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 만물의 움직임에 조화와 활력을 주고 있는 것 같군요. 소크라테스와 청년 파이드로스가 시원한 바람과 앉기에 알맞은 잔디와 맑은 물과 나무 위에 있는 뮤즈들의 사자인 매미와 또 그곳의 주인인 보이지 않는 정령들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이득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K님은 철학을 전공한 바 있으니 철학적 논의에 관한한 군인으로 말하면 사관학교 출신인데 저는 징집당한 보병인 셈입니다. 또한 달리기 경주로 말하면 K님은 잘 훈련된 단거리 선수이지만 저는 그저 동네에서 조금 빨리 뛰는 사람인 셈이지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저는 사실 읽어서 마음에 담고 있는 책은 독서마당에 올린 꼭 그 책들뿐이거든요. 따라서 긴 철학적 계보를 줄줄이 알아야 논할 수 있는 문제나 플라톤 이후에 새로 생겨난 철학 용어들에 대해서는 단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대충 읽어본 사람과 같이 말이지요. 물론 플라톤 이후의 철학의 흐름에 대해 제가 알고 싶은 열의가 있었다면 열중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거든요. 저는 플라톤을 읽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 이후의 철학과 플라톤과는 어떤 단층에 의해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즉, 완전히 저의 잘못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플라톤 이후의 철학에 대해 발전이라거나 발전되어 왔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별로 타당하지 않다는 느낌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인간이 되거나 지혜와 덕을 소유하는데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군더더기 - 제거되어야 하는 혹과 같은 - 가 되어 그런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논란의 목표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건방지다고 너무 책하지 마시기 바라며…….국가에서였던가요? 아무튼 소크라테스가 (엘레아의 손님) 상대 청년에게 말하기를 ‘사물의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노년에 이르러 많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있는 데요, 저는 그 말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는 새로운 이름을 남발하는 것이 그리 필요치도 않고 여러 개의 새 이름으로 구성된 문장은 원래의 의미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소외시켜 생동감을 잃게 하고 단지 죽은 논리만을 따지게 하며, 필연적으로 반대 의견을 일으키게 만든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철학 용어들은 제게 있어 단지 어렵기만 할 뿐입니다. 플라톤을 읽다 보면 주목되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더군요. 플라톤이 자세히 분석을 가하고 있는 것은 욕망과 쾌락(필레보스), 안다는 것 - 하지만 실제로는 안다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의 분석 - (테아이테토스), 비존재와 환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소피스트(소피스트), 덕에 관한 소박하고 그럴듯한 의견에 대한 반박(프로타고라스), 당시 유행하던 변론술이 정의와는 관계없는 일종의 아첨이라는 관점에서의 반박(고르기아스) 등등, 주로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생각되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진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오류들과 인간이 빠져들기 쉬운 쾌락과 같은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성이나 지혜나 덕과 같은 종류의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자세한 분석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처럼 플라톤을 굳세게 믿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즉, 우리가 만약 사물의 분석이나 고찰을 통하여 어떤 참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분석해야 할 것을 분석해야지 그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분석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항상 어떤 존재이며 분석되는 사물은 또 항상 별개의 어떤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즉 분석하는 자와 분석되는 것은 항상 둘이며 분석하는 자가 분석하는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부연하면, 지혜나 이성이나 덕이 우리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우리가 영혼 속에 간직하고 그와 함께 운행하려면 우리는 그 자체를 분석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성이나 지혜가 없이 우리는 올바른 분석을 할 수 없으며 이성이나 지혜를 완전하게 분석하려면 그를 완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 내어 객관적인 다른 존재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그렇게 되면 분석자인 우리 자신의 영혼 속에는 단지 무엇이 남아있게 될지 알 수 없으며, 더 이상 분석이라는 작업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오류나 악에 대하여 완전한 분석을 행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그 오류나 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즉, 좋은 것을 구하는 대신 나쁜 것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분석이 완전하면 할수록 결국 우리는 참다운 지혜와 명철한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라 서요. 위에서 말하는 이성은 K님이 말씀하였듯이 근대적인 협의의 이성은 아닙니다. 우리의 세속적 욕구보다 고귀한 존재로써 당연히 우리 정신의 상부에 머물러 여러 가지 욕망과 그 욕망이 만들어 내는 산물들을 통제하여 신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구현하는 그런 존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 상부에 주소를 두고 이성이나 지혜와 함께 운행하며 하부를 알맞게 관리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부에 머무르면서 상부를 우러르는 상태에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 하부에 있으면서 상부를 지배하려는 거센 욕망 속에 나의 주소를 두게 되지는 않도록 비는 일도 필요하다면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소크라테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그에게 탈옥을 권유하고 그의 죽음에 대해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죽어야 할 상황에서 죽는 것이 비겁하고 말과 행실이 다른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복되다는 그의 믿음 말이지요. 즉, 그는 국가에서 그가 말한 대로 지혜와 기개와 욕망이 알맞게 배합되고 각각 제자리를 찾아 질서 있게 조화된 진실로 정의로운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정의로운 인간은 저 세상에서도 신들과 벗하며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바뀌지 않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에게 있어 지금 느껴지는 것(그리고 후에 변할 수도 있는 것) - 주위의 조건들이 결합되어 만들어 지는 것 - 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의 영혼의 상태 - 애초에 있던 순수하고 질서 있는 - 에 따라 있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반대로 고통이라는 것도 감각적이고 물리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특정한 영혼의 상태 - 애초에 질서 있는 것으로부터 내분 등으로 혼돈과 도치 상태로 된 것 -를 유지하는 사람이 그런 사실을 모르면서 무언가 그 영혼의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상황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불교에서 이 세상이 고해라고 했을 때 고란 단순히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이 아니고 ,이 상황 자체가 어긋난 마차바퀴처럼 본래 그렇게 있지 말아야 할 것인데 그렇게 있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하여 행복을 향한 노력으로 라고 말하면 무지의 자각에 무엇인가를 더하여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군요. 저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면, 지혜나 이성이나 덕이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으로 말하면 확실히 무지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절대적인 지식에 관하여는 무지가 종점이지 시작은 아닌 것 같습니다.즉, 누군가 나에게 ‘지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되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지혜 말인가? 집을 지으려고 할 때 목수가 가진 지혜를 말하는가? 아니면 구두를 만들려고 할 때 구두장이가 가진 지혜를 말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컴퓨터를 조작하여 마술과 같은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지혜를 말하는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제 말만 길게 한 것 같군요.편지의 특성상 도리 없는 일이지만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좋은 지적 바랍니다. 다음번 저의 회신부터는 아마 시간이 조금씩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무실에서 일이 조금 있을 지도 모르거든요. 하지만 제가 피곤할 것이라든가 과로로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셔도 좋습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억지로 하지는 않으니까요.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K님에게 앞날의 행운을 바라며…….연천에서 philebus 드림
philebus : '95년도에 하이텔에서 만난 어느 벗과 나눈 메일 중 하나입니다. 사생활에 속하는 내용 일부를 삭제했습니다.
당시에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었는데…….