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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소피스트 1

20여 년 전쯤 philosophy.co.kr 게시판에서 소피스트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과 하루에 한 편씩, 한 달 정도에 걸쳐 나눈 문답입니다.

그는 매우 솔직하고 명석하여 호감이 가는 분이었습니다.

 

소피스트

철학이 산 세상에, 죽어버린 철학자들의 이야기.

흐름이 그렇다는 겁니다.. 흐름이..
누가 근대인식론의 대두 = 심리학의 원류라고 했습니까?
그럼 님께서 심리학의 발달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보시지요.
이건 심리학 발달사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보세요. 책을.
제가 그 부분에서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어이가 없군요.
그리고 부문별 지식이 과학으로 대두된다고 보는 관점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전 글에서 이미 이야기를 드린 것 같군요.
님이야말로 제 글을 다 읽지도 않으신 것 같군요.

내친김에 피지코이 님의 설명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나 말해 볼까요?

먼저 분류가 잘못 되었군요.
무릇 몇 가지로 분류를 하였다 함은 그 분류 항목 안에 모든 경우가 망라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피지코이님의 분류는 그렇지가 못하죠. 피지코이님의 분류는 가능한 분류 항목들을 제멋대로 거두절미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철학의 입장에서 심리학을 이야기하는 입장으로 치우쳐 있고요.
이런 식의 분류로 무언가 설명한다는 것은 우습죠.

게다가, "어떻게 해도 둘의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더 어이가 없습니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든 둘의 관계는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위의 분류를 보면 관계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려던 것 같은데,
그게 뭐 하는 짓입니까? 지금 많이 안다고 자랑하려는 겁니까, 대답을 해보겠다는 겁니까?
여러 입장을 이야기했으니 여러 결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요.
차라리 하나씩 알려 드리는 게 대답이 되지 않을까요.

피지코이님은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쭉 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런 거 못한다고 하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리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요?
제가 본시 과학도이기 때문에 잘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이 무슨 철학자의 특권인 줄 아시나 본데 역겨운 생각입니다.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그 질문에 대답해 가는 방향이 다른 것이지, 과학이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데서 철학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건 오히려 철학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꼴밖에 안 되겠지요.
실제로 당신 같은 철학관의 철학자들이 무의미한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동안,
과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한발 한발 대답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과학도 철학의 가지 중 하나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제발 기억하십시오.)
사실 철학(과학과 분리한 의미)200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뭐가 얼마나 있습니까?
논리학의 발달도 희랍인들이 이루어 놓은 것에 손질이나 한 정도고,
인식론이라 해봐야 심리학적인 접근법이 추가된 것뿐입니다.
사실 철학의 가장 큰 기여야 말로 과학적인 사고를 발전시킨 것이지요.
요즘 철학하겠다는 사람들은 무슨 콤플렉스라도 있는 듯이(하긴 한 게 없으니 당연한 건가…….) 과학은 철학과 별개고, 철학이 낫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데, 당치도 않은 소리.
과학이야말로 현재 가장 인정받는 철학의 가지인 것입니다.
과학이야말로 모든 철학 중 세계를 가장 많이 바꾸어놓았고,
모든 이들의 철학적 바탕을 바꾸어놓은 철학의 가지인 것입니다.

"무전제에서 출발하는 학"이라고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얻는 것이 없는 겁니다. 무전제에서는 어떠한 학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든 논리는 - 심지어 귀납적인 사고까지도 - 전제라 불릴 수 있는 기반 사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철학은, 그러니까 요즘 철학이라 불리는 것이 이런 생각을 하며 무슨 신선이나 된 듯 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면, 이제 철학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질 때가 된 것이지요.
철학이라 함은 처음부터 "생각하여 나아지게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 이유도 있었던 것이니까요.

철학하는 사람들이 괜히 먹고살기 힘든 줄 아십니까? 하는 게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같은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그런 것입니다.
무슨 근본을 어떻게 찾는다고요?
이제 철학은 과학이란 방법론을 통해, 인간이 그 근본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하나 증명해가고 있지요.
무슨무슨 불확정성, 무슨무슨 복잡성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그걸 부정하겠다고요? 어떻게요? 수천 년간 못한 게 갑자기 될 것 같습니까?

어쩌면 당신들은 그런 건 이미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다 하던 이야기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차이가 있지요.
당사자들이 알든 모르든, 과학자들은 그 부조리에 빠지되,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게 부조리하여도,, 우리가 사는 것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 안에서 조금씩 나아지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백 년간 허둥대기만 한 것인데도요..

철학이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 역시 질문을 해결해 나가는 학문이지요.
그리고 자연, 사회과학적인 영역은 이미 과학이라는 가지가 잘 분담하고 있으니,(철학자들도 그게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 윤리론 쪽에서, 일반인들이 살며 따라갈 기준들을 제시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신선놀음으로서 외엔 무시당하는 학문이 되지 않으려면 요.
솔직히 지금의 철학은 일반인들에게 신학만큼의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창피한 줄을 아십시오, 제발.
그리고 좀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이제 철학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계속 되돌아오는 것이 지겹지도 않습니까?

그래요. 전 과학도이기 때문에 당신들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나 될까 말까 하지요.
그러나 과학도이기 때문에 철학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철학으로 당신보다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지 못하는 철학자들도 있겠지만, 당신들 글을 보면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전 과학으로 인간에 접근하는 방법을 상당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지요.
이제 제발 철학으로 돌아오십시오.
철학책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철학은 아닌 것입니다.
근본을 생각하고자 하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맨 처음을 생각하시고,
하나씩 하나씩 종합하고, 저울질하여 따져 가십시오.
제발 이 소리 저 소리 떠들며 결국 아무 말도 안 하는 바보가 되지 마세요.
이제 세상은 지성인들의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들 생각보다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며,
다들 나름대로 답을 구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철학을 하고, 그것으로 패러다임을 이루어가며,
정말 세상의 철학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철학을 바꾸어나가는 것은 당신들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당신들이 정말 철학을 이야기해서, 요즘 청소년들을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산 철학을 하십시오.
이제 입이 다 아픕니다. 이런 얘기에도.

philebus(청년학도)

Re: 철학이 산 세상에…….

보니까 소피스트님은 생선으로 치면 매우 싱싱한 분 같아요.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아는 게 없으면 다른 사람의 말에 제대로 반론도 못 펼 텐데 지금 보면 게시판 여기저기서 여러 사람을 상대로 이야기도 잘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런데 하신 말씀 중에,

철학이라 함은 처음부터 "생각하여 나아지게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 이유도 있었던 것이니까요. 라고 된 부분이 있는데,

위의 말에서 나아지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부연해서 얘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위의 말 자체로 보면,
처음엔 바나나를 못 따던 원숭이가 궁리 끝에 상자를 쌓아놓고 바나나를 따먹게 된다면 그 원숭이도 철학을 했다는 얘기가 되는 건지,
아니면 몸살에 걸린 주부가 전에 먹었던 진통제를 둔 곳을 잊어서 한참을 생각한 끝에 주방 서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꺼내 먹은 결과 몸이 좀 나아졌다면 그 주부도 철학을 한 건지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는 좋아하는데 그 생각에 비해 나아지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소피스트님께 배우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소피스트

학으로서,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관한 단상

모든 학문은 주체적이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또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학문이라 함은 ""가 하는 것이되, ""에게 떠들어대기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에게 주장하지 못하는 학은 학문의 이름을 얻지 못한다.

또한, 모든 학문은 사유하여 나아지게 하는 것의 특성을 지닌다.
학문이라 함은 "우리"를 나아지게 한다는 결론 하에 인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짐"은 물질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의미를 찾고, 심적 발전을 기하는 일도 물론 여기에 속한다.
"나아짐"을 인정받지 못한 학문은 혼자만의 학이 되고,
사회적으로 사장되는 학문 아닌 학이 된다.

학문이 학 보다 낫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특성이 있기에 학문으로 남고자 하는 학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철학도 학문으로서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철학은 조금은 다르다.
본시 철학이라 함은 포괄적인 의미의 학문,
삶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학문을 잉태한 학문의 모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분화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철학의 고유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혹자의 말대로,
"우리 인간 자신에 관한 의미(여기에는 가치관념 및 목적 관념이 포함된다)를 탐구하는 것 이외에는 모조리 아들딸들에게 넘겨준 셈이다.
(물론 이전의 영역들도 연구는 되고 있을 것이나, 학문으로서의 방법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므로, "학문"의 예에서는 제하기로 한다.)

철학에 이러한 영역이 남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이제부터 철학이란 말은 현대적, 학문적 의미의 철학으로 사용한다.)
이는 철학이 "정답을 구할 수 없는 영역"에 매달리는 학문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릇 "비조건부 지식"이라는 것이 전제적 기반을 갖지 못함에 기인한다.

이러하다 하여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철학 또한 주체적인 학문이며, 그 결과라는 것이 연구자 자신에 있어서는 어떠한 학문보다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어떠한 방식이든 큰 의미를 갖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의미는 또 다르다.
혹자가 말하듯 유물론적 사상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이 유물론 적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라 함은 절대 아니다.
이 유물론적 사고는 현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패러다임 적 진리이고, 또한 수많은 이로움을 낳은 사유의 방식이다.)
"비조건부 지식"은 그 설득적 능력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 사회는 유물론적인 기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 지성이 아닌 초 다수 지성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살펴봄에도, 이러한 비조건부 지식이 그 자신의 설득력만으로 군중을 움직인 예는 없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문으로서 인정을 받은 비조건부 지식은,
사회적인 고충이나, 특정 층의 이득을 배경으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에는 종교적인 것들도 포함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특히 소위 신세대라는 자들은 이런 유물론적, 경험론적 사고 및,
자유로움과 주체적 임의 자각에 익숙해 있는 바,
"비조건부 자식"들이 그들을 현혹하는 것이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하면 학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살아남는 방법이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철학 또한 자신의 영역을 조건부 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계의 철학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돈오나 꿈꾸는 철학이 아닌, 철학적 앎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의 의미와, 그 안에서의 가치와, 그 안에서의 선택의 기준을 이야기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설득적이어야 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큰 축이 되는 학문이다.
그들은 정말 가치를 만들어나가고, 깊게 사유할 시간이 없는 자들을 좀 더 편케 만들며, 좀 더 객관적으로 세상을 풀어나갈 수 있는 학문이다.
철학은 이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라 함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인가.
철학적 사유라 함도 결국은 논리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할 진대,
무슨 철학적 사유가 따로 있고, 더 중요하고 그렇겠는가.
철학을 규정하는 것은 영역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말 그대로 "삶이란 영역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삶을 이야기함에 있어 소용되는 언어와 규칙을 세우는 학문"이요,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이는 철학이 학 이 아니라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개인적인 학에 머물게 할 작정이라면,
철학에 대한 대외적인 토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학문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라면, 철학은 무언가 변해야 한다..
언어적 유희나 주관의 강요로 혼란만 더하는 학문이 아니라,
정말 길잡이가 되어주고, 정말 세상을 나아지게 할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철학을 사랑하고, 철학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게 철학이 살아남는 길이고, 세상이 그 어려운 일의 한 부분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학문"을 얻는 길이니까.

지금은 과학과 철학의 차이를 따지고, 어떻게든 철학에 의미를 부여해 볼 때가 아니다.
과학이야 철학의 한 갈래가 그 방법론적 타당성을 인정받아 분가한 것이고,
철학은 그의 한 영역을 과학에게 떼어준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역시 학문으로서의 이야기이다.)
이제 헛소리들은 그만하고 좀 바꿔봐야 할 때가 아닐까.
남의 말들을 기반으로 무어라도 세워보려 하기보다는,,
다시 세상을 보고, 단단한 기반들을 다져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학으로서의 철학은 분명 영원할 것이다.
이것이야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소실됨은 사회인으로서 그리 달가운 일이 못된다.


philebus(청년학도)

Re: 학으로서,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관한 단상

소피스트님은 닉네임을 잘 붙인 것 같습니다.
군중을 중요시하는 태도도 그렇고, 머리에 떠오른 혼자의 생각을 길게 얘기하는 것도 책에서 본 옛날의 소피스트들을 닮은 것 같아요.

그런데 학문이든 학이든 말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정작 학문이 되려면 남에게 알려야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알리는 시점에서 알리는 사람은 자신이 알리려고 하는 내용이 옳다고 생각해서 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틀리는 부분이 있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음에도 알린다면 그건 올바르지 못한 행위겠죠.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 알리든 소피스트님 말대로 군중에게 알리든 알린다고 쳤을 때, 그 알린 내용에 대해 듣는 사람으로서 의문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히 말한 사람에게 물어보아야겠죠..
그리고 말한 사람은 그 물음에 성의껏 답변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물음이 가치가 없는 물음이라고 판단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고대 희랍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각각의 철학적인 생각과 그 알림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물음과 반론이 있어 왔는가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탈레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지금까지의 과학도 각각의 알림에 대해 많은 의문과 그 의문의 추적 결과 결론의 뒤집힘이 있어 오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개인이나 군중에게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알렸는데 조금 지난 후 그 말이 옳다고 여겨지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거죠.
물론 그런 옳고도 옳지 않은 말들이 쌓여 지금의 성과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철학은 소피스트님 말대로 이제부터는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면, 그 이끈다는 말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과연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야 할까요?
아마도 가능한 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쪽으로 이끌어야 하겠죠.
그럼 어떤 말로 이끌어야 인간이 보다 행복해지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군중이 잠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과 진실로 행복한 것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도 따져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의 예로 보았을 때, 남에게 말해진 것이 참되다고 말할만한 것은 매우 적고 대부분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는 군중은 오류를 파악하는 능력이 개인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개개인은 능력에 따라 오류를 파악할 수 있고 질문도 할 수 있지만 말이죠.
그리고 질문과 대답을 듣고 다시 재질문하는 것은 항상 개인이지 군중은 아닙니다.
물론 군중 속의 개인이 문답을 나누고 그 개인을 군중이 지켜볼 수는 있지만 그 문답을 이해함에 있어 군중이 모두 따라올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럼 누군가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군중에게 큰 소리로 외쳤을 때, 그 외침에 오류가 있을 경우, 군중은 그 오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소수의 개인만이 그걸 의심하게 되죠.
그리고 그 외침에 따라 사상과 사회가 얼마간 흘러간 뒤에 오류가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학문에 있어서는 그러한 오류가 쌓여 지식이 발전한다고 평하더라도 나쁠 게 없는지 모르죠.
하지만 군중을 움직이는 '철학적인' 말이 처음에는 그럴듯했지만 나중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어 결국 좋지 못한 결과로 귀착된다고 할 때, 그럴 때도 역시 우리 개개인은 "그런 오류가 쌓여 인간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제 삼 자적 입장에서 마치 처럼 말해도 좋을까요?
아니면 예전에 그런 오류로 피해를 보았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가 철학자라면) "나는 그런 점에서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리라."하고 다짐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군중을 위해서나 더 낫겠습니까?

아무튼 소피스트님 말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점이 있지만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많은 의문도 동행하고 있습니다.
 글에서 쓰고 있는 나아짐이란 말도 말만 바뀌었을 뿐 구체적인 의미는 없는 것 같고이전의 제 물음에 명확한 답변도 없으신데…….

제가 보기에는 소피스트님은 지적이고 상대에게 호의적이며 솔직한 분인 것 같은데 저와 터놓고 문답을 주고받을 의사가 혹시 없습니까?
너무 긴 글은 말고 비교적 짤막하게 말이죠.
저는 매일 저녁에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차분하게 대화한다면 하루에 한 번씩 주고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다른 사정이 있거나 생각이 없다면 할 수 없고요.

 

소피스트

청년학도 님께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지만, 감히 몇 자 적겠습니다.

먼저 지지난번 글 이야기예요..

물론 원숭이가 생각한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아줌마가 약 찾아먹은 것도 철학이 아닙니다.
나야 철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말이란 그런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그게 철학이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철학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해도, 그걸 아니라고 할 만큼은 되겠죠.
하지만, 그것조차 철학이라는 생각은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특정한 철학적 방법론에 빠져 생각의 폭을 좁혀버리기보다는,, 철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고, 왜 필요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을 거라는 겁니다.
(사실 그렇지는 않겠죠? 암만 그래도 그걸 철학이라고 하긴 그래요..-.-;
아주 옛날을 생각해 봐도, 우리 주변의 본질을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정도는 되어야 철학이라 해 주지 않겠어요?)

, 지지난번 글에서 쓴 나아진다는 의미는 지난번 글에 쓴 거랑은 좀 다른 겁니다.
지지난 글에서 쓴 나아진다는 것은, 철학은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푸는 것을 이야기한 거였어요.
사실 풀지 않을 거면 있으나마나 한 것이 아니냐는 뻔 한 이야기였죠..-.-;
그리고 지난 글에서 쓴 나아진다는 것은 상황을 좋도록 한다는 것이었어요.
다음번엔 잘 나눠서 쓸게요…….^^;;

그럼 이제 지난번 글 이야기 쓸게요.

철학이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
이것도 제가 잘못 쓴 거 같아요. 매번 10분 정도 남는 자투리 시간에 쓰다 보니.. ……. 나도 잘 쓰고 싶은데……. T.T…….T.T
정정할게요.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학문"이 아니라,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학문"입니다.
상아탑을 벗어나자는, 그리고 방법론을 개혁하자는, 상당히 진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렇게 진부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지금 필요한 이야기니까.
(철학이 본래 사상적 흐름을 이끌어 나가려는 학문이기는 했죠. 다만 요즘 잘 안될 뿐이지……. 그 이유는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고요.)

물론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는 잘 모르죠.
그걸 모르니까 알겠다고 발버둥 치는 거고,
지금까지 맨날 틀리고, 또 다른 소리가 나오고 그런 거지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럼 어쩌자는 이야기냐고요?
대체 어떻게 이끌자는 이야기냐고요?
아예 이끌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거지요~*^^*
철학을 다시 학문 이전의 학문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철학이 비조건부 지식이 되었다는 사실은, 답을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보편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아예 탈가치적인 방향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유도 없는 해야한다들을 쓸어버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따질만한 것들은 따질만하다고 인정해 버리고, 좀 더 실제적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주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사상 이전의 사상을 말입니다.

사실 제 말은 지금까지의 윤리나 도덕관념들을 다 깨어 버리자는 이야기도 될 수가 있어요.
물론 그 틀은 남겠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지요.

자유를 예로 들어볼까요?
자유는 소중한 것이다. 천부인권이다 하는데, 그거 어디 지켜질 이야기입니까? 자유라는 것, 힘이 없으면 아무도 못 지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자유"는 소중한 것이라고 세뇌시키려들고, 괜히 서로 부딪혀 혼란에 빠지게 하지 말고, "자유는 하고픈 걸 하고자 하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넓고, 힘이 적은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좁다."는 것을 명확히 해 주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풍습이 사라질 것 같습니까?
물론 잘못 배운다면 잠시는 그럴 겁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 이들이,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고,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를 알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아무도 서로의 자유를 함부로 해치지 못할 겁니다.
약자들은 뭉쳐서 얻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쓸데없는 비겁 같은 관념에 사로잡히는 대신, 강자들에 맞서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건 정말 민주주의로 빠르게 다가가는 길이기도 하겠지요.
사실 이건 모두들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조금씩이나마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가는 것도 없었겠지요.

또 길어지네요. 짧게 쓰려고 했는데…….말하듯이 쓰면 군더더기도 많고, 길어지는 것 같아...-.-;

그럼 뭉뚱그리며 끝낼게요..
제 이야기는 그냥 멋있는 척 좋은 척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겠지만 바꾸어보자는 거죠.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생각의 흐름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럼 내일 밤에 기다리겠습니다.
안녕~*^^*


philebus(청년학도)

Re: 소피스트님께 - 철학과 과학과 대중…….

답변을 주셔서 감사하고,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소피스트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쁘기도 합니다.
글을 읽어보니 소피스트님이 과학자 내지는 과학도이신 것 같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것도 같고,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겠네요.

그래서 통상 하는 말로 건강한 젊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소피스트님의 주장 중에서 다음 부분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님은 과학의 발전이 우리 생활에 가져다준 유익한 점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문이 상아탑을 벗어나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특히 철학이……. 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위 두 가지 사항 중 첫 번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이치를 발견하는 것과 그 이치를 이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성의 법칙이나 가속도의 법칙이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발견해 내는 것과 그 지식을 이용하여 로켓을 만드는 것은 별개라는 뜻이죠.
빛의 성질을 연구하여 빛은 직진, 굴절, 반사, 회절 등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일과 그 성질을 이용하여 망원경이나 다른 광학기계를 만드는 것도 다른 일이고요.
질량이 어떤 경우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런 사실을 이용하여 핵무기를 만든다는 것도 전혀 다른 부문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수학적인 정리를 발견하는 것과 그 정리들을 뭔가 유용하게 이용하는 것도 다른 일입니다.

이런 兩者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같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양자를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든 같은 사람이든 각각의 행함에 있어 동기는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어떤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는 것은 대체로 순수한 호기심이나 탐구 정신의 소산이지만 그 이치를 이용하여 뭔가를 다시 산출하는 것은 다른 동기, , , 명예, 애국심, 책임감, 생활의 편리성 등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거죠.
하긴 요새는 정보가 곧 돈이 되는 세상이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순수한 탐구정신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돈을 바라고 연구를 하여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낸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연구를 하면서 항상 머릿속에 돈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고 연구를 단계별로 하나하나 지속시키는 힘은 어디까지나 탐구정신이며, 돈은 오직 그 탐구의 결과로써 특별한 경우에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돈을 연상하면 그 순간 연구 자체에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죠.
무슨 말이냐 하면 각각 다른 사람일 경우는 물론, 동일한 사람에 있어서도 돈과 편리함 또는 그에 부수되는 갖가지 것들을 요구하는 욕망과 순수한 호기심 또는 탐구정신은 분명히 다른 것이며, 이 두 가지 동기가 어우러져 과학의 발전과 문명의 향상이 이루어졌고,, 소피스트님이 과학이 인간생활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이 두 가지 동기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결과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거죠.

잠시 방향을 돌려서 지금의 얘기를 저번에 말한 원숭이 건에 연결시키면 이런 얘기가 됩니다.
원숭이가 상자를 쌓아 바나나를 따는 것은 어떤 사물 위에 다른 물건을 겹쳐 놓으면 겹친 물건의 두께만큼 높이가 높아진다는 것을 원숭이는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은 가지고 있지 못한 그러한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 거죠.
지난 님의 글에서의 얘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마 반대하겠지만 소피스트님 개인적으로는 이런 원숭이의 생각이나 행위가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에 관해 제 의견을 차례대로 말씀드리면, 원숭이가 어떤 식으로든 바나나를 따먹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며 이런 행위는 인간의 유사한 여러 가지 욕구충족의 행위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 고상한 방법과 명분을 동원하더라도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먹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거죠.
그리고 다른 동물이 하지 못하는……. , 상자를 쌓는다는 착상과 행위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는 이것을 위에서 말한 사물이 가진 어떤 이치를 이용하는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 호기심이나 탐구정신의 발로에서 이치를 발견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존재하는 이치를 욕망을 위해 이용한 것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이와 같이 욕구충족을 위해 주변의 사물을 이용한다는 것도 바로 그 점에만 한정시킨다면 원숭이나 인간이나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상자를 이용하여 바나나를 따는 것이나 농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나 낚시나 배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 것 등이 모두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거죠.
그럼 원숭이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하면 남은 한 가지가 되는 거죠. 육체적인 욕망에 근거한 행위가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 또는 탐구정신에 의해 사물의 이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이죠.
원숭이도 호기심이 있다고 하면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그 호기심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것에 머문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럼 원숭이는 과학적인 탐구 자체와는 인연이 없지만 사물의 어떤 점을 이용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과학적 탐구 결과를 이용하여 욕망을 충족시키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대등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럼 나아가 이와 같은 예시에서 철학이란 과연 어떤 행위인가에 대해 제 생각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상자를 쌓으면 바나나를 딸 수 있다는 것은 원숭이가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사람 중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상자 세 개를 차례대로 쌓으면 상자들 전체의 높이가 높아진다는 것, 높아진 원인은 첫 번째 상자도 아니고 두 번째 상자도 아니며 세 번째 상자도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상자 세 개 모두가 그 높음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눈에는 그 상자 세 개의 높이가 낮다고 느껴지는 일이 없을까또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는 세 개의 상자가 높다고 느껴지겠지만 또 다른 언제는 오히려 낮다고 느껴지는 때가 없을까?
그런 점에서 상자가 과연 높음의 참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 높다는 것, 즉 높음은 그 자체로 무엇이며, 낮다는 것, , 낮음이란 무엇인가?

만약 여기까지 스스로 생각이 미쳤다면 그는 철학에 입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피스트님이 비판하는 상아탑 속에서의 철학이나 책 속의 철학이 아니라(그런 점에서는 아마 철학개론 읽기와 같은 것이 입문이 되겠지만) 생활 속에서 특정한 개인의 체험으로써 철학하기라는 의미에서 입문이라는 뜻이죠.
소피스트님이 철학을 '생각하여 나아지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이런 점에서 보면 무엇을 생각하고 그로 인하여 무엇이 나아지느냐 하는 점이 필수적으로 언급되어야 보다 나은 정의가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쨌든 이제 이런 생각을 원숭이가 결코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긍정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다면 원숭이는 철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상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해 주시고…….…….

실은 정작 말하려는 것은 이 얘기가 아니라 소피스트님께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소피스트님이 과학의 발전이 인간생활에 기여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여를 제가 위에서 분류한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다시 생각해봐 달라는 것입니다.
, 순수한 호기심이나 탐구정신을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했을 때 그 연구행위 자체나 연구결과 자체는 본인이나 타인의 생활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가?
그리고 다음으로 그 연구결과를 이용하여 뭔가 다른 사물이나 물건을 산출하여 그것을 인간의 욕구충족에 이용했다면 그러하므로 써 인간생활에 어떤 구체적인 기여를 했는가? (아마 이것이 기여했다고 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철학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소피스트님은 독서량이 많은 것 같으니까 프로이트도 잘 아시겠죠?
그리고 신경증 치료 방법으로써의 정신분석도 어느 정도 아실 것 같은데…….
신경증 환자와 정상인의 구별이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양적인 문제라는 사실도 아실 것 같습니다.
이 얘기는 정상인과 신경증 환자가 심적 체계의 어떤 지점에서 확연히 갈린다기보다 정상인과 환자의 구별은 증상에 따라 갈린다고 보는 편이며, 우리가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사실은 거의 모두 신경증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고, 그중 어떤 계기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일정한 지장을 받는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 환자가 된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정신분석이 사용되고 있는 거죠.
저도 의사가 아니니 구체적으로 아는 건 없고 들은풍월 중에서 제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으로 이런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매우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긴 시간을 들이면 다 완치가 되느냐 하는 것도 잘 모르겠지만…….

환자와의 대화나 꿈의 분석이 치료의 주된 방법이 되는데, 어째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가 하면 그 병이 환자 개개인의 사적인 과거 체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치료에 대해 저항하는 심리기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경증 환자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어떤 연설을 하여 그들 모두의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죠.
그들이 각각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과거에 증상과 관련된 어떤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억압된 욕구가 있는지, 치료의 어떤 내용에 대해 특히 저항하고 있는지, 현재의 생활환경은 어떤지 등을 알기 전에는 치료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치료는 환자가 위와 같은 내용을 스스로 깨닫고 그 내용을 말로 표현할 때 증상이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내용을 철학적인 설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원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피스트님이 대중을 설득하여 지금까지의 윤리나 도덕관념을 깨어버리고, 그 틀은 남겠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제 입장은 경우에 따라 개인은 설득할 수 있지만 대중은 설득할 수 없다는 거죠.
물론 여기서 설득이란, 말을 사용해서 어떤 인간이 올바르고 훌륭한 인간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엇을 바라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어 대중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그러한 신념을 긍정적으로 보유케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변화를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인간을 현 상태에서 철학이 요구하는 훌륭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은(알기 쉽게 얘기하면 보통사람을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나 또는 그들의 수제자처럼 변화시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정신분석을 통한 신경증의 치료와 어떤 면에서 유사한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방법의 특성상 대중을 상대로 하여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대중은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유순해지고 덕을 나누어 가질 수는 있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 철학적인 인간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 거죠.
쉬운 말로 쌍방향 소통이 아니면 철학적으로 향상된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정신분석의사와 같은 레벨의 지도자(, 인간을 아는 성인)와 그 의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치료에 적극 협조하는 환자와 같은 레벨의 대중이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가 되겠죠.
하지만 이건 상상이고, 현실의 경우는 거의 반대라고 해야 할 겁니다.
대중은 넘치는 자유를 누리고 있고, 그럼에도 때로는 더욱 많은 자유를 원하고, 조그마한 통제도 견디지 못해 하고,,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알지도 못하면서 근거 없는 희망과 낙관에 젖어있는 사람들도 많죠.
대중 매체는 쓰기에 따라 그래도 상당히 유용할 수 있지만 현재는 이익과 손해를 합쳐 결산해 보자면 그것들이 인간의 향상에 유익하게 쓰인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는 걸로 생각됩니다.
이상은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소피스트님의 얘기에 대한 저의 입장입니다.
질문이나 의견이 있으면 올려 주시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죠.
소피스트님이 얘기한 다음 부분,

"자유는 하고픈 걸 하고자 하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넓고, 힘이 적은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좁다."라는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예컨대 하고픈 걸 한다고 무엇이든 하는 건 아닐 테고 거기엔 타인의 자유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단서가 붙을 걸로 생각됩니다만, 그렇다면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타인에게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힘이 있는 만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때 힘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이죠.

지금까지의 얘기를 요약하면,

과학의 발전이 우리 생활에 기여한 바를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는 것.

첫째는 순수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의 결과물로써의 기여.
둘째는 위 결과물을 욕구충족에 이용함으로써 기여.

소피스트님이 생각하는 기여를 위의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는 것.

원숭이와 바나나의 예를 통하여 철학하기를 암시한 것.

철학은 대중을 설득하여야 한다는 데 대하여 그것은 원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견.

소피스트님이 얘기한 자유에 대한 질문.

이상이고요, 지난 글에서 소피스트님께 짤막한 말로 얘기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소피스트님을 아주 약간 믿지 못해서였죠. (미안합니다.)
혹시 앞으로의 얘기를 핵심과 어긋난 방향으로 자꾸 끌고 갈까 봐요.
그럼 토론이 비경제적으로 되는데, 그게 마땅찮아서 미리 못을 박았던 거죠.
하지만 님의 답글을 보니 그럴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해주실 것 같고, 제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의견을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님의 취향에 따라 길게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도 흐름을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테니까요.
, 그럴 경우 끝에 가서 저처럼 간단한 요약을 부탁합니다.
그럼 안녕히…….

 

 

소피스트

철학과 과학과 대중을 더 간단히 보는 방법에 대해

……. 과학에 대한 자부심은 별로 없는데..-.-;
어떻든, 먼저 그 기여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전 님이 구분하신 두 가지 기여가 크게는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봅니다.
자기만족이라는 측면으로요.
만족의 측면에서 본다면, 첫 번째의 호기심과 탐구정신의 충족은 어떤 정신적 갈증, 어떤 "부족현상"에 대한 자기만족을 얻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의 욕구충족도 어떤 신체적, 혹은 그에 따른 심리적 부족 현상에 대한 자기만족을 얻는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는 육체적, 정신적인 필요성이 모두 심리적인 범위에서 비교되기 때문이지요.

이 관점에서 돈, 애국심, 등등을 지적 호기심과 비교해 볼까요?
(돈을 위해 연구하는 사람도 있고, 호기심 때문에 공학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하므로 두 기여의 구분에 대한 언급은 넘어가겠습니다.)
자기만족의 측면에서, , 애국심 같은 소위 외적 동기라는 것들은, 지적 호기심 같은 내적 동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심리적인 어떤 부족에 대한 추구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선택을 위해 비교될 때,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더 알고 싶지만, 저걸 하면 좀 덜 궁금한 거라도 더 돈이 될 거 같다. 난 지금 돈이 조금 급하니 저걸 해야겠다."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말인데, 특별히 어떤 가치를 두고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것을 다시 원숭이와 인간의 이야기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원숭이나 인간이나 존재하는(이라기보다는 알고 있는 이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이치를 욕망의 충족에 이용합니다.
이것은 님이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로 제시하신 호기심에 따른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관점을 적용하였을 때, 호기심 충족을 위한 실험 또한, "어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새로운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관점대신 기여를 구분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그 어떤 욕망 또한 호기심의 발생이전의 어떤 동기(어떤 욕구 충족에 OO가 필요한데 그게 맞나? 같은..)에 의해 설명될 것이므로, 복잡한 이야기가 될 뿐만 아니라, 종래에는 이야기가 불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원숭이는 감각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상황이 나아지도록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미 소위 "이성적"이라는 사고를 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동물들이 가질 수 없는 - 끼니 때우기의 어려움, 혹은 지능의 미발달 따위 때문에 - 욕구들을 갖는다. 그러나 욕구의 충족을 위해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종의 여하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이다. “
(인간의 욕구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으면 더 이야기합시다.. 이때에는 개인이 안다는 것, 혹은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물론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편이 더 쉽고 많은 것을 설명할 수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대중의 설득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중의 설득은 분명 어렵습니다.
인간의 판단과 선택에는 수많은, 그리고 개인마다 다른 Facktor들이 작용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와중에서 그 선택을 한 방향으로 모은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처럼 다른 여러 특성들에 기인하는 요구일 때입니다.
만약 "! 내가 너희들을 설득하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니 맘~대로 해라!"라고 한다면? ~! 아마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점 이전의 공통점에 기인하는 요구이기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이러한 설득에는 ""이나 "철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욕구 충족의 공통적 열망"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자유 이야기를 해보죠.
모든 사람들에게 "니네다 자유롭다! 맘대로 해라!"한다면 이에 설득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없을 것입니다. 어떤 규범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자유에 따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규범을 따르는 것도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나, 규범의 존재가 그것을 볼 수 없게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강한 자들이 무턱대고 난장판을 만드는 시대가 될까요?
제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힘의 문제 때문이지요. 여기서 힘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강제력을 이야기합니다.

님께서는 왜 지금의 시민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자유란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은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사회는 시민이 강자이기 때문에 올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정규분포에서 앞대가리보다 중간의 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것을 깨닫고 있고, 때문에 개인적 강자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은연중에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처음 그들이 그것을 깨달을 때에, 로크나 등등의 사람들이 "천부인권"을 외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감을 심어주지 않으면 그 중간 몸뚱이들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난 로크가 정말 그렇게 믿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더 이상은 이러한 사고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중간계층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보다 강자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더 강한 자가 강자의 위치를 지켜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요.
때문에 과거의 사고방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가리고 헷갈리게만 만드는데 말이죠.

정리를 하겠습니다.

먼저 기여의 방식을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편한 일입니다.
따라서 구분하지 않는 방식을 택하겠습니다.

, 원숭이나 인간이나 욕구의 충족을 지향하며, 이점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다만, 둘이 가지는 욕구의 종류는 다릅니다. 이것이 둘의 차이입니다.

다음은 철학이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함은 그 설득의 종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종류의 설득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힘이란 모든 종류의 강제력을 지칭합니다.
강제력이 강할수록 제 맘대로 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 분석을 곁들였습니다.

그럼 읽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또 님의 주장도 부탁드립니다.
질문을 못하니 조금 안타까워서요...*^^;


philebus(청년학도)

Re: 철학과 과학과 대중을 ..........

답변 잘 읽었습니다.

소피스트님 답변의 요지는 우선 인간이든, 동물이든 욕구를 가지고 있고 가능한 방법으로 그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는 점은 동일하다.
제가 제시한 과학과 문명발전의 두 동기 즉, 순수한 탐구정신과 그 탐구정신의 결과물을 이용하려는 기타 욕망은 모두 욕구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불편하게 그들을 구분하여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라는. 거죠?

그럼 그에 관해 제 의견을 제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 긍정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죠.

1. 우리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어떤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설득하거나 길을 들이거나 변화시키거나 이용하려고 한다면 우선 그 대상에 대해 필요한 만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면 우린 그 대상에 대해 어떠한 의미 있는 행위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2. 대상에 대해 필요한 만큼 안다는 것은 본다든가, 듣는다든가 하는 감각의 활용이 있을 테고, 더 나아가 대상이 무엇으로 또는 어떤 성질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부분들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것, 즉 구조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또 그 대상은 전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 부분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파악하는 일도 포함된다고 생각되는데…….

3. 지금 문제 되는 철학함이나 과학탐구나 학문의 이용이나 어떤 말로 개인이나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나 모두 인간에 관한 문제라는데 동의하시죠?
말하자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든가, 대중을 설득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대상인 인간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것. 바로 그거죠.
위에서 말한 대로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면 어떠한 의미 있는 행위도 대상에 대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그럼 지금과 같은 경우에, 즉 과학이 인간에게 어떤 기여를 했는가, 또는 대중을 어떤 말로 어떤 방향으로 설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할 경우에도 우선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여기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는 것은 단지 사람을 보거나 듣는다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그 구조나 성향이나 성질, 가지고 있는 능력 등을 논해야겠죠?

6. 그리고 그렇게 논하더라도 지금 얘기되고 있는 주제로 보아 인간의 육체에 대하여는 그리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구조나 성향, 성질 등을 알아야 하지만 육체적인 구조나 성질, 성향 등을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이죠.
하지만 도중에 필요하다면 얘기할 수도 있겠죠.

7. 그럼 남은 건 우리가 보통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 우리는 지금의 주제에 대해 충실히 토론하려면 인간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그 정신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물론 가능하다면…….)

8. 인간이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소피스트님이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인간의 욕구는 매우 다양한 방면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욕구)이 매우 다채롭게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로 묶어 인간은 욕구하며, 그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가고 있다라고만 말하고, 각각의 욕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자세히 따져보지 않아도 무방합니까?

9. 즉, 인간의 정신에 대해 단지 욕구와 욕구충족이라고만 알고서 과학이 인간에게 어떤 기여(욕구충족)를 했는지, 대중을 어떤 말로 어느 방향으로 설득해야 하는지 등을 충분히 밝힐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죠.

이상은 소피스트님이 제가 제시한 욕구의 두 가지 형태, 즉 탐구정신과 기타 다른 욕망이라는 구분을 불필요하고 불편하다는 말로 거부한 데 대한 의견입니다.
위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 YES, NO로 판단해 보시고, 만약 이미 말씀드린 탐구정신과 기타 욕망이라는 전제를 수용하신다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아니라면 그 이유를 다시 들어보고 싶네요.
자연에 있어 하나와 여럿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역시 그것을 파악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욕구는 전체로는 하나이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여럿이라는 점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말이죠.

다음으로 대중의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제 말은 어째서 나왔냐 하면 소피스트님의 다음 얘기 때문이죠.

"사실 제 말은 지금까지의 윤리나 도덕관념들을 다 깨어 버리자는 이야기도 될 수가 있어요.
물론 그 틀은 남겠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지요. “

윤리나 도덕관념들을 다 깨어버리고도 개개인이 모두 충분히 도덕성을 유지한다는 말로 들렸고, 또 윤리 도덕관념을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얘기는 그런 관념 아래에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상황에 따라 최선의 행위를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런 건 성인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지금 보면 소피스트님 얘기는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한 국가의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뭔가 호소하여 웬만큼 그대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되었다면 그게 설득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비스마르크나 처칠이나 김일성이나 박정희나 나름대로 국민들을 설득한 거죠.
그리고 소피스트님은 그런 식으로 철학이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철학이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을 철학의 고상한 목표, 즉 진리를 아는 자, 그리하여 올바른 자가 아직 그렇지 못한 자를 설득하는 걸로 생각했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대중은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한 거고요.
그럼 이 점에 대해 소피스트님이 애초에 요구한 것. 즉 철학은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지 한번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시죠.
어떤 말을 해서 대중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건지 말이죠.
그리고 이미 예로 드신 "니네다 자유롭다! 맘대로 해라! 한다면 이에 설득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거나 "! 내가 너희들을 설득하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니 맘~대로 해라! 라고 한다면? ~! 아마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것은 혹시 단지 반박을 위해서 사용하신 건 아닌지…….
알맹이도 없고 현실성이 없으니까 말이죠.
지금의 토론이 자기 논리나 동어반복과 같은 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보여주는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컨대 그 말을 들은 어떤 시민이 이렇게 되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왜 지금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제 글에서 질문한 것, 다음 부분인데요.

"자유는 하고픈 걸 하고자 하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넓고, 힘이 적은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좁다."라는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예컨대 하고픈 걸 한다고 무엇이든 하는 건 아닐 테고 거기엔 타인의 자유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단서가 붙을 걸로 생각됩니다만, 그렇다면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타인에게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힘이 있는 만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때 힘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이죠.

여기서 힘이란 강제력이라고 답변하셨지만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강제력과 동거하는 자유라는 것이 과연 어떤 자유인지 궁금하고, 반복해서 쓰신 강자라는 말도 무슨 개념인지 좀 어리둥절합니다.
다시 설명해 주신다면 들어보고 아니면 그 부분은 거론치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이 없었는데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유는 하고픈 걸 하고자 하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넓고, 힘이 적은 자는 그 선택의 범위가 좁다."라는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예컨대 하고픈 걸 한다고 무엇이든 하는 건 아닐 테고 거기엔 타인의 자유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단서가 붙을 걸로 생각됩니다만,
그렇다면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타인에게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힘이 있는 만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겁니까? “

요약하면,

인간의 욕구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대한 이의 제기 및 답변 요청.
철학이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며 어떤 범주를 가리키는 말인지 설명 요망.
자기 자신에 있어 자유의 의미,(강제력,  강자의 의미) 설명 요망.

그리고 제 주장이 없어 질문을 못해 안타깝다고 하셨는데, 저는 대중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특별히 아는 게 없다는 뜻도 되죠.
하지만 저도 이미 짧지 않은 글을 썼으니까 그 안에서 질문거리를 찾아보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질문거리는 제출된 텍스트 안에 항상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그럼 내일 또 뵙죠.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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