부도덕해지고, 사회는 질서를 잃을 거라는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럼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충설명을 해 볼까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것만이 욕구가 아니라 그런 욕구를 억제하려는 마음도 욕구이며 그런 욕구를 끊어 없애려는 것도 욕구이다.
술을 마시려는 것도 욕구고, 술을 끊으려는 것도 욕구고, 덜 마시려는 것도 욕구다.
그런 것들이 어울려 서로 힘으로써 작용하니까 욕구를 풀어헤친다고 해서 사회가 붕괴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요.
그럼 듣는 사람은 아마 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시 되씹어 보았을 때는 님의 말이 암시하는 바가 하나도 없는 거죠.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래요,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거죠?"라고 님의 말을 듣는 사람이 반문했을 때 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는 거였죠.
"기냥 니맘대로 하라구~“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되지만, 사회적으로는 님의 말씀대로 풀어놓았을 때 현상을 유지하거나 지금보다 나아지거나 한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물론 형평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저로서는 더 나빠질 거라고 단정하지도 않겠습니다. 결과 불명이 되는 거죠.
그러나 제 입은 형평을 말했지만 제 마음 속으로는 불안하죠.
이상은 잠재적으로 사회가 도덕성을 유지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얘기한 거지만 님은 당연히 그렇게 말씀 안하시겠죠.
님의 입장에서는 욕구의 호오 외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사회가 망가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죠.
망가진다고 해서 안 될 아무런 기준이 없으니까 죄가 될 것도 없고, 신경 쓸 게 없는 거죠.
님은 단지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욕구라는 기준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행동하면 된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가 자꾸 질문을 드린 겁니다.
세렌게티 평원의 맹수이야기도 그래서 드렸죠.
동물이나 사람이나 의식하지 못하되 어떤 의지가 담긴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고 님도 말씀했죠.
그래서 저는 다음번 질문에 님의 이론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그런 신의 의지에 비추어 어떤 결과로 작용할 것 같은가 라는 점을 물으려 했었습니다.
물론 님의 답변에 따라 질문은 다시 가지를 치게 되겠죠.

또 욕구를 구분하려 하고 앞으로 나아가보려 하면 님은 불가지론을 얘기하신 거죠.
오늘은 학문 이야기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주안점을 둔 것이 님이 오늘 일상적으로는 그렇다고 긍정하신 부분입니다.
인간으로써 각자의 체험에 대해 남도 그럴 것이라는 암묵적인 추정 말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돌아가고 말도 통하게 되는 거죠.

제가 만약 "이 개미들이 이렇게 줄지어 가는 것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님에게 핀잔을 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학문적이지 못하다고요.
그건 생물학자나 개미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겠죠.
하지만 제가 질문을 드린 것은 거의 절대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누구나 동의를 해줄만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학문적 운운은 의미가 좀 모호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전제로 삼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무엇도 전제가 되지 못할 테고, 결국 불가지론이 될 텐데,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없지만, 말을 하기로 한다면(철학은 말이 도구이니까)불가지론은 잘못 쓰면 불성실의 증거로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럼, 그렇게 예를 들어가며 문답식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 저도 역시 뚜렷하게 답변할 말도 없죠. 제가 뭘 알고 얘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튼 인간이 각자의 체험으로써 느낀 바에 대해 남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암묵적인 추정이 왜 필요했는가 하면, 인간사의 중요한 점에서 님이 싫어하는 일은 대개 남도 싫어할 것이라는 점을 님이 믿고 있을 것이란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였죠.
그리하여 내가 싫어하는 일 즉, 남에게 얻어맞는 것이 그것이라면 내가 남을 때리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을 때, 반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반성의 방식은 아마도 님에게는 도덕적인 무엇으로 들릴 테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달리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든 도덕이란 개념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내가 남을 때린다는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그것은 어쩌면 전에 말씀드린, 님이 건너뛴 부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님의 말씀에 따라 질문과 답변은 형태를 달리 해야 할 테니, 지금 뭐라고 다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님의 이론에 주목한 부분은,

1. 이론을 적용할 때 개인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사회적으로는 나아짐을 예견할 만한 근거가 없는 대신, 나빠진다는 예감이 든다는 것.
2. 인간의 정신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
3. 솔직히 말하면 제가 보기엔 별거 아닌 이론을 님은 조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

이 정도입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계속 던진 거죠.
중간 중간에 님도 문답법이 괜찮다고 재미있어 하신 거고요.
하지만 저는 단지 재미를 위해 남의 이론을 논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저나 상대방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길을 항상 찾고 있습니다.
그런 게 없다면 문답을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재미만을 위한다면 다른 놀이도 얼마든지 있고…….(저는 바둑을 두죠.)
그리고 님께서 문답으로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라 서툴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반면에 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면 대화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지성이 있어야 하고, 상대방을 무조건 꺾으려는 호승심보다는 상대의 말을 가능한 호의적으로 해석해 주는 이해심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피차간에 생각도 잘 알게 되고, 싸움도 안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제가 밖에서 보니까 소피스트님은 삼박자를 갖춘 듯해서 한번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님의 생각을 알고 싶고, 나아가 제가 얻어들어 배울 것이 있지 않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럼 이제 제가 생각했던 한 가지 반론을 마저 하고 저의 반박은 끝내겠습니다.

45번 질문에서,

Α. "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Β.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럴만한 것을 사실이라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만한 것. “

이 두 가지를 다른 의미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반박하려 했습니다.

С.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는 것.
여러 가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이 있고, 자유에 의해(자유롭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것.
어느 행위나 본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며, 그 행위 시점까지 가지고 있는 본인의 능력의 총체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여기서 님의 주장인 СΒ로부터 나온 거죠.
님의 주장인 С가 탄생할 당시 ΑС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С가 탄생하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СΑ를 포함하게 되었다는 거죠.
말인 즉, С가 의미하는 욕구에 С보다 먼저 있었던 Α가 포함되었단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애초에는 있었던 ΑΒ의 구별이, 말하자면 Β의 아들인 С가 탄생한 이후 없어져 버렸다는 거죠.
왜냐하면 С에 의하면, ΑΒ나 다 자기가 좋다고 믿는 대로 행하는 셈이 되는데, 그 이후의 욕구의 구분은 님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애초에는 구분이 있었는데 구분된 한쪽에서 나온 자식에 의해 애초에 있었던 구분마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비유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현실에서는 자식이 아비를 죽여도 아들은 멀쩡히 살아남아 있지만, 이론에서는 어떨까요?
구분된 한 쪽에서 나온 자식이 아비 뻘 되는 전제들의 구분을 없애버렸다면 그 자식은 이론으로써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된다는 거죠.
그럼으로써 С는 무의미해졌다는 얘기고요.
이건 현실적으로는 승려의 의지와 욕구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질문과 반박은 일단 끝났습니다.
님이 빙빙 돌리지 말고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해 달라고 하신 고로.
제 말에 의문점이 있으면 되도록 님의 의견을 첨부해서 상세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의 질문이 끝났으니 님의 질문에 답변할 차례군요.

"님은 정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설명 좀 해 주십시오. “

*** 정신이란 말도 무얼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육체와 대비되는 광의의 의미로 일단 대답하겠습니다.
지금은 제게 정신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소피스트님에게도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1. 님은 불가지론은 인정하십니까만약 아니라면 왜 아니라 생각하는지 다음번에 이야기해 보십시다.

*** 불가지론에도 몇 가지가 있는 걸로 생각되지만 개괄적으로 "우리는 알 수 없다."라는 뜻으로 여기고 답변하겠습니다. 님이 다음번 질문 시 범위를 한정해가면서 해주십시오.
저는 불가지론은 믿지 않습니다.

2. 님은 인간이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 지금까지 님과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이 필요한 질문입니다.
만약 욕망을 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모든 인간이 언제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답변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오늘의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일요일엔 다녀올 데가 있으니 월요일에 뵙죠.

아하, 하나만 더 말씀드려야겠네요. 님의 답변 중에서,

물론 그러한 추정은 "매우 자주" 통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떤 규칙이라 생각지도 않았겠죠. 그러나 이른바 의외의 상황이라는 것은 매우 자주 있습니다. "개에 물리지 않았어?" 그랬더니 "니가 개를 풀었구나!"하면서 달려들 수도 있고, "밤새 도둑이 들지 않았니?" 하니까 "너 내가 새로 단 샤시가 그렇게 맘에 안 드니?"할 수도 있는 겁니다. 실제로도 이런 상황은 정말 "매우"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훨씬 적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학문적으로 "진실"이라 판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예외가 있으면, 그것은 근사적 법칙일 뿐, 절대법칙이 아니니까요. 일상적으로는 허용이 되지만, (허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학문적으로는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니가 개를 풀었구나!" "너 내가 새로 단 샤시가 그렇게 맘에 안 드니?"라는 부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죠.
핵심은 내가 그를 염려한다는 점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개에게 물리는 것과 도둑이 든다는 것이 대체로 모두에게 불유쾌한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님의 불가지론에 따르면 개에게 물린 사람이 괴로워할지, 기뻐서 춤을 출지 어떻게 압니까? 라는 것이 되겠지만 말씀이죠.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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