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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시각경험의 퍼즐

20여 년 전 philosophy.co.kr 에서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작성자 :착한 왕

시각경험의 퍼즐 1(답변부탁)
착한 왕 씀:
함 풀어보세요~ 각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여기면, 대답 좀~
원래 남의 동내에는 잘 놀러 원정 안 가는데, 저한테는 너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서 가급적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파 왔음. 드레츠케에 의하면, ..어쩌고저쩌고 이런 대답은 저 한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고요. 가급적 대가의 이론에 의거하지 않은 자유로운 대답 좀 많이 해 주시길 부탁!

시각경험의 퍼즐 1
§1. 내가 컴퓨터 화면을 볼 때 내 경험에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컴퓨터라고 믿는다. 시각경험에 드러나는 것 혹은 경험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우리는 믿으며, 이 믿음에 대한 정당화는 일상생활에서 요구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보는 것이 컴퓨터 화면이라면, 나의 시각경험에 드러난 것 또한 그 화면이다.
경험의 직접적 대상은 '나무', '' 등으로 불리는 일상적 대상이다. 여기서 직접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대상을 시각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지향함을 말한다. 시각경험에 드러난 혹은 경험되어지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차이 없음을 인정하는 한에서, 일상적 대상들은 소위 '외부대상'들이다. 실제 우리 모두는 일상적 대상들이 마음 혹은 두뇌 속에 갇혀있지 않다는 실재 주의적 태도를 갖고 살고 있다. 따라서 내가 보는 컴퓨터 화면은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는 외부대상으로서 그 화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각경험에서 외부대상을 지향한다는 점을 '외적능력'(external capacity)라고 한다면, 그 능력은 이제 아래와 같이 일상적인 의미에서 정당화되었다:

1. 시각경험에서 일상적 대상에 대해 직접 지향한다.
2. 그 대상들이 머릿속 혹은 마음에 들어있지 않다는 실재 주의적 태도를 갖고 산다.
3. 실재 주의적 태도가 인정되는 한에서, 시각경험의 대상인 일상적 대상들은 외부대상들이다.

4. 따라서 시각경험에서 우리는 외부대상에 직접 지향한다는 점에서 외적능력을 갖는다.

§2. 그러나 나의 경험은 결국 나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각경험의 대상에 대한 지향성은 '나의 경험 안'(within my experience)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시각경험에서 외적능력을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는 경험의 주관성을 인정한다. 그 결과로서 얻어지는 장점은 이미 플라톤이 지적하였듯이 지식(knowledge)과 지각(perception)의 구별이다. 지식은 객관성을 지향하지만, 지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사과 혹은 책이 공적(public)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 공적인 경험이 가능한가? 단순히 경험이 주관적이라는 사실로부터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및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맞바로 뒤따르지 않는다는 점에 그냥 만족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세상은 우리의 개념체계로 구성된 허구일 수도 있다. 객관적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 개념이 경험에 효과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인정할 때 그 객관성은 경험대상의 측면이 아니라 오로지 개념의 구성에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의 순수하고 내적인 주관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또한 일상생활에서 전 절의 논증 1-4를 거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퍼즐에 부딪힌다.

첫째 퍼즐: 일상생활에서 경험의 대상이 공적인 것으로 믿어지는 한에서, 그것은 나의 외부에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경험은 나의 경험인 한에서, 일상적 대상은 내 경험 안에서만 유효하므로 외부대상이 될 수 없다.

§3. 첫째 퍼즐은 일상적 지각경험과 지금의 과학이 함축하는 인과적 지각이론(a causal theory of perception)의 마찰관계로 나타난다. 과학의 지식은 분명히 빛의 매개 작용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음을 함축한다. 어떤 거울에 반사된 빛과 똑 같은 자극을 나의 뇌에 준다면, 나는 아마도 그 거울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시각경험의 인과과정만을 따질 때 외부대상으로서 일상적 대상이 반드시 존재할 이유는 없다. 단지 나의 시각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인과적 원인으로서 자극만 있으면 충분하다. 물론 자극의 원인으로서 물질적인 어떤 것을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물질적 어떤 것이 일상적 대상이 될 필연성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자극의 원인으로서 물질적인 것은 글자 그대로'물질적인 어떤 것'이면 되지, '나무' ''등으로 불리는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인과적 지각이론은 물리주의, 인과적 지시이론(a causal theory of reference), 자연화 된 인식론(a naturalized epistemology) 및 진화론적 인식론(evolutionary theory of knowledge) 등과 함께 현대 외재주의(externalism)를 대표한다. 외재주의를 지향하는 이론들의 특징은 어떤 철학적 문제를 푸는데 정신상태 혹은 내면적 특성에 관한 언급은 어떠한 공적 혹은 객관적인 설명력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재주의는 오히려 지각경험이 순수 내적인 혹은 주관적인 어떤 것임을 함축한다. 실례로 '역전된 스펙트럼'(inverted spectrum)이라는 사고실험을 살펴보자.
어떤 유전적 원인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색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빨간색을 푸른색으로, 푸른색은 빨간색으로 경험한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그가 빨간색을 푸른색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푸른 대상을 보면서 '빨간 것'이라고 말하고, 어느 경우에 도로를 건너야하는가 라고 물으면 당연히 "신호등이 푸른색일 때이죠." 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한 토마토가 빨갛다고 주장할 객관적 근거는 경험의 영역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그 토마토 자체도 어떤 개인의 경험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공적인 외부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면 색과 대상이 분리되어 경험되지 않으니까.
인과적 지각이론을 충분한 것으로서 여길 때 경험대상으로서 일상적 대상이란 내적(internal)인 대상이 되어버린다. 결국 내가 보는 어떤 나무는 나의 경험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는 이유로 공적인 대상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적 지각이론은 지각경험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 마찰하며, 첫째 퍼즐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퍼즐을 벗어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인과적 지각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 이론은 지각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한 철학적 고찰을 인정할 때, 역으로 인과적 지각이론은 과학주의(scienticism)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과학주의에 의하면, 현대과학이 실용적인 측면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전통적으로 던져졌던 철학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개념 틀(conceptual framework)로서 작용한다. 더 이상 자유의지 혹은 합리적 논증과 같은 문제에 고심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철학문제는 과학이 제공하는 설명 틀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거나 아니면 사이비 문제로 판명될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보통 외재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외재주의의 대안으로서 내재주의의 관점에서 시각경험의 대상은 무엇인가? 기껏해야 고작 세련된 표상이론(representational theory of mind)이다. 시각경험은 표상들의 다발로서 주어지지만, 표상은 관계된 외부대상을 지향하기 때문에 어떤 표상을 갖는다는 것은 곧 한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경험 자체는 내적이지만 경험의 대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philebus(바람)답변

Re: 시각경험의 퍼즐 1(답변부탁)

저로서는 매우 어려운 얘기지만 흥미도 있네요.
하지만 저는 초보자라 전문용어를 잘 몰라서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고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습니다.
위에서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여기면 대답해 달라고 하셨는데 그건 아니라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밑에서 다시 대가의 이론에 의거하지 않은 자유로운 대답을 많이 요구하셨으니 그 말에 용기를 내서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 항에서 말씀하려는 바는 예를 들면, 지금 나에게 보여지는 나무는 보여 지는 그대로 나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보여 지는 나무에 대해 벌목이나 관찰이나 그것을 보여 지는 그대로 캔버스에 그리거나 하는 등으로 그 나무와 관계를 맺으려 할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둘째 항에서는 그러나 그 나무가 나에게 그렇게 보여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일 뿐이며 내가 그 나무에 대해 무엇을 하든 그 행위는 나에게 보인 나무의 영상에 관해서일뿐이다..
내가 그 나무를 그릴 때 나무 잎의 색깔을 보이는 대로, 몇 마리의 진딧물과 함께 진 초록색으로 그린다 해도 다른 누가 다시 그린다면 바로 그 나무 잎을 엄밀한 의미에서 나와 꼭 같은 색과 모양으로 보겠는가?
아마 1시간 후에 내가 그 나무를 다시 본다 해도 그 나무 잎의 색은 정말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 보는 색깔과는 결코 다른 것이리라.
물감의 종류는 아마도 그 다름의 미세한 차이를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사물이 각자에게 보여지는 그대로 그 각각의 사람에게 그렇게 있는 것이며 그러한 지각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사고하고 행위하는 한, 뭇사람들에게 공통된 객관적인 지식이란 어떻게 존재한다고 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일상생활에서는 사람들 간에 사물에 관한 인식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나 지식이란 것도 사물 자체와는 상관없이 각자 사람들에게 보인 그대로의 개념만으로 구성된 허구적인 체계일 수도 있다는 말인 것 같고요.

셋째 항은 말하자면, 내가 한그루의 나무를 보고 그 색과 형태를 이러한 것이라고 지각하였을 경우 그러한 지각은 꼭 그 나무를 보아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터무니없는 얘기긴 하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시신경의 일부를 조작하여 나무를 보았을 때와 꼭 같은 자극을 줌으로써 나무 없이 내가 그 나무를 볼 수 있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에게 공통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인정되는 사물이 아니더라도 어떤 조건하에서 어느 개인은 그 사물이 자기 앞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위의 예는 극단적인 것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각된 사물의 형상은 그것이 빨간 것이든, 긴 것이든, 큰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며, 그 사물이 아무와도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그 자체가 빨갛다거나 길다거나 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상 경험상 많은 사람들이 긴 것은 길다고 하고, 빨간 것은 빨갛다고 하며 큰 것은 크다고 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내가 지각하는 사물은 순전히 나 자신만의 내적인 경험인가.
아니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로 생각됩니다.

제가 좀 미흡하게 알아들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여기까지가 제 한계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고요.

위 문제에 대해 답을 추구하려는 태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문제 제기가 제게 어떻게 생각되는가 하는 점에서 대충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나의 사물 또는 주변의 사물들이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태의 인간에게……. , 건강하고 활기찬 기분을 가지고 있는 청년의 눈에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이고 밭에 있는 토마토가 뭔가 의미 있는 붉은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달리 반박의 여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거죠.
물론 똑같은 하늘과 토마토가 다른 사람에게는 달리 보일 수 도 있고, 같은 청년에게도 보는 시점과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또 다르게 지각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그 청년이 애인과 함께 백포도주를 한 모금 물었을 때 그 지각은 매우 감미롭고 사랑할만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더라도 그 청년이 심한 열병에 걸려 탈진했을 때 똑같은 그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면 이번에는 그 지각이 예전과 같지 않고 구역질을 일으킬 것 같은 맛이 된다는 거죠.
그 포도주 자체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보는 눈과(또는 듣는 귀나 맛보는 혀라도) 보여 지는(들려오거나 맛보여지는) 사물은 작용을 받는 것과 작용을 주는 것으로써 완전히 한 쌍이며 그 한 쌍이 어울려 포도주의 흰색이나 토마토의 붉은색이나 술의 단 맛을 자손으로써 생성해 낸다는 거고요, 그 생성되는 자손은 각각이 다른 곳에 가서는 결코 그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들이며, 또한 그 수에 있어서 무한하다는 거죠.
따라서 보여지는 사물을 제외하고 보는 눈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반대로 지각하는 주체로써 보는 눈을 떼어놓고 보여 지는 사물만을 거론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거죠.
말하자면 사람 각자에게 지각되는 사물이 그에게 어떤 형상으로서 인식되든지 그것은 필연이고 일단 그에게는 진리이며 더 이상 질료로써의 그 사물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물에 보이는 그대로 말고 어떤 다른 객관적인 성질이나 의미를 찾는 것이 철학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인가라는 의문이 든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과학적인 탐구로 그 사물의 물리 화학적인 성질을 밝힌다든가 분자구조를 알아낸다든가 하는 것은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구결과조차도 단지 경험된 사물의 개인적인 개념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대한 허구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지금 얘기의 내용인 것 같으니까요.
그럼, 각자에게 보이는 그대로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한다면 곧 프로타고라스적인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기는 하죠.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지 그에게 그렇게 있는 것은 바로 진리로 통용되어야 하니까요.
아마도 아시겠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에 대해 여러 각도로 비판하는데요, 그중 하나를 보면 이런 게 있죠.
현재 누군가에게 지각되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는 그대로가 진리라고 하더라도 바야흐로 앞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술을 담근다고 할 때 앞으로 있을 그 술의 맛이 단지, 떫을지, 쓴 지 하는 것을 내가 잘 판단할 수 있을 까요. 아니면 양조장의 기술자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까요?
, 내가 몸살에 걸려 아프다고 하면 앞으로 이틀 뒤에 내가 느낄 열이 얼마나 될지에 대하여 나 자신이 척도가 되어 분명히 단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의사가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요? 하는 식입니다.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고 기억에 따라 제가 편집했습니다.
인간과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 현재에도 있지만 미래에도 걸쳐 있으므로 위의 반박은 프로타고라스의 진리를 거창한 것에서 별로 볼 것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거죠.
얘기가 좀 옆길로 샌 것 같은데요…….
누군가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에 표시되는 그러한 표상으로써는 알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그 물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언급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방향이 과연 그쪽이냐 하는 거죠.
보여지는 사물과 보는 눈으로써 한 쌍으로 취급되어야 의미가 있고 거기서 필연적으로 양자에 합당한 어떤 감각이 생성된다고 하면 그 외에 그 사물 자체로부터 더 이상 다른 독립적인 어떤 무엇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애매하다는 거고요..
사물이 인간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있기도 하고, 반면에 그 사물을 지각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지각경험 안에서만 그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럼 도대체 지각되는 사물과 우리의 지각과 그에 따른 지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캐묻는 것도 그다지 요긴한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일단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제가 논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우선 재미로 봐주시고요.
제가 모르고 있는 점 있으면 가급적 쉬운 말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작성자 : 착한 왕

Re: 시각경험의 퍼즐 1(답변부탁)

착한 왕

이거 답변이 될는지-_-
쑥스럽군요.. 아마 퍼즐 2가 나중에 올라갈 건데.. 그건 지각자의 문제니깐 좀 더 토론이 그때 깊어질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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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님 답변
>
>.........
> 하나의 사물 또는 주변의 사물들이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합니다.
> 예를 들어 어떤 상태의 인간에게……. , 건강하고 활기찬 기분을 가지고 있는 청년의 눈에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이고 밭에 있는 토마토가 뭔가 의미 있는 붉은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달리 반박의 여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거죠.
> 물론 똑같은 하늘과 토마토가 다른 사람에게는 달리 보일 수 도 있고, 같은 청년에게도 보는 시점과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또 다르게 지각될 수도 있습니다.
> 건강한 그 청년이 애인과 함께 백포도주를 한 모금 물었을 때 그 지각은 매우 감미롭고 사랑할만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더라도 그 청년이 심한 열병에 걸려 탈진했을 때
> 똑같은 그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면 이번에는 그 지각이 예전과 같지 않고 구역질을 일으킬 것 같은 맛이 된다는 거죠.
> 그 포도주 자체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보는 눈과(또는 듣는 귀나 맛보는 혀라도) 보여 지는(들려오거나 맛보여지는) 사물은 작용을 받는 것과 작용을 주는 것으로써 완전히 한 쌍이며 그 한 쌍이 어울려 포도주의 흰색이나 토마토의 붉은색이나 술의 단 맛을 자손으로써 생성해 낸다는 거고요,, 그 생성되는 자손은 각각이 다른 곳에 가서는 결코 그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들이며, 또한 그 수에 있어서 무한하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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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왕 재 답변
당연합니다. 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심리 상태 및 환경에 좌우되죠. 그렇지만, 이 점으로부터 본다는 게 완전히 보는 사람의 심리작용 등의 내적인 조건으로 환원된다고 볼 수는 없죠!
마음의 외적능력이란 보는 것이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직관에 불과하다고 합시다. 우리가 만약 포도주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 포도주 병은 포도주 병으로 보이지 않죠! 그러나 그 병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나위 외부에 있음이 부정되기는 힘들죠. 포도주 병의 형태가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것 물론 어느 각도 어느 거리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죠! 그러나 이점으로부터 이러저러한 형태를 가진 그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공품이란 결론은 안 나오죠. 만약 지각경험에서 대상에 지향하는 능력을 외적으로 인정한다면, 그 능력은 결코 완전히 주관적일 수도 없고 완전히 객관화될 수도 없습니다. 현재 판치는 외재주의(인과적 지각이론)은 시각경험을 관찰자의 내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설명하려는 것이죠. 따라서 외적능력이란 말에서 외적이란 결코 외재주의자들이 말하는 외적과는 다른 뜻이죠. 문제는 대상의 시각경험에서 외적능력이 인정된다면, 그 경험은 완전히 주관적일 수도 없고 지각의 주체가 사라지게 되는 외재주의에도 포섭이 되기 힘듭니다. 문제는 그러한 외적능력을 정당화할 만큼 과학이 성장하지 못했고, 또한 철학적 논의 또한 미비한 상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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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님 답변 중에서
> 따라서 보여지는 사물을 제외하고 보는 눈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반대로 지각하는 주체로써 보는 눈을 떼어놓고 보여 지는 사물만을 거론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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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대한 착한 왕의 의견
이 답변은 인과적 지각이론과 같은 외재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어 대단한 공력이 담긴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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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님 답변 중에서
> 말하자면 사람 각자에게 지각되는 사물이 그에게 어떤 형상으로서 인식되든지 그것은 필연이고 일단 그에게는 진리이며 더 이상 질료로써의 그 사물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 그 사물에 보이는 그대로 말고 어떤 다른 객관적인 성질이나 의미를 찾는 것이 철학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인가라는 의문이 든다는 말입니다.
> 물론 여기서 과학적인 탐구로 그 사물의 물리 화학적인 성질을 밝힌다든가 분자구조를 알아낸다든가 하는 것은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왜냐하면 그런 연구결과조차도 단지 경험된 사물의 개인적인 개념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대한 허구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지금 얘기의 내용인 것 같으니까요.
> 그럼, 각자에게 보이는 그대로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한다면 곧 프로타고라스적인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기는 하죠.
>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지 그에게 그렇게 있는 것은 바로 진리로 통용되어야 하니까요.
> 아마도 아시겠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에 대해 여러 각도로 비판하는 데요, 그중 하나를 보면 이런 게 있죠.
> 현재 누군가에게 지각되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는 그대로가 진리라고 하더라도 바야흐로 앞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됩니까?
> 내가 술을 담근다고 할 때 앞으로 있을 그 술의 맛이 단지, 떫을지, 쓴 지 하는 것을
> 내가 잘 판단할 수 있을 까요. 아니면 양조장의 기술자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까요?
> , 내가 몸살에 걸려 아프다고 하면 앞으로 이틀 뒤에 내가 느낄 열이 얼마나 될지에 대하여 나 자신이 척도가 되어 분명히 단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의사가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요? 하는 식입니다.
>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고 기억에 따라 제가 편집했습니다.
> 인간과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 현재에도 있지만 미래에도 걸쳐 있으므로 위의 반박은 프로타고라스의 진리를 거창한 것에서 별로 볼 것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거죠.
> 얘기가 좀 옆길로 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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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대한 답변:
맞습니다. 사람을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의 뼈다귀가 보이는 게 아니죠. 지금 저 앞에 있는 시디 플레이에서 나오는 음악 듣고 있는데, 전자나 원자 등 이런 건 안 보이고,, 그냥 음악만 들리죠! 더욱이 전자기학 몰라도 시디플레이어 작동하는데 아무 문제없죠!
외적능력에서 외적이란 결코 지각의 주체자 경험을 설명하는데 필요 없다는 식의 객관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음악을 들을 때 어떤 때는 더 기분이 좋고 그러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죠.. 분명히 지각 경험 전체는 지각자를 포함한 시공간적 경험이죠. 시디플레이어 볼 때 제 몸 일 부분도 항상 보이거든요! 따라서 그것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보이든 내 속에 있지 않다는 직감은 일상적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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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님 답변 중에서
> 누군가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에 표시되는 그러한 표상으로써는 알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그 물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언급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 우리가 보아야 하는 방향이 과연 그쪽이냐 하는 거죠.
> 보여지는 사물과 보는 눈으로써 한 쌍으로 취급되어야 의미가 있고 거기서 필연적으로 양자에 합당한 어떤 감각이 생성된다고 하면 그 외에 그 사물 자체로부터 더 이상 다른 독립적인 어떤 무엇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애매하다는 거고요.
> 사물이 인간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있기도 하고, 반면에 그 사물을 지각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지각경험 안에서만 그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럼 도대체 지각되는 사물과 우리의 지각과 그에 따른 지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캐묻는 것도 그다지 요긴한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 일단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 제가 논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 아무튼 우선 재미로 봐주시고요.
> 제가 모르고 있는 점 있으면 가급적 쉬운 말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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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대한 답변..
외적능력을 인정한다는 건 시각경험 안에서 지각자와 대상이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하죠. 바로 보여 지는 것과 보는 눈을 분리해서 다루면 안 되죠……. 저도 개인적으로 표상이론을 반대합니다.
문제는 이에 대항한다는 건 철학 계에선 자살행위가 될 수도 이슴-_-
아마 두 번째 퍼즐에선 지각자와 관련되니깐, 좋은 답변 계속 부탁드립니다..
꾸벅(인사)^^

philebus(바람) 답변 2

Re: 시각경험의 퍼즐 1(답변2)

, 주신 답변은 잘 보았습니다.
말씀의 요지는 이미 전에 쓰신 퍼즐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제게 이해됩니다.
어떤 사물이 내게 보일 때, 그 사물은 분명히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그 점에서 내가 그 사물에 영향을 미치거나 관계를 맺을 외적능력이란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반면에 그 사물은 오직 나의 눈에 비치는 영상으로써만 경험되므로 내가 그 사물에 영향을 미치거나 관계를 맺더라도 꼭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의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외적능력이 저 사물의 실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며 또 나의 눈에 비치는 영상으로써의 부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히고 싶다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 결국 위 말씀의 핵심은 이렇게 되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과연 내 눈에 보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답변이 있다면 제기하신 문제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나무가 과연 무엇인지 안다면 내 눈에 비치는 나무는 본래 그것의 어떤 부분이며 내 손에 만져지는 나무는 또 어떤 부분이며 나의 지각에 포착되지 않는 부분은 무엇이며 내가 그 나무에 어떤 행위로 영향을 끼쳤을 때 지각되는 부분은 어떤 상태로 변화하며 지각되지 않는 부분은 어떤 변화를 겪는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죠.
아무튼 말씀하신 두 번째 퍼즐을 보고 계속 이어보겠습니다.

이만 안녕히…….

 

도와주세요..

푸른 나무

> 그래서 말인데요…….
> 철학이'전혀 다른 사색'으로 비약하는 사례를 자연과학의 한계를 통하여

> 해명하라는데…….
>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철학 책은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 꼭 좀 가르쳐 주세요..
> 제발…….

philebus(바람) 답변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자연과학은 현세계의 여러 가지 것들 중 과정과 조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밝혀냈고 앞으로도 밝혀내겠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하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못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제 글을 읽고 계시는 푸른 나무님이 지금의 행위를 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님의 마음 또는 판단이 참된 그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 원인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다름 아니라 푸른 나무님이 지금 컴을 보고 있는 원인은 그의 다리가 방바닥을 딛고 있고 그의 엉덩이는 의자에 붙인 채 등뼈를 곧게 펴고 그의 눈은 모니터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그것이 원인이라는 거죠. 그런데 등뼈나 엉덩이나 눈이 없다면 푸른 나무님이 지금처럼 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조건이지 원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원인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마음이나 판단이나 의지라고 불리는 것이죠.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마음도 단지 분자 수준의 물질의 결합이나 이동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해도 그 말도 단지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뿐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분자수준의 물질이 왜 하필 그런 방향으로 이동하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만약 그것이 우연이라고 한다면, 즉 모든 우주의 운동과 인간의 행위를 물질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야스퍼스가 지적한 대로 알파벳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아니 사람이 아니라 개나 원숭이라도 아무 상관없지만)컴의 자판을 임의로 두드려 성경이나 플라톤의 대화편을 쳐내는 것과 같은 얘기라는 거죠.
고로 위와 같은 주장은 지성을 쓸모없이 만들고, 비례나 균형 따위는 전혀 모르는, 음악으로 말하면 음치의 노래와 같다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빅뱅이 현 우주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은 아니고 단지 과정의 일부가 될 뿐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로 전혀 다른 사색으로의 비약은 아마 세계의 참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간단히 적었습니다. 이만.

Re: 바람님…….감사해요

푸른 나무

>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 문제가 시험 문제였는데, 더 보태서 써야겠어요.
>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 야스퍼스에게 철학적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 이것도 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hilebus(바람)

제가 얘기한 야스퍼스의 말은 그의 주저에서 본 건 아니고 아마 지혜에의 길인가 하는 제목을 달고 있는 소책자에서 본 거죠.
아니면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었는지…….
아무튼 야스퍼스의 말이라는 건 확실한데 어느 책인지는 가물가물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저는 읽어본 일이 없어 미안하지만 그의 사상에 대해 더 이상은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시험 답안 잘 생각해 쓰세요.
점수 못 나와도 저는 책임 없습니다……. 이만.

도와주세요.. 자연과학의 한계(착한 왕 덧붙임) 

 

착한 왕 덧붙임

"우리는 과학의 바깥에 서있다. 그 대신 우리는 실례로 꽃을 피운 나무 앞에 서 있고, 그 나무가 우리 앞에 있다. ... 이러한 서로 마주 보기의 만남은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관념들 중 하나가 아니다. 여기서 도약하기 전후에 숨을 고르는 것처럼 일단 멈추자. 지금 우리는 친숙한 과학의 영역, 심지어 철학의 영역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도약한 곳은 어디인가? 한없이 깊은 심연 속인가? 아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 정직할 때 살며 죽는 그곳으로서 땅으로의 귀환! “
M.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London: Harper & Row 1968, p. 41.

결국 지각경험에 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은 '머릿속의 관념', 어떤 마음의 그림 혹은 뇌의 어떤 상태로 끝날 때 첫째 딜레마를 피하는 최선의 선택은 일상성으로의 귀환이다. 이러한 하이데거 식의 대안은 전 절의 인과적 지각이론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과 다른 성격을 갖는다. 그의 대안은 결코 그러한 지각이론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결국 과학이 맞는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 믿음과 신념을 위협한다고 해도, 우리가 발 디딜 곳은 여전히 일상생활! 근데 하이데거의 도약과 야스퍼스의 비약과는 좀 약간의 차이는 있는 듯하지만 요……. !)

바람님이 전에 쓴 시각경험의 퍼즐1에 대한 답변과 이 글에 그냥 하이데거가 한 이 말 덧붙이면 좀 더 폼 날 거 같습니다!^^

philebus(바람) 답변

Re: 도와주세요(하이데거의 일상)

글쎄요, 인용하신 하이데거의 말은 아마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가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이데거가 어떤 관념의 여행길을 돌고 돌아 그와 같은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주 있고 패기 있는 젊은 철학도가 그 얘길 듣는다면 실망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저 같으면 지난 착한 왕님의 글에 대한 제 답변으로부터 바로 위 하이데거의 말로 뛰어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저도 아직 늙은이는 아니니까…….)

위의 말 중에 주목되는 부분은 '우리 자신에 정직할 때…….'라는 구절입니다만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많은 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아마 하이데거 자신에게는 명백한 의미로써 사용되었겠지만 말이죠.
제가 지난번에 착한 왕님의 퍼즐에 대한 답변으로 쓴 글에 각자에게 그렇게 지각되는 사물은 또한 그렇게 있는 것이기도 하며 보는 눈과 보여지는 사물이 한데 어울려 양자에 합당한 감각이 생성된다고 했지만 또한 그에 부수되어 개인마다 다른 감정과 기억과 생각이 그때그때 일어나고 끊임없이 변화하게 될 테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에 가졌던 감정이나 생각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 일어나게도 될 텐데요, 과연 그중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나 자신과 동일한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말은 결국 최종적으로 그 자신의 행위로 증명하게 되겠지만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일관되게 자신에게 정직한 행위가 될는지 알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또는 사적으로라도결과로 보거나 윤리적으로 보거나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여러 가지 말과 행위로써 자신에게 스스로 부담을 지운 후에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위와 같이 말한다고 하면 그 말이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제 생각을 저의 지난 글에서 한 걸음 더 옮겨놓는다고 하면 하이데거의 말과 같은 방향은 아니고 아직은 다른 길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에 표시되는 그러한 표상으로써는 알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그 물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제게 대지에 토착되어 살아가는 2차원적인 동물을 연상시키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보여지는 사물은 또한 그에게 그렇게 있는 것이며 그것은 필연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러한 필연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라고 한다면 이 말은 하늘을 나는 새를 연상시킨다고 생각이 드는 거죠.

위와 같은 말은 과감하고 또한 철학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도 할 수 있지만, 반면에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혼 중에는 본래 이성과 사려분별에는 관여하지 못하는 욕구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부분이 혹시 이성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어떤 지각에 관여한다 할지라도 밤이나 낮이나 환상과 환영들에 의해 현혹될 것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러니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머나먼 진리에의 길을 탐구해 간다고 하더라도, 진리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충분한 경계심을 가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위 하이데거의 말을 성급한 일상으로의 회귀라고 옆으로 밀쳐놓을 것이 아니라 탐구 도중 우리의 정신이 혹시 이성적으로 보이는 환상을 만들어 낼 것에 대비한 백신으로써 옆에 차고 다닐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철학에의 여행 도중 우리의 능력이 부족함을 느끼거나 그 여행길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고 생각되면 그땐 하이데거의 일상으로 복귀해야 할 테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때도 역시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파악하라고 하는 내적인 명령이 마치 영화 나이트메어 마지막 장면의 프레디 크루거처럼 다시 얼굴을 쳐들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Re: 도와주세요(하이데거의 일상)

착한 왕:

저도 하이데거 주의자가 아닙니다. 누구 주의자 되고픈 맘도 업고. 저 같은 경우 지각경험에서 일상성 할 때 젤 중요시 여기는 건 시공간적 감이 아니라 그 자체인데…….

위 문제는 접어두고, 하이데거 노인은 과학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없다고 보지만 또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는 취지를 피력한 걸로 아는데…….
문제는 과학과 일상경험이 충돌할 때 양쪽에서 니체의 줄타기가 시작되는데, 이 줄타기를 끝내기 위한 방법이 그냥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는(도약) . 만약 과학 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면, 삶 자체가 깨진다고 생각한 거고, 뛰어내렸을 때 과학도 일상성 안에서 기능할 수 있다는 취지를 피력한 걸로 압니다.
첨에 산전수전, 그리고 마지막에 여행길 한 바퀴 돌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단순히 보통사람의 상식적 수준이 아니라 철학사유에 의해 가능하다고 하이데거 옹이 생각하더군요. 다시 말해 아무나 뛰어내리는 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자기의 철학방법은 보통인의 상식적 실재론인가 하고는 다르다네요! 물론 남대문에서 자주 보는 동료들은 전혀 위에 같은 줄타기조차 의식 안 하고 살죠!

그 영감이 자신에 정직하다는 것은 같은 대상에 갑자기 새로운 느낌과 과거 느낌 중 어느 것이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런 문제에 반대된다고 하지는 않을 거 같군요.. 여기서 동일시한다는 말을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맥주병에 대한 시시각각 다른 느낌이 일어나는 거 자체를 문제시 삼는 거보다는,, 그냥 내 앞에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것……. 이거 인정하자는 거죠! 그가 정직하다는 건 행위의 옳고 바름을 판별하는 지식이라는 거 하고도 다른 거죠! 실제 내 행위가 소쿠리테스 영감이 말한 거처럼 올바름을 향상 향해야 한다면, 이 세상은 아마 그냥 먹고사는 장사하는 양반들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고.. 아마 인간 종 자체가 멸종했을 거 같은데.

과거 주관적 관념론(헤겔 예외)이나 빛과 뇌신경 작용에 의해 경험을 설명하는 과학의 방식은 내 앞에 드러난 무엇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타당화시켜주지 못할뿐더러, 고작 머릿속의 단순 관념 혹은 표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강요하니깐! 그렇다고 과학이 틀린 거라고 말하기도 싫고, 그래서 그 영감이 땅바닥으로 돌아와 정직해질 때 갈등 혹은 줄타기가 해결될 거라고!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감은 그게 최선의 방법으로 본 거죠..

암튼 그 담 바람님 말 인정하고, 문제는 머 저런 식의 문제해결이 그다지 절실해, 그리고 그런 주장으로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별거도 아닌 거 같은데! 모차르트가 그 당시 아프리카에서 음악 작곡해 봤자 아무도 안 알아주었을 거 같은데,, 마찬가지로 하이데거가 뜰 수밖에 없었던 서구의 역사적 맥락이 있는 거죠! 자세한 얘기는 피하겠지만, 바람님도 자주 쓰시는 '관념', '표상' 이런 거 하고도 관련이 있지요!

시각경험 그 퍼즐하고 비슷한 게 저쪽에선 사실 요새도 자주 논의 중인 거로 아는데요. 이쪽의 사유 전통에선 전혀 그런 문제조차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 과연 왜 그랬을까요? 글쎄 누구 주장처럼 이쪽엔 체계적인 인식론이 없어서? 과연 이쪽저쪽 나누고 싶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 "사물이 내 앞에 드러남에 정직함"을 포함한 일상성이 백신 작용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은유는 하이데거의 해석과 연관시키던 아니던, 좀 더 발전시켜 보시길! 단 현대든 과거든, 과학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속칭 과학'이 아니라 각 시대별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왜냐면 이런 식으로 하이데거 시대 혹은 현대에 과학이 철학적으로 다루어졌다면, 하이데거 식의 주장조차도 나올 이유가 없다는 느낌 이 들어서요!

그럼 이만 줄임~

philebus(바람) 답변

Re: 도와주세요(하이데거의 일상)

제 말 중에 좀 해명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착한 왕님의 퍼즐 의도에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한 제 잘못이겠지요.
제가 하이데거의 일상성을 과학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써의 백신으로 사용하려는 거라고 이해하신 듯한 데 저는 과학적 지식 자체가 제가 말한 환상이나 환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과학자나 과학적 탐구나 그 결과로써의 업적에 대해 저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경외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경계 대상은 과학적 업적이나 발견, 발명 등에 대해 자칫 가지게 되는 인류의 앞날에 대한 희망, 과학적으로 발견된 사실들을 철학적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서 빚어지기 쉬운 임의의 꾸미기, 사실 이상으로 과학기술에 의해 또는 그 생산품에 의해 인간의 행복이 증대되리라는 환상, 기타 이치로 보아 분명히 의문이나 반박의 여지가 있음에도 어떤 이론을 옳다고 주장하고 남에게 그것을 설득시키려는 완고함 등입니다.
과학적 탐구나 그 결과 나온 지식에 대해 그 자체가 환상이라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매도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노력을 그다지 옹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국가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이 필수겠지만…….
과학기술 탐구의 열매로 얻어지는 각종 혜택에 대해서는 떡이 있으면 적당히 먹고 없으면 안 먹으면 그뿐이라는 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그 이상 과학에 대해서는 어떤 선입견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일상성에 대한 말이 정확히 내 앞에 그냥 나무나 맥주병이 있다는데 그치고 그 나무의 꽃을 감상하느냐 잘라서 불에 때느냐, 병 속의 맥주를 마시는 것이 나의 건강에 좋으냐, 마시지 않고 참는 것이 좋으냐는 등의 가치판단을 무시한 것이라면 저는 더 이상 그런 논의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무지한 저로서는 가능하면 현명하게 되고 싶지만 단지 사물이 외부에 있느냐, 아니냐 만을 문제 삼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면 그러한 논의가 저를 얼마나 현명하게 만들어 줄지 의문이라는 거죠.
그런 논의가 원래 착한 왕님의 퍼즐의 의도라면 저는 거리낌 없이 외재주의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 외재주의니 무슨 이론이니 하는 어휘로 그런 말들을 정렬시켜 남에게 알리려 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을 거지만요.
그리고 다음은 그런 논의로부터 떠나 단지 외재주의를 마음속으로만 신봉하는 일상인들의 생각과 행위(나 자신을 포함하여)를 탐구하여 저 자신이 조금이라도 지혜로워지도록 힘써 보려고 합니다.

Re: 도와주세요(하이데거의 일상)

착한 왕

그런 입장이시라면 더 이상 토론거리는 없을 거 같고..
바람님이 지혜를 추구하는 소망으로 사신다면, 저는 다르죠…….

저는 다음 모토에 따라 살고픔:

"Information is not knowledge‘
Knowledge is not wisdom
Wisdom is not beauty
Beauty is not music
Music is the best……. “
Frank Zappa의 노래 Packgard Gooes 중에서

philebus(바람) 답변

Re: 도와주세요(하이데거의 일상) 인사

시가와 혼화 된 이성이 훌륭한 정신이며,
철학은 가장 고상한 음악이라고도 하더군요.
짧은 동안이지만 말씀 감사했습니다.
어디선가 또 뵐지도 모르겠네요.
이만 ,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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